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군 생활 실태와 현실

노동사회

북한의 군 생활 실태와 현실

admin 0 6,978 2013.05.07 10:37

종종 신문지면에 군 인사비리에 관한 기사가 오를 때면 '신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씁쓸한 조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고관댁 자제는 은근슬쩍 군대 뒷구멍으로 빠져나가 버젓이 대한민국 법인(法人)임을 행사하는 데, 못 사는 집 자식은 산악 오지를 뒹굴며 빠듯하게 26개월을 일명 '땅개'(보병)로 지낸다. 필시 조어가 빗대는 속뜻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불평등을 일구어 내는 우리 사회의 부정직성에 있겠지만, 그 본질은 군 의무 병역제라는 분단현실의 안보테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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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복무환경

북한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북한에서 "돈도 없고, 줄도 없어 군에 간다"는 말이 공공연히 유행하는 것은 최근 들어 추락한 군의 현실이 심각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군 복무 기간 중 수시로 농촌 및 건설현장 노력동원에 시달리고, 만기제대 시에도 귀환은 드물고 대부분 또다시 건설현장에 '무리배치'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10년 가까운 군 복무기간은 그야말로 비참하다. 장기복무의 염증도 있지만 후생이 낙후할 대로 낙후해 대부분의 일반군인들은 만성적인 영양부족 상태에 있다. 또 "있으면 공급하고 없으면 주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심각한 보급품 부족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최근 귀순자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군인들 배급량은 1일 쌀 800g, 부식물 1kg, 육류 80g, 기름 20g 등 3,200∼3,500cal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배급량이 감소하기 시작해, 현재는 1일 쌀 600g 이하만 공급되고 나머지는 나물 이외에 거의 전무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간부층에서 보급품을 중간착복하는 일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다.

입대기피 현상의 증가

과거 군에 입대하는 것이 노동당에 입당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면에서 청년들의 군 입대는 입당을 보장받기 위한 방편으로 선호되었다. 고등중학교 5학년이 되면, 지도원들이 학교마다 한 명씩 나와 본인이 지망하는 곳을 조사한다. 그래서 대학 혹은 군대로 가게된다. 대충 80% 정도가 군대를 희망한다. 군대를 다녀와야만 입당이 가능하고, 입당해야만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당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군대를 희망한다.

그러나 군 복무 중 입당 비율이 최근 들어 과거 90%에서 30%로 대폭 떨어졌다. 거기에 대학진학률도 고위간부의 자식들로 국한되어 20%정도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입대를 기피하는 현상이 만연하고, 입대를 해도 복무 중 자해를 한다던가 무단 탈영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귀순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입대 기피자들은 대부분 신체검사 등 징집과정에서 신병(身病)이나 개인사정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또 복무 중에는 '감정제대'를 노리고 손가락을 절단하는 등 극단적인 자해를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탈영의 경우 6개월∼1년 간 중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교양중대나 노동연대에 배치된다. 이 경우 체포되면 대부분 '생활제대'를 명령받고, 탄광 등 오지의 건설현장으로 배치되어 불명예제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치 이야기는 꺼려

입대하면 우선 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약 1개월 정도다.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대부분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 또는 조선인민군에 대한 초보적인 단계의 교양을 받는다. 우상화에 관련한 교양이 교육의 80%를 차지한다. 그러나 군 적응의 문제는 남한과 조금 다르다. 워낙 군 입대 전까지 조직생활에 익숙해 육체적인 힘듦이나 배고픔 이외에는 조직생활 자체의 부적응은 많지 않다고 한다.

일과생활은 아침 기상부터 저녁에 취침시까지 모두 조직생활이다. 매주 생활총화가 있고, 토요일 낮에는 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시간이 있다. 그리고 아침마다 30분씩 독보시간이 있다. 주로 김일성, 김정일 문헌들을 암송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사는 김정일의 위대성을 30분 이상 혼자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휴식시간에도 쉬지 못한다. 또 매일 저녁에는 계급교양이라는 시간이 있다.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구호의 제창이 주된 교양내용이다.

매주 이루어지는 생활총화 시간에는 호상비판이라고 해서 군사규정에 어긋난 행동 등을 서로 비판하고 일주일간의 생활을 총화한다. 대개 제식훈련 활동이나 군사훈련, 사격시간에 누가 무엇을 못했다는 식의 비판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잘 아는 동료들끼리 돌아가면서 호상비판을 하고, 정치적인 문제는 될 수 있으면 꺼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단절

hongmin_02.jpg복무 기간 중 가족이나 친구들의 면회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식들 역시 부모들이 면회오길 바라지 않는다. 서로 부담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려운 가정인 경우, 오는 경비는 물론이고, 매일 일상에서 분공(책임진 일)되어 있는 일들과 직장을 쉽게 비울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면회 오겠다고 마음먹어도 도로 사정이나 그밖에 이동시 통행허가 등의 문제들이 쉽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 휴가 때나 찾아가서 보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휴가 또한 쉽지 않거니와 많지도 않다. 북한 군대에서는 정기적인 휴가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 사망시나 표창을 받을 경우에만 휴가가 가능하다. 그래서 약 80%의 사람들이 제대할 때까지 한번도 휴가를 나가지 못한다. 이렇다보니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군 생활을 하게 된다.

한창 식량난으로 아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을 때, 중대장이 휴가자들을 내보내면서 "후방에서는 굶어 죽기도 하니, 갈 때도 올 때도 못 볼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대에 들어와서는 일체 그런 말하면 안 된다"라고 '입조심'의 지침을 줄 정도라고 한 귀순자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휴가를 다녀오면 거의 한달 간은 말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웃지도 않고 잠자리에서 혼자 울면서 집 걱정을 하는 것이다. 모두 자기들 집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보니 모두 굶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까닭이다. 그래서 '가정제대'하는 병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가정제대'란 1995년부터 집안사정이 어렵거나 보호자가 없는 부모가 있는 경우 제대 조치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 병사가 부대에 있어 봤자 집안 걱정 때문에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는 것도 힘들고, 사고위험이 있기 때문에 내린 조치다.

휴가 이후의 후유증으로 일부에선 군 복무에 대한 회의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술을 마시거나 탈영을 한다. 이런 병사들은 '생활제대'를 시킨다. 탄광이나 오지로 중노동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당원이었다면 당증을 반납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회적 매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군사기피자로 기록에 남아 꾸준한 감시대상으로 전락한다.

군 생활이 사회와 갖는 단절로 인해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군인들은 친구관계를 두절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가면 제대할 때라야 서로 만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여자문제도 공공연하게 군 생활의 문제로 등장하곤 한다. 병사들은 밖에 나가지 못하지만 사관들의 경우 주위 민간인들과도 알고 때로 나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과 눈이 맞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제대할 때, 마음이 맞아 결혼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무 기간 중 성관계가 탄로나면 바로 제대해야 한다.

군민일치운동

군 생활의 이런 어려움들은 최근 들어 악화된 식량난으로 더욱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얘기다. 특히 군인들의 민간인 약탈행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한 부대가 마을을 지나가면 닭, 토끼, 개 등 남아나는 가축이 없다는 항의가 잇따른다. 그러나 군에서는 군의 문제로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후방(지원)사업을 잘못했기 때문이지 인민군대 잘못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주민들은 군인들이 나타나면 "영실군대(영양실조 군대)가 또 온다"며 집안 단속을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내린 조치가 '군민일치운동'이다. 군민(軍民)간의 불화관계가 극한 상황에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1992년 12월 김일성이 직접 전군의 군관에게 지시문을 내렸다.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일제시기 항일무장투쟁 중 빨치산 부대원들에게 강조했던 구호를 군민 불화관계 해결의 구호로 제시한 것이다.

귀순자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북한군인의 생활은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 붕괴와 경제난 등으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1997년 12월부터 공식적으로 '선군정치'를 강조하고 있다. 표면적인 의미로는 군사중시의 노선으로 과거부터 강조되어 온 군의 위상을 더욱 통치의 핵심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어려운 시기마다 군대가 앞장서서 난국을 타개해 왔고, 현재의 어려움을 군을 통해 역시 해결하겠다는 생존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군이 가진 위상이나 그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군은 심각한 정체에 직면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