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Ⅱ)

노동사회

제13장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Ⅱ)

편집국 0 4,154 2013.05.3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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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3장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노동 상황과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노동운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계급의 사회·정치적 상황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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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앙 유럽과 동남 유럽 국가들에서의 대중적 투쟁

<폴란드>

폴란드에서는 1923년 말부터 경제공황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생산이 격감했으며 많은 기업들이 폐쇄되었고 실업자가 불어났습니다. 불황은 1926년까지 계속되었어요. 폴란드 정치체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가 점점 커지고, 사회제도의 민주화도 충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921년에 제정된 헌법마저 제한된 범위에서만 시행된 점이죠.

지배계급은 경제안정을 위해 반노동자정책과 폴란드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폈습니다. 1924~1928년은 노동자계급의 기득권에 대해 반동세력이 집중 공격을 행한 시기였죠. 정부는 1924년 1월에 노동자계급의 특정 부류에 대한 노동시간 연장을 허가했으며, 1924년 여름에는 실레지아의 석탄 및 철강업에서 10시간 노동일이 시행되었습니다. 또 이 부문의 노동자 임금도 인하되었죠. 정부와 자본의 이런 정책과 행동은 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을 불렀어요. 그 결과 노동자 50만 명 이상이 1924년에 발생한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대규모적인 투쟁은 보리소프, 스타니슬라부흐, 크로스노에서의 석유노동자 1만 1,000명 파업, 로지와 인접 지역에서 발생한 섬유노동자 12만 명의 파업 ―이것은 다른 로지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의해 지지를 획득했다― 이었는데, 이 투쟁에 의해서 노동자들은 종래의 임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파업투쟁의 결과, 산재보험법, 실업보험법, 여성 및 청년의 노동보전법이 채택되었죠.

1925년에는 파업 투쟁이 퇴조를 보였으나, 1개월 동안에 걸쳐 완강하게 전개된 바르샤바 금속노동자 파업은 노동자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종료되었습니다. 12월에는 실업자의 대중행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고요. 

한편, 비(非)프롤레타리아 근로자층과 소수민족의 행동이 점점 적극화되었습니다. 가망 없는 토지 부족 상태와 정부의 농업개혁 포기, 무거운 세금 부담과 인플레이션은 농민의 불만을 키웠죠. 1924년 봄에는 콜노와 오스트롱렝가 지역에서 농민과 경찰대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농민 정당과 농민 조직의 행동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독립농민당이 결성되었는데, 이 당은 노농정부의 수립과 무상의 지주 소유지 분할, 삼림의 국유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 자유, 무상교육 등의 투쟁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1925년 6월에는 공산당 의원단, 독립농민당 의원, 벨로루시 ‘그로마다(Hromada = 농민·노동자단)’ 명의로 무상 분배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법이 국회에 제출되었죠.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투쟁이 강화되고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는 정세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금지, 좌파 활동가의 대량 검거 등 다양한 형태의 탄압을 행사했어요. 통치자 그룹이 경제적·정치적 안정을 보장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고, 정부가 자주 교체됨으로써 의회제도의 위기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죠.

sooya_01.jpg1926년 5월12일 피우스츠키(Jzef Piłsudski) 원수가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피우스츠키는 군대의 힘으로 무능한 뵈토스 내각을 퇴진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어요. 이에 대통령 보이체홉스키(Woichehobski)는 정부군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막으려했습니다. 정부는 우파의 영향력이 강한 서부 폴란드로부터 원군이 출동하기를 기대했죠. 그러나 사회당의 지도로 시작된 철도 노동자의 파업으로 원군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정부는 마침내 패배했으며, 우파 중심의 내각이 총사퇴했습니다.

새 내각은 형식적으로 3월 헌법에 의해서 구성되었으나, 모든 실권은 피우스츠키가 장악했습니다. 5월 말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의 후보자 피우스츠키가 당선되었으나, 그는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모스치스키(Mosciski)를 지지했죠. 모스치스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바르테르는 새 내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이정희, 2005: 386).

애초부터 피우스츠키의 선동적인 선언들은 근로대중을 비롯한 광범한 주민층을 혼란 상태에 빠뜨렸어요. 사회당은 피우츠스키의 쿠데타를 무조건 지지했고, 폴란드 공산당은 피우스츠키를 프티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권력 장악은 민주화를 향한 도상에서의 일정한 진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1926년 6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5월의 피우스츠키에 대한 평가의 오류를 정정했으며, 독재 권력의 타도와 노동자?농민 정부의 수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대중들에게 호소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02).

부단한 공격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의원단, 독립농민당, 벨로루시 그로마다, 우크라이나 농민조합과 ‘인민의 의지’ 그룹은 국회 안에서 통일전선을 꾸려 행동했으며, 노농동맹을 위한 투쟁 방침, ‘샤나치아’(sanation)체제에 대한 투쟁 전개에서 민주주의 세력들의 결합, 그리고 근로대중과 소수민족의 권리 수호를 위한 투쟁 방침을 실행했습니다.

피우스츠키 정권의 본래 모습은 금융자본 및 산업자본과의 밀접한 협력,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합리화 지지, 국가에 의한 강제조정의 엄격한 적용 등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샤나치아 체제는 탄압수단을 폭넓게 행사했어요. 노동자 집회는 금지되었고, 출판물은 몰수되었으며, 대중집회나 시위는 강제로 해산당했습니다. 벨로루시의 그로마다는 괴멸되었고, 진보적 조직 활동가 수천 명이 투옥되었죠. 

사회주의운동 진영 내에서는 여러 세력들 사이의 복잡한 분화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1926년 6월 폴란드 사회당(PPS)과 노동조합 내의 좌파는 독립정당 ―PPS 좌파― 로 분열되었고, 이 당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선언했습니다. 1926년 말에는 폴란드 사회당 지도부는 샤나치아 체제에 대한 반대 결정을 채택했으며, 사회당 우파는 친 샤나치아 정당을 결성했습니다.

1926년부터 경기가 나아지고 실업이 감소하며 임금이 어느 정도 인상되면서, 파업투쟁은 일시적으로 후퇴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1927년 들어서는 노동자들은 다시 반격을 시작했어요. 노동조합원의 수가 증가하고 노동자계급의 전투력이 고양됨과 동시에, 탄압 반대를 위한 캠페인과 정치범 석방 요구 캠페인이 확대되었죠. 파업 투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은 로지 섬유노동자 15만 명이 벌인 3월 파업으로서, 경찰대와의 격렬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의 임금인상을 획득했습니다.

1928년에는 파업 참가 노동자 수가 35만 4,000명에 이르렀고, 파업의 4분의 3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가장 대중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파업은 3주간에 걸친 로지 섬유노동자 10만 명 참가의 파업이었습니다. 파업참가 노동자들은 가두시위와 대중 집회를 열고 반전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1928년 3월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는 피우스츠키 지지의 ‘초정당 연합 블록’이 27.6%, 우파가 8.4%, 중간파가 12.1%, 좌파가 29.2%, 소수민족인 16.9%를 각각 차지했습니다. 1929년 9월에는 의회의 중도파와 좌파가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되어 시후이타르스키 내각이 사퇴했죠. 피우스츠키는 타협적 경향의 바르텔 내각을 등장시켰으나, 사회당의 강력한 반발로 곧 물러나게 되었고, 쉬백(Schwek)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쉬백 내각은 의회를 휴회 상태로 두었으며, 이에 의회의 중도파와 좌파는 ‘피우스츠키 독재 정부의 퇴진’과 ‘헌법에 충실한 새 정부의 구성’을 주장했죠.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피우스츠키는 자신이 직접 수상직을 맡으면서 유력한 반대파 의원의 체포를 명령하기 시작했습니다(이정희, 2005: 387~388). 

결국 1924~1928년 사이에 일어난 파업투쟁과 사회적 충돌은 결코 완화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1930년대 계급투쟁의 새로운 폭발을 위한 가연재료(可燃材料)의 축적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04).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중유럽과 동남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경제적·정치적으로 매우 상이한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높은 수준의 산업 발달을 이룩한 이 나라에는 노동자계급이 300만 명 이상에 이르러, 사회구성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정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제도가 정착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노동자들은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혁명적 고양기에 획득한 민주적 권리를 나름대로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근로대중의 노동조합 조직, 정치조직, 여타 대중조직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04). 

1925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업생산은 전쟁 이전 수준에 접근했으며, 경제 성장은 인민대중의 경제 상태를 일정 정도 개선했어요. 1924년에는 의회가 사회보험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근로대중에 대한 일종의 양보였죠. 이것은 지배층이 전 국민적 통일과 계급적 이익의 조화 사상을 대중 속에 널리 퍼뜨리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40~45%가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을 정도로 노동조합 조직률이 매우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어 노동운동의 난맥상을 드러냈어요. 이 나라에는 전국중앙조직이 12개 또는 15개 존재했는데, 이 조직들은 각각 다른 정당조직 산하에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최대 노동조합 조직은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가맹의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조합연맹’으로서, 우파 사회민주당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노동조합원은 35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국제 일반노동조합’ 가맹의 노동조합으로서, 1924년 당시 20만 명 이상의 노동조합원을 포괄했고 프로핀테른에도 참가했습니다.

1924년 무렵 노동자계급은 주로 경제투쟁을 전개했어요. 많은 공업 부문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1923년과 비교해서는 파업 건수는 증가했지만 파업 참가자 수는 반으로 줄어들었죠. 노동자 측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은 전체 파업건수의 8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25년 들어 파업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갱신을 요구했으며 일련의 파업 사례에서는 노동자의 생산통제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2월10일 프라하에서 노동자 시위가 행해져 경찰대와 충돌이 빚어졌는데, 시위대 6명이 중상을 입었어요. 오스트라바 노동자 5만 명이 참가한 파업 투쟁은 가장 대중적인 파업이었는데, 정부 당국의 테러와 개량주의자들의 분열 책동 때문에 패배로 끝났죠. 

1926년에는 파업운동이 침체양상을 보였는데, 이것은 경기침체와 그것에 따른 실업의 증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파업 건수와 파업 참가자 수는 전년에 비해서는 반으로 줄어들었고, 노동자가 승리한 경우는 겨우 4%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투쟁이 다시 격화되었으며, 완강하면서도 공격적 성격을 띠게 되었죠. 

sooya_02.jpg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통일, 노동자계급과 농민 그리고 민주적인 사회세력과의 동맹 달성이 불가결한 조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갈등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통일 수행 또한 노동운동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죠.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4세기 동안 분리된 채 외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영역에서 대표적인 두 인물이 대립적인 주장을 펴고 있었어요. 즉, 앤드류 흘린카(Hlinka)는 가톨릭 성직자 출신으로 슬로바키아의 자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바브로 스로바르(Vavro Srovar)는 친체코적이며 진보적 노선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헝가리는 슬로바키아가 체코로부터 탈퇴할 것을 배후에서 선동했죠. 

이런 가운데 1927년의 행정 개혁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밀란 호자(Milan Hodza)는 슬로바키아 농민당을 지지하여 슬로바키아의 자치권을 획득했습니다. 또 그는 스벨라(Svehla) 내각에서 개인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슬로바키아와 체코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죠(이정희, 2005: 404~405). 

<헝가리>

헝가리는 1918년 11월16일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고 공화국임을 천명했습니다. 이어 곧 민주적인 선거법, 토지 개혁의 실시를 비롯한 각종 개혁적인 정책이 발표되었고, 국내에서는 공산당에서 극우파 정치조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당이 결성되었죠.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1919년 봄에 구체제의 정치적 지도자들이 ‘반볼세비키 위원회’와 ‘반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호르티(Horthy, Miklos) 장군 통솔 아래에 국민군 부대를 창설한 것이었습니다(이정희, 2005: 412).

1920년 3월1일부터 재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25년 동안 헝가리의 최고 권력자로서 군림하게 된 호르티는, 칼빈교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이며 반유태주의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서 매우 보수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1920년 6월4일에는 베르사유 강화 회의의 일환으로 헝가리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는 조약이 베르사유의 트리아농(Trianon) 궁에서 체결되었습니다. 트리아농 조약의 체결에 따라 헝가리는 민족사상 큰 비극을 겪게 되었어요.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 영토의 70%와 국민의 60% ―순수 헝가리인의 비율은 28%― 를 상실하게 된 것이죠. 결국 헝가리 국토는 9만 3,000㎢로 축소되었고, 국민의 수도 1,820만 명에서 760만 명으로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체 헝가리인의 약 3분의 1일이 타민족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소수민족의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이상협, 1996: 242~243).

1920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민족통일당과 소지주당이 다수파가 되었어요. 그리하여 반혁명 임시 정권은 많은 주요 과제를 안고 정권 이양 작업에 착수했죠. 4년 동안의 전쟁으로 헝가리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혁명과 루마니아 점령 기간의 약탈 등으로 인해 그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sooya_03.jpg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의 충격으로부터 회복하여 서서히 사회의 안정을 되찾게 된 시기는 베틀렌(Bethlen, Istvan)이 수상으로 재임한 1921년부터 1931년까지였어요. 1920년의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가난한 농민의 생활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민층의 지지도 획득할 수 있었죠. 또 농민층의 상당수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면서 농민당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농민당은 여당과 합당하여 베틀렌 정권을 지지했습니다. 베틀렌은 이를 바탕으로 사회민주당을 합법화했어요.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공산당은 불법화되어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죠. 호르티 반혁명 보수 민족주의 정권은 헝가리 사회의 진보적 인물 상당수가 유태인 출신이었고, 초기 주요 간부직 공산당원과 소비에트 공화국의 주도적 인물들이 유태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켜 선전했죠(이상협, 1996: 248~249).

헝가리가 전후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부분적인 안정기에도 헝가리 경제는 미처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했어요. 헝가리의 지배층은 외채의 도움과 근로대중 및 농촌의 광범한 프티 부르주아 층에 대한 수탈에 의해 금융시스템을 일정 정도 안정시키고 공업과 농업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의 지배계급은 헝가리인 전체의 ‘전 국민적’인 ‘단일’의 이해가 계급적 이해보다 우선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민족주의적·배외주의적 사상을 국민들에게 보급하려 노력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의 기간에는 민족주의적인 강박관념이 지배계급이나 도시와 농촌의 프티 부르주아지 뿐만 아니라 근로대중의 상당한 부분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13).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의 급진 사회주의자들은 지하 활동을 유지하기 곤란한 조건에서 공산당의 재건을 준비했습니다. 1925년 8월 빈에서 헝가리 공산당 제1회(재건) 대회가 열렸는데, 대회 결의는 반혁명정권의 타도와 노동자·농민 정부의 수립을 위한 투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헝가리 공산당의 주요한 전략 목표는 이전과 결코 다름이 없었죠. 즉,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반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헝가리의 정세는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이제 긴급한 과제는 민주주의 혁명의 실행이고, 이 혁명의 성공적인 실현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회는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투쟁, 민주공화제와 토지개혁, 큰 재산 소유자에 대한 과세 강화 요구 투쟁을 제기할 것을 당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1925년 4월 헝가리 사회민주당(HSDP) 지도부의 협조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에서 제명 또는 탈당한 좌파 사회민주당원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HSLP)을 창립했는데, 이 당은 합법적 노동자 정당이었습니다. 이 당의 강령이 제기한 주요 임무는 민주주의적 권리 ―결사와 집회의 권리, 보통선거권― 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어요.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전반적인 정치적 대사면과 헝가리 공산당 활동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또 실업자에 대한 국가부조의 보장, 실질임금의 인상, 8시간 노동법의 제정, 여성?연소노동의 보호, 누진재산세의 도입, 민주적 토지개혁을 주장했습니다.

호르티 정부는 형식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활동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당 지도부와 하부 조직을 마비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죠. 당 지도부와 활동가들이 자주 투옥 당했습니다. 결국 당은 1928년 활동 정지를 당하게 되었죠. 당원의 일부는 비합법 상태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공산당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부분은 노동조합이나 사회민주당의 하부조직, 또는 문화?교육단체 등에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유고슬라비아의 정치발전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는 중앙집권주의(centralism)와 연방주의(feralism) 사이의 교착상태 기간이며, 1929년부터 1934년까지는 알렉산다르 1세의 독재 기간, 1934년에서 동맹국 점령이 시작된 1941년까지는 섭정시기로 나눌 수 있는 거죠.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벨그라드의 중앙집권주의자들이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급진당의 파시치는 크로아티아 농민당과 당 지도자 라디치가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1925년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해산을 명령했죠. 

sooya_04.jpg이런 가운데 1926년 급진당의 파시치가 사망하자 급진당은 구심점을 잃게 되어 알렉산다르 공이 정당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편, 라디치가 급진당의 하수인으로부터 암살당하게 되자 유고슬라비아는 벨그라드에 반대하는 크로아티아 인의 저항과 개헌 요구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어요. 이에 알렉산다르 1세는 1929년 1월6일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와 자치체 기관을 해산했으며, 모든 정당과 진보적 단체를 금지시켰습니다. 알렉산다르 1세는 불가리아의 보리스 왕이나 루마니아의 캐롤 왕처럼 각 정당에서 대표를 뽑아 기용하였어요. 알렉산다르 1세의 권위주의 체제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반목을 키워가는 가운데 마케도니아의 한 폭력 혁명주의자에 의해 알렉산다르 1세가 암살당하게 되었습니다(이정희, 2005: 455~456).

알렉산다르 1세가 죽고 난 뒤, 세르비아에서는 파시스트인 유고슬라비아 민족당이 생겨나 크로아티아 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거부했고, 크로아티아 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테러리스트들은 지하운동을 벌였어요. 자유주의자들은 독재가 완화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죠. 

경제적인 면에서 유고슬라비아는 1920년대 중반부터 상대적인 호황기에 들어섰습니다. 고용이 어느 정도 증가했고, 실질임금은 1926년 당시에도 아직 1913~1914년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일부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상승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저숙련 노동자와 여성·연소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노동자의 사회적 획득물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거세졌죠.

정치권력은 진보적 노동단체를 엄격하게 탄압했으며, 노동권을 봉쇄하려는 자본가의 공격에 대항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떤 기도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파시스트적 ‘의용단’이 공업중심지나 탄광지역의 노동자 거주지구와 노동조합 건물을 습격했죠.

이런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4년 여름에는 경찰과 파시스트의 테러 행위에 대한 항의 집회와 파업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으며, 자그레브에서는 파업이 총파업으로 진전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대중투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요 임무로 제기되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세력 통일, 민족적 반목의 극복, 그리고 근로농민 및 도시 중간층과 동맹 확립 등이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20). 

1928년 무렵 유고슬라비아의 국내 정세는 매우 첨예한 양상을 보였어요. 민족 동권을 요구하는 피억압민족의 투쟁이 격화되었고, 같은 해 여름에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반(反)왕정 및 반파시즘 대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학생을 비롯한 중간층 대표들이 파업 노동자와의 연대를 공공연하게 표명했죠. 연말에는 청년노동자의 시위가 벌어졌고, 슬로베니아에서는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3. 북유럽 국가들에서의 노동운동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공황이 각국의 경제성장, 산업의 집적과 독점화 진전과 더불어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경제지표를 나타낸 것은 스웨덴이었는데, 공업성장율(연율 7% 상당) 면에서 스웨덴은 1920년대 후반에 미국과 모든 유럽 국가들을 앞질렀죠. 노동자계급의 비중이 끊임없이 증가했고, 1920년대 말에는 공업노동자와 농업노동자가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경제적 호황 조건에서 높은 이윤을 획득한 부르주아지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계급협조주의를 촉진하기 일정한 양보정책을 취했어요. 이런 정책은 노동자가 행사하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들의 시행 방침과 서로 맞물려 도입되었죠. 1920년대 말에는 모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정부는 법체계를 정비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반노동자적인 방향에서 이루어졌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38). 

1927년 노르웨이 의회는 새로운 법안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은 단체협약의 해석을 둘러싼 노동재판소의 설치를 규정한 것이었죠. 법률은 또 비공인 파업(wildcat strike)을 행한 노동조합에 대해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1928년에 스웨덴에서는 2개의 반노동자적인 법― 당체협약법과 노동쟁의강제조정법― 이 채택되었는데, 이 법의 제정 목적은 파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경제투쟁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죠.

자본주의의 일시적·부분적 안정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회민주당은 정부 참가를 경험했어요.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세 번에 걸쳐 스웨덴 정부의 수반이 되었죠. 1924년의 선거 결과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처음으로 하원에서 100석 이상의 의석을 획득했습니다.

sooya_05.jpg덴마크 사회민주당도 자본주의의 일시적·부분적 안정기에 두 번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죠. 1924년에 이 당은 선거에서 40%의 표를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으며, 당 지도자 스타우닝(Stauning, Thorvald)이 최초의 사회민주당 내각(1924~1926년)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상원에서 안정적 다수를 차지한 부르주아지 당이 사회민주당 정부의 정책 시행을 가로막았죠.

1927년에 노르웨이 노동당은 노르웨이 사회민주당과 통합했는데, 새 정당은 노동당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1927년 선거에서 이 당은 37%의 표를 획득했으며, 1928년 초에는 노르웨이 역사상 처음으로 호른스루드(Christopher Andersen Hornsrud)를 수반으로 하는 노동당 정부가 성립되었죠. 노동자계급과 모든 근로자의 이익을 위해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하고 준비한다’는 정부의 성명은 부르주아지의 금융방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결국 이 정부는 18일 만에 물러나야만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38). 

북유럽에서 추진된 경제 안정화와 부르주아지와의 협조라는 사회민주당 노선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지는 못했으며, 파업을 비롯한 대중투쟁을 크게 북돋우지는 못했죠. 

그러나 이 기간에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노동자 투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어요. 스웨덴에서 이 기간의 최대 파업참가 인/일수(노동손실일수)를 기록한 것은 1925년(256만 인/일)과 1928년(483만 5,000인/일)이었습니다.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투쟁도 큰 주목을 끌었어요. 이를 테면 1927년의 경우 이들 노동자들이 파업 노동자 총수의 38%를 차지했죠. 1926년에는 스트리파라는 작은 촌락의 광산에서 장기적인 파업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28년에는 노르보텐의 광산노동자들이 직장폐쇄로 인해 해고된 중부 스웨덴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고 반년 동안 파업을 제기했죠. 

덴마크에서는 1920년대 중반에 파업 노동자와 직장폐쇄를 당한 노동자의 수가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파업은 덴마크 미숙련노동자조합이 지도한 운수노동자의 16일 동안에 걸친 파업으로서, 이 파업으로 농산물의 수출이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기업주는 노동자들에 대한 압력을 늦출 수밖에 없었죠.

sooya_06.jpg노르웨이에서는 1924년에 몇 건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기업주의 임금 삭감 기도로 인한 것이었어요. 파업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불법’ 파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노동자 6만 3,100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파업과 직장폐쇄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520만 일이었죠. 

핀란드에서는 1924~1927년 사이에 파업이 220건 발생했으며, 파업참가자 수는 29,600명이었고 파업의 대부분은 노동자계급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1927년에는 금속노동자의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투르쿠 조선소에서 기업주가 직장폐쇄를 단행하려는 데 대응하여 시작된 것이었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한 가운데 투쟁은 30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파업은 승리로 마무리되었어요. 1928년에는 파업참가 노동자 수가 전년의 2배로 증가하여 2만 7,000명에 이르렀습니다. 고무공업과 항만노동자의 파업이 제기되어 완강한 양상을 보인 가운데 근 1년 동안 계속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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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