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일반노조의 홈에버 노동자 조직화 사례

노동사회

이랜드일반노조의 홈에버 노동자 조직화 사례

편집국 0 7,907 2013.05.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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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일반노조의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직들의 조직화를 위한 지도부의 노력이 바탕이 됐다. 2007년 7월 홈에버 상암점 점거 투쟁 모습   ▷ 참세상 ]

Ⅰ. 들어가는 말

510일간의 이랜드일반노조 투쟁이 지속되면서 유통업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07년 이랜드기업이 인수한 한국까르푸는 1996년 부천 중동점을 포함한 3개의 점포(1,166명)로 시작하여, 1997년 4개 점포(1,101명, 조합원 약 150명), 2006년에는 32개 점포(6,025명)로 성장한 다국적 기업이었다. 그런데 2006년 4월 한국까르푸가 우리나라에서 철수하면서, 해당 매장을 인수한 기업은 노사관계가 갈등적인 이랜드기업이었다. 당시 이랜드 기업은 뉴코아 및 2001 아울렛 그리고 해태유통 등을 포함한 대형 유통업체(시장 점유율 약 11.3%)로 성장한 상태였다. 이런 측면에서 이랜드일반노조의 홈에버(현 홈플러스) 노동자 조직화 과정은 유통업 노동조합의 미조직·비정규 조직화 사례로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Ⅱ. 이랜드일반노조의 홈에버 노동자 조직화 과정

한국까르푸 노조 시기부터 이랜드일반노조의 조직화 형태는 대체로 △노조 집행부가 조직한 곳(인천 계산점), △노동자 스스로 조직한 곳(인천 구월점, 서울 면목 및 방학점), △지역 대책위가 조직한 곳(서울 상암 월드컵몰점)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시기별 구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 한국까르푸 시기 노조 조직화 과정

한국까르푸 노조의 경우 1997년 2개 점포(결성 당시 일산 115명, 대전 151명,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 변경)에서 노조가 결성된 이후, 사측의 노조 파괴 작업과 파업(대전 32일) 등으로 인해 노조 활동이 정체된 상태였다. 2002년까지 한국까르푸 노조는 특별한 활동이 없었던 상태였으나, 2002년 부천 중동점에서 노조가 건설(60여 명)된 후 약 300일 정도의 파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동점 파업 이후에도 한국까르푸 노조는 2003년까지 노조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으며, 2003년에서야 겨우 처음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당시 단체협약의 핵심 쟁점은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문제(1명 가입, 사측의 정규직 인사승진 후 노조 탈퇴)였으며, 매니저와 비정규직이 노조 가입 대상에서 제외된 사측 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는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던 매니저들이나 비정규직은 비공개로 노조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런데 이 시기 까르푸 노조의 집행부가 교체되었다. 당시 파업 중이던 노조 내부에서는 현장복귀와 전면파업 문제로 내부 논쟁이 진행됐는데, 위원장이 개별적으로 현장복귀를 하면서 사퇴함에 따라(2003.10) 이랜드일반노조 김경욱 전(前) 위원장(2003.11, 당시 중동점 사무장)이 노동조합을 이끌게 된 것이다. 새 집행부를 맡은 김경욱 위원장(반전임)은 사무국장(비전임)과 함께 침체된 노조를 재조직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갔다. 당시 집행부는 2006년 초까지 약 3년 동안 하루 3개의 점포씩 나누어 동료 직원들을 만나러 다녔으며, 업무가 끝난 새벽(01:00~02:00시)에 조합원 간담회를 진행했다. 또한 노조 재조직화를 하면서 노조 소식지를 발간하여 직원 휴게실 등에 배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이 다소 증가해, 2002년 말 62명이었던 조합원은 2005년 말에는 339명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당시 조합원이 증가한 이유 중 하나는 2004년 까르푸 노조가 비정규직에게도 주5일제 적용이 가능토록 특별 단체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특히 면목점의 경우 이를 계기로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거의 모두 노조에 가입했으며, 전국적으로는 약 100여 명의 비정규직이 가입한 상태였다. 또한 2005년 10월 노조 가입 범위에 비정규직을 포함하는 내용의 단체협약 합의문이 확정된 것이 비정규직 조합원 증가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2005년 당시 까르푸 매장 29개 점포 중 노조가 결성된 곳은 수도권 중심의 10개 점포에 불과했고, 나머지 19개 매장에는 노조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였다.

1) 노조 집행부가 조직화 시도: 인천 까르푸 계산점

인천 계산점 조직화는 김경욱 위원장(당시 부천 중동점 사무장)이 2003년 부천 중동점 파업 이후 연수원(인천 계산점 4층)으로 전보 발령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측은 노조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김경욱 위원장을 연수원으로 발령을 냈으나, 김경욱 위원장은 교육에 참여한 직원들에게 노조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에 사측은 연수원에 근무하던 김경욱 위원장을 같은 건물 아래 3층 매장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하지만 연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당시 계산점 직원들 120명이 김경욱 위원장의 노조 조직화 활동으로 인해 오히려 노조에 가입했다. 당시 인천 계산점 직원들이 약 180명 정도였으니 사실상 관리자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노조에 가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2) 현장 주체들이 조직화 시도: 인천 까르푸 구월점

인천 구월점의 경우 2005년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허용 시기(단체협약)와 맞물려 비정규직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당시 구월점은 주5일제 시행 이후에도 매장 매출을 위해 토요일 연장근무(2시간)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했다. 결국 노조 확인을 통해 이러한 토요 연장근무가 불법으로 드러나자, 현장 조합원들 중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한 것이었다. 당시 까르푸 매장 관리자들의 경우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입사하여 정규직이 된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일부 관리자들을 제외하고는 실무 능력이나 관리 노하우가 전혀 없는 사원(특히 남성)이 관리자가 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에 따라 까르푸의 주요 매장에서는 토요일 연장근무와 관리자들의 비인격적인 관리로 인해 현장의 불만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주5일 할 때 근무시간을 8시간이 아니라 그걸 연장시켜서 장사가 잘되는 주말에는 1, 2시간씩이라도 더 시켜서 하려고 했던 거 때문이에요. 여기 2~3년 일을 한 사람들은 다 식구 같아요. 수산에 누구 언니, 야채의 누구 언니, 정육에 누구 언니, 계산에 누구 언니, 다 친해요. …… 여기는 인맥이나, 일하면서 저 사람이 얼마나 신뢰를 줬나 이런걸 보고 그 사람의 말을 믿거든요. 때문에 가서 설명도 해주고, 이런저런 조합 소식 알려주고 하면서 노조에 가입하게 된 거예요

-인천 구월점 조합원


2. 이랜드일반노조 시기 조직화 과정

이랜드일반노조 시기의 노조 조직화 과정은 대체로 △노조 집행부에 의한 조직화 ⅰ)노조 통합(홈에버 노조와 이랜드 노조)과 공투본 구성, ⅱ)내부 조합원 대상 조직화 사업,  △시민사회단체와의 비정규 조직화 연대사업의 두 가지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1) 노조 집행부가 조직화 시도: 홈에버 각 매장

이랜드일반노조는 지난 2006년부터 비정규 조직화 사업을 진행해 왔으며, 이전부터 단체협약과 규약에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내부 조직력을 기반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가능했다. 이랜드 홈에버의 경우 까르푸가 한국 사업을 철수하고 사업장을 이랜드로 매각하는 인수합병 과정 속에서 고용불안을 느낀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300여명 신규 가입)했다. 특히 까르푸가 이랜드 기업으로 인수되면서, 내부 직원들은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직원 주차 금지, 직원 휴게실 및 수면실 폐쇄, 기도실 등장, 매출 목표 증가)들로 인해 불만은 쌓였고 ‘반(反) 이랜드 정서’가 급격하게 전 직원들에게 확산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랜드 기업은 2006년 10월부터 매월 4개 점포씩 8개월에 걸쳐 리뉴얼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적으로 처우했다(정규직은 오대산 호텔교육, 비정규직은 점포 근무 또는 무급 휴직). 이에 노조는 이랜드 기업의 차별적인 직원 교육과 비인간적인 모니터링 저지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폐점 조합원들을 규합해 나가는 조직화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한국까르푸 노조(김경욱, 이경옥)와 (구)이랜드 노조(이남신, 홍윤경)의 통합(8개월 소요)으로 노동조합의 집행력과 조직 강화라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다. 당시 이랜드 계열 사업장의 노동조합은 이랜드의 한국까르푸 인수를 계기로 2006년 5월 ‘3사 공동투쟁본부’(뉴코아 노조, (구)이랜드 노조, 까르푸 노조)를 출범시켰고, 공동간부 수련회, 공동 선전물 제작, 매주 1회 집중 집회, 조합원 간담회 등을 진행하면서 조직 결속력을 높여 왔다. 당시 3사 공투본은 2006년 공동 임단투를 진행하면서, 2006년 9월 뉴코아 임단협 합의 후 매장 복귀 이전까지 ‘까르푸-이랜드-뉴코아 3노조의 통합’ 논의를 매우 진척시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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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일반노조 지원대책위원회는 조직화와 투쟁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결합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소모임 활동도 지원했다. 2008년 4월 30일 '노동절 맞이 4.30투쟁문화제' 공연 모습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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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장 주체들이 조직화 시도: 홈에버 서울 면목 및 방학점

이랜드 홈에버 면목점의 조직화는 까르푸가 이랜드로 매각된 이후 비정규직법 시행 이전 사측의 계약 만료로 인한 고용불안이 주된 원인이었다. 당시 이랜드 계약직의 고용계약은 ‘3개월 → 6개월 → 9개월’ 형태로 연장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되자 노동자 다수가 노조에 가입한 것이다. 

또한 서울 방학점의 조직화 경우도 인수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에 기인된 측면이 컸다. 당시 이랜드는 홈에버 광고 포스터에 ‘직원 5% 할인’이라고 표기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러한 할인적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같은 동료(정규직)들이 매장 상품을 구입할 때 5% 할인(도장)을 적용해 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작업장 내 사회적 배제라는 비정규직의 차별과 함께 ‘인간적인 모욕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고, 방학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할 바에는 노조에 가입해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자는 뜻을 키우게 됐다.

저희 면목점 같은 경우 최근에 가입하셨던 분들은 (계약이) 3개월 , 6개월, 9개월 이렇게 하시잖아요. 저희가 11월10일 날 재오픈을 했는데요. 그때 입사 하셨던 분들이 8월쯤 되면 9개월 계약이 만료가 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투쟁할 때, 어차피 잘릴 거 해고가 부당하다는 생각도 가지고 계셨고 또 힘이 좀 되어 주자 해서, 그 분들 중에 지금까지 같이 하신 분들도 계세요.

-이랜드 홈에버 면목점 조합원


3) 지역대책위원회에서 노조 조직화 시도: 홈에버 서울 상암 월드컵점

이랜드일반노조는 노조 조직화 과정에서 노동조합 및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사업을 함께 진행했다. 2006년 9월과 10월 이랜드일반노조는 노조 조직화 사업을 위해 민주노동당 서울시당(노동위원회), 지역 노동조합(일반노조, 단위노조 등), 시민사회단체에 지역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초기 이랜드일반노조는 서울, 부산, 인천(부평), 울산, 순천 지역의 각 연대단위들에게 ‘지역 유통서비스 노동자 조직화 & 투쟁 사업을 위한 대책위 구성’을 제안했다. 특히 이랜드 홈에버 투쟁의 상징이 된 상암 월드컵점의 경우, 이랜드 3사 공투본(뉴코아, 이랜드, 까르푸노조)이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노동위원회에 비정규 조직화 공동사업을 제안했고(2006년 9월~10월),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역대책위(서대문, 은평, 마포, 용산 지역위원회)를 구성(2006년 10월~11월)한 것이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 분회 건설 및 투쟁의 성공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지역대책위(이후 ‘지원대책위’로 명칭 변경)에는 시기별로 지역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하면서 대책위 활동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의 지역대책위 당원들은 이랜드 투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월드컵 상암점 매장 앞에서 2차례 1인 시위와 촛불집회, 선전전, 휴게실 방문, 노조 교육 등을 전개했으며, 8개월간의 조직화 사업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연대 활동이 기반이 되어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상암 월드컵 분회 건설 및 투쟁의 단초가 되었다. 실제로 2007년 5차례의 이랜드 및 뉴코아 매장 매출 제로 투쟁에 참석한 민주노동당 서울당원은 총 1,609명이나 된다. 

상암에 거점이 있을 때는 연대단위가 항상 그 앞으로 모였고, 지역에 있는 지역대책위원회(지대위) 동지들은 조합원들을 묶어내는 …… 지역이 가까우니까. 투쟁 끝나고도 집 근처 가서 지대위 동지들과 술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이뤄져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죠.

-이랜드일반노조 간부


Ⅲ. 글을 나가면서

앞에서 살펴본 이랜드일반노조의 조직화 과정을 통해서 다음의 두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이랜드일반노조의 비정규 조직화 과정이 시사하는 바는 ‘노동조합과 정규직의 역할’이다. 이랜드일반노조는 단체협약 체결 과정에서 비정규직과 동일한 내용(주5일제)을 적용했고, 비정규직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집행부와 정규직 조합원의 노력이 컸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이랜드일반노조는 지난 2006년 10월부터 비정규 조직화 사업을 진행한 결과 전국 25개 매장에 분회를 건설했으며, 파업 후유증에도 조직화 사업을 통해 지난 3년 사이에 조합원이 1.5배(2005년 339명 → 2007년 970명 → 2008년 12월 현재 580명)가량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이랜드일반노조의 조직화 과정과 투쟁은 노동조합의 ‘사회적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랜드 투쟁은 노사관계 전문가 및 노조 활동가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유통업 비정규직 조직화 방안의 선례를 보여주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랜드 투쟁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노동조합 상급단체 및 단위노조, 지역사회와 시민사회단체 등의 연대의 성과와 가능성이다.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은 노동조합뿐 아니라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등의 노동운동 외곽 진영까지 폭넓게 결합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의 주요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랜드 상암동 월드컵 지대위의 경우 지역에서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공동실천과 지원으로 장기파업의 원동력이 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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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월드컵분회 조직화 과정 개요 : 지역대책위의 활동을 중심으로

1. 이랜드일반노조 지원대책위원회 건설 시기 활동

1) 초기 주요 과정
- 2006년 9월-10월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노동위원회에 조직화 사업 제안 
- 2006년 12월 서울시당 노동위 수련회에 노조 간부 참석(김경욱, 이남신, 이경옥)
- 이랜드 일반노조 지원대책위 건설(노조-당 공동집행위원장 맡음)
* 주요 활동 : 약 8개월간의 현장 선전전 및 촛불집회
- 기간 및 시간, 장소 : 매주 주말(주로 토요일), 고객이 밀집한 시기 1-2시간, 매장 입구 및 휴게실 등 선전전, 소규모 촛불 집회(매주 10-20여명 당원 참석)
- 방법 : 노조 간부(조끼 착용) 일대일 접촉, 노조가입서 받음. 선전물 제작 배포(한면: 직원용, 한면: 고객용)
2) 월드컵분회 공식 건설시기(2008.5.11) 활동
- 분회 창립문화제(2007.5.7) 준비 및 참가
- 조직 당시 조합원 수 : 120명(대부분 비정규직, 정규직도 가입)
- 분회 명칭 : 조합원들이 스스로 정함
- 교육 : 노조 교육 진행(노동법, 노조 할동 교육- 지대위 강사, 노동자의 삶- 하종강, 2007.5.6~7)
- 파업투쟁 선포식 지원(2007.6.7) : 파업투쟁 선포식 장소 이동 함께 동참(민중가요 함께 하기, 파업 내용 공유 등)
3) 이랜드일반노조 파업 시기 활동
- 초기(상암점 봉쇄 이후) 지대위 활동 : 파업지지 및 동참 호소(지역 단체 동참 조직), 피케팅 유인물 배포(1만부), 매일 조합원들과 상암점 점거 사수 투쟁(먹거리 지원, 투쟁기금 지원 등)
- 후기(상암점 봉쇄 이후) 지대위 활동 : 상암점 월드컵몰 밖에서 문화제 및 여론조성 활동
4) 상암점 점거투쟁 이후 활동
- 다양한 투쟁 지원 : 면회 투쟁, 투쟁 결의 뒷풀이, 매장 순회 투쟁 지원, 걷기 대회, 불매운동, 1인 시위, 천막농성 불침번 서기 등
- 추석 총력 투쟁 진행 : 지역순회 문화제(이후 금요문화제의 모태가 됨), ‘블로그 액션데이’ 진행
- 재정지원사업 : 홈쇼핑 영상촬영, 분회설립 1주년 주점(2008.5), 책 발간(『우리의 소중한 꿈을 응원해 줘』 - 8천부 이상 판매)
- 각종 모임 건설 지원 : 율동패 ‘신화’, 연극패 ‘전설’, 노래패 ‘비상’
5) 천막농성 이후 파업투쟁 완료시기 활동
- 투쟁 및 지원 : 천막 사수투쟁, 금요문화제, 1인 시위
- 재정지원 : 바자회 등
- 투쟁 종료 이후 : 토론회 진행, 지역 연대활동 모임 건설 등 지속적 관계 유지

2. 대책위 구성 변화 흐름

1) 2006년~2007년 6월(상암점 점거 초기) 
: 민주노동당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구위원회
2) 2007년 7월~2008년 초기(상암점 점거 이후) 
: 서부민중연대,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서부모임 등 참여
3) 2008년 초~2008년 중반 
: 서부민중연대 정리. 민주노동당 마포, 서대문, 은평구위원회, 서울여성노동자회, 서부비정규센터(준), 진보신당 마포, 서대문, 은평, 용상당원협의회,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서부모임으로 확대 재구성
4) 2008년 하반기 
: 연세대 학생 모임 ‘살맛’ 가입
5) 2009년 초
: 서부비정규직센터(준)와 월드컵 분회가 지역 유통조직화 관련 테이블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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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