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Ⅰ)

노동사회

제13장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Ⅰ)

편집국 0 5,362 2013.05.3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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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3장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노동 상황과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노동운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계급의 사회·정치적 상황
 제2절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유럽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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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적 안정 속의 모순 증대 

1922년과 1923년에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은 1924년 무렵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거의 전 지역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순환적 고양 국면에 들어갔으나, 이것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수반했죠. 1925년에는 이미 세계 공업 생산지수가 전전 수준을 20% 정도 초과했습니다.

sooya_01.jpg이 과정에서 독점체의 경제력이 급속하게 성장했는데, 공업생산의 모든 중요부문에서 차지하는 국민생산의 압도적 부분은 독점체의 손에 집중되었어요. 공업의 주도적 부문에서는 거대 독점체가 출현했는데, 독일에서는 IG 파르벤(I.G. Farbenindustrie)과 철강 트러스트(Sthal Trust), 영국에서는 임페리얼 케미컬 인더스트리(Imperial Chemical Industries)가 그것들이었고, 자동차 공업부문에서는 미국의 포드(Ford), 프랑스의 르노(Renault)와 시트로엥(Citron) 등의 거대한 자동차기업 연합이 그러했죠. 농업에서도 자본의 집적 과정이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36). 

자본주의의 부분적·일시적 안정은 국제관계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베르사유=워싱턴 조약체제가 수립된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의 새로운 역관계를 기초로 분할되고 재편성되었어요. 1924년에 채택된 ‘도스 안(案)’은 독일 배상 지불의 상당한 부분을 면제했고, 독일과 전승(戰勝) 국가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켰습니다. 동시에 도스 안이 노린 것은 소비에트 연방을 독일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전화시켜 소련의 공업화를 저지하려는 것이었죠. 또 로카르노 조약에 따라 협상국 열강은 독일의 서쪽 국경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함과 동시에, 동쪽 국경에 대해서는 독일의 이후 확장 방향을 지시했습니다. 이것은 반(反)소련 공모를 통해 열강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의 일부분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은 대중들에게 부르주아 의회주의적 또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확대시켰어요. 이런 현상을 키운 근거가 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시적 번영이었고, 도시와 농촌 프티 부르주아지 일부의 물질적 상태의 개선, 일부 노동자계층의 임금상승이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안정화의 과정을 자본주의의 점차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개혁으로 가는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어요. 1924~1927년 사이 카우츠키, 힐퍼딩 등 여타 사회민주당의 이론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독점체와 국가독점자본주의 조류의 성장은 경쟁을 제한하게 되고, 이에 따라 생산의 무정부성 극복을 통한 ‘조직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점점 초계급적인 기관으로 전화한다는 거죠.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주장은 국가 조직이나 독점체의 경제적 조직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대표권을 확장하는 방법을 통하여 ‘조직된 자본주의’의 지배권을 점진적으로 사회 자체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이 곧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코민테른 진영은 자본주의적 안정이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틀 안에서 형성된 것이고, 따라서 안정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새로운 사회적 폭발과 제국주의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적 고양 국면, 생산의 증대와 기술 진보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결과에 따라 더욱 심화된 내적 모순을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산능력의 창설, 자본의 계속적인 집중과 독점체의 강화, 독점체 소유의 부와 국민소득 분배분의 집중 증대, 착취 규모의 확대, 국가독점 자본주의적 경향의 강화, 국제독점체의 출현, 이들 모든 양상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모순의 확대재생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논급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민테른은 1928년에 자본주의적 안정이 동요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고 심각한 경제공화의 도래를 예견했어요. 그 근거로서는 인구의 많은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화 되고 있는 현상을 비롯하여, 생산설비의 불완전 가동의 증대, 경제 균형 파괴의 확대, 만성적 실업, 생산의 성장에 대비한 유효수요의 부족 등이 제시되었죠.

제국주의의 식민지체제 위기가 심화된 것도 자본주의의 안정을 깨뜨리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식민지 착취의 강화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제국주의의 억압조치는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들의 인민 사이의 모순을 첨예화했죠.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이 불균등하게 진행됨으로써 경제적 안정이 일시적이고도 불확실한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 세계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영국의 비중이 저하되고 프랑스가 정체되고 있다는 것,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타격을 받은 독일이 제국주의 정책을 다시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 일본의 경제력이 급성장했다는 것, 석유를 비롯한 원료산지를 둘러싸고 투쟁이 격화되고 경제가 군사화 되었다는 것, 이런 모든 과정은 불가피하게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모순 심화와 새로운 군사 블록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40).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의 정치 지배 강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몇몇 국가들에서는 1920년대 초에 수립된 파시스트적 또는 군사독재체제가 존재했는데, 이탈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스페인 등이 그러했습니다. 이들 국가에서는 시민의 권리가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의회는 해산되거나 파쇼화 되었으며, 노동자 정당과 투쟁적인 노동조합은 금지되거나 활동을 통제 당했죠.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는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배타적 애국주의, 군국주의였고, 선전과 교육의 통일적 반동체제를 지향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기에는 선진공업국의 경우 부르주아지 정책에서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당 활동에 대해 정면에서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양보와 노동운동의 분단,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지도자 포섭 등 유화적 방법과 강압수단을 결합하는 방법을 채택했죠.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강하게 추구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사상적·정치적 자립성을 보장하고, 사회진보·민주주의·평화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 요구를 실현하는 정책이었습니다.

2. 서유럽 국가들에서 전개된 노동운동

<영국>


영국의 경우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자본주의 부분적·일시적 안정기에 산업 발전이 두드러지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어요. 1929년이 되어서야 공업발전이 겨우 1913년 수준에 도달했죠. 그러나 실업자 수는 100만 명 이상을 헤아렸습니다.

sooya_02.jpg정치적으로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 체제가 붕괴되고 여당인 보수당에 이어 노동당이 제2당의 지위로 진출한 거죠. 1923년 12월의 의회선거에서 보수당은 하원의 259개 의석을 획득했고, 자유당은 155개 의석을, 그리고 노동당은 191개의 의석을 확보했어요. 노동당 지도자 맥도널드가 내각 구성을 위임받게 되었고, 1924년 1월23일 제1차 노동당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러시아 10월 혁명 후의 계급투쟁적 영향을 받아 점점 적극적으로 정치생활에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노동당의 정치노선은 1927년에 채택된 강령적 문서(Labour and the nation)에서 명시화되었습니다. 이 강령은 “계획적인 성취로서 ―실험적 방법으로, 어떤 폭력이나 혼란도 없이 과학적 지식과 행정적 기술의 전면적 이용을 토대로― 유일한 목적, 즉 사회의 전체 구성원들에게 최대한의 경제적 복지와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한다는 목적에 따라 사회의 자원이 조직되고 관리되는 사회질서를 수립한다.”는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당원들에게 호소했죠.

제1차 노동당 정부는 1924년 2월에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시영주택 건설의 확대를 규정한 법률을 도입했으며, 실업급부금제도와 노령연금, 신체장애자 연금의 배분을 개선했습니다. 또 농업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법이 채택되었고, 공공사업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시책은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고, 부르주아지의 특권이나 소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죠.

노동당 정부가 시행한 정책은 대중의 깊은 실망을 불러일으켰어요. 보수당은 이를 기회 삼아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1924년 가을에 실시한 선거에서 노동당은 40개의 의석을 잃게 되었고,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당은 볼드윈 내각을 출범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영국 노동자계급이 벌인 파업투쟁은 이런 정치정세 아래서 전개되었죠. 당시 영국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무렵 영국 노동조합회의(TUC)는 노동자 약 500만 명을 조합원으로 포괄했어요. 그러나 노동조합회의의 지도부는 경제적 노동조합주의를 표방하는 개량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현장에서의 대중행동에 대해 적대감을 지닌 지도부와 현장 활동가(shop steward) 사이에 심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죠.

1920년대 중반에 일어난 파업 동향을 보면, 1923년에는 628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파업 참가자 수는 40만 5천 명이었으며 1924년에는 710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파업참가자 수는 61만 3천 명이었습니다. 철도 노동자, 조선(造船) 노동자, 도시교통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며, 고용 확대를 요구하는 투쟁이 광범위한 규모로 전개되었습니다. 1924년에 전개된 실업자운동은 실업자 헌장을 채택했는데, 헌장은 공공사업의 조직, 고용 확대를 위한 국영기업의 창설, 노동시간의 단축, 직업교육의 조직을 요구했죠.

sooya_03.jpg자본주의의 일시적·부분적 안정기에 발생한 최대 규모의 투쟁은 1926년의 총파업이었어요. 1925년 7월로 단체협약이 만료되는 것을 기화로 탄광 기업주 측이 1925년 6월 탄광 노동조합과 체결한 전국적 단체협약을 각 지역단위의 협약체제로 대체하고, 임금을 각 직종에 따라 4%에서 13%까지 인하하며, 최저임금제를 폐지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노동조합 집행위원회는 1925년 6월30일 특별회의를 열어 6월 말 이후 석탄 수입 저지를 위한 TUC 총평의회의 계획에 동의하고, 탄광 노동자의 요구를 지지하는 파업을 선언할 전권을 총평의회에 부여했습니다.

이 같은 사태 전환을 예기하지 못했던 정부는 양보를 하게 되었는데, 정부는 탄광 기업주들에게 국고보조금을 제공하여 그들이 앞으로 9개월 동안 종래에 지급해왔던 액수의 임금을 탄광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수 있도록 보장했던 겁니다. 이 결정이 발표된 것은 7월31일 금요일이었어요. 노동자 측의 이 부분적 승리는 ‘붉은 금요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 이 같은 조치를 통해 탄광 노동자들의 대투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어요. 이후 몇 개월은 볼드윈 정부에 의한 맹렬한 파업파괴 공작을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이 정부는 트럭을 동원했고, 기관차의 특별차고를 설치했으며, 비상시에 이용할 자동차를 준비했고, 파업 파괴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산업의 주요 지점에 배치할 요원을 훈련했죠. 그리고 전국이 10개 지역으로 분할되어, 각 지역에 비상시에 대처할 경제·정치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많은 군대가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되었어요. 정부는 혁명이라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었던 것입니다(Foster, 1956: 300~3001).

1926년 3월11일 석탄산업의 상황을 조사한 왕립위원회의 보고가 발표되었는데, 보고는 탄광 기업주의 요구를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 내용은 탄광 국유화 금지, 석탄 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정지, 임금인하, 노동시간 연장 등에 관한 것이었죠. 몇 주 동안에 걸친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결국 5월3일 자정을 기해 전국 총파업이 선언되었습니다.

철도, 운수, 인쇄, 여타 공업부문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처럼 광범하게 대중적 성격을 띤 것은 영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파업 참가자 수는 무려 3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총평의회는 파업을 경제적 목적에만 한정하려 의도했고, 파업 지도부는 두려움을 갖고 몹시 당황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혼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어요. 총평의회 다수자의 공포, 결국 그들은 파업이라는 무기를 두려워하여 오직 억누르려고만 했습니다. 혼란 자체는 바로 다름 아닌 탄광노동조합과 총평의회 그 자신 속에 있었던 거죠(Foster, 1956: 302~303).

현장에서 투쟁을 지도했던 공장위원회와 행동평의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들 조직의 행동 지침은 때로 총평의회 방침과 어긋나기도 했어요. 또 파업기관이 대중의 창의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했고, 대중 집회에서 노동자 자신들이 파업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행동평의회는 노동조합대표회의에서 선출되었고, 몇몇 지구에서는 투쟁의 통합적 지도를 위해 ‘통일 파업위원회’와 같은 큰 규모의 조직이 꾸려졌죠. 

행동평의회는 피케팅을 조직하고 노동자 자위대를 편성했으며, 파업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선동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행동평의회는 현지 권력기관 역할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평의회는 철도, 항만, 기업들을 통제 아래에 두고 도시의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시켰습니다. 뉴캐슬에서는 파업위원회가 식당을 개설하고 주민들의 식량 확보를 위해 지역 협동조합과의 연락을 확립하기도 했죠. 

총파업이 전개되면서 정부 측은 파업 지도부가 평화와 온건 그리고 질서 유지를 권고한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총파업을 국가와 통치권에 대한 결정적인 도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정부는 이 총파업을 내전의 발단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철저히 진압하려 했습니다. 

파업 지도부가 정부의 이런 강경 방침에 대응하여 총파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기간산업을 완전히 정지시켜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 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도록 만드는 결연한 투쟁 방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부는 그런 대담한 전술을 구사하기는커녕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요.

마침내 총평의회 지도자들은 5월12일 볼드윈 수상과 회담을 마친 뒤 파업 중지를 선언했습니다. 총평의회는 광산노동자들이나 파업 참가자들과 아무른 협의도 없이, 또 정부로부터 어떠한 양해도 얻지 않은 채 파업 중지를 선언했고, 파업에 참가한 각 노동조합 집행부를 통하여 직장 복귀를 명령했습니다(Cole, 1947: 420).

노동조합 지도부의 결정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혼란과 분노를 안겨주었어요. 노섬벌랜드와 더럼의 통일파업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총평의회가 현지 광업주와 기업주에 의한 혹심한 박해 앞에 노동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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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의회의 지령을 거부한 채 많은 공업 기업의 노동자들이 며칠 동안 파업을 계속했어요. 탄광 노동자들은 11월 패배로 끝날 때까지 몇 개월에 걸쳐 파업을 계속했습니다. 총평의회와 노동조합의 지지를 상실한 탄광 노동자들은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죠. 1921년의 ‘검은 금요일’이 되풀이된 셈입니다. 파업의 패배 뒤에는 혹독한 보복이 뒤따랐죠. 노동자 활동가들의 대량해고가 시작되었고, 수백 명에 이르는 조직가와 파업참가자가 체포되고 투옥되었습니다. 

1926년의 영국 총파업이 패배로 끝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분석이 좀 특이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그 대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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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영국의 자본가와 보수당은 …… 일반적으로 영국의 노동자와 그들의 지도자보다도 경험이 많고 잘 조직되어 있으며, 결의에 차 있어서 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②영국의 자본가와 보수당은 완전하고 확실하게 준비를 갖추고 커다란 사회적 분쟁에 임했음에 반해서, 영국 노동운동 지도자는 …… 불시에 휩쓸리게 되었다. 
③노동운동의 참모부가 …… 내부적으로 사기가 떨어지고 부패해 있었음에 반해서 …… 자본가의 참모부인 보수당은 단결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전재했다. 
④자본가들은 이번 투쟁을 본질적으로 정치투쟁으로서 싸운 데 반해서, 노동자의 지도자는 경제투쟁으로 보고 지도하려 했다.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총파업은 정치투쟁의 궤도로 옮겨지지 못하면 반드시 패배한다. 
⑤자본가는 완전한 국제적 원조를 발전시켰음에 비해, 노동자의 지도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⑥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이 이 파업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실패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였다. 
⑦ 영국 공산당은 ‘절대 올바른’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아직 파업의 방향에 영향을 줄 만큼 성장하지도 않았고, 대중에 대한 권위도 못 갖고 있었다(Foster, 1956: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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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의 패배가 가져다 준 결과는 영국 노동자계급에 대해 매우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1926년 여름 의회는 탄광 노동자의 노동일을 7시간에서 8시간으로 연장하는 법령을 통과시켰죠. 또 1927년에는 의회가 ‘노동쟁의 및 노동조합법’을 채택했는데, 노동자계급은 이 ‘악법’을 철폐하기 위해 20년에 걸친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법률은 정치파업과 연대파업을 엄격히 금지했고, ‘비합법’ 파업을 조직하거나 거기에 참가한 사람에 대해서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또 대중적인 피케팅을 금지했고 일반 피케팅도 엄격하게 제한했으며, 손해에 대한 민사소송의 지불의무를 부담하기 위해 노동조합 기금을 조성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TUC와 노동당 가입을 금지했고,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모금활동을 금지했죠. 

총파업의 배반에 따른 반동의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점진적인, 그러나 지속적인 진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몇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Cole, 1947: 424). 

<프랑스>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에 대해 엄청난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배상금에 의해 상당한 자금이 유입되었으며, 공업생산은 1924년 이후 전쟁 이전 수준을 상회하게 되었죠.

정치적으로는 1924년 5월11일 실시된 의회선거에서 급진당과 사회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획득하여 ‘좌파 연합(Cartel des Gauches)’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좌파연합이 제기한 정치적 프로그램은 혁명운동 참가자에 대한 특사, 국가공무원의 노동조합 단결권 승인, 1920년 파업에서 해고된 철도노동자의 복직, 기업주 부담에 의한 통일적 사회보험제도 실시, 8시간 노동일의 법제화, 국가로부터 교회의 분리 등을 포함했습니다. 

급진당의 에리오(Herriot, Edward)를 수반으로 하는 좌파연합 정부는 몇 가지의 민주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했지만, 당초 내세웠던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실시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이 정부는 모로코와 시리아에서 식민지 전쟁을 발발시켰죠.

sooya_05.jpg좌파연합이 실시한 정책 실패의 결과는 이 블록 지지세력에게 환멸을 안겨주었고, 드디어는 연합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그 자리에 1926년 푸앵카레(Poincar, Raymond)를 수반으로 하는 우파연합 ‘국민동맹’(Union Nationale) 정부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부는 실제로 모든 부르주아 정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죠. 푸앵카레가 병으로 사임한 이후에는 타르디아(Tardieu)가 정부를 이끌었고, 이어서 라발(Laval)이 등장해 1928년에는 질병에 대한 사회보장법을 채택했습니다. 1928년의 의회 선거는 우파세력의 승리를 굳히게 했죠(프라이스, 2001: 294).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기에 노동운동의 일시적 후퇴가 진행되었어요. 이 시기에 일어난 파업은 주로 경제적 성격을 띤 것이었습니다. 1924년 쉘부르와 생테티엔의 금속 노동자, 루앙의 섬유 노동자, 파리의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1925년에는 건축 노동자와 섬유 노동자 그리고 세라믹 산업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습니다. 은행 노동자 4만 명이 6주간 동안 파업을 제기했죠. 노동자계급은 임금 인하와 착취 강화에 반대했고, 산업안전·보건의 개선을 요구하여 투쟁했습니다. 파업이 정치적 성격을 띤 경우도 있었어요. 이런 양상이 명료하게 나타난 경우는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투쟁이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73).

이런 파업 투쟁은 자본가 측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가운데 전개되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습니다.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 분열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도 노동자 투쟁을 곤란하게 했어요. 이런 경향은 주로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의 개량주의적 지도부의 지도방침에서 연유된 것이었죠. 노동총동맹은 1919년까지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전국중앙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CGT는 1919년 11월 프랑스 기독교노동연맹(CFTC)이 설립되면서 그 독점적 지위를 잃게 되었죠. 또 1920년 이후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서 1922년에는 사회주의 그룹과 생디칼리스트 중심의 혁명적 노동조합이 새로운 전국중앙조직 ―통일노동총동맹(CGTU)― 을 창립했습니다. CGTU는 제3회 대회(1925년 말~1926년 초)의 결의에 따라 CGTU의 조직을 재편성했는데, 그 기초조직은 공장노조 조직이 되었으며, 이 혁명적 노동조합 단체는 대중적 규모의 조직이 되었어요. 

이 당시 CGTU가 벌인 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계급의 화해를 목표로 한 당시의 국제노동기구인 SDN, ILO의 방침을 부정했습니다. CGTU로서는 이들 국제노동기구가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죠.

둘째, 자본 측이 추진하는 경영 합리화 반대투쟁을 중요시했습니다. 또 반동적 입법의 전형이라 하여 사회보장제도 제정을 반대했습니다.

셋째, 조직활동 영역에서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비조합원과 지역 동맹에 대해 개방적이었습니다. 예컨대 공장위원회를 그들에게 개방했죠(광민사, 1980: 38~39).

CGTU는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을 최대의 과제로 설정하고, 두 총동맹의 결합을 목표로 하는 합동 대회 개최를 제안했어요. CGT 지도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죠. 그러나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제안에 따라 두 총동맹의 대표로 구성되는 합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옹호했습니다. 

자본주의 안정기의 노동운동 내 정치세력 역관계는 사회당 측의 우위를 특징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기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국제노동자연맹 프랑스지부(SFIO) 지도부는 국제 사회민주주의운동 우파의 특징이었던 극단적인 반공주의에는 동조하지 않았어요. SFIO 지도부는 연립정권 참가에 대한 부르주아 정당의 제안을 거부했는데, 이것은 당이 부르주아 정책에 대한 일정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게 했죠. 1924~1929년 사이에 SFIO 지도부는 때로 좌파 조류와 블록을 형성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내 우파가 반대파의 처지에 섰습니다.

SFIO 지도부는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1925~1926년)이 전개되던 시기에 의회나 선전활동을 통해 전쟁을 비난하거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독자적인 대중적인 반전운동을 행하지도 않았으며, 프랑스 공산당과 협력하여 반전운동을 벌이는 것도 반대했죠. 

사회당은 유권자의 약 18~20%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최대의 노동조합 CGT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력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중투쟁이 의회투쟁의 틀을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SFIO 지도부의 우려는, 노동자계급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데서 당의 잠재적 가능성을 현저하게 저하시키고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전투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중요하고도 복잡한 임무의 실현을 위한 프랑스 공산당의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주요 특징을 보여주었죠. 먼저 프랑스 공산당은 1924년에 공장 세포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유형의 당 편성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 세포를 대중의 정치적 구심과 조직의 거점으로 바꾸어 당내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중핵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재편성 과정에서 당내 우파와 생디칼리스트 그룹의 반대가 완강했어요.

프랑스 공산당이 모로코와 시리아에 대한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 반대를 위한 대중투쟁을 조직한 것은 큰 성과로 평가되었습니다. 1925년 봄 모로코에서의 군사행동이 시작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은 즉시 강화, 리프 공화국의 독립, 모로코로부터의 프랑스군 철퇴를 요구했습니다. 식민지 전쟁 반대투쟁을 조정하기 위해 토레즈(Thorez, Maurice)를 책임자로 하는 행동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프랑스 공산당, CGTU, 구(舊) 출정군인연맹(ARAC), 선진적 지식인을 결합한 ‘클라르테(Clart)그룹이 참가했죠. 행동위원회는 반전 집회를 조직하고 하역 노동자들에게 모로코로 가는 군수물자의 수송을 거부할 것을 호소했으며, 모로코로 떠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을 대상으로 선동활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사회당과 CGT 지도부의 분열주의적 방침과 정부의 탄압조치는 반전 캠페인의 수행을 곤란하게 했지만, 결코 가로막지는 못했어요. 1925년 10월12일에 예정되었던 모로코 전쟁 반대의 대중적 정치파업은 결행되었습니다. 이 파업에는 9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고, CGT 산하의 몇몇 지방 노동조합도 반전파업을 지지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77). 

공산당이 지도한 모로코 전쟁반대 캠페인은 프랑스 노동운동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식민지주의와 배타적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별한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대는 이 나라의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에 유효한 원조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1924년 의회 선거에서 약 10%(75만 5천 표)를 획득하여 당원 26명을 당선시켰습니다. 1924년 선거 후 공산당의 선거전술은 상당한 정도의 유연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1925년 1월 클리시에서 열린 공산당 제4회 대회는 당면한 자치체 선거에서 ‘좌파 블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죠. 사회당과 급진당과의 부분적 협정을 인정한 것이 새로운 전술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은 그 후 ‘클리시 전술’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기에 진행된 부르주아 지배의 경제적?정치적 기초의 강화는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1929년 여름에 정부의 탄압은 정점에 이르렀으며, 1929년 7월 말에는 정부 당국이 토레즈를 비롯한 공산당지도부를 체포하고 『‘뤼마니테』지의 자금원이었던 노농은행의 영업을 봉쇄함과 동시에, 중앙위원회와 뤼마니테 건물을 차압했죠. 프랑스 공산당은 반합법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정부가 금지한 1928년 8월1일 반전 시위를 결행했으며, 경찰의 탄압에 반대하여 대중적 항의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독일>

1923년 말 혁명적 대중투쟁이 퇴조한 뒤,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또한 상대적 안정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유럽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였어요. 바이마르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죠. 이 구성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충돌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회제도에 대한 지지 세력과 적대 세력 사이의 투쟁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안정성은 궁극적으로 공화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죠. 1918년 11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고 불과 며칠 만에 합의되었던 사회적 타협의 향방이 바로 그런 사실을 잘 반영해주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취약했던 혁명 시기에 노동 측에 몇 가지 양보를 했어요.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8시간 노동일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는 다시금 중앙노동공동체(Zentral-Arbeits-Gemeinschaft)라는 조합주의적인 합의체, 즉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국가는 필요할 경우에만 중재하는 체제로 제도화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경영평의회법의 제정으로 독일의 노사공동결정권 전통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1920년대 후반에는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습니다. 1924년 통화 안정 이후 주택건설 사업이 추진되고 1927년 실업보험법이 마련됨으로써, 사회정책에서 일정한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풀브록, 2000: 251).

그러나 산업관계와 사회정책에서 전적으로 진보적인 요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부르주아지는 1923년의 위기를 이용해 8시간 노동을 비롯한 몇몇 합의 사항을 폐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은 중앙노동공동체에서 탈퇴했습니다. 1923년부터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원과 자금, 세력, 신뢰를 상실하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에서 수세에 몰린 노동조합은 사용자들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국가의 개입에 의존해야만 했죠. 그러나 자본가 측은 1923년부터 1918년의 타협을 고수하고 있던 바이마르체제에 대한 공세에 나섰고, 그 공세의 연속선상에서 루르 철강분쟁이라는 공화국 자체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부터는 공화국 초기의 혼돈이 정리되고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프랑스·벨기에가 기존의 국경을 무력으로 변경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을 담았죠. 한편, 배상금 문제는 도스 안(Dawes Plan)으로 잠정적인 해결을 보았어요. 도스 안은 독일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경제적 팽창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습니다. 연간 지불 액수가 과거의 협정과 달리 지불 가능한 한계 내에서 정해졌고, 특히 독일 경제가 회복하는 초기 국면에서는 연간 지불액의 5분의 1만을 독일 국내에서 동원하고, 나머지는 독일에서 ‘착수지금’으로 제공된 해외 차입금에서 동원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겁니다(풀브록, 2000: 247).

이런 상황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개량주의적인 독일 노동조합총연맹(ADGB) 지도부는 경제의 안정화, 경제민주주의, 특히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당면한 사회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에게 설득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어요. 1924년 여름 베를린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대회는 ‘경제부흥’, 도스 안 지지,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지지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1925년 8~9월 브레슬라우에서 열린 독일 노동조합대회에서는 노사대등의 ‘경제회의소’ 운영과 그 속에서의 협력, 자본주의적 합리화 지지 결의가 채택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79~180).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총연맹이 내세운 ‘경제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조직된 자본주의 시대’에는 계획에 의해 자본주의의 모든 ‘어두운 면’(공포, 실업, 빈곤화)이 극복될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경제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사회정책을 의미했던 것으로, 경영상의 공동결정의 성취, 초경영적인 자치기관의 도입, 공영사업, 산업조합, ‘노조의 본질에 맞는 자본주의’ 촉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죠. 이런 주장은 노동조합의 지도 아래에 있는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타도할 것이 아니라 ‘개량’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바른케, 1970: 76, 181).

사회민주당은 공화국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세력 상황 아래에서 최대한 가능한 전진’을 실현하기 위해 책임 있는 결정적인 세력으로 역할을 수행하려 했습니다. 1925년 9월의 사회민주당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 행한 빌헬름 카일(Keil, Wilhelm)의 아래와 같은 연설은 사회민주당의 노선을 선명하게 드러냈죠.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