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뼛거리며 시작된, 끊어지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들

노동사회

쭈뼛거리며 시작된, 끊어지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들

편집국 0 3,267 2013.05.29 11:35

지난 6월16일, 산정호수 부근에서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밤이 있었다. 끊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들, 누구는 먼저 일어나 흔들고 아직 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켜 어우러지는 춤들. 그리고 또다시 밤늦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들.

그 밤에는 칠십이 넘는 노신사가 있었고, 매끈한 넥타이가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아저씨들이 있었고, 작업복에 투쟁 조끼 차림의 아저씨, 빨간 꽃무늬 남방의 아저씨, 동네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언니 같이 보이는 아줌마,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모를 법한 언니들도 있었다. 언뜻 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어울려 뜨거운 밤을 보낸 것이다.  

나는 이 날의 여러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다, 동시에 이 사람들이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다. 자기소개를 하는 것조차 어색했던 날, 남들은 다 똑똑한 것 같고 나만 모르는 것투성이인 것 같은 기분으로 무슨 질문을 받아도 쭈뼛거려지던 날, 저 사람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던 날……. 그 이후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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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간부 활동론 토론 모습 ]

무식해서 용감하게? 겸손해서 당당하게!

이들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노사연)에서 주관하는 ‘노조간부 학습모임 <저자 김금수 선생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간부활동론>’ 1기생들이다. 한노사연에서 동을 떴고, 지난 4월7일부터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김금수 선생’의 명망을 듣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그냥 공부 좀 하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가 같이 공부 좀 해보자고 ‘꼬드겨서’ 온 사람도 있었고, 이미 같은 공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직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해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저마다 모인 이유는 달랐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그냥 한노사연 교육장에 모여서 저자의 강의만 듣고 가면 되는 모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첫 날부터 색 카드를 나눠주고 자기 생각을 잔뜩 쓰라고 하더니, 자꾸만 이런저런 말을 시켰다. 게다가 다음 모임부터는 장별로 읽고 발제자를 정해 발제를 해야 한단다. 사람들도 낯설고 모임도 부담스러운 사람이 많았다. 첫 모임, 두 번째 모임, 세 번째 모임이 지나도록 공부가 끝나면 제각기 흩어져 돌아가기 바빴다. 처음엔 발제를 맡지 않은 사람도 부담스러웠다. 발제자의 발제가 끝나면 다 같이 토론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너무 똑똑한 것 같고 아는 것도 많은 것 같았던 것이다. 머리털 나고 발제라는 걸 처음 해보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노동운동 조직 형태의 발전’, ‘투쟁의 전략과 전술’, ‘노동운동의 이념’……. 뻔한 얘기 같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도 열게 하는 물꼬를 텄다. 본인은 “무식해서 용감하게”라고 표현했지만,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질문하는 당당함으로, 궁금했지만 질문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당연히 자기가 하고 있는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나왔다. 서서히 각자의 활동 속에서 어려웠던 일들과 고민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매 시간 읽은 것들 속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뒤섞여 상호 질의응답과 토론이 되었다. 

화장품 판매직 노동조합 활동의 고민들이 쏟아졌다. 업종에서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비슷한 고민의 경험이 있어 증권사 노동조합 간부들의 조언이 쏟아졌다. 노동조합 자체가 만들어진지 3년이 안된 노조간부들의 고민들이 쏟아졌다. 역시나 업종과 활동은 많이 다르지만 활동한지 10년이 넘은 선배 간부들의 고민도 함께 쏟아졌다. 처음엔 주로 자기 노조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들과 진행 중인 고민들이 쏟아졌다.  

서로 다른 조건과 목적 품고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명 

로레알코리아 노조, 엘카코리아 노조 같은 서비스 직종 노조간부, 현대증권, 부국증권, 외금노(주한외국금융기관노동조합) 등 민주금융노조의 상급조직 간부와 단위노조 간부, 민주연합 노조의 본조 및 지부 간부 등이 함께 고민을 나누다 보니 같은 노조간부라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동과 활동의 이야기들이 많고, 활동의 조건도 활동의 방식도 매우 달랐다. 심지어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어서 자기 현장과 조합원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경험은 매우 달랐지만, 덕분에 외국의 사례들과 연구 사례들도 나누어졌다. 공부하면서 ‘현장활동 강화’나 ‘연대’같은 당위적인 원칙들을 배웠지만, 그 원칙들에 대해 각 노조들 간에 혹은 간부들 개개인 간에는 생각과 실천의 온도차도 많이 느껴졌다. 

상시적인 노조의 투쟁과 조합원들의 연령·학력 문제로 문서나 인터넷으로 노조의 방침을 전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언제나 인터넷을 열어놓고 있는 환경에 있어서 노조의 현안이나 방침을 전달하기가 너무 쉽고 조합원들의 관심도 높은 편이지만, 실제로 조합원들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전 조합원이 진보정당의 당원인 노조도 있었고, 연대 투쟁은 거의 조직해보지 못했거나 심지어 노조간부들조차도 꺼려하는 노조도 있었다. 단체협상에 노조활동 시간과 교육 시간을 많이 확보하여 일상적인 조합원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노조도 있었고, 연 몇 차례 숙박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노조도 있었고, 일상적인 교육은 거의 진행하지 못하지만 조합원 전체 백두산 등반 같은 큰 행사를 치르고 있는 노조도 있었다. 

이렇게 조건과 활동 상황, 활동 방식은 많이 달랐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서 토론해보니 사실상 이들의 고민은 한결 같이 하나였다. “어떻게 조합원들이 참여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현장활동을 강화하고 조직력을 강화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던 서로 다른 활동과 토론 내용은 자극이 되기도 하고, 노하우의 전수 과정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신생노조 간부가 천진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질문이나, 나이 지긋한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중견 간부가 “왜 자기 노조 고민만 말하고, 연대를 고민하지 않느냐”고 울분에 차서 쳤던 호통이나, 모두 어떤 이론보다 가슴 깊이 와 닿는 공부가 되었다. 물론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현장 간부들의 고민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열강을 하시는 김금수 선생의 열정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딱딱한 책 내용과 낯선 이론이나 용어 등에 주눅 들던 사람들도 자기 활동과 자기 고민들을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공부가 끝나면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첫 한 두 차례 모임에서는 공부가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쁘던 사람들도 점점 거나한 술자리에서 ‘수다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선배 활동가가 토론 시간에 말했던 ‘노동자’와 ‘근로자’라는 용어 차이가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아 자신의 활동 전체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노조 간부가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연대’를 실천하고자 그 자리에서 손을 내미는 노조 간부가 있었다. 자기는 활동가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자기가 그렇게 불린다면 진짜 활동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노조 간부의 성찰이 있었고, 훨씬 더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하는 타 노조 간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활동을 반성하는 노조간부가 있었다. 

‘급제안’으로 만들어진 수련회, 한 발 더나간 즉석 강연 

그렇게……, 석 달여에 걸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애초에 계획에도 없었던 1박2일 수련회가 제안되었다. 처음엔 두 시간 강의만 들으면 땡일 줄 알았던 공부모임이었는데, 두어 시간의 토론과 한 시간 가까운 저자 직강, 그리고 이어지는 뒤풀이로도 아쉬운 사람들이 의기투합했다. 애초에 이 모임의 동을 떴던 한노사연 교육국에서 참견할 틈도 없이 날짜가 정해지고 장소가 정해지고 회비도 정해졌다. 사는 곳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카풀조도 짜여졌다. 한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점심을 먹고 산정호수 부근에서 모이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각자 약속 장소로 오는 동안에, 얼마 전 외국에 출장을 나가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독일 등의 사례를 둘러보고 논문을 쓰고 있는 모임 회원이 탄 차에서 ‘급제안’이 들어왔다. 즉석에서 전화 연결을 통해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국가 및 노동조합의 외국 사례들에 대한 강의가 수련회 프로그램에 추가되었다. 수련회가 없었어도 진행하려고 했던 9회차, 10회차 토론과 강의가 진지하게 이어졌고, 저녁 식사 시간도 미루고 외국사례에 대해 회원의 강의를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진지한 공부와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모임 회원은 아니었지만 동지들이 온다 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민주연합노조 포천지부장님 등이 막걸리를 박스로 날라왔고, 지역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식당에 예약도 했다. 그리고…….

‘2기 노조간부 학습모임’을 모집합니다!

산정호수 부근에서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밤이 있었다. 끊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들, 누구는 먼저 일어나 흔들고 아직 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켜 어우러지는 춤들. 그리고 또다시 밤늦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도무지 뭘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건지 알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진한 농담을 주고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동지가 되었다. 현재 ‘노조간부 학습모임 1기’는 민주금융노조 민경윤 동지가 자천하여 반장이 되고 후속모임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한노사연에서는 오는 9월부터 ‘노조간부 학습모임 <저자 김금수 선생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간부활동론>’ 2기 교육을 준비 중이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문의와 참여를 기대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