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제3, 4회 대회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문제(Ⅰ)

노동사회

코민테른 제3, 4회 대회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문제(Ⅰ)

편집국 0 7,022 2013.05.29 11:37

*****************************************************************************************************
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제2절  코민테른 제3, 4회 대회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문제

※ 지난 연재분은 연구소 홈페이지(
www.klsi.or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코민테른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계급 다수에 대한 우세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중요 계층을 투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상황이 혁명적인데도 …… 대다수 노동자들이 여전히 공산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코민테른 제3회 대회 결의안.


1. 노동운동의 대내외적 정세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20년대 들어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이제 힘겨운 방위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더욱이 이런 투쟁은 1920년과 1921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들을 덮친 경제공황의 어려운 조건하에서 이루어졌어요.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리고, 일하는 노동자들도 임금을 깎이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노동대중들이 그 동안 쟁취했던 정치·경제·사회적 성과들은 축소되거나 폐지되었습니다. 자본의 공세와 함께 정치적 반동이 강화된 거죠. 몇몇 국가에서는 파시스트가 대두했으며,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테러리스트 단체나 파업 파괴단이 노동자계급이 벌이는 투쟁에 대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전개된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의 경우, 패배로 끝나고 말았죠. 노동운동과 혁명투쟁이 쇠퇴와 침체로 접어든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자본가들은 직접적 탄압이나 테러 정책과 함께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적인 양보정책을 교묘하게 활용했어요. 여기에 발맞추어 사회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적극성은 감퇴되었습니다.

이 시기 부르주아지의 힘과 포섭역량, 사회개량주의자들의 사상적·조직적 영향력, 대중의 정치적 미성숙과 노동대중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편견과 환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소박한 신뢰, 혁명적 정당의 약세와 경험 부족 등의 원인들로 말미암아 노동대중의 상당한 부류는 개량주의자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실제로 1921년 당시 사회민주당이나 사회주의당이 약 800만 명의 당원을 포괄했던 데 비해, 개량주의 경향의 국제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rade Unions =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은 약 2,200만 명을 포괄하고 있었죠(김성윤, 1986, Ⅰ: 120). 

사회민주당 우파 지도자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계급평화’나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성장 이행’을 주창했습니다. 제임스 토마스는 “노동자계급의 힘도 투표함을 통하여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투표용지는 탄환보다도 강하며, 그것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sooya_01.jpg합법적 정치가 일정한 공간을 확보함에 따라 연합국 사회주의 정당들이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26개국으로부터 102명의 대표가 참가했어요. 카우츠키를 비롯한 중앙파에 속한 사람들도 참가했죠. 제2인터내셔널은 주로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사회주의 정당에 기반을 두게 되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 측에 돌리고,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와해된 것을 비난했으며, 연합국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기구였던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승인했습니다(Foster, 1956: 265~266). 

한편,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서 혁명 지향 노동자들을 탈퇴시켜 독자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설립하도록 부추김으로써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기존 노동조합을 탈퇴한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런 노조들은 혁명 지향 노선을 내걸었으나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에 남아있던 광범한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죠.

또 다른 분파인 중앙파의 지도자들은 혁명적 노선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개량주의적이고 분열주의적인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양태를 보였죠. 1920년 12월과 1921년 2월에 중앙파에 속하는 각 당이 오스트리아의 베른과 빈에서 열린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 국제활동연합’(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을 결성했어요. ‘빈연합’ 또는 ‘제2.5 인터내셔널’(Tow―and―a―Half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체코 사회민주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발칸 반도의 모든 사회민주당 그룹 등을 규합했죠. 1919년 여름에는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스위스 사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의 러시아 비(非)볼셰비키파, 영국의 독립노동당 등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1919~1920년 사이에는 양 진영 사이에서 일관되게 독립성을 유지했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발휘했죠. 

레닌은 이를 두고, “제2반 인터내셔널의 신사 여러분은 혁명가라 자칭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나면 언제라도 반혁명적으로 행동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래의 국가기구를 힘으로 깨뜨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며,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김성윤, 1986 Ⅰ: 122).

이처럼 사회개량주의와 ‘좌파’ 공산주의, 중앙파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 등의 분열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각국에서는 운동의 새로운 고양을 위한 다양한 모색이 진행되었죠.

sooya_02.jpg
[ 독일 통일공산당 모임의 클라라 체트칸과 윌리엄 피크 ]

새로운 당의 창립

독일에서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 세력이 주도하여 1920년 10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과 독일 공산당과의 합당에 찬성하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우파 세력은 대회에서 퇴장하여 당을 분할했죠. 독립사회민주당 좌파 세력은 1921년 2월 베를린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공산당(VKPD)을 창립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1920년 12월에 사회당 대회가 투르에서 열렸는데, 대회는 코민테른 가맹을 결정했습니다. 비합법적으로 투르 대회에 참석한 클라라 체트킨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를 대표하여 혁명적 계급투쟁을 주장함과 아울러 전위당 창설을 호소했죠. 당은 설립 당초부터 대중적인 정당이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해 광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몇몇 농민지구에도 견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코민테른의 지도방침을 실행할만한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어요. 당 내부에는 사상적·조직적 통일도, 강고한 정치적 규율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죠. 1921년 1월 리보르노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중앙파 그룹이 사회개량주의자와 연합하여 당의 혁신을 거부하자, 혁명 지향 그룹이 퇴장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많은 혁명 지향 노동자들이 사회당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도 구심조차 확립하지 못한 공산당은 파시즘의 공세 아래서 어려운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죠.

루마니아 사회당은 1921년 5월8일 당 대회를 열어 코민테른 가맹과 공산당으로의 당명 개칭을 결정했습니다. 대회에 참가했던 상당수 대의원들이 체포되고 투옥당하는 탄압을 당했죠. 이런 상황에서도 당은 존속하여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좌파)은 1921년 5월 당 대회를 열어 루마니아 사회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코민테른 가입과 공산당으로의 당명 개칭을 결정했습니다. 공산당은 대중정당으로 출발하였고, 창립 때의 당원 수는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공산당에 버금갈 정도였죠.

같은 해 중국, 남아프리카, 벨기에, 캐나다, 룩셈부르크, 스위스, 팔레스타인, 포르트갈, 뉴질랜드에서 공산당이 설립되었어요. 1922년에는 브라질, 일본, 칠레에서 공산당이 창립되었으며, 1923년에는 노르웨이에서 공산당이 창설되었죠. 각국에서 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혁명적 노선이 널리 채택되고 있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운동 노선의 큰 전환을 단적으로 나타냈습니다(김성윤, 1986 Ⅰ: 125~127). 

sooya_09.gif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 형태는 이미 존재했지만, 막 출범한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이 힘겨운 방위투쟁을 벌여야 할 상황에서 새로운 임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인민대중의 당면 요구나 그들의 경제적 요구를 옹호하는 일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적 자유와 지난날 노동자계급이 쟁취했던 사회·경제적 성과를 지키고 확대하는 일, 새로운 전쟁 위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국가를 옹호하는 일, 혁명 지향 활동을 지원하고 주도하는 일 따위가 바로 그런 임무였죠. 

그러나 신생 공산당은 조직역량도 취약했고 대중활동의 능력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 능력도 취약했어요. 말하자면 당은 아직 잘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고, 잘 훈련되지도 않았던 거죠. 그래서 당은 더없이 신중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점검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경험을 검토하면서, 당원을 적절한 방식으로 훈련하고 조직하여 모든 행동과 다양한 형태의 투쟁에서 공격작전과 후퇴작전을 통해 단련시켜야만 했습니다. 

기본적 임무로서의 ‘대중획득’을 둘러싼 논쟁

독일의 경우, 당이 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결속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1921년 초 독일 공산당은 인민대중 속에서 한층 더 폭넓은 활동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전환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행동통일을 위해서 당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경제적 요구와 민주주의적 권리 및 자유의 옹호·확대에 관한 요구를 전면적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조직 내에서 체계적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대중 동원을 위해 의회 연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김성윤, 1986 Ⅰ: 129).

1921년 1월7일 독일 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독일의 모든 노동자 조직(독일 노동총연맹, 자유직원조합연맹, 일반노동자연맹, 자유노동자연맹 = 생디칼리스트 조직) 앞으로 「공개장」을 발표하고, 거기서 노동자와 노동대중의 긴요한 요구를 위해 반동 공세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전개를 호소했어요. 이 공개장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최초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죠(동녁 편집부, 1989 3: 63~65).

공개장은 “자본주의 해체의 진행, 개시된 세계공황이 독일의 특수한 공황에 미치는 반작용, 화폐가치의 계속적 저하, 독일에서 역시 높아가고 있는 모든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가격 등귀, 실업의 증대, 광범한 대중의 빈곤화 등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방위에 나설 것, 즉 그들이 공업프롤레타리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 점차 자기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자각해 가는 모든 층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공개장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조직에 대해 당면한 주요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즉각 행동을 벌일 것을 제의했습니다. 임금·연금·은급·실업자의 급료 인상, 모든 임금생활자와 하급 봉급생활자에 대한 식료품 공급, 빈집의 징발과 노동자 주택조건 개선, 보유 원료와 석탄 그리고 비료의 경영평의회 관리, 생필품을 생산하는 유휴경영의 조업재개, 농장평의회와 소농평의회의 모든 농산물 경작·수확·판매 관리 등이 공동투쟁을 위한 요구 조건이었죠.

또 모든 부르주아적 자위단의 무장해제와 해산,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결성, 정치범과 생활 곤궁으로 인한 범죄인의 석방 및 사면, 파업 금지령 폐지, 소비에트 러시아와 통상·외교관계의 즉시 수립을 위해 공동행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 문서의 발표는 독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독일 내의 많은 도시나 공업중심지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렸고, 노동자들은 공개장의 제안을 수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독립파’,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죠. 또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같은 ‘극좌파’도 공개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sooya_03.jpg한편, 「공개장」은 국제적으로 관심을 크게 집중시켰으며, 이를 둘러싸고 코민테른 내에서도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지노비예프와 집행위원 부하린이 ‘좌파’의 견해를 옹호하여 공개장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1921년 2월22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독일 통일공산당의 전술이 토의되었을 때, 지노비예프는 공개장을 인위적인 조작물이라고 평가하면서, 거기서 제안된 전술은 전혀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부하린은 공개장을 “비혁명적인 행위”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독일 통일공산당이 당의 혁명적 정책에 대치시켜 노동대중의 일상적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참된 투쟁을 방기하고 인위적인 수단에 매달려 제멋대로 공상을 하고 있다고 했죠(김성윤, 1989 Ⅰ: 131).

이와는 반대로 레닌은 「공개장」을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올바른 시도라고 평가하고,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획득하는 실천적 방법의 최초 행위로서 모범적이다”라면서, 「공개장」의 제안을 적극 지지했어요. 레닌이 「공개장」을 옹호하고 ‘좌파’ 분파주의에 반대했던 것은, ‘좌파’가 내놓았던 분파주의적·모험주의적 방침이 위험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죠.

‘좌파’는 노동자계급의 결집을 목표로 하는 투쟁전술에 반대하여 이른바 ‘공세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산당은 항상 공세적인 전술을 취해야 하고, 객관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어떤 경우에도 무장공세로 전환하여 전위전(前衛戰)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은 당시 독일,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정한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죠. 이 공세이론은 코민테른 제3회 준비과정에서 격렬한 토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2. 코민테른 제3회 대회와 노동자통일전선

대회에서 제기된 전술문제


1921년 6월22일부터 7월12일까지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3회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회에는 52개국의 103개 조직을 대표하여 605명(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사람은 291명)이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48개국의 공산당과 8개의 사회당, 그리고 28개의 청년동맹 대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IKKI)의 자료에 따르면, 공산당에 입당한 당원은 220만 명으로서, 그 가운데 150만 명은 자본주의 국가의 당에 속해 있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34~535). 

대회에서 토의된 중심 의제는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관한 것이었어요. 이 밖에도 코민테른의 전술 문제, 코민테른과 지부들의 조직건설 문제, 노동조합·협동조합·청년운동·여성운동과 관련한 사항, 기타 테제와 보고 사항에 대한 토의 등이 의사일정에 올라 있었죠.
대회는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봉기, 불확실한 투쟁방법과 목표, 그리고 지배계급의 극단적인 혼돈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전후 혁명운동의 제1기가 대체로 종료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또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자신감과 그 국가기관의 외견상 안정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강화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대회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연한 혁명투쟁이 세계적 차원에서 정체되었고, 그 속도가 완만해진 것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회는 부르주아지의 공세와 혁명운동의 퇴각 국면을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죠.

대회는 이런 정세 하에서 자본주의 세계의 당이 수행해야 임무를,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 방위투쟁을 지도·확대·강화·통합하여 ―사태의 발전에 따라― 그것을 결정적인 정치투쟁의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키는 것”이라 설정했습니다. 

sooya_04.jpg 레닌과 그를 지지했던 체트킨, 쿠시넨, 콜라로프, 슈메랄, 자크모트, 마이너 등 각국의 지도자들은 국제적 변혁운동의 현상과 임무에 관한 결정들을 대회에서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침을 관철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 이유는 대의원의 상당한 부분이 ‘공세이론’을 대회에서 통과시켜, 그것을 당 활동의 기초로 삼으려 시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노비예프를 비롯한 이탈리아 공산당의 젠너리, 테라치니와 독일 공산당의 헥케르트, 케넨, 헝가리 공산당의 라코시 등의 ‘좌파’ 그룹은 중앙주의 분파와 반(半)중앙주의 분파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고 그들을 당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죠. 

이런 움직임에 대해 레닌은 7월1일 대회 회의에서 코민테른의 전술적 원칙 확립을 강조하면서 ‘좌파’ 기회주의에 대해 경고했어요. 그는 “만일 이런 오류에 대해, 이런 ‘좌파적’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대회가 단호히 공세로 나가지 않는다면, 전 운동은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또한 레닌은 광범한 대중 획득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대중’ 개념 자체도 투쟁의 성격과 수준에 따라 변화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투쟁의 초기에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가 수천 명만 있어도 대중으로 일컬을 수 있지만, 혁명이 시작된 경우에는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죠. 그는 “대중이라는 개념은 변하여 다수자를 가리키게 된다. 그것도 단순히 노동자의 다수자만이 아니라 모든 피착취자의 다수자를 말한다”고 밝혔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39). 

대회는 ‘좌파’ 대의원들의 ‘공세이론’ 제기에 따른 격렬한 논쟁을 거친 뒤, ‘전술에 관한 테제’를 채택했습니다. 대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체적인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당면 임무로서 제기하는 동시에, 그 같은 요구 전체의 실현은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며, 권력 획득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계급 투쟁의 한 단계가 된다는 방침을 표명했습니다. 또 테제는 “대중의 모든 필요를 혁명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한 의의를 처음으로 제기했죠. 테제는 노동자계급의 다수에 대한 압도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노동자대중의 투쟁에 참가하여 변혁 사상의 정신으로 이 투쟁을 지도하고 투쟁 속에서 단련된 거대하고 혁명적·대중적 당을 건설하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밝혔습니다. 즉 ‘공세이론’을 거부하고 독일 통일공산당의 「공개장」제안을 지지한 것이죠(김성윤, 1986 Ⅰ: 148~149).

코민테른 제3회 대회는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의 제창과 함께 자본의 공세에 대항하는 광범한 일반 민주주의적 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반(半)프롤레타리아적 또는 프티 부르주아적 인민층, 이 밖에도 프티 부르주아지, 사무직 노동자, 지식인층 등을 투쟁 대열에 끌어 들인다는 임무를 제기했습니다.

대회에서 레닌의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보고」가 있었는데,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에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가지는 국제적 의의를 설명했죠. 「보고」에서 레닌은 특히 ‘신경제정책’(NEP)의 특징을 밝혔어요. 네프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경제정책이고, 그것은 농업의 개조와 함께 공업의 전면적인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죠. 그는 소생산 분야에서 일정한 상업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상품·화폐관계의 기구를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노동자와 농민, 공업과 농업의 경제적 결합에 바탕을 두고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보하며, 종국적으로 착취계급을 철폐하는 것이 기본임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고 원칙으로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계급 사이의 경제적 동맹이 발전하고 강화되는 것은 합법칙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로핀테른의 창립

코민테른 제3회 대회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여성단체, 청년단체 내에서의 당 활동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1921년 7월3일, 3회 대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산업별 노동조합의 제1회 국제대회가 열렸어요. 이 대회에는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41개국 노동자 1,700만 명을 대표하는 380명의 대의원이 참가했습니다. 이 대회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을 창립했죠. 

규약에 명시된 프로핀테른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Foster, 1956: 274).

*****************************************************************************************************
⑴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억압과 착취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며,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의 광범한 노동자대중을 조직하는 것.
⑵ 자본주의 제도와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 혁명적 계급투쟁, 사회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적 대중행동의 원칙들을 널리 선전하고 선동하는 것.
⑶ 세계노동운동의 핵심부분을 갉아먹는, 타협이라는 부패병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계급협조와 사회적 평화 아이디어에 반대하여 투쟁하며,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에 관한 터무니없는 희망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
⑷ 세계노동조합운동의 혁명적 계급 요소를 통일하고 국제연맹에 부속되어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에 반대하며, 강령과 전술에서 세계 부르주아지의 방파제에 지나지 않은 암스테르담 노동조합 인터내셔널(국제노동조합연맹)에 반대하여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 
*****************************************************************************************************


레닌은 이 대회에 보내는 격려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어요. “노동조합 국제대회의 중요성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노동조합원들을 획득하는 것은 전 세계 모든 나라 어디에서도 억누를 수 없는 기세로 전진하고 있다. 각국의 특수성에 따라 불규칙하고 불균등하게 무수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밟고 있기는 하지만, 억누를 수 없게 전진하고 있다. 오늘의 국제노동조합대회는 이 전진의 속도를 빠르게 할 것이다. …… 세계의 어떤 세력도 자본주의의 붕괴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김성윤, 1986 Ⅰ: 157~158) 

노동조합 대회는 코민테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갖기로 결정하였으며, 기존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을 깨뜨리지 말고 그것을 획득하자. 즉 기존 노동조합에 소속해 있는 수백만 명의 대중을 획득하자. 이것이 혁명적 투쟁에서 내세워야 할 슬로건이다”라고 결의했습니다. 

대회는 프로핀테른의 중앙평의회를 선출했습니다. 사무총장에는 로조프스키가 선출되었어요. 프로핀테른은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옹호하고 자본의 공세와 파시즘 및 제국주의 위험에 반대하며, 소비에트 국가 노동자계급과의 관계를 긴밀히 함과 동시에 노동조합 통일의 확립을 강조했습니다. 코민테른 대회는 ‘특별 테제’를 통해 프로핀테른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46~547). 

코민테른 제3회 대회 기간에 프로핀테른의 창립 외에도, 7월9일부터 23일까지에 걸쳐 제2회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렸으며, 대회 직전인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여성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또 대회는 협동조합 내에서의 당 활동에 대한 테제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통일전선 전술

코민테른 제3회 대회에서 결정된 노동자 통일전선의 실시, 즉 “대중 속으로!”라는 전술의 실행을 위해,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모든 노동대중의 국제적 단결을 위한 방책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요구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이었죠.

1921년 8월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특별 격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자본주의 공세에 대한 방위에서 모든 나라의 노동자대중을 결집하기 위해 투쟁하고, 단결된 노동자계급의 선두에 서서 그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이다. 이런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우리는 노동자계급을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을 굳게 단결된 일군의 밀집부대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정면으로 맞서게 할 수 있는 유일의 생동하는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주위로 노동자대중을 결집시킬 것이다.”(김성윤, 1986 Ⅰ: 164).

노동자 통일전선 슬로건은 자본주의 각국의 광범한 노동자대중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러나 당시 노동전선은 분열되어 있었고, 통일전선의 결성 작업은 심각한 곤란에 봉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半)인터내셔널, 그리고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대해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을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제안을 반복적으로 제기했죠. 

sooya_05.jpg1921년 7월3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프로핀테른 집행 뷰로,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대규모적인 자연재해 ―대한발(大旱魃)과 기근― 를 당한 데 대해 만국의 노동자와 국제조직을 상대로 긴급원조를 호소했습니다. 8월12일에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의에 따라 러시아 기근 피해자에 대한 ‘노동자 구원 재외 조직위원회’가 독일 베를린에서 설립되었죠. 이 위원회는 뒤에 ‘국제노동자구원회’(IAH)로 개칭되었습니다. 위원회의 의장에는 클라라 체트킨이, 서기에는 뮌젠베르크가 선임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에는 아인슈타인, 넥크세, 버나드 쇼, 아나톨 프랑스, 앙리 바르뷔스 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가입했죠. 위원회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 그리고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대해 공동행동을 제안했으나 협력을 거부당했어요. 다만 볼가 강 연안지방의 기근 피해자 구원운동에는 제2인터내셔널이 참가했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1년 10월 헝가리와 스페인에서 진행되는 백색 테러에 반대해 공동행동을 전개할 것을 제2인터내셔널에 제안했고, 11월에는 스페인과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투쟁의 형태, 방법, 그리고 수단을 토의하기 위해 ‘특별회의’를 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1921년 12월18일 코민테른은 제3회 대회의 지침을 발전시켜,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조직들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를 채택했습니다. “노동자통일전선은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싸우고자 하는 모든 노동자의 통일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당연히 무정부주의자, 생디칼리스트 등을 따르고 있는 노동자들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힌 것이죠. 또 테제는 “노동자대중에게 사상적으로 작용을 미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확보한 뒤에는, 모든 국가의 공산당은 오늘날 모든 경우에 이들 대중의 실천적 행동의 가능한 한 광범위하며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천명했습니다(동녘, 1989 3: 70, 77~78). 

3개의 인터내셔널 회의

전국적 차원에서나 국제적 규모에서의 노동자계급 연대행동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비단 코민테른만은 아니었고, 사회민주주의 조직이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도 그러했어요. 이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정치적 권리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공세 강화, 파시스트운동의 활발한 전개, 군비증대와 결합된 새로운 전쟁 위험, 유럽 내에서 제기되는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 첨예화 등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제반 정세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을 부추겼던 거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74). 

노동자통일전선을 창설하기 위해 노동자 당이나 노동자 조직의 세계대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영국 등의 나라에서 노동자 출판물 지면이나 노동자 집회에서 폭넓게 논의되었습니다. 

제2반 인터내셔널에 소속한 프랑스 사회당 대회는 제2반 인터내셔널 뷰로의 공동회의에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대표를 초청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2반 인터내셔널 지도부는 노동자 조직의 국제회의 소집을 찬성했으며,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의 대표만으로 구성된 회의를 개최하자는 영국 노동당의 제안을 거부했죠.

sooya_06.jpg1922년 1월13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는 제노바 회의에서 심의될 예정이었던 국제정치상의 중요 문제들 -독일과 베르사유 강화조약 개정문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구원문제- 을 토의하기 위해, 코민테른과 다른 모든 국제 노동자조직과의 공동회의 개최 문제를 2월로 예정된 집행위원회 확대총회의 의사일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이런 움직임과 병행하여 제2반 인터내셔널 뷰로는 1월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의에서 모든 노동자 정당의 공동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하고, 1월19일 유럽의 경제정세와 반동의 공격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1월2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제2반 인터내셔널의 초청을 수락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의 의제에 포함시킨다고 회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2년 2월21일부터 3월4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는 격렬한 토론을 거친 뒤, 노동자통일전선에 대한 12월 테제를 승인하고 전 세계 노동자조직 회의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죠. 또 세계대회가 모든 노동자조직을 전면적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모든 노동조합, 전국적 연합체와 국제적 연합체를 회의에 참가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더 나아가 확대집행위원회는 “노동자 조직들의 세계회의는 국제자본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방위투쟁을 조직한다는 유일한 큰 사명을 몸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sooya_07.jpg세계노동자대회의 준비를 위해 4월2일부터 4월5일에 걸쳐 독일 베를린에서 3개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대표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대표자 회의에는 제2반 인터내셔널의 프리드리히 아들러와 제3인터내셔널의 클라라 체트킨,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의 톰 쇼가 참석했죠. 

아들러는 개회연설에서 여러 조직들의 통일이 아니라 공동행동의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특히 제노바에서 열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경향을 지닌 프롤레타리아 당들의 적절한 협력”으로 대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체트킨은 종국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에 대해 견해가 다르더라도 행동통일의 정신으로 세계노동자대회를 열자고 제안했고요. 또 “국제회의에서는 노동자대중의 실천적 공동행동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만을 토의하자”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코민테른 대표단은 국제회의 의사일정에 자본 공세에 대한 방위, 반동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준비, 소비에트 러시아 공화국의 부흥을 위한 원조, 베르사유 조약과 황폐화된 지역의 부흥문제 등을 포함시킬 것을 제의했습니다(김성윤, 1986 Ⅰ: 175).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