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언론의 반노동 공세 자세히 읽기

노동사회

보수 언론의 반노동 공세 자세히 읽기

편집국 0 3,246 2013.05.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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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17일 민주노총 탈퇴를 선언한 KT노조가 “민주노총 탈퇴는 노동운동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있다.  ▷ KT노조 ]

낡은 옛것은 가고 없는데 새것이 오지 않을 때, 흔히들 위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오래 전부터 위기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정규직 중심 기업별 노사관계의 사회적 호응성이 지난 199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구조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음에도,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 지 어언 10여 년째를 맞이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정권과 자본에 맞서 그것을 지키는 데만도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또한 산별노조 건설과 비정규직 조직화 등 새로운 전망을 주체들이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해왔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더없이 심해진 무기력과 혼탁한 전망의 무게를 그러한 과거의 희생과 노력의 존재 자체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수언론의 보도 프레임을 분석하는 이유

직관하건데, ‘조중동’(조선·중앙·동아) 등 보수언론들은 지난해와 올해를 거치며 이러한 노조운동의 위기상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두게 됐을 터다. 배제를 넘어 적대적이었던 지난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서? 물론 아니다. 여기에는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적어도 현재는 반노동적 정책기조 추진을 일순 멈칫하게라도 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함이 이명박 정권의 거침없는 독주 속에 실천적으로 확인된 것과, 민주노총 ○○특위 위원장의 불미스러운 성폭력사건 및 공공부문 노조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총 탈퇴 흐름 등 내파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의 영향이 작용했다. 과거처럼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양 노총, 특히 민주노총을 배제한 ‘새로운 대안’까지도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자신감이 생겼을 거란 거다.

물론 저들이 떠드는 대안을 노동조합운동이 진지하게 수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보수언론이 발휘하고 있는 부분적인 설득력을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보수언론도 비정규직문제나 내부 갈등 등 노동조합운동의 균열과 사각지대에 착목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또한 현재는 노동조합운동이 기존 틀에서 벗어나 차근차근 ‘진지’를 구축하고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야 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틀을 구축하기 위한 반면교사의 자료로서 보수언론의 인식 틀을 검토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작업을 위한 초보적인 시도다. 이를 위해 올해 상반기 노동 이슈 중 ‘민주노총 탈퇴’와 ‘비정규직법’ 각각을 키워드로 2009년 1월1일부터 7월22일 사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조선일보 기사들을 토대로, 그 보도 프레임을 간단하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신문인 조선일보는 보수신문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영향력’은 단지 부수만이 아니라 이슈를 자기 프레임으로 포섭하는 능동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따라서 조선일보만을 분석하는 것은 보수언론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부족하나, 그럼에도 어느 정도 상징성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총 탈퇴 흐름’과 ‘비정규직법 개정 논란’을 다루는 이유는 이 이슈들이 특정 사업장 노조의 갈등 사례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선명하게 조선일보라는 창에 비친 노동조합운동과 노동문제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이미지의 구체적인 형태와 이를 형성하기 위한 조선일보의 은유법 사용방식을 이해하고, 거기에 내재해 있는 암묵적인 의미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노동자들의 분노”에서 자라난 ‘제3의 노동운동’?

2009년 상반기 인천지하철, 인천국제공항공사, KT 등 주로 공공부문에서 이뤄진 일련의 민주노총 탈퇴 흐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적어도 조선일보의 보도 프레임 안에서 이는 기존의 “소수 운동가 중심의 폐쇄적·이념적 노동운동”과 대립하는 “합리적 대안과 사회공헌을 앞세운 ‘제3의 노동운동’”의 출현 가능성을 뜻한다. 이러한 선명한 이항대립의 틀 안에서 선악의 가치판단 준거를 제공하는 것은 “진짜 노동자들의 분노”이다. 이 “진짜 노동자들”, 즉 “풀뿌리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운동의 “투쟁에만 팔 걷고 조합원엔 뒷짐”지는 위선과, “돈·감투·권력”에 눈이 멀어 “썩어서 무너지는” 부패와, “내 탓 대신 남 탓만” 하는 무능과, “약자에게만 강한” 패권과, 조직 보위를 위해 성폭행사건을 덮으려는 패륜에 분노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노가 “상향식 개혁 압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강경·이념투쟁 중심의 민주노총 운동을 “극복하는” 상생·합리적 노동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틀의 형성 및 정당화 과정은 반복학습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조선일보는 인천지하철노조의 이성희 위원장과 서울지하철노조 정연수 위원장을 필두로 거의 대부분의 탈퇴 추진 노조들에서 취재와 인터뷰를 진행해, 매 번 앞에서 언급한 이항대립을 정확하게 되풀이하며 “진짜 노동자들의 분노”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성해간다. 그리고 규모가 큰 노조들 같은 경우는 탈퇴 추진 과정 하나하나를 중개하고, 그 의미를 자신들의 프레임 안에서 매번 비슷한 용어로 평가한다. 또한 이러한 중개보도들 및 인터뷰들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 인상 깊은 몇 토막들은 이후 분석기사, 칼럼, 사설 등에서 지속적으로 재활용되며, 마찬가지로 이항대립을 굳건히 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하나의 이야기만을 ‘반복학습’하는 셈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가끔 진보적인 노동계 인사들의 자성적 목소리들이 삽입되기도 하는데(즉, ‘이이제이’), 이는 인터뷰를 통한 직접 인용이 아니라 축약된 ‘간접 인용’이다. 신뢰성 확보를 위해 끌고는 왔지만, 결국에는 조선일보의 프레임에는 수용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조선일보 입장에서 이 이항대립의 올바른 해소 방향은 당연하게도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 내지는 후자의 발전이다. 그런데 후자, 즉 ‘합리적인 상생 지향적인 노동운동’은, “꿈틀대는 ‘제3의 노동운동’”, “노동운동도 생명체”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새로운 생명체’로서 은유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노동운동의 동력으로서 현장 노동자들, 즉 “풀뿌리 조합원들”에 대한 강조와 결합해 ‘성장’의 이미지, ‘상승 지향’의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이는 전형적인 ‘진보의 은유’이다. 물론 그 지향점을 “노사 상생의 시대 철학”이라는 모호한 것으로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보수신문 조선일보에서 이는 의도치 않은 당혹스러움과 내부 모순을 낳고 만다. 때문에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민주노총 탈퇴 사태”의 계기를 만들어내며 “역사를 진보시킨” “평범한 영웅”으로서 상찬하는 헛발질을 하고, 과보호받는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조선일보가 회사 울타리 안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익 보호를 강화”하려는 이른바 “제3의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찾는 우스꽝스러운 역설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법은 “실업 대란” 일으키는 ‘자연재해’? 

시행 2년째를 맞이한 세칭 ‘비정규직(보호)법’을 두고 정치권과 사회 여론이 한바탕 논란을 벌였다. 논란의 발단은 비정규직법 중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기간제근로자및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로 인해 대량실직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므로, 사용기한을 연장하거나 법률을 유예시켜야 한다는 정부와 한나라당의 공세로부터 비롯됐다. 이에 대해 노동계 및 대다수 야당들은 ‘대량실직 사태’ 예측은 근거가 없다며, 법을 그대로 두되 정규직 전환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정확하게 법 시행 2년째가 되는 7월1일부로 정점을 찍었다가 결국에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이후 ‘미디어법’ 직권상정 충돌이 폭발하면서 완전히 묻혀 버렸다. 법안 개정이나 유예는 당분간 어렵게 됐다.   

조선일보의 보도 프레임에 이는 어떻게 포착됐을까? 우선 이 논란에 대한 조선일보의 정책적 판단은 명확하다. 그들의 틀에서는 “정부 개정안대로 비정규직 사용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든가, 아니면 ‘2년 고용 기한’의 현행규정 시행을 당분간이나마 더 유예하든가”만이 논란의 “해결책”이며 다른 주장은 “말뿐인 비정규직 보호”이다. 이러한 판단의 준거로 제시되는 것은 비정규직법이 야기할 “고용 대란”과, 이로 인해 발생할 “해고 지옥”의 고통과, “가장 열악한 곳”에서 발생하는 “약자들의 통곡”이다. 이러한 인식 틀에 따라 “해고 대란”을 막을 수 있도록 법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국회는 “비정규직 정치게임”만 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급기야 “차라리 의원들을 해고하라”는 주장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실업대란이 벌어지면” 한나라, 민주 양당 원내 대표와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책임”이라며, 특히 추미애 환노위 위원장의 “도를 넘은 무책임”을 지탄한다.

이러한 인식 틀이 형성되는 과정은 앞서 ‘민주노총 탈퇴’ 보도와 마찬가지로 반복학습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식에 따른다. 그런데 강력한 이항대립을 기반으로 주관적인 목소리들만으로도 그럴듯한 구성이 가능했던 “진짜 노동자들의 분노”와 달리, “고용 대란”과 그에 따른 “약자들의 통곡”이라는 준거는 주관적인 고통의 목소리들에 대한 취재와 함께 객관적인 고용 통계의 뒷받침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조선일보는 “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비정규직들의 불안과, 결국에는 “궂은 일만 하다 쫓겨나”는 고통과, “해고하기 싫어”도 해야 했던 살아남은 ‘정규직’의 슬픔 등을 기획취재, 인터뷰, 좌담 등의 형식을 통해 반복해서 담는다. 그리고 “해고 대란”을 뒷받침하는 주로 노동부의 통계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조선일보의 보도 프레임은 다소 강퍅해서 정규직 전환자의 목소리나 노동부 예측의 일관성과 신뢰성에 문제제기하는 연구들은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비정규직법 논의에 양 노총 참여를 비판하는 기사에, 여당을 질타하는 진보적 학자의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과 같이 난데없는 경우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편, “강자에겐 ‘미풍’, 약자에겐 ‘태풍’”, “100만 실업 대란”이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조선일보의 보도 프레임에서 비정규직법은 ‘재해’로서 은유된다. 이러한 재해로 인해 사회가 “약자들의 통곡”이 울려 퍼지는 “해고 지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안 유예나 사용기한 연장이라는 “응급처방”이 내려져야 하며, 이러한 처방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정치권, 특히 야당은 자연재해를 인재(人災)로 더 확대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해의 은유의 설득력은 그로 인한 고통과 불안을 체감할 수 있는 정도에 비례하며, 다양한 예방 수단들의 활용 가능성과 용이성에 반비례한다.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약자들의 통곡”, “생체실험” 등 감성적이거나 과격한 용어들이 남발되는 것, 그리고 유예 또는 사용기한 연장이라는 “응급대책” 외에 정규직 전환 지원금 등의 ‘일상적 대책’들이 전혀 논의되지 않는 것 등은 이러한 재해의 은유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해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지언정 사실상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보도 프레임에서는 마찬가지로 (사용자들의) ‘해고 행위’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 원인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정규직 노조’”라는 이상한 주장이 가능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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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9일 야 4당과 민주노총, 공공기관 기간제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국회본청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공공부문 ‘기획해고’를 규탄했다.  ▷ 레디앙 ]

“역사의 진보” 및 “약자들의 통곡”과 함께 하길

160건이 넘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아, 이래서 조선일보가 독자 충성도가 높구나’ 하고 깨달은 게 있다. 어휘들이 상대적으로 매우 공격적이고, 불안과 분노 등 부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정도가 크다는 점이다. 그런 기사들을 계속 읽다보면 좋든 싫든 정서적 에너지를 더 많이 쓰게 되고, 그 매체를 더 확실하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될 터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공격적이고 부정적 정서와 이항대립적이고 독선적인 노동 보도 프레임을 결합해서 고려한다면, 4?19 시절 혁신세력들의 집결지인 민족일보 기자들이 자주 들었다는 “기자야 투사야”라는 질문을 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어쨌거나 앞으로는 그러한 전투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지향의 틀 안에서라도 “역사의 진보”와 호흡하고, “약자들의 통곡”을 보듬는 방향으로 실질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과격파가 주름잡는 풍토에선 미래 없다”는 건 노조운동뿐 아니라 조선일보 스스로에게도 돌아가야 할 소리다. 

한편, 이들이 폭력적인 이항대립으로 노조운동을 재단하고 독선적으로 약자 대변을 자처할 수 있는 데는 어느 정도는 진실이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렇기에 부분적인 설득력을 갖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이 보수 언론의 공세에 대응하는 궁극적인 길은, 이항대립으로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실험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약자 대변에 있어 노동운동을 매개하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도록 사회 인식의 틀을 구성해가는 것이다. 장기적이고 꾸준한 실천을 통해 이러한 지향을 풍부하게 만들고 ‘사회의 힘’을 강화하는 것만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일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