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건강센터와 노동자‘건강’센터 사이에서, 뚜벅뚜벅

노동사회

‘노동자’건강센터와 노동자‘건강’센터 사이에서, 뚜벅뚜벅

편집국 0 3,177 2013.05.29 11:34

수상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 며칠씩 비가 퍼붓다가 눈꺼풀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가 오나 싶더니, 다시 폭우가 시작된다. 
집권당의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란 자와 노동부 장관이란 자가 그렇게도 비정규직을 ‘사랑’하는 줄 몰랐다. 눈물까지 흘리다니 입이 떡 벌어질 일이다. 두 달을 공장 안에서 나오지 못한 채 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진료하러 간 공장 정문 앞에서는, 사측이란 자들이 그악스럽게 ‘정의’를 외치는 현장을 목도했다. 차라리 눈을 감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을 찾지 못했다.  

진료 방해를 ‘정의’라 외치는, 부조리한 여름의 한가운데서

아,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삿대질을 하긴 했다. 의약품이 가득 든 박스를 든 채 두 시간을 공장 문에 매달려, 사측에게 시달리고 있는 의료진을 구경만 하는 경찰을 향해, “세금으로 밥 먹는 주제에 왜 보고만 있느냐”, “의료진 안 막는다고 언론 플레이는 왜 했느냐”, “가만히 안 두겠다”고 미친 여자처럼 떠들긴 했다. 그러고 나서 농성노동자의 아내들이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공장 앞을 떠나는데, 서늘한 슬픔 같은 것이 차오른다.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한 2009년의 여름이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노동건강연대가 위치한 성수동에서도 역시 조용하지만 큰 사건들이 물밑으로 지나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를 한다고 특별시가 내놓은 도시개발 프로젝트의 중심에 성수동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 ‘산업뉴타운’이라는 미명하에 성수동 일대의 제조업공장을 정리하고 IT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사업안이 나와 있는 것이다.

주거지역은 주거지역대로, 공장지역은 공장지역대로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 사장과 노동자 사이에,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을 터다. 그러나 부동산 사무실에서나 오가는 땅값 시세 얘기라면 모를까, 주민들이 모여서 우리 동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마을을 만들고 싶은가 이야기하는 토론의 장은 없다. 애초에 거주자들이 토론하고 합의하여 개발의 방향을 정하는 사회라면 용산의 비극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성수동식구들’ 집터를 마련하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무엇이든 해보겠다고 지역노조들이 모이고, ‘성수동식구들’이라는 활동가 협의체가 만들어지고, 구체적인 공간을 염두에 둔 ‘지역노동자센터’를 구상해온 지 7~8년이 지났다. 

지역노조는 노사교섭도 거의 없고 조합원수도 많지 않은 데다, 재정상황 역시 좋지 않아 조합 활동을 활발히 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 대신 조합원 사이에 유대관계가 끈끈해서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노조운동의 초기에 가졌던 열정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지역노조들이 산별노조의 지회로 체제를 개편했지만 내용적 지원은 멀기만 하다. 조직형식은 더 탄탄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세사업장에 적합한 노조활동을 찾기 위해서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러한 조건 덕분에 상상과 창의를 모색하고, 적은 수의 조합원과 할 수 있는 일상 활동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다. ‘성수동식구들’은 노동건강권 문제를 매개로 만남을 시작했지만, 노동복지와 삶의 질, 영세산업정책과 대응방안을 같이 이야기했고, 경계 없이 활동을 해왔다. 조합원들과는 참여형 노동건강 교육을 해왔고, 영세공장에 맞는 노동안전 활동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활동가를 불러 공부도 했다. 

두 번이나 강사로 와 준 일본 활동가는 공장 안팎을 카메라로 기록하며 어떤 시각으로, 누구의 관점으로 일터를 볼 것인가 일깨워주었다. ‘노동자’, ‘현장’을 입에 달고 살지만, 타자화된 자의 불평 외에 어떤 능동적 개입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5년, ‘영세사업장노동자 노동복지 실태조사’를 대규모로 진행하면서, 지역과 노동운동의 결합이 ‘구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50인 미만 일터에서 일하는 5백여 명의 노동자를 만나면서, 노동자 평균임금이 월 150만 원 정도이며 휴일이나 퇴직금 같은 기업복지가 거의 없고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것을 알아냈다. 

새로운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5백여 명의 노동자를 만나서 삶의 조건과 욕구를 말로 표현하며 얻어낸 결과이니, 그 시점부터 지역과 노동자의 관계의 온도가 실감나게 확 다가왔던 것이다. 또한 이 조사를 통해서 영세 일터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구분이 별 의미가 없고, 불안정한 산업정책만큼 일자리 역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소규모사업장 노동자 무료 건강검진’ 사업도 6년째 안정적으로 진행했고, 활동가 간담회, 지역단체 간담회 등을 열면서 지역노동자센터 건설이 시나브로, 저지르는 단계만 남았다고 생각된 지난해 11월, (가칭) ‘성수노동자건강센터’의 공간을 마련했다. 

요가도 배우고, 건강검진도 받고, 아픈 얘기를 나누는 공간 

센터 공간은 사무공간과 교육장을 구분했는데, 사무공간에는 노동건강연대와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 금속노조서울동부지회, 민주노총서울본부 동부지구협의회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센터의 밑그림부터 색이며 모양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동반자들이다. 교육공간에는 작은 상담실과 부엌 공간을 따로 두고, 마루를 넓게 배치했다. 강의가 있는 날은 책상과 의자를 놓고 요가를 하는 날은 매트리스를 깐다. 
공간 이사 후 첫 프로그램은 활동가 요가, 노동자 요가 배우기였다. 현재 월례특강, 매주 토요일 정신과의사 상담, 업종별 노동자 간이검진, 건강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주부터는 ‘성수동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책과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시작했다. 제목이 좀 긴데 프로그램 내용은 간단하다. 책과 시, 노래를 매개 삼아 살아온 얘기, 아픈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참여자는 주로 4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고, 7~8명이 함께 한다. 제화노동자도 있고, 실직자도 있고, 전업 활동가도 있다.       
     
업종별 노동자 간이검진과 상담은 두 업종의 노동자를 진행하고 있는데, 가사관리 노동자들과 음식점서비스 노동자들이다. 가사관리는 주로 50대 중년 저소득여성들이 일하는 직종인데, 지역 복지단체가 운영하는 기존 조직이 있어서 진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음식점업 노동자들의 간이검진 및 상담은 센터 인근 건대입구 음식점 밀집지역인 ‘맛의 거리’에 나가서 진행한다. 매월 셋째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하여 6월과 7월 두 달을 진행해 보았다. 한국 음식점서비스 노동자의 90% 이상이 중국교포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이곳에 가보니 과연 그렇다. 중국교포들은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렇지만 건강보험 문제도 있고, 돈도 많이 들어서 병원에 잘 가지는 않는 것 같다. 

또 하나, 음식점 일하면서는 그런대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지만 병원에 가면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른 의료용어들이 많고, 진료문화도 달라서 그런 것 같다. “한국 사람들도 병원 가면 말 잘 못 해요”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검진을 미리 선전하고 당일 의료진과 함께 짐 싸들고 나가는 수고에 비하여 노동자 참여가 적어 힘이 안 난다. 평가를 해 보아야 알겠지만, 다른 방식을 찾아볼까 한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정신과 상담’의 사연들

매주 토요일 정신과상담을 하겠다고 개설하고 4주를 진행했다. 이 대목에서는 휴…… 한숨 한번 내쉬어야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정신과 의사 두 분이 격주로 진행했는데, 다음 주부터는 두 분이 더 결합하게 된다. 

상담 오시는 분들은 주로 가정폭력과 빈곤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삼십대에서 오십대 여성이다. 주로 지역 복지단체와 쉼터 시설에서 소개하여 오시는데, 사연 하나하나 문제 하나하나가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버거워 맘고생을 좀 했다. 

하나는 분명하다. 한국 남성,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이들 중에 아내와 아이를 학대하고 돈이 있어도 충분한 생활비를 주지 않거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도 끝내 놓아주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빈곤, 알코올, 폭력적인 성장과정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지만, 면죄될 수 없는 가혹한 결과가 여성과 아이들에게 남는다. ‘가폭’(가정폭력)이라는 줄임말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놀랐다.  

전업 활동가들도 정신과 상담에 관심이 많다. “공적인 언어, 공적인 행위로 위장(?)한 일상을 이어가다 보니 긴장도도 높고, 사생활을 가꾸고 소통하는 시간이 너무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상담하러 오신 활동가가 해 준 진단이다. 공감하시는 분 많으리라.

어려워만 가는 현실…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이 있어 한발 내딛는다  

센터는 올 한해를 시범 사업 기간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정식 개소는 내년 여름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센터 공간으로 이사할 때 재원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이 주로 마련했고, 현재 운영비도 비슷한 사정이다. 시범사업을 통해 지역 노동자, 주민, 사장님들에게 벽돌 한 장 값이라도 모금해야 한다. 운영을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역노조의 참여, 주민, 지역 단체들의 협업이다. 그런데 2002년 이 활동을 시작할 때보다 지역노조들의 힘이 많이 빠져 있다. 노동이 처한 현실이 버겁고 조합원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 그래도 노동자가 모여서 노동자가 말하고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꾸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헌신적인 동료들이 있어서 한발을 내딛는다. 

한편, 센터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흐름, ‘노동자병원’ 개원을 목표로 가자는 의견과 ‘민중의 집’처럼 좀 더 넓게 보자는 의견이 있다. 그렇지만 재원 마련 방안과 운영구조에 있어서 민주성과 참여의 원칙을 맨 앞에 놓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이제 반년을 왔을 뿐인데 숨이 좀 차다. 일 자체가 힘들어서라기보다,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오는 답답함이 커서이다. 건강 검진을 하다 보니 인력이 모자라 “피를 뽑으라”는 무시무시한 요구가 있던 날, 바늘이라면 단추 다는 것도 무서운 한 여자의 절규가 있었으니, “나 국문과 나온 여자야!”(내 얘기다)

나한테도 노동자‘건강’센터 활동가이니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라는 압박, 정신과 상담을 진행해야 하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라는 압박이 거세다. ‘노동자’건강센터라며 저항하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회 기여 모범 보여주는 노건연 전문가들에게 감사를  

이쯤에서 이 활동에 대해 전적으로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으면서, 노동조합과 활동가가 합의하는 만큼, 갈 수 있는 만큼 천천히 가는 것을 지켜봐주는 든든한 조력자인 노동건강연대의 전문가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현재 노동운동과 보건의료운동에서 잘 나가는 곳이 아닌, 꼭 필요한 곳에 자신들을 자리매김하고, 전문가의 자리에서, 학자의 자리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현장과 연결하기 위해 애써왔다.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지식인의 조건은 능력보다 겸손함이 먼저고, 사람 됨됨이가 그 고갱이라는 걸, 이들은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