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2절 새로운 경제정책의 강구(Ⅱ

노동사회

제12장 제2절 새로운 경제정책의 강구(Ⅱ

편집국 0 5,019 2013.05.29 11:55

*****************************************************************************************************
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절 소비에트 공화국의 방위
 제2절 새로운 경제정책의 강구
*****************************************************************************************************


3. 경제의 부흥과 소비에트연방의 창설 

1922년 3월22일부터 4월2일까지에 걸쳐 열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제11회 대회는 신경제정책에 기초한 평화적인 사회주의 건설 1년 동안의 총결산을 수행했습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 정치보고를 통해, 후퇴는 끝나고 목표는 달성되었으며, 농민 경제와의 결합이 확립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은 확고해졌고, 경제적 성과가 눈앞에 보인다고 선언했죠. 

신경제정책은 소비에트 러시아 경제에 실제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었어요. 농민들은 점점 경작 면적을 늘렸고, 1922년의 풍작은 그 전해의 흉작 영향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24년 봄에는 곡물 경작 면적이 전쟁 이전의 80% 정도로 회복되었죠. 또 이 무렵 대규모 산업의 총 산출고는 1921년에 비해 거의 2배였습니다. 기초산업의 생산고는 전쟁 이전 수준의 40%를 넘어섰으며, 석탄 산출은 44%, 석유는 57%였습니다. 또한 ‘고엘로 계획’에 의해 건설된 최초의 발전소가 송전을 개시했으며, 몇 개의 발전소가 건설 중이었죠. 가동 발전소의 총 출력은 123만 킬로와트였는데, 이것은 제정 러시아의 그것을 초과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철강 산업의 부흥은 극히 완만했는데, 1923년의 선철(銑鐵), 조강(粗鋼), 강재(鋼材)의 생산고는 전쟁 이전 수중의 20%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기계제조업의 발전이 제약을 받게 되었죠. 그러나 간단한 농기구와 일반 소비재의 생산은 어지간히 궤도에 올랐습니다. 다만 운수부문에서는 화차 적재량이 1913년 수준의 40%로서 매우 부진했죠.

국민경제의 부흥과 더불어 노동자계급의 양적 성장과 질적 구성에서도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1920년대 초기에는 생산의 집적과 경제계산제로의 이행과 함께 국내전쟁이 남긴 폐해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공장노동자 수는 얼마간 줄었죠. 1920년을 100으로 잡으면 1921년의 공장 노동자 수는 96.9, 1922년의 경우는 92.5였고, 1922~1923년이 되어서야 겨우 117.3이었습니다. 

초기 몇 년 동안에 공장으로 복귀한 사람은 주로 전쟁 중에 기업을 떠났던 숙련노동자들이었어요. 거기에다 붉은 군대로부터 제대한 노동자 50만 명이 공장으로 복귀했습니다. 다른 한편, 근로동원에 의해 공장에서 일했던 임시노동자 수가 감소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질적 구성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했죠.

이런 경제적인 부흥은 대체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적극성과 노동 활동 고양의 결과였습니다. 경제적 부흥기의 최초시기에 노동자 스스로의 발의에 따라 여러 가지 생산적 세포 ―서클, 생산회의, 여타 조직― 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선진적 노동자들은 생산의 관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는 이런 조직에 관여한 노동자는 매우 좁은 범위에 국한 되었고, 실제로 대중적 참가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어요. 차츰 차츰 생산회의 체제가 형성되면서, 회의 참가자 중에는 경험 있는 기간노동자의 수가 우세하게 되었죠. 그들은 공장관리부의 경영보고와 활동보고를 활발히 토의하고 공장 활동의 개선을 위해 자신의 제안을 내놓으며, 생산의 합리화와 노동생산성의 향상, 무단결근의 감소와 제품 단가의 인하, 원료와 연료의 절약 등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했습니다. 

국민경제의 부흥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공업은 농촌에서 증대된 상품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상품가격은 등귀했죠. 반면에 농산물의 경우는 그 양은 증가했으나 가격은 하락했습니다. 공산물과 농산물의 가격차 ―이른바 협상가격(鋏狀價格)― 가 특히 심했던 것은 1923년 가을이었어요. 이 같은 일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판매가격의 인상을 통해 공업 기업의 채산성(採算性)을 높이려는 일부 경영 지도층의 잘못된 방침과, 상업 분야에서 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네프 맨 부르주아지의 부족 상품에 대한 투기적 가격 책정이었죠. 

농민은 필요한 공산품을 손쉽게 구입할 수 없었으며, 공업부문은 상품 판매에 곤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회전자금 문제가 제기되었고, 생산이 축소되었으며, 임금체불 사태가 발생했고 몇몇 기업에서는 노동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공업과 농업 발전에서 생긴 불균형은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결합을 가로막았습니다. 1923년 4월에 열린 제12회 당 대회는 모든 문제를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 강화라는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했어요. 대회는 “국가의 경제부흥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최초의 징후가 존재한다”고 했고, “신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운영의 정확화와 구체화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회는 또 농업은 앞으로도 장기간에 걸쳐 경제의 기반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도시에서의 국유공업, 특히 중공업에서의 국유공업 발전을 위해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중공업이야말로 사회주의 건설의 강고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밝혔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09). 

대회는 또 농민의 생활 상태를 개선하고 국내의 상품 교환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징수 했던 직접국세(식량세, 호주할당금납세, 하역마역)와 직접지방세를 통합하여 단일한 직접 농업세로 이행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대회는 국가에 속하는 주요한 생산수단인 공업과 운수에서 계획원리를 강화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경제적 지도방법을 행정적 방법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죠.

sooya_01.jpg1923년 9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제르진스키(곧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이 되었다)의 보고에 기초하여 파국적인 가격 격차의 극복과 임금지불의 표준화 대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긴급하게 실시할 목적으로 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고스플란의 권리와 기능 확대를 위한 대책, 소비에트 상업의 조정과 협동조합의 강화 ―자발적 가입제 원칙의 부활을 포함하여― 에 관한 대책 등이 세워졌죠. 통화 안정을 위한 화폐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시장의 지배력에 대한 국가 통제와 투기억제가 강화되면서 판매 곤란은 점점 극복되었죠. 이렇게 되면서 공업과 농업은 다시 생산을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제12회 당 대회에서는 경제부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어요. 트로츠키는 일부 기업을 폐쇄하여 공기업을 집중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트로츠키는 대회 직전에도 적자경영을 이유로 프틸로프, 브리안스크, 여타 몇몇 대공장을 폐쇄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당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의 제안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이유를 들어 부결시켰습니다. 

당 내 정세가 복잡한 상황에서 트로츠키와 ‘46인 정강’ 주위에 결합한 이전의 반대파들이 다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당 중앙위원회를 비난하고 당 기관의 관료화를 공격했으며, 신경제정책은 전면적인 퇴각이고 자본주의 궤도로의 전락이라고 했어요. 반대파는 공업화 정책의 실시를 위한 자금 원천을 농민 수탈에서 추구했는데, 이런 방침은 소비에트 권력의 기초인 노동자계급과 근로농민의 동맹을 불가피하게 깨뜨리게 될 것이 분명했죠.

이 논쟁의 총괄은 1924년 1월에 개최된 제13회 당 협의회에서 수행되었어요. 이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 파의 반당 행위를 비난하고 “현재의 반대파는 볼셰비즘을 수정하려는 시도이고 레닌주의로부터의 명백한 이탈일 뿐만 아니라 분명한 프티부르주아적 편향이다”라고 밝혔습니다(황인평, 1986 Ⅲ: 193).

한편, 경제부흥과 활성화를 위한 당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치적·경제적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방책 강구였습니다. 현실은 관계 정상화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적 곤란을 이용하려 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내정 개입과 권력 타도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죠. 무엇보다 먼저 프랑스 정부와 미국 정부가 차르 시대의 부채 인정을 요구했습니다. 대화의 시작을 바랐던 소비에트 정부는 일정한 양보를 하겠다는 데 동의했죠.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미 1921년 3월16일 영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했고, 같은 해 5월6일에는 독일과, 12월2일에는 노르웨이와, 12월7일에는 오스트리아와, 1922년 5월9일에는 스웨덴과, 6월5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각각 잠정 통상협정을 맺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10월28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 정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각서를 발송했어요. “소비에트 정부는 어떤 국민도 수세기에 걸쳐 짊어지고 온 족쇄의 대가를 지불할 의무는 없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그러나 다른 열강들과 완전한 협정을 맺으려는 확고한 결의를 지닌 러시아 정부는 몇 가지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양보를 할 용의가 있다.” 

각서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열강이 소비에트 정부 측의 ‘반대 요구’를 수용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완전하게 승인한다면, 차르 정부의 전쟁 이전 채무를 인정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때문에 국제회의 소집이 제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각서는 이 밖에도 소비에트 정부가 “사적 상업, 소기업의 사적 소유, 이권 및 대기업 임차 권리를 부활한다”는 것과, “외국 자본에 대해 법률상의 보장과 이윤의 상당 부분을 제공하고 …… 모든 국가와 경제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 한다”고 천명했죠. 

1922년 1월 드디어 칸에 모인 협상국 대표들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협상국 수뇌들이 참가하는 경제·재정 회의를 열 것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에 협상국 말고도 소비에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대표도 초청하기로 했죠. 협상국들은 경제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유럽의 경제부흥을 촉진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패전국 독일까지도 포함한 전 유럽 국가들의 경제·재정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게 된 겁니다. 

이 회의 소집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어느 국가도 별도의 소유제도, 국내 경제제도, 통치제도를 다른 국가에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와 공산주의적 소유제도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을 의미했죠.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제노바 회의 개최를 환영하고 레닌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임명했으나, 뒤에 레닌은 전권을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에게 위임했습니다.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 대표들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 하도록 러시아 공화국에 위임했습니다. 

sooya_02.jpg1922년 4월10일 제노바 회의 제1회 전체회의에서 치체린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어요. “러시아 대표단은 공산주의의 원칙적 관점을 현재에도 고수하고 있지만, 구 사회체제와 신 사회체제 사이의 공존이 가능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이 두 개의 체제를 대표하는 여러 국가 사이의 경제협력이 전반적 경제부흥에서 필수 불가결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 한다”(황인평, 1986 Ⅲ: 158~159).

그는 또, “러시아 정부는 세계경제와 그 생산력 발전의 요구에 응답하여 의식적으로 또 자주적으로 국제횡단철도를 위해 국경을 개방할 것이며, 수백만 데샤티나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삼림자원, 탄전과 광산을 이권개발에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습니다. 그리고 소비에트 대표단은 차르 정부 및 임시정부의 채무 지불과 그 이자 지불에 관한 요구와 기업 국유화에 의한 외국 기업가의 손실 보전 요구(통틀어 180억 금 루블)에 대해 반대요구를 제기했습니다. 외국의 군사간섭과 경제봉쇄에 의해 소비에트 공화국이 입은 손실은 문서자료상으로도 총 390억 금 루블이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13).

협상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력할 것을 원치 않았어요. 러시아 공화국 대표단은 협상국 측의 요구를 거절하고, 4월6일 라팔로(제노바의 교외에 위치함)에서 독일과의 조약에 조인했습니다. 양국의 외교관계와 통상관계가 부활된 것입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각각 상대국에 대한 청구권, 즉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주어졌던 배상청구권, 구 채무의 지불, 국유화된 재산의 보상을 차례로 폐기했습니다. 양국은 군사지출과 손실의 보전, 기타 일체의 요구를 서로 방기했죠. 라팔로 조약의 체결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는 경제적·정치적 봉쇄를 돌파하게 되었고, 독일은 전후 최초로 동등한 권리에 기초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라팔로 조약 조인은 협상국가들에 대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노바 회의에서는 별다른 성과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22년 6월15일부터 7월26일 사이에 헤이그에서 경제전문가 회의가 열렸어요. 이 회의에서도 국유화된 재산의 반환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결론 없이 끝났죠.

1922년에는 독립을 위해 싸우던 터키와 영국의 지원을 받았던 그리스 사이의 전쟁이 터키의 승리로 끝났어요.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로잔에서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자본주의 열강들은 해협문제만 심의한다는 조건으로 참가대상 가운데 소비에트 러시아를 초청했죠. 소비에트 정부는 해협에 대한 터키의 주권, 터키 군함을 제외한 모든 군함의 해협 통과 금지, 통상 및 항해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했어요. 그러나 로잔 회의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항의를 무시하고 해협과 흑해에서 모든 군함의 행동 자유가 보장된다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열강들은 자신들의 무력 병력을 소비에트의 남부 국경으로 보낼 통로를 유지한 것이죠(황인평, 1986 Ⅲ: 161~162).

1923년 들어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적 행동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유럽 열강들 사이의 모순이 증대되고 루르 분쟁이 발발한 가운데 새로운 유럽 전쟁의 위협이 커진 상황 하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압력이 가해졌죠. 1923년 5월 일 영국 외상 카즌은 영국 스파이 사살과 다른 공작원의 체포에 대한 보상과 ‘반영(反英) 선전’을 행한 소비에트 대사를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소환할 것을 최후통첩 형식으로 요구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분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 회의를 제안했죠. 그러나 회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대외무역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요. 1922년에는 러시아 공화국은 18개국과 무역관계를 갖게 되었고, 1923년에는 그것이 23개 국가로 증가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영국, 독일, 발트 해 연안 국가, 네덜란드, 터키였죠.

소비에트 러시아가 당면한 여러 가지 경제적·정치적 과제 ―생산력의 부흥, 방위력의 강화, 주권의 옹호, 자본주의 세계와의 대외관계와 통상관계의 확대, 노동자의 생활조건 개선 등― 의 총체는 러시아의 모든 민족,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성하는 민족 공화국의 협력 강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습니다.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자원의 통합과 노동자계급의 공동 투쟁이 요구되었죠.

다민족적 연방인 러시아 공화국은 국제주의, 민족적 동등권, 후진적 민족에 대한 원조 등의 원칙을 견지해왔어요. 1919년부터 1922년에 이르는 기간에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공화국’ 구성 내에서 새로운 자치공화국(바슈키르, 타타르, 카렐리아, 키르기스, 산악지방, 다게스탄, 크리미아)과 자치주(추바시야, 보챠그, 마리, 칼마크, 코미, 브리아트-몽골,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야쿠트, 오리오트, 체첸, 카라차미체르게시아)의 창설이 이어졌습니다.

한편, 러시아 공화국은 독립한 소비에트 공화국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과 밀접한 군사적?정치적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붉은 군대의 지지를 얻어 반봉건?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한 결과, 1920년 2월 히바 한국(汗國)의 영토에 호레즘(Khorezm) 인민공화국이 탄생했죠. 10월에는 부하라 인민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는데, 이 국가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의 이행단계에 있었습니다. 이들 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과의 사이에 동맹조약이나 군사적·정치적 협정 또는 경제적 협정을 맺었습니다.

1920년에는 자카프카지예(영어로는 트랜스코카시아=Transcaucasia)가 해방되었어요. 4월에는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벌인 끝에 아제르바이잔의 무사바티스트 정부가 타도되고, 독립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1920년 11월에는 아르메니아에서 봉기가 일어나 다쉬낙 정부가 물러나고 소비에트로 권력이 이행했죠. 그루지야의 멘셰비키 정부는 비교적 오래 유지되었으나, 1921년 2월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지를 받은 인민봉기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은 국가적 통합을 열망하는 소비에트 민족들의 의지를 구체화했습니다. 국가적 통합과 그 형식에 관한 문제가 당 중앙위원회에서 전면적으로 검토되고 심의되었죠. 그 결과 1922년 10월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채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프카즈 공화국 연방으로 통합하고, 각각의 공화국에게 ‘연방’에서의 탈퇴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권리를 전제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1922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의 각 공산당은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에로의 통합에 찬성했습니다. 1922년 12월에는 모든 공화국에서 일제히 개최된 소비에트 대회가 민중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소비에트 연방 수립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고요(황인평, 1986 Ⅲ: 163~164).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출범할 때의 구성체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몰다비아, 키르기스, 타지크, 아르메니아, 투르크멘, 그루지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15개 공화국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 있는 많은 소수민족에게는 공화국 안에서 자치가 허용되었는데, 연방에는 20개의 자치공화국,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관구가 있었죠. 

sooya_03.jpg

[  1922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설립 당시의 지도 ]

1922년 12월30일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연방 제1회 소비에트대회가 열렸어요. 대회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수립에 관한 선언과 연방조약을 채택하고, 최고입법기관인 소비에트 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죠. 중앙집행위원회 제2회기 중에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가 설립되고, 그 의장에 레닌이 추대되었습니다. 또한 1924년 제2회 소비에트 대회는 최초의 소비에트 연방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sooya_04.jpg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창설을 두고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어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형성은 레닌주의와 공산당의 레닌적 민족정책의 승리였다.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와 민족의 불평등을 없애는 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여러 민족들을 단일한 형제적 공동체로 통합하는 길이 전 세계의 진보적 인류의 눈앞에 제기되었던 것이다”(황인평, 1986 Ⅲ: 165).

소비에트 공화국이 경제부흥과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소비에트 공화국의 결합을 진행하는 가운데 1922년 11월에는 사회주의 혁명 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무렵 레닌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어요. 레닌은 11월20일 모스크바 소비에트 본회의에서 연설했다. 이것은 레닌이 공식 석상에서 행한 최후의 연설이었죠. 레닌은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을 이룩했다”면서, “신경제정책의 러시아는 사회주의의 러시아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레닌은 1922년 12월부터 1923년 3월까지에 걸쳐 최후의 논문, 「일기 몇 페이지」, 「협동조합에 대하여」, 「우리는 노·농 감독국을 어떻게 재편해야하는가」, 「우리 혁명에 대하여」, 「양은 적더라도 질이 좋은 것을」과, 서한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국가계획위원회에 입법기능을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민족문제 또는 자치공화국 문제에 대해」를 구술했습니다. 이들 논문과 서한은 당과 세계 사회주의운동에 레닌이 남긴 일종의 정치적 유언이었죠. 

레닌은 10월 혁명 이후에 쓴 논문과 서한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계획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것을 발전시켰습니다. 레닌이 설정한 사회주의 건설계획의 기본명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황인평, 1986 Ⅲ: 175~177).

※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계획 기본명제

첫째, 소비에트 국가에는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그리고 충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둘째, 노동자계급은 근로농민을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시켜 근로농민의 산재(散在)한 개인경영을 대규모 공동경영으로 개조하는 사업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농민을 사회주의 건설과 결합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협동조합이다.
셋째, 사회주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문화혁명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문화혁명의 목적은 소비에트 사회 속에 사회주의 문화와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심는 것이다. 
넷째,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조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끊임없이 강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째, 사회주의 건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의 변치 않는 우호관계가 실현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여섯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 자본주의세계에서의 계급적 모순과 국가 간의 모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투쟁의 격화,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 등이 그 근거이다.
일곱째, 당과 소비에트 정부는 극히 현명한 대외정책을 구사하여 부르주아 국가들과의 군사적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를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평화공존, 경제경쟁을 위한 집요한 투쟁이야말로 당의 일관된 정책이 되어야 한다.
여덟째, 사회주의 건설의 지도력은 공산당이다.
이것이 레닌이 제시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계획의 기본 명제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배영수, 2000, 『서양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이인호, 1991, 「러시아 혁명과 노동자」서울대학교 서양사연구회, 『서양사 연구, 12권』.
황인평, 1986, 『볼셰비키와 러시아 혁명 Ⅲ』, 거름.
레닌, 백승욱 편·해설, 1991, 『신경제정책론』, 새길.
오사카시립대학 경제연구소, 1965, 『경제학사전』, 岩波書店.
Deutscher Isaac, 2003, The Prophet Armed, 김종철 옮김, 2005,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Trotsky, Leon, 2007, Terrorism and Communism, 노승영 옮김, 2009,『테러리즘과 공산주의』, 프레시안북.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nal Working-Class Movement, 1984,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roblems of History and Theory, volume 4, -Progress Publishers Moscow.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