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가 빠진 비정규직 노동정치

노동사회

세 가지가 빠진 비정규직 노동정치

편집국 0 3,845 2013.05.29 11:22

비정규직의 규제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시끄럽다. 정부는 노동정책상의 다양하고 부드러운 수단들을 강구하고 활용할 궁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키보다, 제도개혁이라고 하는 어렵고 딱딱한 수단, 그것도 현행 비정규 고용형태의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공고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단 하나의 방향에 목을 매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노동계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당조차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여 과연 정부의 의도대로 법 개정이 쉽게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그 사이 결과적으로 일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험에 별 여과장치 없이 노출되어 이미 일자리를 잃었고, 또 다른 일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그나마 기존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수혜를 입는, 상반된 운명을 맞이했다. 다만 정부가 초반에 위협하였던 대로 1년 만에 100만 명이 해고가 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높지 않아 보인다.

비정규직의 규제방식을 둘러싼 작금의 노동정치에는 세 가지 중요한 거버넌스 자원이 빠져 있다. 그것은 각각 두터운 정책지식, 노사관계상 중층화된 규제수단, 그리고 정부의 노동정책상의 장기적인 비전이다. 이들은 노사관계뿐 아니라 민주주의 전반의 운영수준에 있어 우리보다 선진적인 나라들과 대비되는 모습임과 동시에, 좋은 정책을 결정케 하는 제도적 인프라와 공익적 자원이 우리 사회에 취약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세 가지의 결핍은 결과적으로 현재 비정규직 규제의 노동정치를 답보상태에 빠뜨리고 있는 결정적인 요인들이다. 

향후 이 공백을 매우기 위한 노력을 동반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규제의 노동정치는 설(說)과 설(說)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내 사회적 시민권의 취약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들을 위한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재차삼차 반복할 여지가 있다. 

두터운 정책지식의 결핍 

먼저 과연 우리에게 노동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는 양질의 데이터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고, 그것을 발굴 및 개발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00만 해고설’ 등의 루머성 지식이 사회적으로 유포되고,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일 먼저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그러한 주장들이 좀 더 두터운 경험적 데이터와 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들을 통해 형성된 정책지식의 풀(pool)에 기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의 실행이 오히려 비정규직의 대량해고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에 해당 법을 완화하거나 그 실행을 미뤄야 한다는 정부와 여당의 주장은 과거 ‘밀레니엄 바이러스 소동’을 연상시킨다. 세기의 전환기에 겪었던 그 소동이 인간의 지식의 한계에서 유래했다면, 이번 비정규직 사태 역시 큰 범주에서 마찬가지이다. 다만 전자의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제어가 자연과학적, 공학적 영역의 지식이 부족해서였다면, 후자의 문제는 사회과학 차원에서의 지식의 한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사회과학이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 예측하기 위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은 현실의 문제와 관계하는 전문적인 연구기관들을 운영하면서 과학적 실증연구를 통해 사회현상에 대한 처방적 지식을 생산하려는 노력에 경주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 연구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요 연구기관들이 사회 현안에 대해 제시하는 인식과 처방의 토대가 되는 ‘정책지식’(policy-knowledge)은, 대체로 현실의 상황을 충분히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다. 

소위 국책연구소와 재벌기업연구소 등의 대규모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편향성과 연구의 자율성 등에 있어서의 한계를 지적받고 있다. 반면 노동계의 입장에 서서 공익지향적인 정책을 과학적인 인식과 연구의 수단을 통해 개발하는 역량 있는 연구기관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비정규직과 관련한 공방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책연구계는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정부가 법의 개정을 요구하였을 때는 물론이요,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던 노동계의 주장도 사실 경험세계의 모습과 변동에 대한 두터운 조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 결과 그 어떤 싱크탱크나 연구기관도, 100만 해고설이든 그에 대한 반대주장이든,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데이터를 갖고 현실의 동향을 예리하게 분석한 결과에 기반하는 모습을 취하지 못했다. 

만일 노사정 모두 역량 있는 싱크탱크들을 갖고 있고, 정책을 결정하기 이전에 그들 각자가 학술적인 엄밀성을 갖되 정책함의를 끌어낼 수 있는 분석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갖고 토론에 임하여 현실의 실태를 지금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분석적으로 짚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밀레니엄 바이러스 식의 루머에 휩싸일 가능성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정책지식 토대 마련은 정부 책임이 가장 커

정책지식의 취약함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 정책수립을 광범위한 실증데이터와 그것의 세심한 분석에 기반하기보다, 피상적인 제도적 상상력, 그것도 이미 결론을 선험적으로 내리고 자신의 선택지를 일찌감치 제약하는 방식의 행위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현실적이고 타당한 정책지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각 집단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싱크탱크들이 실증에 기반한 분석을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하며, 일단 정부의 싱크탱크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특히 비정부 연구기관들을 육성하여, 공익을 지향으로 한 정책개발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해, 만일 정부가 자신의 정책지식에 기반한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 보다 합리적인 반대자를 원한다면, 노동계의 이해에 기반한 연구기관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육성될 수 있도록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여러 가지 정황들이 보여주듯이, 현 정부는 자율적이고 다원화된 싱크탱크 환경의 구축에 전혀 관심이 없을 뿐더러, 국책연구기관들마저 정권의 지향에 종속된 지식을 생산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이 사안을 두고 합리적인 정책분석과 그에 기반한 다원주의적 토론을 통한 대안모색의 싹이 사회적으로 꽃피우지 못했다. 거기에 보수언론 역시 ‘팩트’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조합하면서 정부에 힘을 싣는 쪽으로만 갔다. 

노동시장의 연구환경과 관련하여 독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와 큰 대조를 이룸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노동시장의 동향을 탐구하는 연구기관,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정책개발 지향적인 복수의 연구기관들이 즐비하게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있는 분석을 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책연구소인 ‘노동시장과 직업연구소’(IAB)는 사회학과 경제학에 기반하여 각 지역노동시장의 동향까지 포함한 심층적인 노동시장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에 기반한 다층적인 분석을 행한다. 독일 노총 산하의 한스뵈클런 재단에 속한 ‘경제사회연구소’(WSI)는 단체교섭과 기업 내 노사합의 등에 관한 정책지식에 있어서 독일 노동부를 능가하는 높은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 사용자측의 입장에 서 있는 ‘쾰른경제연구소’(IW-Koeln)도 상당한 연구역량을 자랑하며,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에 관한 양질의 분석결과를 내놓는다. 정부가 정책을 마련할 때에도 이익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 때에도, 이들은 각각 학술적인 실증분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각자의 목소리에 타당성이 높고, 또 현실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노사관계상 중층화된 수단의 결핍 

현대 산업사회에서 노사 이익집단은 보편적으로 기업 내외에 존재하는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자로서 역할을 한다. 특히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사람들과 나가려는 사람들, 그리고 노동시장 내에서 노동력을 매매하며 하루하루 생활해 가는 임금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노동방식을 규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노사관계는 바로 노동시장의 규제방식과 규제내용을 둘러싼 제도적, 비제도적 영역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정치적 공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기업내부의 소위 내부노동시장에 대한 영향력에 머물고 있지만, 유럽의 선진국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기업 외부에까지 확대되어 있어, 하나의 중층화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소위 중층적 노사관계라 함은 노동시장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중층화된 거버넌스(multi-level governance) 체제가 갖추어져 있고, 노사정 간의 상호작용도 그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경우 대표적으로 세 가지 수준에서 상이한 노사관계 수단들이 동시에 작동한다. 독일어 형용사 ‘게젯츨리히(gesetzlich)’, ‘타리플리히(tariflich)’, ‘베트립플리히(betrieblich)’ 등의 표현이 바로 그 세 가지를 가리킨다. 이들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각각 ‘법적’, ‘산별교섭적’, ‘기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노동시장과 관련한 주된 의제들은 항상 이 세 가지 수준에서 규제되고 규율되며, 각각이 상호 모순적이지 않고 보완적으로 작용하도록 노사관계의 행위주체들은 항시적인 조율작업에 노력을 기울인다. 

상대적으로 장기지속적인 법적인 수단하에서 그것을 전제로 한, 산업 및 광범위한 지역 수준에서의 산별교섭적 수단이 결정 및 갱신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기업 수준에서 노사대표 당사자들이 상위수준에서의 결정의 취지를 살림과 동시에 개별기업의 상황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것을 실행해 간다. 

특히 산별교섭이 주가 되는 단체교섭은 산업 수준의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가 1~2년을 주기로 해당 산업 노동시장의 임금, 노동시간 및 여타 고용과 관련된 주요사항들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며, 이는 법적 수준의 포괄적인 규정과 기업별 수준의 개별적인 규정 사이의 중범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 

독일에서는 비정규직과 관련한 규제의 정치도 바로 이 세 가지 수준 모두에서 동시에 작동을 한다. 파견근로나 기간제 근로에 대한 일반적인 노동법상의 규제가 존재하고, 파견근로자들의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 간의 단체협약이 마련되어 있으며, 일반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 간의 합의에서도 일정하게 비정규직의 고용정책과 관련한 원칙들이 마련된다. 개별 기업들에서는 반드시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가 중심이 된 기업별 노사합의(Betriebliche Vereinbarung)를 통하여, 이렇게 상위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이행하면서 해당기업 비정규직의 수와 노동조건을 결정해 간다. 

이렇듯 다층적 노사관계 구조하에서는 대량해고가 예상이 되는 상황에서도, 입법적 수단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노사관계상의 수단들을 통해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이루고, 대신 임금이나 노동시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기업의 부담을 경감해 주는 방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노사관계의 행위자들이 다층적 영역에서 활발히 상호작용하며 문제를 능동적으로 푸는 것과 거리가 멀다. 현재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이 대책 없이 방기되는 데에는 산별수준의 단체교섭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만일 산별노조가 대화파트너로 인정이 되고 그들이 개별기업의 노사관계를 넘어 산별노사관계 수준에서 비정규직 노동시장에 대해 규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된다면, 문제를 풀어가는 데 훨씬 유용했을 것이다. 

“일단 해보자”던 노동부의 자발적 직무유기

중층화된 거버넌스 구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우리 상황에서는, 노사관계상의 결정적인 자원을 쥐고 있는 정부가 그러한 구조를 형성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 정부는 이제 막 실행이 되는 현행법을 존치시키면서도, 실행차원에서 운영의 묘를 살려 기업들의 부담을 줄이는 여러 가지 보조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길을 찾았어야 했다. 

허나 정부는 애초에 ‘비정규직 일자리를 지키는 것’을 현 시기 비정규직을 위한 정책의 최대치라고 간주하면서, 입법적 수단에만 몰입하였다. 기업별 수준에서의 규제는 비정규직의 노조가입에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행법하에서는 ‘정규직 전환의 비용’과 ‘해고 비용’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후자가 낮다. 때문에 이뤄지는 해고에 대해서는 전환의 비용을 낮춰주는 대응 방식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업들에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주거나 전환과정이 완만히 이루어질 여지가 있도록 하는 방안을, 노사 간 단체교섭의 수단을 통해 구축하도록 권장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당장 하루아침에 전환을 하지 못하더라도 점진적으로 전환을 해 가는 방식이나, 회사의 경영상황을 투명하게 객관화하고 그것의 변화과정을 노사정 모두가 관찰을 하면서 세심하게 결정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방식 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비정규직법안의 힘겨웠던 탄생과정을 우리는 기억한다. 비정규직을 제도화하되 그것을 일시적인 고용형태로 하자는 것이었다. 법이 도입될 때, 그것의 폐지를 주장했던 이들에게 노동부가 이야기했던 것은 “일단 시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시행을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그것의 비용을 탓하는 것은 ‘자발적 직무유기’다. 재계 및 노동계와 동시에 적극적으로 접촉하면서, 법의 시행경과를 지켜보고 단계적으로 대응책을 강구하는 방안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일까? 현행법이 실행의 유예기간 속에 있었던 지난 1년 반 동안의 시기는 그러한 노력을 강구하라고 존재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새로운 제도가 그것이 존재하는 정책환경 안에 조응하고 융합되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련 행위자들의 조율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진정한 의미의 보호법이 되기 위해서는 노사정 모두 해당 법을 준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일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현행법의 시행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는 이 법을 만든 이전 정부와 해당 법을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사용자와,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타의 정책적 수단을 도입하고 노사관계 주체들을 독려하여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려고 하지 않은 현 정부의 임무방기에 대해 먼저 비판을 가해야 할 것이다. 

 노동의 질 함양을 위한 마스터플랜의 결핍 

정부가 노동의 질을 함양시키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는 정부가 중장기적으로 고용의 질 전반을 높이는 노동정책에 대한 세심한 비전하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정책을 가리킬 때 그것은 광의의 의미와 협의의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자가 대체로 노사관계정책과 거시적 노동시장정책, 나아가 사회정책까지 포괄하는 그야말로 노동체제의 총체적인 측면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노동의 질 내지 노동과정의 질을 의미하는 바, 노동의 미시적, 질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앞서 노사관계의 중층적 수단을 갖추기 위한 정책이 전자의 영역이라면, 필자가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바는 후자의 의미에서 노동정책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정책을 모색함에 있어 최우선적인 고려는 해당 일자리의 질적인 측면에 대한 점검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의 질’, ‘사회적 시민권’, 그리고 ‘삶의 기회’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일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상적인 경제사회 생활을 영위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미래를 설계해 가는데 인간적이고 합당한 노동조건과 노동대가를 향유하고 있는가?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상은 과연 우리의 경제와 산업발전에 부합하는 수준인가? 나아가 비정규직과 정규직 가운데 어떤 고용형태가 정상적인가? 현재 한국의 대다수 비정규직들이 비정규직으로서 목도하고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과 불공평은 치유대상인가, 아니면 그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인가? 

사실 비정규 노동의 질에 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진정한 개선방안이 부족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되어 왔던 지난 10여 년간 지속되어 왔던 문제이다. 그나마 지난 정부에서 마련된 비정규직 보호법은 미봉책이긴 하지만 제도적인 수단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나름대로 값진 성과라고 하겠다. 반면 현 정부는 그러한 취지를 부정한다. 어쩌면 비정규직을 정상적이라고 간주하고, 정규직을 비정상적인 ‘귀족 노동자들’로 정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특히 대선준비와 신정부 출범 준비 등의 시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2년간 정부의 노동정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취약근로자들의 고용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마스터플랜이 무엇인지, 그것이 지난 정부에서 마련된 ‘노사관계 로드맵에’서 어떠한 점을 계승하고 어떠한 점을 보완하려는 것인지 명확치 않다. 

“경제위기 때문에 복지국가 포기, 핑계 혹은 무능”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자리의 질을 따질 게재가 아니며, 일자리의 존재 자체가 최고의 복지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이는 지난 정부에서 명시적, 암묵적으로 표방하였던 복지국가화를 향한 노력을 포기한 채, 70년대 박정희식의 저임금-고성장 시대 노동시장정책으로 회귀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그것은 ‘핑계’ 아니면 ‘무능’ 둘 중에 하나로 보인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아무런 집단적 노사관계의 틀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적 노사관계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절대약자로 방치되어 있는 질적인 문제가 크다. 그럼에도 현재 노동시장, 특히 비정규직과 관련한 논의는 여전히 일자리의 개수를 중심으로 한 양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논쟁이 진행될 경우, 비정규직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든지 비정규직 몇 명이 해고의 위험에 처해 있다든지 하는 식의 논의에만 빠지게 된다. 

애초에 현 정부는 집권 당시부터 일자리의 질에 관한 정책과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정규직 문제가 지난 대통령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되지도 않았고, 현 여당은 그것을 부각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비정규직은 나쁜 일자리”라는 인식도 바꾸라고 말한다. 비정규직은 나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도적인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의 비정규직들은 선진국의 비정규직들에 비해 훨씬 더 나쁜 일자리의 상태에 처해 있고, 무엇보다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는 정규직에 비해 엄연히 그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필자는 지난 10년간 비정규직의 규제와 관련한 논란이 일 때마다, 매우 근본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체의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노동시장 유연화 일체를 거부하는 노동운동계 일각의 태도에 대해서 일정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단, 거기에는 일정한 전제조건이 있어야 했다. 비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제도적, 정책적 조치를 통해서 그들의 노동의 질이 비참해지지 않고, 고용과 재고용의 기회를 비롯한 여타 삶의 기회에 있어 정규직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정책당국과 노사당사자들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만일 비정규직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방치하고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너무나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노조를 설립할 권리와 사회보장을 받을 혜택을 모두 차단당하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고 그것을 개선할 정책이 도무지 추진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저질의 일자리는 없애나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설(說)과 설(說)의 대결’을 넘어서기 위하여

2009년 여름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정치는 설(說)과 설(說)의 대결에 머물고, 법의 개혁 여부에만 매몰되며, 노동세계의 질에 대한 고찰은 배제된 상태에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는, 특히 정부는 다음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보다 탄탄한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지식을 제시해야 하며, 더불어 그러한 정책지식생산의 기반을 형성키 위해 노사이익단체의 시각에 기초한 민간연구기구기관들이 일정한 수준의 자원하에 양질의 연구결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둘째, 법적인 수단과 제도개혁에만 집착하지 말고, 노사관계의 중층적 층위에서의 다양한 정책수단들을 개발하고 그것들 간의 호응을 통해 문제가 유연하게 다루어지도록 모색해야 한다. 셋째, 중장기적으로 노동세계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러한 노력 속에서 현재 심각한 수준에 처해 있는 비정규직의 노동의 질을 동반 상승시키기 위하여 힘을 쏟아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