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

노동사회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

편집국 0 12,227 2013.05.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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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계노동운동사 학습팀은 2007년부터 공부를 해온 1반부터 2010년 민주노총 교육원과 공동과정으로 운영하는 4반까지 총 4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습 팀은 분기마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특강을 기획하는데, 이 글은 2010년 12월13일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다섯 번째 특강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번 특강은 노경덕 국민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연구원이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이라는 주제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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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안녕하십니까? 노경덕이라고 합니다. 저는 소련사를 주로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귀국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의미 있는 자리에서 강의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오 늘 강의 주제를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라고 잡아봤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단지 당대의 정치, 사회 상황뿐만 아니라 현재의 복잡한 정치, 사회적 이해관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 시기 소련 역사가 지금의 노동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대를 어떤 입장에서 해석할 것인가는 분명히 현재 노동운동계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 이 주제를 잡아봤습니다.

스탈린 시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배신’?

load_01.jpg“스 탈린주의 시대의 역사”라는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는 크게 나누어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서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두 집단의 해석에 교묘하게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스탈린 시대의 반인권성, 반민주성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주류학계는 스탈린주의를 미국식 인권과 민주주의 개념에 대척점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 중 하나가 미국식의 인권과 민주주의 개념에 반하거나 다른 형태의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면서 미국식 개념을 보편화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 전략이 잘 드러나지요. 그들에게 스탈린 시대는 바로 그 ‘비정상의 모델’인 것이죠. 그들은 스탈린 시대를 ‘전체주의론’이라는 시각으로 봅니다. 전체주의론이란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회조직 -시민사회부터 작게는 가족까지- 의 자율성을 말살하고 국가나 당이 그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탈린 시대는 전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로, 사회의 부문의 자율성과 기능을 말살했기 때문에 반인간적 체제였다.”라는 것이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입니다.

반면, 유럽의 좌파들은 사회주의 경험 자체를 복원시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의지가 있었겠지만, 대체로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주류학계와 궁극적으로는 유사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에 의하면, 스탈린주의 체제는 ‘생산력 우선주의’로 생산 과정의 민주성, 인간관계 등은 무시했던 체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동유럽의 좌파들은 좀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소위 서구 좌파들은 대부분 이런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서구 좌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는 트로츠키주의와도 관련돼서 더욱 그렇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의 타락 내지는 배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문서고 개방 후 새롭게 쓰인 스탈린 시대 역사

위 두 가지 흐름은 모두 1990년대 초반 이전에 제기되었던 주장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해석은, 사실 모두 문서적 근거가 빈약했습니다. 왜냐하면 1990년대 초 이전까지는 소련시대의 문서고들이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좌파들이나 소련 내부의 문서를 읽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들은 대체로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되어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 초반 이후 구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거대한 양의 문서고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이 90년대 중후반부터 발표되면서, 스탈린 시대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물 론 대중성을 중요시 하는 학자나 지식인들은 스탈린 시대의 억압적 모습을 이전보다 더 강조하기도 했죠. 굴락(강제수용소)이나 숙청 같은 주제들을 부각시키면서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 학자들의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문서에 근거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스탈린 시대에 관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을 바로 이 새로운 실증적 연구들이 밝혀낸 내용입니다. 이 새로운 사실들은 스탈린 시대와 스탈린주의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전쟁 위협 속 광범하게 수용된 일국사회주의론

우선 1917년 혁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볼 때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산업화가 미약했던 사실상 농민사회였으니까요. 그래서 카우츠키를 비롯한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닌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 -정확하게는 연속혁명론- 을 이론적 기반으로 1917년 혁명을 시도합니다. 1905년 혁명 때까지 레닌의 입장은, 일단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을 감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러시아 같은 후진 농업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일단은 정치혁명에 머물러야 하고, 차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한 이후에야 진정한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진정한 사회혁명의 시대가 온다고 생각했던 거죠.

load_02.jpg그 러다 1917년 혁명 와중에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받아들여 이 같은 ‘단계’적인 생각을 수정하게 됩니다. 기존 마르크스주의는 한 국가 내부의 상황만을 기반으로 이야기했지만, 트로츠키는 국제질서와 매개되어 혁명을 설명하였으니, 독일이라던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있으면 러시아 같은 후진적 농업국가도 사회주의혁명을 즉각적으로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레닌이 결행한 러시아혁명의 배경에는 독일혁명에 대한 절대적인 기대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독일은 1918~19년 혁명에 실패하고 맙니다. 거기다 1918년 이후로 러시아는 내전에 돌입하기까지 합니다. 이 내전이 소용돌이에서 볼셰비키가 기적적으로 승리하고 난 1921년, 서유럽에서는 이제 더 이상 혁명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921년에 레닌은 일시적으로 연속혁명을 포기하고 신경제정책(네프, NEP)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부분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의 소유를 비롯한 사회혁명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인정하는- 을 시도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1905년 때의 자신의 사상으로 되돌아 간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연속혁명론을 대신하여 ‘일국사회주의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건 스탈린이 공식화한 것인데, 사실 신경제정책을 수립하면서 레닌 자신이 제시한 아이디어나 마찬가지이고, 트로츠키까지 사실상 이를 수용했었습니다. 그리고 볼셰비키에게 내전의 경험은 중요한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건설하면, 외세가 가만히 좌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당시 내전에 영국,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까지 파병을 했으니까요. 러시아혁명의 주역들은 자신이 포위되어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극히 수비적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요. 현재 북한 정권까지, 20세기에 존재했던 모든 사회주의 정권은 이런 수비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농촌, 가난한 도시

이 런 와중에 1920년대를 지나게 됩니다. 우선 이 시대 경제영역을 봅시다. 일부 대공장과 거대 국제무역, 은행 부분만 제외하고 대부분 민영화되어 자본가들이 재등장했고, 당시 잡지에는 하녀를 구하는 광고까지 나올 정도로 혁명 이전의 질서가 부활하게 됩니다. 한편 혁명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은 공장의 관리자가 되거나 정치권력에 진출하거나 또는 전쟁 와중에 생활이 어려워져서 농촌으로 돌아가서 도시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도시에는 ‘네프맨’이라고 불리는 자본가와 일반 도시민들만이 두드러지고, 조직된 노동자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 농촌은 비약적으로 좋아졌습니다. 귀족이 소유하던 토지를 나눠가져 내 땅이 생겼으니까요. 레닌이 이런 시대를 구상하게 된 것은 농민이 잘살게 되면 새로운 수요자로 등장해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농민은 자급자족할 뿐 공산품이나 도시생산품들을 그다지 사지 않았습니다. 결국 농촌은 부유해졌지만 도시는 더 가난해져버렸습니다.

정치영역을 살펴볼까요? 혁명에 동참한 노동자들이 관료가 되면서 국가기구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게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에서는 큰 무리 없이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지방으로 내려가면 상황이 훨씬 복잡했습니다. 지방에는 볼셰비키, 멘셰비키만 있는 게 아니라 민족당 등 소수 정당들도 많고, 이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혁명과 내전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변신들을 하면서 악행, 배신, 복수가 횡행하는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혁명 전에 짜르 체제에 충성했던 사람이 혁명 와중에 볼셰비키로 변신하고, 내전 끝에 중앙당에 잘 보여서 네프 시기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원래 볼셰비키 계열이었던 사람의 아내를 빼앗아 같이 산다는 등…… 뭐 이런 종류의 복잡한 일들이 존재했던 거죠. 이런 복잡한 정치적, 개인적 관계가 얽혀있는 일들에 대한 투서가 중앙당에 엄청나게 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방당 상황은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회영역에서는, 혁명과 내전 승리에서 승리한 후 발생한 거대한 에너지가 존재하는 반면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니까, 오히려 불만들이 증폭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런 불만의 증폭이 신경제정책 시대 소련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이전 많은 학자들은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였는데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나와서 다 망쳐놓았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실증적인 연구를 해보니 스탈린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더 중요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농장 국유화-엄격한 노동법-중공업 지향

이런 와중에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1924년 초 레닌이 사망했다는 것, 두 번째는 그 후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후계자 경쟁구조로 가게 되는데, 스탈린이 승리한 것입니다. 전에는 이 둘의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을 강조했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둘의 이데올로기상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둘 다 일국사회주의론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두 사람이 개인적 라이벌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며, 서로의 입장을 과장해서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사건인데요, 1927년 영국이 국교를 단절합니다. 이 사건으로 소련은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지도부는 내전 시기처럼 외세의 개입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이걸 이전 학계는 소련 지도부의 정권 유지를 위한 일종의 제스처라고 해석했습니다만, 최근 공개 자료를 보면 지도부 자체가 영국의 국교단절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니 군비확장을 해야겠지요. 그 당시 러시아의 공업수준이 매우 약했으니 군사 시설을 갖추려면 산업화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소련 국내에서는 자본이 부재하니, 소련 지도부는 우선 외국자본을 들여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볼셰비키가 외자를 유치하려 했다니요! 하지만 소련 정권에 적대적이었던 서양 국가들은 볼셰비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볼셰비키는 서양에 대한 불신만 더 키우게 됩니다. 결국, 유일한 자본축적 수단으로 소련 국내에서 부유한 농민들로부터 뜯어내는 전략을 쓰게 되죠. 즉, 이들의 곡물을 빼앗아 해외시장에 팔아 자본을 만들려고 강제공출을 시작합니다.

당연히 농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니 소련 지도부는 더 강력한 강제공출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리고 임시방편적이었던 강제공출에서 나아가, 아예 보다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어울려보였던 집단화 정책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즉, 농업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시작된 겁니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재앙이었습니다. 자신의 농토와 가축을 빼앗기고 농기구 들고 아침에 집단농장으로 출근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농민들은 격렬한 저항을 하는데, 가축을 국가에 빼앗기느니, 그냥 다 잡아먹고 만다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그 다음 해에 기근이 와서 천만 명 이상이 죽게 됩니다. 사실 러시아 역사에서 기근으로 인해 위와 같은 재앙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가축 도살과 농민들의 의욕상실 등의 소위 인재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거죠. 

한편 도시에서는 중공업 위주의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됩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하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경공업은 도외시하고 중공업만 중시한다는 인상이 있는데, 사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중공업 지향적이었다기보다는 소련의 상황이 그것을 추동했던 겁니다. 새로운 산업화 때문에 도시에 일자리가 급증해,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이동합니다. 우리나라 1960년대 같지요? 그런데 농민들은 도시에 와서도 문화적으로는 농민들이었습니다. 농노에서 해방된 지도 60여년밖에 안됐으니까요. 아침 정시에 출근해서 요란한 기계소리를 들으며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패턴에 익숙할 수 없었죠. 농민들의 생활 리듬이 공장의 규율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노동법이 만들어집니다. 심지어는 결근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법도 만들어집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법이 실행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요. 오히려 혁명 전의 노동자들이 관료로 올라가면서 교육기회, 수당보장 같은 친노동자적 법률들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농민들로 채워지면서 노조의 활동성은 떨어지게 되지만, 노동자들은 소련 사회에서 특권계층이 됩니다. 1936년에 스탈린이 “소련에는 노동자, 농민, 인텔리겐치아, 이 세 계층밖에 없다”라고 공언하게 되는데, 스탈린 시대는 국가가 각 사회집단에 대해 특권을 부여하고 그 집단들이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계급사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분사회에 더 가깝습니다. 아무튼 농촌 잉여에 대한 국가의 강제적 확보와 농촌인구의 대규모 도시 이동으로 소련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산업화는 1930년대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소련이 더욱 국제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소련 산업화의 급격성과 중공업 지향성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관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서 숙청

load_03.jpg이 제 1930년대의 정치부분을 보죠. 스탈린의 숙청은 악명이 높습니다. 1937~38년 대숙청은 혁명을 주도했던, 혁명이후 관료가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었습니다. 여기서 도망간 사람들은 “스탈린이 혁명을 배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스탈린은 실제 의심이 많았고, “죽여야 안심”이라고 생각한 그의 성격도 이에 한 몫을 했지요. 하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대규모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관료적 모순이 증가했던 점이 이 숙청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의 공무원 비리는 우리도 잘 아는 모습입니다만, 그 당시 소련은 대격변의 시대이니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계획경제 속에서 물자조달 비리나 서류조작 등등이 횡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스탈린의 대숙청은 관료제에 대한 공격이었던 겁니다.

물론, 그 와중에 스탈린의 개인적 정적들도 희생이 되었지만, 이런 정적들보다는 공산당 관리들이 주요 타깃이었습니다. 아까 1920년대에 지방당에서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1930년대 급속한 산업화 속에 이 같은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면서, 거대한 양의 투서가 중앙당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한 명이 투서에 걸리면 그 밑의 인맥관계가 줄줄이 얽혀 들어가면서 피해자가 늘게 되었습니다. 이 숙청으로 2천만 명의 피해자가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허위고, 대략 100만 명 정도였고, 500만 명은 기근으로 희생됐습니다.

스탈린 시대를 규정한 전쟁 위협과 국제적 고립

어 쨌든 외세의 침입에 대한 수비적 자세, 국제정세 속에서 고립 등이 그 당시 사회주의를 중공업 위주, 속도전, 강력한 노동입법 등의 흐름으로 가게 했습니다. 당시 상황의 산물이었죠. 그러다 1939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습니다. 그 조약 이후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서양 국가들은 소련의 배신으로 전쟁이 벌여졌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문제가 있는 해석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의 반공산주의를 이용하기 위해 그들에게 계속 양보를 했고요. 한편,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으로 곧 침입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신문 사설도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으니까요. 물론 전쟁 초기에는 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만 결국엔 소련이 승전했습니다. 추위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아니고요, 소련 경제규모의 승리였습니다. 후방으로 탱크 공장을 옮기는 등의 소위 전쟁 준비도 주효했습니다. 4년간 소위 대조국 전쟁에서 2천7백만 명이 죽었습니다만, 군인 희생자는 1천만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후퇴하는 독일군이 섬멸 작전을 펼치면서 민간인 희생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었지요.

load_04.jpg전 쟁에서는 거대한 희생을 겪었지만, 1945년 러시아는 드디어 고립에서 벗어납니다. 미국, 영국과 함께 연합국으로 승전국이 된 겁니다. 이제야 외세에 대한 걱정을 덜고 제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안심한 소련에서는 1945년, 46년 많은 수의 경공업 입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제시됩니다. ‘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런 시대도 곧 막을 내리고 다시 서유럽과의 대결구도로 가게 됩니다. 1947년이 되면서 미국이 얄타 회담의 약속들을 어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측 회담 당사자인 루즈벨트는 급작스럽게 죽었고, 부통령인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의도와는 다른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 근거는 유럽에 소련의 입김이 커지게 되면 미국 자본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소련은 고립시대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종전 직후, 동유럽을 인민민주주의 국가들로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던 계획도 강력한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바꾸고, 경공업 입법도 다 허사가 되고 다시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펴게 됩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죽는 순간, 스탈린은 다시 소련이 고립되어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반인권-반민주주의 도식’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읽어내야

결 론적으로, 스탈린 시대에서 중심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한계, 국제질서에서 고립, 소련의 약한 경제력 속에서 홀로 사회주의를 이루고 지탱하고자 했던 것이 스탈린주의를 낳았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개인적 성격이 중요했다는 해석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이 밖의 1990년대 이전 기존 연구들은 소련이 처했던 상황과 이들은 소련의 지도부가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는 스탈린 시대의 상황을 보다 면밀하고 실증적으로 알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 후의 논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스탈린 시대를 반인권과 반민주주의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했던 보수나 진보 계열 모두, 소련 체제에 대한 보다 실증적인 연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소련 사회주의를 하나의 흘러간 역사적 산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향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질문과 답변>

질문:
스탈린 시대 산업화 정책의 성과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정책이 사회주의 정권에서만 가능한지도 궁금합니다.

대답: 성과라는 것은 거대했죠, 1930년대 말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생산국이 되니까요. 근데 속도전을 하다 보니 내부 문제가 없을 수 없겠죠. 속도로 인해 발생한 모순을 약식으로 처리하면서 정책 결정 과정이 비민주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지도부가 모여서 임시 위원회를 만들어서 정책을 내려 보내는 등의 관행이 자주 목격됩니다. 그러다보니 비밀이 많아집니다. 잘못 보고된 서류가 들키면 안 되니 비밀을 만들고, 그걸 캐내기 위해 비밀경찰을 만들고…… 뭐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스탈린주의라고 하면 뭔가 투명하지 못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란 이미지가 강하게 생기게 돼버렸습니다. 이는 의도했던 바는 아니고 상황 자체가 그런 흐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이죠. 이런 방식의 국가주도 경제정책을 펴는 것은 소련이 최초였고, 그 후로 후발국들이 모방합니다. 가장 먼저 일본, 그리고 그걸 본 우리나라의 관료들이 장면 정부 때부터 유사한 정책을 피죠. 1945년 이후에 사회주의가 된 국가, 제3세계의 급격한 공업화가 필요한 나라들도 좇아서 합니다. 그걸 보면 국가권력이 강하면 산업화 초기에 다 이런 종류의 정책을 펼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지만 극도의 저곡가정책으로 자본을 축적했죠. 

질문: 1943년 코민테른이 해산하는데 그 배경에 스탈린의 영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어떤가요?

대답: 코민테른은 공용어로 독일어를 쓸 정도로 국제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볼셰비키들이 서유럽 혁명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일국사회주의를 공유하게 되면서 사실상 코민테른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소련의 외교 기관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1943년 코민테른 해체 이후 소련 중앙위원회에 국제부가 생기면서 이를 대신 했다는 것이 그 증거죠. 해산할 때도 별 반대도 없었고요. 코민테른이 우리나라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일국사회주의가 결정된 이후에 더 그랬지요.

질문: 소련은 성립되자마자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탈린주의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성과와 한계를 짚어주십시오.

대답: 경제 부분의 성과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꼭 스탈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파시즘으로부터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지킨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겠죠. 러시아라는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미약한 경제력을 가지고는 적대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이미 쓰러져도 진작에 그랬을 체제를 지킨 거죠. 물론 그 과정에서 비밀경찰, 숙청 등의 악행들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 현재 사회주의의 전망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또 한계일 것입니다.

질문: 지금의 푸틴의 러시아를 보면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지 좀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 현재의 러시아를 사회주의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석유와 관련 산업은 국유화가 진행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해서 자본주의의 소유를 인정하니까요. 이런 형식만 보면 레닌의 네프 시대와 비슷한 거처럼 보입니다만, 레닌이 그 이후에 사회주의적 지향점을 분명히 한 것과는 달리, 푸틴은 단지 국제 정치에서 ‘강한 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 소련식 사회주의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비밀주의 이런 것도 있지만, 사회주의라는 만민이 평등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데 인종, 민족적 차별이나 이런 문제가 있는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답: 고려인이 강제이주를 당한 사건이 있었지요. 아이러니한 건데, 이는 오히려 소련 당국에서 민족의 가치를 고양했던 배경에서 벌어진 일이지 인종적 차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1920년대에 다른 나라보다 소수 민족의 언어, 문화 등을 더 강력히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신문을 낸다던가, 고려인 학교를 연다던가 하면 다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소련시대에 소수 민족들이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기들만의 테두리를 지어서 살게 되지요. 그런데 1930년대 후반 들어 전쟁이 임박해지니 이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인들이 연해주 쪽에 강력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소련 지도부 입장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편을 설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나 독일인들은 소련의 서쪽 국경선에 있으니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겠죠. 그래서 강제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전쟁 위기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또 민족 가치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지금도 러시아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잘합니다.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들 보다 수준이 높지요.

질문: 아까 소련 노동조합의 자율성이 없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실제 현장에서 노동자, 노동조합과 당과의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을 텐데요.

대답: 노동조합이 혁명 때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정치적 역할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서, 예전 학설에서는 스탈린이 중앙통제를 강화하며 사회단체를 박살내는 과정에 노조도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근래의 해석은 좀 다릅니다. 노동조합에서 있었던 사람들이 다 중앙정부나 당의 관료가 되어 핵심 인원이 빠졌던 사실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리고 1930년대 초 농민들이 노동자로 대량 유입되면서 노조가 힘이 없어지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정치적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역으로 조합에 가는 혜택들은 더 커졌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조합과 자본가와의 관계가 자본주의처럼 적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 소련 지도부의 생각이었습니다. 노동자의 물질적 혜택이 높아지는 것과 노조의 정치적 발언권이 약해졌던 현상을 소련 체제를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잣대로 이용할 수 있을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오늘은 1924년부터 53년까지 스탈린 집권시대를 다루었습니다. 보통 우리도 조직을 만들면 기본 체계부터 잡아나가는데, 소련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쟁도 준비해야겠지만, 내부적으로 다져가는 정책도 폈을 것 같은데, 좀 짧게나마 소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답: 그 과정이 미약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1920년대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지방에 있는 공산당 관료들의 지지였습니다. 1990년대 이전 학설에서는 스탈린이 서기국장이여서 관료 명부들을 다 가지고 있어 그 인맥을 이용해 트로츠키를 물리쳤다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스탈린의 서기국을 그들을 다 관리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탈린이 그들의 지지를 받았냐면, 스탈린이 공개 석상에서 “현재 권력을 장악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겠다.”라는 대원칙을 제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민주적으로 해결하고 내부에서 정책을 다지는 과정을 가지지 못하게, 이렇게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정권을 장악했으니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모순들을 걸러내는 것도 약했습니다.

스탈린도 그 모순들을 알고 있어서 숙청을 했던 것입니다. 공산당 관료사회에 주기적으로 숙청을 통해 충격을 주었던 것이죠.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투서 문화가 있는데, 농민이나 노동자에게 그걸 독려합니다. 그래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투서가 쌓였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관료들을 숙청했죠. 역설적이지만 스탈린 이후에는 아무도 숙청을 못하는데, 그래서 소련은 더욱더 관료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소련이 무너질 때 그때의 관료들이 지금의 부유층이 되었습니다. 스탈린 시대 당시에, 내부적으로 잘 다지지 못하고 주기적인 숙청이라는 충격 요법에 의존했던 결과가,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의 관료화를 낳았던 것이죠. 슬픈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