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고용시스템과 은행업 노동시장 내 성별불평등의 변화

노동사회

유연고용시스템과 은행업 노동시장 내 성별불평등의 변화

편집국 0 3,982 2013.05.2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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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동일 제목 석사학위 논문을 수정·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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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본 연구는 2006년 12월 비정규 관련법의 제·개정 이후 은행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정규직화’ 방안들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법 시행 이후 은행업 노사에 의해 합의된 ‘정규직화’ 방안들은 대체로 고용안정과 기업복지를 보장하는 대신 기존 정규직과는 다른 임금·승진체계를 유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중요한 지점은 은행업 비정규고용이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던 관계로, 이러한 변화가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한 처우의 개선인 동시에 1990년대 이후 폐기된 ‘여행원제’와 유사한 불평등한 고용구조의 부활이라는 측면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노동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상이하게 대립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란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대신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짚어보고자 한다. 즉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정규직화’가 1990년대 이전의 ‘여행원제’와 유사성을 갖게 된 것인지, 또 그럼에도 왜 그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독해되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집단이 갖는 차이, 즉 여성 내부에 발생한 고용형태에 의한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임시·일용직으로 파악되는 비정규직노동자 규모가 전체 임금근로자의 절반을 넘어서면서부터이지만, 실상 여성의 경우 비정규노동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노동시장에서 한 번도 정규직 비율이 과반을 넘어선 적이 없다는 사실은 ‘여성 비정규직 문제’가 경제위기 이전부터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추동되어 온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가 여성 비정규노동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규모의 증대뿐 아니라, 당시의 구조조정이 여성 비정규직의 질적 구성 나아가 여성 노동시장 전체의 구조에 불러일으킨 변화를 중심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한국 여성 노동시장에서 두드러졌던 한 가지 특징은, 기존에는 주로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여성의 비정규고용이 전 산업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내부노동시장을 구축했던 대규모 사업장들까지도 인원감축과 비정규직 채용을 통해 비용절감을 꾀하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1차적 고용변화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상대적으로 ‘나은’ 여성 일자리들이 위협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업장들은 그간 성차별에 대한 여성 노동자 집단 및 다양한 운동세력들의 문제제기와 이에 따른 법·제도의 마련, 그리고 사업장 차원의 차별시정 등을 통해 노동시장의 명시적인 성차별들이 개선돼 온 영역이라는 점에서,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은 노동시장 내 젠더구조를 한 단계 후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경제위기 이후 여성 비정규직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여성 비정규직 문제는 여성노동 분야의 가시적인 연구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후반 여성 비정규직의 규모와 특징(장지연, 2001)을 파악하려는 노력들을 시작으로,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 과정이 갖는 성차별성(강이수, 1999; 조순경, 1999; 장하진, 2000)이 규명되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 비정규직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성별과 고용형태에 의한 이중적 차별들(강현아, 2004)이 주요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비정규직의 확산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유연고용시스템으로의 변화 과정에서 기존의 불평등한 젠더구조가 성차별적 고용구조로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뚜렷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에서 ‘성별’이라는 변수가 가지는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은 여성 비정규직 문제가 기존의 성차별 문제와 공유하는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비정규고용, 나아가 이를 포함하는 유연고용시스템의 도입이 기존 성별불평등 문제에 가져온 변화의 지점들을 포착하는 데는 한계를 가진다. 즉 경제위기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및 유연고용시스템으로 인해 조직 내 고용구조 형성에 미치는 내·외부 요인들의 영향력과 그 복잡성이 증대함에 따라, 여성 비정규직 문제 역시 여성집단과 남성집단의 문제, 혹은 노동시장의 가부장성으로 치환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의 관계 속에서 파악될 필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노동시장의 성별불평등 문제를 제기해 온 주요 주체가 여성 노동자집단임을 고려할 때, 위기 이후 여성 노동력 내부에 발생한 고용형태라는 분절 지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간 성별을 고려하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 문제와 연계해 살펴보려는 시도들(Smith, 1997; Davis-Blake et al., 2003; 이병훈, 2003)이 있었지만, 여성 비정규직의 경우 이는 여성 노동시장의 양극화라는 결과를 중심으로 논의됐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틀 안에서 여성노동 문제는 가족책임과 승진차별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 정규직의 문제’와 차별 및 고용불안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 비정규직 문제’로 이분화 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은행업 고용구조의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 이후 유연고용시스템의 도입이 은행업 노동시장의 성별불평등 양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특히 경제위기 이후의 시기를 2000년 이후의 ‘유연화 시기’와 비정규 관련법 이후의 ‘재규제 시기’로 구분하여, 이러한 상반된 환경 변화에도 성별불평등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지·재생산되는지, 또한 여성노동자집단의 분절을 중심으로 하는 내부 조직동학이 그러한 재생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찰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현재 ‘정규직화’의 발생 배경과 그 의미를 유추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대응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노동시장 유연화와 성차별적 분절의 체계화

1) 시장 영향력의 강화와 법·제도의 지체


한국사회에서 은행업은 경제위기 이후 극심한 경제적 환경의 변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간 준공공기관과 같이 비교적 안정적인 경영환경 속에 있던 국내 은행들을 세계화의 영향력에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비롯해 은행업 노동시장에 미치는 시장의 영향력도 유래 없이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 은행들이 단순히 비용절감과 수량적 유연성 확보에만 주력했던 것은 아니다. 은행들은 격화되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서비스 질’을 향상시켜야 하는 이중의 압력을 받게 되었고(Kitay & Cutcher, 2007), 이러한 상충하는 압력 속에서 사용자들은 통합과 분절 사이에서 비정규고용을 다양화·체계화시키는 전략을 추구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시장 영향력의 증대와 사용자의 전략에 대해 기존에 노동시장을 규제하던 법·제도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1988년부터 시행되어 1992년 여행원제가 폐지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차별이 제거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남녀고용평등법’은, 공유된 위기의식과 강화된 남성 생계부양자 논리 속에서 발생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자발적’ 퇴직을 규제할 수 없었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안정을 되찾은 은행들이 막대한 업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상당수 퇴직 여행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하는 과정에서도 기존의 법률은 규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재고용 여성노동자들의 인적 속성 및 그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내용이 정규직노동자들의 그것과 동일하거나 상당히 유사했음에도, 여성 내부에 발생한 고용형태에 의한 분절로 인해 이들 여성 비정규직노동자 집단이 경험하는 차별은 더 이상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로 읽히지 않게 된 것이다. 

2) 여성 내부 분절과 여성 노동 의제의 협소화

이러한 외부환경 변화와 함께 조직 내부동학의 변화는 사용자에 의한 일방적인 고용구조 악화 속에서 노동자집단의 문제제기 능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특히 경제위기 당시 은행업에서는 성차별적 구조조정으로 다수의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퇴장하였고, 이로 인해 여성 내에 고용형태를 중심으로 하는 분절이 발생하면서 은행업 여성노동운동의 방향은 대폭 전환되었다. 여기에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여성 정규직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규직노동자로서의 고용불안과 임금극대화 욕구를 동일하게 가지게 된 것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집중된 구조조정으로 인해 더욱 큰 심리적 불안을 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생존해냈다는 사실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게 되면서 남성과 동등하게 일 하고 인정받는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개인적 적응의 과정은 여성노동운동에 있어서는 다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의 면접에 응한 대부분의 노동조합 여성 간부들은 차별적 조건들이 제거된 상황에서 여성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성별불평등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생존자’ 여성 정규직노동자들에 한해서는 실제로 임금이나 승진 등에 있어서의 차별이 이전에 비해 상당부분 개선된 면이 있다. 신인사제도가 도입된 하나은행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업무를 맡든 임금과 관련해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남녀 간 임금차별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은행업 내 여성노동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또한 경제위기 당시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퇴직하면서 상대적으로 살아남은 여성들의 책임자 승진이 훨씬 수월해진 측면도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은행업 내 승진에 있어서의 성차별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면접 대상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고, 오히려 최근에는 여성의 승진이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면서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응답도 다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 내 여성부문은 모성보호와 관련된 부분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채용, 승진, 배치와 같이 임금 이외에 여성의 직장 내 경력구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되었다. 또한 법 규정보다 더욱 앞서나가 있는 모성보호 규정과 직접적인 성차별의 철폐를 근거로, 은행업 내 여성노동에 대한 차별이 상당부분 제거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상 은행업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대거 탈락하고 비정규직으로 재진입하는 과정이 성별에 근거한 차별적 성격을 보였고, 텔러 업무의 상당 부분이 비정규직으로 대체됨으로써 2008년에 이르면 노동조합 내 여성 정규직 비율이 30%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남아 있는 차별을 사회 전반의 보수성과 가부장성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여성 비정규직 문제와는 거리두기를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부터 2006년에 이르기까지 금융노조가 사용자와 체결한 단체협상의 여성 관련 사안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채용이나 배치와 관련된 성차별 등 금지 항목과 남녀기회균등부여 항목은 현재에도 초기의 막연한 선언적 문구로 남아있는 반면, 모성보호, 산전후휴가 및 유사산휴가, 육아휴직, 불임휴직, 가족간호휴직 등의 항목들은 매년 구체적인 내용들을 추가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이 기간 동안 노동조합의 여성 관련 활동 내용의 검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000~2006년 기간 동안 『금융노조 활동보고』에는 여성의 채용과 관련된 기본적인 통계 수치는 물론이고 채용과 배치에 대한 활동 내용이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듯 여성노동 문제의 상당 부분이 여성 비정규직노동자 집단에 이전되는 동시에 여성 정규직노동자 집단의 거리두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은행업 노동운동 안에서 여성 비정규직 문제는 일반 비정규직 문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 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에 따라 기본적으로 비정규고용에 대한 동의가 유지되었으며, 다만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 비율과 처우에 대한 노동조합 차원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인다. 노동조합 간부들 및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면접을 통해 이러한 개입에는 노동자들 및 노동조합의 문제의식과 비교적 양호한 노사관계뿐 아니라, 비정규직의 증가가 정규직노동자들의 노동조건 및 노동운동 역량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한 고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 여성 비정규 고용의 다양화와 체계화

이렇듯 은행업 고용구조에 대한 시장 영향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법·제도 및 노동조합의 개입이 지체되면서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 고용구조는 상당 부분 사용자 전략에 의해 주도되었다. 앞서 지적한 비용 절감과 서비스 질 제고라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자들은 고객시장 세분화를 통한 영업력 극대화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 텔러 업무의 상당 부분은 기계와 콜센터/후선지원센터 등을 통해 대체되었다. 특히 콜센터와 후선지원센터는 그 규모가 크고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영역으로, 새롭게 발생한 이러한 ‘여성 업무’들이 주로 비정규직으로 충원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특히 은행들은 대체로 같은 비정규직임에도 영업점 창구, 콜센터, 후선지원센터 인력들의 속성을 달리해서 채용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보상에서도 차등을 두고 있다. 또한 영업점 텔러의 경우와 달리, 콜센터나 후선지원센터 인력의 경우 상당 부분 간접고용의 방식으로 인력을 운용하고 있다. 

반면 영업점 텔러의 경우 비정규직의 비율 및 그들에 대한 처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규제되는 측면이 있다. 2004년 비정규직에 대한 별도의 합의서가 만들어지면서 비정규직 비율이 30%대 수준으로 규제되었고, 이들에 대해 정규직의 임금인상률을 상회하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정규직 전환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은행들은 기존에 퇴직 여행원들을 대상으로 하던 영업점 차원의 선발 과정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즉, 2000년대 들어 은행들의 비정규직 채용 방식은 중앙의 인사부서로 집중화 되었고, 선발 과정 또한 상당히 까다로워졌다. 이 시기 계약직으로 입사한 면접대상자들은 공통적으로 서류전형과 1, 2차 면접을 거쳐 입행하였고, 그 뒤에도 4주에 걸친 연수를 마치고서야 정식으로 영업점 발령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계약직 텔러의 인력 구성은 20대 대졸 여성들로 변화되었고, 이들에 대한 반복적 계약갱신이 관행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은행업 비정규고용은 기존 성차별의 영향을 받아 성별에 따라 불평등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성별불평등과 연속성을 가지지만, 일단 성별과 고용형태에 의한 이중구조가 도입된 이후에는 여성 내부 분절로 인해 적극적인 성차별적 행위 없이도 성별불평등이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 비정규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이러한 비정규고용이 기회주의적인 고용관행을 넘어 체계적인 인사관리전략으로 탈바꿈하면서, 이제는 노사 모두 차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그것이 차별적인지의 여부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보여 왔다.

3. 노동시장 재규제와 차별의 합리화

1) 비정규 관련법의 가능성과 한계


많은 논란을 거쳐 2006년 통과된 비정규 법안은 노동계와 재계 모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노동계는 법안 통과로 비정규직의 전면적인 확대가 가능해졌다는 점을 비판한 반면, 재계에서는 법안이 이미 전 세계적인 추세인 고용의 유연성을 제약함으로써 노동시장의 경직성 강화와 실업 증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초기 논의 시기의 비정규 관련법에 대한 노·사·정 간 의견 차이와 2006년 통과된 비정규법안의 내용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면, 논란이 되던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주로 정부와 재계가 주장하던 대로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조처가 수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는 계약기간 만료로 인한 해고에서 완전한 정규직화에 이르기까지 산업·기업별 특수성과 노사의 선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제한적인 노동시장 재규제에 대응해 은행업 사용자들은 어떠한 선택지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은행의 기존 전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경제위기 이후 은행들이 비용절감과 서비스 질을 모두 확보하기 위해 △여성 비정규직 간 인적 속성 및 처우에서 차등을 두고, △특히 텔러들을 중심으로 20대 대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입직구를 신설했으며, △이들에게 계약의 반복갱신과 임금·복지 측면에서 부분적인 수혜를 제공하면서 이들의 업무 범위를 정규직과 유사하게 유지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법·제도적 변화에도 애초에 은행업 사용자들에게 있어 비정규직에 대한 대량 해고나 외주화와 같은 방안은 선택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상당 부분 정규직의 업무를 대체하고 있었고 은행의 수익 활동에 있어 이들의 숙련과 몰입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러 사용자의 선택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이나 정규직노동자 집단들 역시도 이러한 해결방안에 대해 ‘차선’ 혹은 ‘차악’으로서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접에 참여했던 모든 노동조합 간부들이 완전한 정규직화가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제한적 정규직화가 그들 내부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안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즉 노동자 집단 내부에 비정규 노동자들의 불완전한 ‘정규직화’에 대한 유인이 존재했다는 것은, 노동자 내부의 분절이 끊임없이 새로운 분절을 만들어내며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을 암시한다. 

2) 제한적 차별의식과 분절지점의 부각

은행업 정규직노동자들은 대체로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가 차별적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영업점에서 정규직과 섞여 일하는 비정규직 텔러들의 경우 이들과 정규직노동자들 간의 심리적 관계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비교적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성과급이나 평가 등이 주로 영업점 단위로 이뤄짐에 따라 영업점 실적이 매우 중요해진 데 반해, 영업점당 배정 인원은 과거에 비해 확연히 줄어듦으로써 정규직노동자 개개인이 받는 실적 압박과 노동 강도가 강화되는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즉 정규직노동자만큼이나 업무능력이 뛰어난 비정규직노동자가 빈번하게 존재함을 고려할 때, 이들의 협조와 업무실적은 정규직노동자들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며, 따라서 이들은 같은 영업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영업점의 영업실적에 대해 좀 더 많은 기여를 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측면은 비정규직에 대한 개선 조치가 정규직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이해를 건드리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무리 없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정규직노동자 자신들의 고용이나 임금 등의 변화를 전제로 할 때, 정규직노동자들은 훨씬 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경제위기 이후 정규직노동자들은 대체로 사용자가 제공할 수 있는 ‘파이’의 절대적인 양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내면화함으로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조건을 ‘제로섬’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정규직노동자들 사이에서 비정규직의 완전한 정규직화에 대한 동의를 형성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경제위기 이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정규직노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입직구를 통해 은행업 노동시장에 진입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다른 인적자본이라는 전제를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모두가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특히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업종으로 부각되면서 ‘정규직 은행원’이라는 일자리에 대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경쟁을 뚫고 입행에 성공한 정규직노동자들이 스스로를 핵심노동자로 규정짓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이와 같이 정규직노동자로서의 이해·심리적 관계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 정규직노동자로서 여성 비정규직노동자의 고용구조 및 배치와 관련해 특수한 이해를 갖는다. 은행업무의 성별분리가 지속되면서 그간 여성 정규직노동자들과 여성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상당히 유사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입행 초기 여성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업무교육을 받는 것은 여성 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흔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 관련법 시행 이후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간 업무 구분의 도입은, 여성 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일종의 기회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여성 정규직 면접 대상자 중 두 명은 비정규 관련법 이후 입·지급 창구에서 VIP룸으로 재배치를 받았고(VIP룸에 있던 비정규직 직원들은 입·지급 창구로 이동), 두 대상자 모두 그러한 배치가 자신의 경력에 있어서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비정규직이 동등한 정규직으로 전환될 경우 이들은 승진 등에서의 경쟁에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과 갈등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여성 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분절 이외에도 위기 이후 한동안 신규 채용이 중단되거나 소규모로 이루어지면서 여성 정규직 내부에서는 세대에 따른 단절이 발생하였다. 면접에 응했던 대부분의 여성 노동조합 간부들이 지적한 것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균열보다는 세대에 따른 사고방식의 차이였다. 경제위기 이후 입행한 은행업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개념과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에 대해 이전에 비해 훨씬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 성과급이나 직군제와 같이 기존에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대항하던 인사관리방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성노동자 내부에서는 결혼퇴직제나 여행원제, 그리고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차별적인 처우 등 은행업 노동시장 내 성차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화되었으며, 이는 은행업 내 여성노동운동의 약화와 의제의 협소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이들에게 있어 은행업 내 여성 비정규직 문제는 이제 성별에 의한 문제라기보다는 고용형태에 의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3) 고용의 보장과 업무 구분에 따른 차별의 합리화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비정규 관련법은 산업·기업별로 다양한 방식의 비정규 고용구조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은행업 내에서도 이는 하위직급제, 분리직군제, 무기계약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그럼에도 이들 방식들은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대신 업무의 분리를 통해 차별시비를 피해가려 하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용절감과 서비스 질 모두를 확보하려는 은행업 사용자의 전략에 부합하는 방식인 동시에,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재규제 단계에 이르러 더욱 부각된 노동자집단 간 분절지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의 딜레마에 따른 선택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법들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고용구조의 성별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①하위직급제: 여성 정규직의 대체 문제

F은행을 비롯한 지방은행을 중심으로 시도된 ‘하위직급제’는 텔러 업무에 대한 계약직 인력 사용을 중단하고 채용 시부터 모든 인력에게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한편, 새로 신설된 최하위직급인 7급 정규직직원들을 대상으로 6급으로의 진급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비정규직노동자들을 기존의 임금·승진체계에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완전한 정규직화를 제외하고 가장 바람직한 정규직 전환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실제로 이러한 전환방법에 대한 정규/비정규 노동자들의 만족도 역시 큰 편이어서, 현재 무기계약제를 유지하고 있는 타 은행 노동조합들 역시 이러한 전환 방식으로의 변경을 준비하거나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시켜 F은행의 조직 내 여성의 고용 현황을 살펴보면 이러한 해법이 기존의 성별불평등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1]은 F은행이 지방은행이라는 특징 이외에도 조직 내 여성의 비율이 타 은행들에 비해 뚜렷하게 낮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5년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 이전까지 여성노동자는 조직 내에서 채 20%도 되지 않았다. 특히 F은행은 계속적으로 여성 정규직 채용 비율을 남성의 10% 수준으로 유지해 왔으며, 이에 대해 별다른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은행 측은 여성 정규직 채용의 기준을 평균 기준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 비정규직노동자 집단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만을 가라앉히고자 했다. 또한 여성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도 비교적 다양한 업무 기회를 제공하고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계약을 해지하지 않음으로써, 여성 비정규직 노동력을 기존의 여성 정규직 노동력을 대체하는 하나의 노동자집단으로 정착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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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분리직군제: 노동의 성별화와 여성노동의 저평가

A은행은 2006년 계약직 인력의 정규직화와 관련해 은행권 내에서 가장 먼저 대책을 발표했다. A은행의 방안은 영업점 창구 담당 비정규직, 사무지원 업무직, 콜센터에 근무 중인 계약직 인력들을 기존의 정규직과 분리된 별도의 직군에 배치함으로써 각종 복리후생은 동일하게 지급하는 대신 임금·승진 체계를 달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안이 발표된 뒤 이에 대한 상당한 비판이 일어났는데, 이는 여성 노동력이 집중되어 있는 세 개의 비정규직 업무를 정규직과 그 체계를 달리하는 직군들에 배치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간접적인 차별이 발생하게 되며, 더욱이 전환된 노동자들이 분리된 직군 내에서 제한적인 업무만을 수행함으로써 경력개발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들에 대한 차별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이주희, 2007).

그러나 전환된 노동자들과의 면접 결과 실제로 분리직군제가 운영되는 방식은 이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업무 영역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환직군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업무지식과 몰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전환직군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개인금융서비스직군 업무뿐 아니라 기존 정규직으로 구성된 개인금융직군 업무에 대해서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으며, 이를 근거로 조만간 직군 간 이동 가능성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A은행의 경우에는 여성이 다수를 이루는 전환직군의 직무와 임금, 그리고 승진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여성의 노동에 대한 기존의 불합리한 저평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분리직군제가 단순히 비정규직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아니라 기존 정규직노동자들을 포괄하는 직군제로의 변화 과정의 일환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1]은 A은행의 직군별 남녀인력 비율이 매우 불균등함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 비정규직뿐 아니라 여성 정규직들도 개인금융과 같이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직무에 배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직군의 절대 다수를 여성으로 채우는 사용자의 논리는 여성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여성 정규직노동자들에게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현재 여성들이 그들 사이의 완전한 분절로 인해 이러한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해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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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무기계약제: 업무의 임의적 구분과 성별 위계의 재생산

은행들의 대응들은 하위직급제와 분리직군제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용의 안정에 초점을 맞추는 무기계약제로 수렴하는 양상을 보인다. 무기계약제는 고용안정을 통해 조직의 안정성과 서비스 질을 제고하는 대신, 갑작스러운 비용 상승을 동반하지 않아 인건비 부담이 큰 대규모 시중 은행들에게서 주로 관찰된다. 하지만 무기계약제 내에서도 정규직화 및 하위직급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등 다양한 방식들이 나타나는데, 무기계약제 전환 이후 하위직급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B은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은행에서 이러한 혼합구조가 안정적인 고용구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들은 대체로 기간제, 무기계약제, 정규직 전환 제도를 모두 이용하고 있으며, 기간제에서 정규직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인 경력 구조를 설치해 이를 일종의 스크리닝 과정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C은행과 E은행이 기간제, 무기계약제, 하위직급 및 정규직으로 구성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도입했다면, D은행은 무기계약직 내에도 다양한 층위를 둠으로써 타 은행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무기계약 전환 이후 근무태도 변화 등의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기간제 노동자인 지원텔러에서부터 대졸 공채 정규직과 동등한 정규직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짧게 잡아도 8년 정도가 소요되며, 이에 따라서 은행은 이러한 승급 코스 중간에 경력개발을 스스로 중단할 수 있는 방안까지도 마련해두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높은 임금과 정규직과 동일한 복리후생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괜찮은’ 직장이 될 것이라는 것이 노동조합 간부들의 설명이다. 

이러한 승급 단계의 세분화는 비정규 관련법의 차별금지 조항에 따라 업무의 세분화를 동반하게 된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전환직의 업무 영역을 D은행과 같이 소매영업으로 제한하는 것은 기존의 기업영업과 소매영업 사이의 위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여성 정규직의 다수가 소매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렇듯 소매영업 업무만을 잘게 쪼갠다고 할 때 이는 장기적으로 여성 정규직고용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내부화 기제를 가지지 않은 A은행의 분리직군제나 B은행의 무기계약제에 비해서는 나은 시도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구분의 근거가 임의적일뿐 아니라 업무의 기존 성별 위계를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정규직을 포함하는 여성 노동시장 전체에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4. 결론: 경제위기 이후 성별불평등의 변화와 함의

이러한 고용구조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경제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은행업 노동시장 성별불평등에서 ‘젠더’라는 요인이 점차 흐릿해졌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 내 노동시장은 유연고용시스템의 도입과 노동시장 재규제라는 상반된 환경 요인의 변화에도 점진적으로 비정규고용이 체계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결국 노동자집단 사이의 분절을 명확히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분절이 주로 여성 노동자집단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 분절은 여성 정규직노동자에게 ‘정규직’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을 중심으로 비정규고용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개입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은행업 내에서 여성 비정규고용이 정착되는 과정, 특히 최근의 ‘정규직화’ 시도들 속에서 기존의 정규직과 차별화된 인사관리체계가 정착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업무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거의 개입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 노동시장의 변화는 여성 노동자 내부의 분절이 재생산되고 고착화되어가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먼저 ‘여성 노동’의 상당 부분이 기존의 여성 정규직노동자와는 다른 고용형태의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은행업 노동시장 내 구성원의 비율에 있어 성별불균형 역시 재생산되었다. 즉 전체 고용 중 남성 정규직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에 미달하는 여성의 고용 비율은 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또는 전환직)으로 양분되었다. 다음으로 비정규 관련법을 계기로 비정규 고용관계 또한 다변화되면서 남성 노동자집단과는 달리 여성 노동자집단 내부는 고용형태를 축으로 그 분절의 정도가 심화되었다. 즉 고용안정성, 복리후생, 임금·승진체계 등을 달리하는 다양한 여성 노동자집단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성 내부의 분절은 은행업 내 성별 분절,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관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는 크게 △노동의 성별화와 성별 위계의 유지, △젠더의 비가시화와 자발성의 강조, △권력 자원의 분절과 약화라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 내 직무 배치를 노동자 집단별로 살펴본 결과, 남성 정규직과 여성 정규직 사이에는 직무 분리가 공고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여성 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은 업무내용에 중첩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즉 여성 노동자들은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대체로 소매영업 부문에 배치되었으며, 여기에서 고용형태의 구분은 업무의 내용 또는 포괄 범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문제는 기존에 존재하던 ‘남성 업무’와 ‘여성 업무’, 즉 기업영업과 소매영업 사이의 위계가 소매영업의 중요성이 더해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은행업 조직 내에서 여성 내부에 정규직/비정규직의 위계가 존재함과 동시에, 정규직 내에서도 남성/여성 사이의 위계가 유지되는 ‘삼중 피라미드식 노동시장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삼중 구조는 여성 내부의 분절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젠더가 비가시화 되고 자발성이 강조되는 한편, 권력 자원이 분절·약화되는 또 다른 성별 분절의 특징들로 인해 유지·강화된다. 즉 오늘날 은행업 노동시장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직접적인 성차별적 행태가 드러나지 않고, 다만 과거 차별의 결과인 성차별적 분절 구조, 즉 여성 내부에 집중된 분절로 인해 여성들이 ‘여성 업무’에 집중되는 현상이 합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여성 비정규직의 경우 이러한 합리화의 기제는 ‘낮은’ 인적 자본이며, 여성 정규직의 경우는 특정 업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와, 경제위기 이후의 노동 강도 심화에 따른 여성의 자발적인 선택의 논리이다. 

이에 더해 여성 노동자 집단 내부의 분절은 그들의 권력 자원 역시 분절시켰고, 기본적으로 수를 통해 이해를 실현하는 노동조합운동 내에서의 이러한 분절은 각 집단의 문제해결 역량을 제약할 수 있다. 특히 조직 내 고용관계가 점점 더 다변화되면서 각 집단에서 중요시되는 의제들 역시 다변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해들은 때로 우선순위를 두고 경쟁하거나 당장의 이익을 두고 상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상의 연구 결과는 비정규 관련법에 대한 은행들의 다양한 대응과 이에 대한 논란들이 사실상 경제위기 이후 변화된 성별불평등 양상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경제위기 이후 은행업 내 유연고용시스템의 도입은 여성 내부에 고용형태에 의한 분절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분절들은 명시적인 성차별적 행위 없이도 성별불평등한 결과가 재생산되는 데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 비정규직 문제는 분명 기존 성차별의 연장선상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된 조건 위에서 기존 성차별의 결과들을 어떻게 해소시켜 나갈 것인지가 향후 성별불평등 문제의 핵심 논의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다양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형태들을 포함한 여성 노동시장 전체가 고려되어야 하며, 각 여성 노동자집단들의 개별 문제는 물론 그러한 문제들이 갖는 연관성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이렇듯 차별이 합리화되는 오늘날의 고용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형성하는 데 성별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개입과 시도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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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