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만 판다고 밭이 되나요!

노동사회

땅만 판다고 밭이 되나요!

편집국 0 2,899 2013.05.29 11:40

10년 만에 전화가 왔다. 

“전수경 동지?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죠?”로 시작한 통화는, “애는 몇인가요? 놀러오세요.” 로 이어지며 안부를 묻는다. 어색함은 날아가고 반가움이 더해가는 순간, 말이 빨라진다.

“노조 선거가 있어요. 공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자료 부탁도 하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요.”

조합원들에게 과로사 문제에 대한 공약을 하려고 하는데, 의학적으로 OO수술을 지원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려고 한다, 괜찮은 방안인지 의사들한테 묻고 싶다, 는 것이 전화를 한 진짜 이유란다. 

질문을 듣는 순간 바로 뇌로 피가 몰리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냐고?

10년 만에 반가운 목소리 듣고 머리에 피가 솟은 이유

전화를 한 이는 자동차사업장에서 활동하는 분이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경찰의 곤봉을 피해 지붕을 날아다니고, 두 달 만에 제 발로 걸어 나와 경찰서행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던 그 때, 이 전화가 온 것이다.  

아, “해고는 죽음”이라고, “노동시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자”던 절규가 헬기소리에 파묻히던 그 시간, 저 쪽에서는 노조 선거를 준비하며 과로사 방지 공약을 묻고 있다. 미쳤어. 미친 게 틀림없어. 

나를 향해서인지, 누구를 향해서인지, 허공에다 대고 욕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같이 살 수 없나, 같이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정녕…? 체제가, 불안이, 욕망이 우리를 갈가리 찢어놓았다고 말해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10년 만에 걸려온 그 전화 이후로, 그 사업장의 다른 분도 전화를 해 왔다. 전화는 여러 번 왔지만 받을 맘이 나지 않았다. 

그 분들은 10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노조활동도 하고, 현장에서 일도 하고, 현장 조직활동도 하고, 바쁘게들 지내셨겠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저 질문은 도대체 뭔가 말이다.

“OO수술 지원”을 공약으로 낼 수 있는 돈이면, 그 회사에 넘쳐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건강검진 지원도 할 수 있고, 작업복, 안전화, 안전모, 마스크라도 제대로 된 것을 지급해줄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물론 그 선거에 나가는 분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살기 위한 전향적인 공약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과로사를 줄이기 위한 노동조합의 접근이 수술지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누구와 같이 살아야 하는가를 외면한 채 노조운동에 대한 변화의 압력을 받아 넘겼던 것인가? 일단 내가 몸담은 조직은 끼리끼리 가는 길 간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공장 노동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애쓰는 노조들의 모범적 사례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전체에서는 너무 작다. 큰 판을 흔들어야 노동운동을 함부로 말하지 못할 터인데.

삶에 관심 없는 운동권, 화가 난다!

한 시사주간지 기자가 안산의 난로 공장에 파견직으로 취업하여 한 달을 일하면서 쓴 수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재미’라는 게 글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제조업에도 인력파견업이 대중화(?)된 요즘, 노조를 통하거나 직접 현장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그 실상을 알기가 쉽지 않은데, 눈앞에서 공장라인이 돌아가는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놓은 재미이다. 

사무실에서 그 기사를 화제에 올리니, “한 달 일해서 뭘 제대로 알겠어. 공장 안에서 얘기나 제대로 해 봤겠어?”라며 단칼에 잘렸다. 읽어봤냐고 했더니 책상에 굴러다니는데 표지만 보고 안 봤다고 한다. 

화가 난다. 사실은 이미 화병에 걸렸다. 사무실에 서너 종류의 신문과 시사주간지가 거르는 날 없이 배달되건만, 읽는 이가 거의 없다. 조금 안다 싶은 문제가 표지로 등장하면 아는 거라고 안 읽고, 우리 활동과 연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가 다뤄지면 연관이 없다고 안 읽는다. 

인터넷 좀 한다는 이들이라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넘어갈 ‘2PM’의 재범 이야기를 꺼냈다가 철퇴를 맞은 적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끼어들어야 운동권도 나중에 사회 일원으로 보호받지 않을까?” 이렇게 말해보았다. 육중한 해머가 바로 머리를 쿵 때린다. 

“어차피 운동권은 사회에서 버림받았는데 뭘.” 
‘운동은 왜 하니? 그냥 토굴이나 파지…….’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했다. 내가 화병에 걸린 이유다. 속으로만 욕을 하니, 그 욕이 다 나한테로 온다. 

꽃을 피우자, 결실을 보자, 머리를 쓰자, 삶을 사랑하자 

사실, 누구를 흉볼 처지는 아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또는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그렇지만 땅만 판다고 어디나 밭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땅이 밭이 될 만한가, 튼실한 열매를 맺어줄 밭이 될 것인가, 흙의 성분도 분석해보고, 호미는 있는지, 쇠스랑에 이는 빠지지 않았는지 점검도 해봐야 할 터이다. 

할 줄 아는 것은 삽질뿐이니 일단 파놓고 보자는 얘기는 이제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도 있고, 토론하는 능력도 있다. 이 능력이 더 퇴화되기 전에 어서어서 써먹을 일이다. 

저 경복궁 뒤에 사시는 분도 삽질만 좋아하시는 분인 줄 알았더니 내놓는 상품마다 꽤 팔리는 것이, 나날이 ‘발전’하고 계시지 않나. 요분이 최근에 가장 히트 친 ‘개각’이라는 상품을 뉴스에서 요란하게 점검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적잖이 속이 쓰리다.    

참 난감하다. 어제까지 좋아한다고 눈길 주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기로 했단다. “착각은 자유”라고 희희낙락하는 사람을 붙잡고,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떼를 쓰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내 돈 내고 구경해야 하는 처지에서 참으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식품영양과 여성문제를 연결하겠다는 고차원적 목적으로 찾아낸 분인 줄 알았더니, 어라, 부동산 사고팔면서 쇠똥구리 쇠똥 뭉치듯이 술술 재산불리는 비기를 전수하려는 분이다. 부자들의 부동산 치부 방식을 실증적으로 전수해 줄 분으로 보인다. 빈혈인가, 이래저래 어지럼증이 더하는 요즘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