제13장 제3절 미국·캐나다·일본의 노동자계급 투쟁

노동사회

제13장 제3절 미국·캐나다·일본의 노동자계급 투쟁

편집국 0 6,550 2013.05.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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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3장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노동 상황과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노동운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계급의 사회·정치적 상황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
 제3절 미국·캐나다·일본의 노동자계급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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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년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시대(Jazz Age)’라고도 한다. 번영과 즐거움의 시대라는 뜻으로, 표현 속에 진실이 존재하고 있다. 실업률은 감소했고,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임금수준도 올라갔다. 국민들은 자동차나 라디오, 냉장고 같은 물건들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수백만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사회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리한 소수의 수중에 있었다. 한편,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는 흑인들, 변경에서 가난하게 사는 백인 소작농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거나 생필품 살 돈도 벌지 못하는 도시의 이민자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뉴욕 시에서만도 200만 명의 사람들이 화재에 취약한 빈민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미국>

미 국의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일시적·상대적 안정을 미국 자본주의의 ‘영원한 번영의 시대’ 시작으로 평가했습니다. 1922년 말 철도노동자 50만 명이 참가한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철도회사는 나중에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계획’으로 알려진 계획을 내놓았죠. 이 제안은 만일 노동자가 생산능률을 높이는 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는 큰 이익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임금은 자동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일은 단축되며, 노동조건은 개선될 뿐만 아니라 실업도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었죠.

1918~1922년 사이에 파업이 빈번하고 오픈 숍이 널리 활용되던 시기에 침묵을 지키던 미국노동조합총연맹(AFL) 간부들이 자본 측의 합리화 제안에 적극 매달리게 되었어요. 1925년에 열린 AFL 대회는 이 제안을 ‘신임금정책’을 통해 받아들였습니다. 개별 노동조합은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유능한 기술자들을 고용했으며, 파업은 낡은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죠(Foster, 1956: 282).

노동 관료들은 이른바 ‘노동의 고등전술’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에 따르면 조직노동자는 이제 새롭고 한층 높은 단계에 들어서고 있으며, 노동자는 대량생산과 계급협조에 기초하여 자동적이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화’의 실제적인 결과는 노동조합의 주장과는 크게 달랐어요. 한마디로 노동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죠. 1920~1930년 사이의 10년 동안에 미국의 국민소득은 배 가까이 증가했고 기업주의 이윤은 한층 더 증대했으며 노동생산성은 순조롭게 향상된 데 비해, 실질임금은 1923~1926년 사이에 2% 정도 높아졌을 뿐 거의 변동이 없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45).

이런 상황 아래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정치적 압력을 강화했으며, 노동조합 지도부는 계급협조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대중투쟁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1924~1926년 사이의 파업 건수와 파업 참가자 수는 1918~1920년 사이의 그것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어요. 그런데도 파업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연평균 파업 참가 노동자 수는 약 50만 명에 이르렀죠.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주요 무대가 된 것은 탄광지대였습니다. 1925년 9월 무연탄광 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을 벌였는데, 이 파업은 1년 전에 체결한 단체협약을 탄광주가 파기한 데서 비롯되었죠. 1927년 4월에는 미국 10개 주의 탄광에서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광산노동조합의 좌파가 제기한 것은 주 5일제 노동과 6시간 노동일제의 확립, 실업자 원조기금의 창설, 중재재정의 폐지 등이었습니다.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 요구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탄광노동자 17만 5,000여 명은 요구 실현을 위해 15개월 이상 파업을 전개했죠. 파업 진행 과정에서 탄광노동자의 새로운 현장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탄광회사는 파업을 깨뜨리기 위해 경찰과 파업 파괴단을 이용했어요. 파업노동자 가족 약 7만 명이 한겨울에 기업주 소유의 가옥으로부터 축출 당했습니다. 탄광지대에서 횡행한 이런 무법행위는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죠. 1928년 초에는 탄광지역의 이런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상원의 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파업 지역에서 회사 측의 테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과 시민적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파업노동자에 대한 실제상의 원조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탄광 기업주는 파업을 힘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죠.

대규모 파업이 섬유산업에도 파급되었습니다. 당시 섬유산업의 노동조건은 지극히 열악했어요. 특히 남부의 섬유노동자 상태가 매우 곤란한 지경이었죠. 이 지역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극히 저조했는데, 이것은 기업주가 노동조합의 권리를 난폭하게 유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섬유노동조합의 간부들은 노사협조주의 방침을 취하면서 파업에는 반대했어요. 이런 상황 하에서 파업은 대게 노동조합 간부의 의지에 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26~1927년에 뉴저지 주 퍼세이익의 양모공장 노동자가 임금의 유지와 주 40시간 노동제, 그리고 노동조합 권리의 승인을 요구하여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파업 투쟁 진행과정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상급조직인 통일섬유노동조합은 이 노동조합의 가입을 승인하지 않았죠. AFL의 지도부는 신노동조합의 지도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어요. 경찰은 피켓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으며, 노동자 200명 이상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결코 굽히지 않았어요. 노동조합 주도 아래 자금과 음식물의 모집이 행해졌고, 파업노동자와 가족을 위한 식당이 개설되었습니다. AFL 지도부도 파업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죠. 결국 기업주는 노동조합 단결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임금수준은 이전 수준대로 유지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경제투쟁의 수준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황색’ 회사노동조합이 더욱 널리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1920년대 말 현재 약 150만 명 또는 전체 조직노동자의 40%에 달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46).

조직노동자의 대부분은 AFL에 가입하고 있었는데, 그 지도부는 부르주아지의 영향 아래 있었죠. 노동조합 간부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자 카버(Carver, Thomas)의 ‘노동의 최고 전략’을 신봉했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노사협조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생산의 성장과 노동생산성 향상을 촉진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임금은 자동적으로 인상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죠(Foster, 1956: 283).

sooya_02.jpgAFL 지도부는 많은 기업에서 임금을 생산의 이윤율에 종속시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철도운수 부문에서는 기업주와 노동조합 간부 사이의 교섭에서 철도 파업을 금지하는 협정이 체결되었죠. 이 협정은 1926년에 채택된 왓슨 파커 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런 가운데 미국 사회당은 부르주아 이론을 수용하고 계급투쟁의 원칙을 방기했어요. 1928년 사회당 대회에서는 당원이라는 조건은 곧 계급투쟁을 승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조항이 삭제되었죠. 그 결과 사회당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정치적 문제의 해결을 방관하게 되었고, 당의 영향력은 급속히 저하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당원 수가 10만 4,000명이었던 것이 1928년 당시에는 당원수가 7,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죠.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당 후보자가 92만 표(3.5%)를 획득했는데, 192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26만 7,000표(0.73%)를 획득했습니다. 사회당 지도자 힐큇(Hillquit, Morris)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 사회당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습니다. “무관심과 불확실성의 풍조가 우리의 노력을 무력화시켰다.”

한 편, 공산당은 우파적 편향과 극좌적 편향 때문에 사상적·조직적 발전을 추진하는 데서 큰 장해에 부딪치게 되었어요. 로어(Lore, Ludwig)가 지도하는 기회주의 그룹은 공산당의 지역 및 생산에 기초한 재편성에 반대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로서 근로농민의 역할을 경시했죠. 또 러브스톤(Lovestone, Jay)과 페퍼(Pepper, John)는 미국 자본주의의 ‘예외성’의 이론을 선전했습니다. 한편, 캐논(Cannon,James)을 중심으로 한 트로츠키주의자 그룹은 통일전선전술에 반대했으며,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서의 공산당원 탈퇴를 요구했죠.

1928~1929년에 우파 기회주의자들이 당에서 제명되면서 공산당은 통일을 확립할 수 있었어요. 1920년대 후반 들어 당은 공장 세포와 지역지부를 기초로 조직적 재편성을 단행했습니다. 당원은 1만 4,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중 속에서의 적극성은 높은 편이었어요. 당원들은 탄광, 섬유, 의류산업의 파업을 조직했으며, 새로운 진보적 노동조합의 결성과 시민권 및 자유 수호를 위한 운동에 활발히 참가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48).

<캐나다>


캐 나다의 경제발전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에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술 및 경제구조의 변화와 독점체의 지배 강화는 캐나다 자본주의가 독점단계로 전화했음을 의미했습니다. 1920~1923년 사이의 경제공황과 경기침체를 거친 뒤, 이 나라는 호황국면에 들어섰어요. 주로 직접투자 형태를 취한 미국 자본의 광범한 팽창은 미국에 대한 일방적 편파성을 제공했으며, 원료 채취의 특화 경향과 미국 시장에 대한 지향성을 강화했죠. 경제적 회복은 고용 증가를 촉진했지만, 실업과 노동력 수요의 계절적 변동은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노동 강화의 최신 방법(포디즘)도 미국의 기술과 함께 도입되었고요.

이런 상황 아래서 전개된 노동운동은 방위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파업 투쟁은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저조했는데, 연평균으로 보면 파업 건수는 80여 건, 파업 참가자 수는 2만 5,000여 명이었습니다. 노동쟁의의 원인은 임금인하 반대, 오픈 숍제 도입 반대, 단체협약 유지와 노동조합의 권리 승인 등이었고, 이들 요구는 파업 투쟁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sooya_04.jpg캐 나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대는 탄광노동자들이었어요. 1920년대에 발생한 전체 파업 참가자 수와 노동손실일수에서 탄광노동자의 파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인쇄, 봉제, 조선소, 목재 부문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파업을 일으켰어요. 자동차, 화학, 기타 몇몇 대량생산 산업에서는 오픈 숍제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기업주가 노동조합의 승인이나 단체협약의 승인에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에 파업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투쟁이 몇 가지 객관적 요인에 의해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공업 기업의 배치가 ‘거점’ 성격을 띠고 있고, 그것도 광범한 지역의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는 것과, 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으로 구성된 노동자계급의 내부적 결합 과정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 요인이었죠.

주체적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낮은 조직률이었습니다. 1920년대 전체에 걸쳐 캐나다 노동조합은 조합원 30만 명을 포괄했는데, 조직률은 12%에 지나지 않았어요. 더욱이 조직된 노동자도 매우 분산적이었습니다. 국제직업조합(동시에 AFL에도 가입하고 있었다.), 캐나다 직업·노동회의,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 노동자를 조직 대상으로 한 가톨릭 조합, 그리고 각 민족 공동체가 설립한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 수많은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었던 거죠. 조직 노동자의 대부분은 직업조합에 가입해 있었고, 숙련노동자를 포괄한 이들 조직의 행동은 이른바 ‘실리적 노동조합주의’의 틀 속에 묶여 있었으며, 계급협조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고도로 세련된 착취방법의 보급,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선전, ‘미국 예외성’ 이론 등은 노동조합 내에서의 기회주의와 노동운동 내에서의 개량주의적 환상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49).

sooya_03.jpg1927 년 전(全)캐나다노동회의(ACCL)가 결성된 것은 노동운동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회의는 몇 개의 민족 그룹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을 결합했으며,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임무를 선언함과 동시에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죠. 그러나 이 새로운 노동조합 기구의 개량주의적 지도부는 그런 계획의 실현을 보장하지 못했어요. 전캐나다노동회의는 다른 노동조합 센터와의 관계에서 분파적 자세를 취했습니다.

1920년대 전반에 캐나다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통일정치전선의 기초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지방 단위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의 지방지부는 전통적으로 선거운동에 참가해 왔는데, 점차로 주와 시 및 전국적 규모에서, 연방 캐나다 노동당의 틀 내에서 그 활동을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1922년에 캐나다 노동당의 한 분파로 참가한 캐나다 공산당 대표는 온타리오, 브리티시컬럼비아, 앨버타, 그리고 여타 몇 개 주의 노동당 지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벅(Buck, Tim)은 “이 통일이 계속적으로 발전했더라면, 조직된 노동운동을 강력한 의회세력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죠.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들어 시작된 노동운동의 좌파 세력에 대한 공격과 공산당에 대한 박해는 캐나다 노동당의 기반을 허물었어요. 캐나다 직업·노동회의 우파와 AFL의 노동관료는 캐나다 노동당으로부터 수십 개의 노동조합을 탈퇴시켰고, 이어서 온건파 그룹과 사회민주주의 그룹이 노동당에서 탈당했습니다. 그리하여 1929년 초에는 캐나다 노동당의 모든 주 지부가 기능을 멈추게 되었죠.

<일본>

일본에 서는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이 지배세력 내부의 새로운 세력배치를 가져왔습니다. 8년 동안의 이른바 ‘헌정’기가 시작되었으며, 두 개의 부르주아=지주당 ―헌정회(憲政會)와 정우회(政友會)― 의 지도자가 번갈아 가며 수상을 역임했죠. 그러나 일본의 부르주아지는 군주제에 대한 투쟁을 일관되게 추진하지는 않았어요. 이와 동시에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위한 온건한 강령을 제기한 부르주아 정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가혹한 탄압정책을 시행하고자 한 반동적 군주주의 세력을 지지했죠. 1925년 4월에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률은 제정 당시의 공산주의 운동 단속이라는 명분을 크게 벗어나,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나아가서는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진보적 정치세력과 노동운동에 대한 혹심한 탄압정책은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발전을 크게 제약했어요. 뿐만 아니라 정당과 노동운동 조직 지도자의 동요와 확신의 상실을 가져왔죠.

sooya_05.jpg일 본 공산당 내부에서도 패배주의적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당 지도자였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와 아카마츠 가츠마로(赤松克) 등은 공산당의 결성 자체가 시기상조였다고 주장하고, 그 대신 합법적 무산정당(공동전선당)을 창설해야 한다(야마카와이즘)면서 일본 공산당의 해산을 제안했습니다. 그리하여 1924년 당 지도부는 당의 해체를 결정했죠.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대립은 노동운동 진영에까지 파급되었어요. 노동조합의 우파 간부들은 공산당원의 대량검거와 당 해산에 따른 좌파 조류의 약화를 기화로 공세를 취했습니다.

당 시 최대의 노동조합 조직이었던 ‘일본노동총동맹’은 ‘우애회’(友愛會)를 모태로 하여 성장한 노동단체로서, 노동조합원 3만 명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총동맹의 지도부는 창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즈키 분지(鈴木文治)를 비롯하여 마츠오카 고마기치(松岡駒吉), 니시오 수에히로(西尾末廣) 등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이런 경향의 지도부는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좌파 활동가들이 세력을 강화함에 따라 점점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와타나베 마사노스케(渡邊政之輔), 야마모토 겐조(山本懸藏), 노사카 산조(野坂參三), 다니구치 젠타로(谷口善太郞) 등이 지도적 좌파 활동가들이었죠(시오다 쇼베에, 1985: 67).

1924년 2월에 열린 총동맹 정기대회에서 우파 지도부는 ‘현실주의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선언 초안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 목적을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의 틀 안에 한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운동과의 완전한 결별과 노동조합에서 혁명분자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우파 지도부의 이런 새로운 방침에 대해 관서(關西) 지구의 좌파 노동조합들이 반대했습니다. 총동맹의 새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각지의 노동조합은 반대파 조직인 ‘총동맹 혁신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25년 5월 총동맹 지도부 내에서의 지위 상실을 우려한 우파 간부들은 ‘혁신동맹’에 참가한 32개 노동조합의 제명을 강행했어요. 제명된 32개 노동조합(노동조합원 1만 2,500명)은 ‘일본 노동조합평의회’를 결성했습니다. 총동맹에 남은 노동조합은 35개 조직, 조합원 1만 3,000명이었죠. 이렇게 하여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은 두 개의 조류로 분열하게 된 겁니다. 그 후 1926년 말에는 총동맹에서의 제명은 반대했지만 평의회에는 참가하지 않은 몇몇 중간파 노동조합이 총동맹을 탈퇴하여 ‘일본노동조합동맹’을 결성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52).

노동조합평의회는 1926년의 ‘태양이 없는 거리’로 불린 공동 인쇄 파업, 105일이라는 장기파업 기록을 세운 하마마츠의 일본악기 파업 등을 지도했습니다. 또 노동조합평의회는 공장대표자회의 설치, 산업별 정리·합동운동, 실업반대운동 등 새로운 형태의 조직운동을 전개하는 등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죠.(시오다 쇼베에, 1985: 74).

한편, 1925년 보통선거법이 제정되면서 ‘합법 무산정당’ 결성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다음해인 1890년(메이지 23년)에 총선거가 행해지고 국회가 개원되었는데, 당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직접국세 15엔 이상 납부한 사람에만 한정 되었으므로 상당한 재산가가 아니면 선거권을 갖지 못했죠. 당시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전 국민 4천만 명 가운데 45만 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세가 크게 변화하면서, 1925년에 이르면 보통선거권이 통과되어 25세 이상의 남성에 한해 선거권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정치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합법적 노동자·농민 정당 건설 운동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25년 말 ‘농민노동당’이 결성되었으나, 결성대회 세 시간 만에 해산 당하게 되었죠. 치안유지법이 농민노동당 결성에 적용되었는데, 공산주의자의 참가가 해산 이유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1926년 3월 좌파 인사들을 배제한 가운데 새로이 ‘노동농민당’이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좌파단체들을 입당시키는 문제(이른바 ‘문호개방’ 요구)를 둘러싼 논쟁에서 소수파였던 총동맹은 노동농민당에서 탈퇴하여 1926년 12월에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민중당’을 결성했습니다. 같은 해에 노동농민당의 좌파적 성격과 사회민중당의 우파적 성격을 지양한다는 명분으로 중간파가 ‘일본 노농당’을 결성했죠. 노동농민당은 우파의 탈당 이후 저명한 학자출신인 오야마 이구오(大山郁夫)를 위원장으로 하여 재조직을 단행하였으며, 좌파적 정당을 채택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시오다 쇼베에, 1985: 71).

sooya_06.jpg이 처럼 합법적 무산정당이 분열을 진행하는 가운데, 1926년 12월 일본공산당이 다시 창립되었어요. 그러나 많은 지도적 당 활동가가 투옥 당하고 있던 그 당시, 야마카와이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좌파 기회주의 조류 ―그 주창자인 후쿠모도 가즈오(福本和夫)의 이름을 따서 후쿠모도이즘으로 불렀다― 가 당내에서 우세했습니다. 후쿠모도는 혁명정당을 협소하고 폐쇄적인 지식인 조직, 즉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조직으로 해석했어요. 그는 실천 활동의 의의를 과소평가했으며, 이론 활동만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의식’을 형성할 수 있고, 동시에 혁명당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쿠모도와 야마카와의 정강은 상이한 이데올로기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일본의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마찬가지로 큰 한계를 보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52).

이런 편향의 극복을 위한 실행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개입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927년 7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일본 공산당 대표 ―와타나베 마사노스케(渡邊政之輔), 도쿠다 다마이치(德田球一), 후쿠모도 가즈오(福本和夫)― 와 협력하여 일본문제에 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것은 1927년12월에 열린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에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 테제는 야마카와이즘이나 후쿠모도이즘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칙과는 맞지 않는 편향으로서 거부되었죠. 테제는 야마카와이즘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당을 노동조합이나 대중적 노동자·농민당으로 하고자 했고, 후쿠모도이즘은 이론투쟁의 의의를 과대시하고 대중적 혁명운동을 과소평가하여 대중으로부터 당을 분리하거나 당을 고립화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테제는 당의 조직적·이데올로기적 강화를 위한 계기가 되었어요. 처음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관한 과학적 분석이 행해졌고, 혁명의 단계적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할 경향을 갖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혁명의 제1단계 주요 임무로 설정된 것은 일본 국가의 민주화, 천황제의 폐지, 토지개혁 실시 등이었죠.

1928년 2월 일본에서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노동농민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은 선거 과정에서 군주제의 폐지, 민주공화제의 수립, 18세 이상 남녀의 보통선거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8시간 노동제, 대토지 소유의 몰수, 제국주의 전쟁 반대, 식민지 독립 등의 정강을 내걸었습니다.

‘합법적 무산정당’은 복잡한 정세에도 선거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른바 무산정당은 전체로서 약 49만 표(약 4.7%)를 획득하여 의원 8명을 당선시켰으며, 노동농민당의 득표는 19만 여 표에 지나지 않았죠.

1928 년 3월15일 다나카(田中) 내각은 공산당원과 당 지지자들을 대량 검거하여 1,000명 이상을 체포했습니다. 또 노동농민당과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그리고 전일본무산청년동맹의 3개 당 및 단체의 영향을 받고 있던 조직은 활동을 금지당했습니다. 1926년 6월 정부는 긴급칙령으로 치안유지법 개정을 공표하고,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보완했죠. 또 정부는 비밀정치경찰, 즉 특고(特高)망을 확대하고 노동운동과 민주주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54).

<참고문헌>

庄兵衛(시오다 쇼베에), 1964, 『日本勞?運動の 歷史』, 勞?旬報社, 우철민 옮김, 『일본노동운동사』, 1985, 동녘.
Zinn, Howard and Stefoff, Rebecca, 2007, A Young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Seven Stories Press, 김영진 옮김, 2008, 『살아있는 미국역사』, 추수밭.
Foster, William Z. 1956, Outline History of the World Trade Union Movement, International Publishers?New York, 정동철 옮김, 1986, 『세계노동운동사 Ⅰ,Ⅱ』, 백산서당.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 1985,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roblems of History and Theory, Volume 5, -Progress Publishers Moscow.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