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 앞에서 태도를 바꾼 시민과 정당을 보면서

노동사회

그의 죽음 앞에서 태도를 바꾼 시민과 정당을 보면서

편집국 0 3,115 2013.05.29 11:14

먼저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이런 글을 쓰는 것에 용기를 내본다. 뒤숭숭한 날들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과 감정, 그리고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말을 하기에 앞서 돌이켜 본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었을 때, 한나라당을 비롯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자유선진당이 철저한 검찰수사를 요구하며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막상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자 이명박 정부를 포함한 모든 정당과 정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를 애도하고 있다. 또한, 지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제법 큰 차이로 승리한 지난 17대 대선 결과가 말해주듯 상당수 시민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을 원망했었음에도, 그가 죽자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분향소와 영결식에 참여하는 놀라운 광경이 목도되고 있다.

죽음 이전과 이후 정당과 시민들의 입장과 태도가 변한 것이다. 나는 죽음 앞에서 정당과 시민들이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보고,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정치’란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연민의 정으로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과 주변을 성찰하는 힘과 능력, 그리고 그러한 성찰과정에서 생기는 신뢰의 형성이, 수많은 시민들을 참여의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러한 성찰의 계기와 새로운 시민성의 형성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정치가들이 일상적일 때도 그것을 의식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무엇이 정당들과 시민들의 태도를 바꾸게 한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죽음 뒤에 꿈틀대는, 살아 있는 정치

노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사건은 도덕성을 강조해온 진보적인 성향의 전직 대통령이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검찰 및 보수언론과의 진실공방 과정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깊은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이와 함께 그 자살 배경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작동되지 않는 정당정치’와 ‘자유주의 정치패러다임이 강요하는 긴장’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제기한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배경에 대해 ‘MB정권의 정치 보복설’, ‘검찰의 보복설’, ‘보수언론의 공격설’, ‘대화와 타협이 부재한 증오와 정치보복 관행’ 등 다양한 관점의 논리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좀 더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구조적인 차원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의적 공론장이 약화됨에 따른 ‘정당의 사인화’(personalization of political party)와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패러다임의 공격성’이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당의 사인화와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대의적 공론장을 활성화할 주체인 정당의 의원들이 특정 보스나 지도자 개인의 성향과 활동에 속박되어 자율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즉,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사회적 갈등을 정당들 간의 충분한 토의에 따라 새로운 정책과 판단기준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기존의 관행을 중시하는 검찰과 사법부에 넘김으로써, 여야관계를 ‘적대관계’로 변질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정파들 간의 갈등과 경쟁이 증오와 보복의 관점으로 폭력화되거나 비생산적으로 극단화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 같은 정당의 사인화와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자유주의적 정치패러다임’과 상호작용할 때 그 공격성과 파괴력이 더욱 커지게 된다.

정치 패러다임의 세 가지 전통

정치의 본질과 원리가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세 가지 전통이 있는 것 같다. 첫째, 개인의 사적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전통(개인적 자유주의)이고, 둘째는 개인의 사적 자유보다는 공적 자유(시민성)를 강조하는 공동체주의 전통(공동체 자유주의)이다. 셋째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다.

이 세 가지 가정과 패러다임은 인간 본성에서부터 공동체, 정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런데 자유주의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차이점이 많음에도 공유하는 점이 한 가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정치를 이익과 선호 및 정체성의 문제로 연관시키고, 이러한 것의 형성과 쇠퇴를 정치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익과 선호 및 정체성을 태어날 때부터 자연법적으로 혹은 사회경제 구조적으로 주어진 것, 그리고 외생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각 주체가 갖고 있는 이익과 선호 및 정체성을 변화 가능성이 없는 고정된 것으로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정적인 입장들에서는 정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호와 이익, 정체성을 표출하게 하거나 관철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정당화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투쟁하는 사람들 간의 합리적인 ‘최적점’과 ‘균형점’을 잡는 것이 정치의 목표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한 강력한 수단과 도구로 사람들 간의 논쟁, 타협, 거래, 절충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는 모든 계급투쟁, 이익투쟁, 정파투쟁, 전쟁 등등은 다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합의와 타협을 위한 극한 견제와 균형, 비정한 적대투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자유주의의 가정과 패러다임은 이와 다르다. 즉, 인간의 이익과 선호 및 정체성은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외생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인, 사회 및 공동체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고 변화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 간의 교류와 대화 및 토론 속에서 정체성이 변화 가능한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사람들이 타고난 이익, 선호, 정체성을 단순히 ‘이익조합’(이익집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과 공동선을 전제로 더 좋은 이익, 선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이익통합’을 하는 과정,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를 위해 대화와 설득, 토론, 대면관계가 중시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새로운 정체성의 창조가 강조된다. 또한 설사 그 과정에서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관계를 공동으로 성찰한다는 점이 중요시된다.

다성악적인 진보와 토의 민주주의의 절실함

앞서 제시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는 공통점은 한국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비록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을지라도, 주류적 시각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특성은 참여민주주의 열정과 이명박 정부의 강경모드가 강렬하게 부딪치는 과정, 그리고 급작스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국면에서 벌어지는 여야 그리고 진보-보수진영 간의 대결 양상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정치패러다임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고 필연적인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매우 비정한 논리다. 그리고 그 때문에 민주화 이후 우리 시대 상황에서는 적실성이 떨어지는 패러다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특히, 지구화, 후기산업화, 정보화, 탈물질화, 탈냉전이라는 시대적 전환 속에서 사람들 간의 이익, 선호, 정체성이 복잡성과 유연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정치의 비극과 비정함, 그리고 폭력성을 개선하고 상생하기 위해서는 선호, 이익, 정체성의 변화를 강조하는 공동체주의 정치 패러다임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대화와 토론을 통한 정체성의 변화와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추구하는 ‘토의 민주주의’ 모델이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토의 또는 숙의는 단순한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드러나는 토론이나 논쟁과는 구분된다. 진정한 의미의 토의는 이익이나 생각의 단순한 집성이 아니라, 충분한 설득 과정을 거쳐 이익과 생각의 근본적인 이익통합이 수반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이다.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합의에 도달하든지 혹은 도달하지 못하든지 간에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관계 속에서 결정이나 결정주체의 정통성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가는 대화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의는 토론이나 논쟁보다 고차원적이고 이상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을 딛고 피어나야 하는 ‘새로운 진보’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건이 무엇보다도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오에 기초한 복수정치, 공멸정치에서 벗어나 타인과 다양성에 기초한 공론정치, 상생의 정치가 부활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그 핵심은 토의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정당정치의 정상화다. 그러한 맥락에서 특히, 민주화 이후 탈냉전과 탈이념사회라는 전환기적 시대 상황에서 진보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전 시기는 대체로 보수독점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진보주의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선과 이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진보주의만이 절대선이자 절대 진리라는 편향성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민주화 이전의 진보는 단성악(單聲樂)적인 진보였다. 그러나 다양성과 복잡성 및 유동성이 커지는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추상적인 이념에 기초하기 보다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기초한 다성악(多聲樂)적인 진보가 필요하다. 즉, 진보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다성악적인 세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보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 중에 하나의 의견 정도로,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잠정적인 결론 수준에서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던지는 수많은 메시지 중에서 내 가슴에 묵직하게 차오르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에 대한 증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음은 자명하다.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새롭게 짜인 정치지형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에너지를 새롭게 부활시키는 길일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