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지국가의 위상과 전망

노동사회

한국 복지국가의 위상과 전망

편집국 0 9,905 2013.05.29 10:27

 1. 서론

한국에서 복지국가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97년 경제위기 이후부터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의 복지국가 확대로 학계에서는 이른 바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논쟁과정에서 한국에서 시도된 복지개혁의 성격 및 복지국가의 성격과 관련하여 △국가복지강화론, △보수주의론, △신자유주의관철론, △발전국가적 성격론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었다(김연명 편, 2002 참조). 각 입장은 경제위기 이후 집권했던 민주정권이 추진한 복지개혁의 성격과 관련하여 상당히 대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특히 국가복지강화론과 신자유주의관철론) 대체로 보아 복지개혁은 국가복지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정권 집권 10년이 끝나고 정권이 바뀐 현 시점에서 돌이켜볼 때 국가복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국가복지가 내용적으로 크게 강화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복지개혁 시도가 정치적 지지를 그리 받지 못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한국이 복지개혁을 시도할 때의 상황은 서구 유럽이 복지국가를 확대하던 제2차 대전 직후의 기간과는 상당히 다른 조건에 놓여 있었다. 서구 유럽은 제2차 대전 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조건에서 복지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한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한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경제위기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상황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서구 유럽은 복지국가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황이었지만, 한국은 경제위기 직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복지국가 확대에 대한 정치적 합의는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극도로 꺼려온 발전전략으로 인해 누적적으로 형성된 시민들의 삶의 조직방식은, 10년간의 짧은 복지개혁 시도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강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지에 대한 국가개입의 극소화로 인해 형성된 사회적 삶의 조직방식이란 무엇인가? 복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국가복지 이외의 복지형태’로 인해 형성된 삶의 조직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복지 이외의 복지는 통상 사적복지 혹은 민간복지라고 불리는데 이는 주로 민간보험이나 비공식적 이전 등으로 구성되며, 연복지(홍경준, 1999)나 연고복지 혹은 각개약진복지(강준만, 2007)와 유사하다. 이 중 강준만 교수가 사용하는 ‘각개약진복지’라는 용어가 한국 시민들의 삶의 조직방식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면 사회적 위험에 대해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으므로 연고가 있는 사람들끼리 스스로 그에 대처해야 하는 사회에서 생겨난 사람들의 생활조직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각개약진복지라는 용어가 다소 거친 느낌이 있어 이 글에서는 국가복지 이외의 복지를 통상 말하는 사적복지보다는 ‘자가복지’(自家福祉)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민주정권은 10년의 집권기간 동안 이런 자가복지에 사실상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학계도 일부 논자들을 제외하면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민주정권 10년간의 복지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자가복지의 존재에서 찾고, 그로부터 한국 복지국가 위상의 전망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2. 한국 복지국가의 위상과 성격

1) 낮은 지출수준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지표는 사회지출이다. [표1]은 사회지출 중에서 정부가 지출의 주체인 공공사회지출이 GDP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일부 국가에 대해 주요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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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에서 보듯이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중은 대단히 낮은 편이다.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은 OECD 평균의 4분의 1 수준이며, 지출수준이 낮은 편인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3분의 1에 그치는 수준이고, 수준이 가장 낮은 멕시코와 유사하거나 그보다도 약간 낮은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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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낮은 공공사회지출 수준은 경제발전 수준을 고려하여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그림1]을 보면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에 도달한 시기가 유럽 및 일본은 대개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이며 한국은 1990년대 초인데(그림의 가로축), 이 시기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은 일본이 10%이고 EU 및 OECD 국가 평균은 17~20%인 데 비해, 한국은 3%에 불과하다(그림의 세로축).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에 도달한 시점에서도 OECD나 EU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평균은 20%대 내외이고 일본도 11%가 넘는 데 비해, 한국은 5%를 조금 넘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공공사회지출의 수준은 국가복지의 낙후성(홍경준, 1999)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 복지국가의 특성: 자가복지(自家福祉)의 동학

지출 주체에 관계없이 사회지출 모두를 합친 총사회지출을 비교하면 한국은 지출 주체를 정부로만 한정시킨 공공사회지출을 비교할 때보다 서구 국가들과의 격차가 다소 줄어든다. [표2]에서 2003년도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중은 5.69%로 이는 OECD 국가 평균의 27.5%이지만 GDP 대비 총사회지출은 8.06%로 OECD 국가 평균의 33.8%에 이른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 사회지출에서 민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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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성 등(2007)은 최근에 한국의 사회복지자원총량을 추계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연구와 선행연구를 비교한 바 있다. [표3]에 이 비교 결과가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시장과 비영리부문, 가족의 복지자원 추계결과도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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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3]에 의하면 정부부문은 대체로 자원총량의 25~4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민간자원의 비중이 60~75%에 이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민간부문 내에서 기업은 기업복지를 의미하며, 시장은 주로 민간보험을 의미하는데(김진욱의 연구에서는 민간의료비가 포함됨(김진욱, 2005)), 기업부문과 비영리부문은 연구 간의 차이가 비교적 적지만 시장과 가족은 차이가 큰 편이다. 김교성 등의 연구에서는 시장부문이 대단히 큰 것으로 추계된 반면 김진욱의 연구에서는 가족의 비중이 대단히 큰 것으로 추계되었다. 이는 가족의 경우 보살핌노동의 가치나 교육비 이전지출 등을 포함하였는가 여부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장(민간보험으로 대표되는)과 가족의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시장과 가족의 비중 가운데 시장, 즉 민간보험의 규모는 이른바 민간보험 보급률이라는 지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간보험 보급률(penetration)이란 민간보험사의 보험료 수입(바꾸어 말하면 민간보험사에 대한 가계의 보험료 납입금)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한 사회의 민간보험의 규모를 보여주는 척도 중의 하나이다. [표4]에는 민간보험 보급률이 제시되어 있는데 한국은 표에 제시된 모든 연도에서 값이 OECD 평균보다 높다. 이 민간보험 보급률을 총사회지출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언제나 민간보험의 규모가 총사회지출보다 큰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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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러한 민간보험 규모는 앞에서 사회지출을 OECD와 비교했을 때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민간보험 규모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 한국의 민간보험 보급률은 1977년에 1.49%였고 세계시장 점유율 순위 25위였는데, 1984년에는 민간보험 보급률이 5.65%, 세계시장 점유율 순위 11위를 기록하였고, 1989년에는 민간보험 보급률 9.80%, 세계시장 점유율 순위 9위를 기록하였다(생명보험협회a). 한국의 민간보험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왜 이처럼 민간보험이 급격하게 성장했을까? 이는 국가복지의 지체성과 관련성이 깊다고 본다. 1980년대의 한국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자본주의 경제가 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위험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양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한 바가 있었다는 점(크리스챤 아카데미 편, 1975)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은 1970년대 이래 자본주의의 심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위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최소수준으로 억제해 왔다. 이로 인한 공백이 민간보험에 의해 채워진 것이다. 

방대한 민간보험의 규모는 민간보험 보험료 수입을 조세수입과 비교해도 드러난다. [표5]는 정부가 걷는 직접세 및 간접세 금액과 민간생명보험사가 걷는 보험료 수입액을 비교한 것이다. 이를 보면 생명보험의 보험료 수입액은 한국 시민들이 정부에 납부한 직접세 납부액보다 많으며, 간접세 납부액보다도 많다는 사실(2006년의 경우 직접세는 62조 8천억 원, 간접세는 47조 9천억 원이었던 데 비해, 생명보험회사의 보험료 수입액은 66조 4천억 원이었다)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 시민들은 소득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민간생명보험회사에 납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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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한국의 복지자원 중 시장(민간보험) 외에 가족의 비중도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가족의 비중은 통계청이 발표하는 가계조사 자료 중 사적 이전소득의 비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표6]에 사적 이전소득의 비중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사적 이전소득은 언제나 공적 이전소득보다 크다. 사적 이전소득은 경제위기 이후 복지제도가 확대된 이후에도 여전히 공적 이전소득의 2배가 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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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실은 한국의 시민들이 정부의 복지제도로부터 얻는 소득(공적 이전소득)보다 가족이나 친지 간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전에 의한 소득(사적 이전소득=비공식적 이전소득)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비공식적 이전소득의 재분배 효과가 공적 이전소득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다([표7] 참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는 참으로 궁금하지만 어쨌든 현재 한국은 정부의 사회보장제도보다 가족 간의 이전이 더 재분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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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한국 시민들의 복지는 한마디로 시장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보험과 비공식적 이전소득은 그 배분원리가 다르지만 그 원천은 결국 가구원들의 근로소득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시장에서의 취업을 통해 소득을 획득하여 생활상의 필요에 충당하며, 그 밖의 남는 소득 중 직접세보다 더 많은 금액을 보험회사에 납부하고 정부의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얻는 공적 이전소득보다 더 많은 소득을 가족 간의 비공식적 이전을 통해 획득하여 삶의 위험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비공식적 이전소득은 공적 이전소득보다 더 재분배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지국가가 차지할 위상은 빈약할 수밖에 없다. 

3) 한국 복지정치의 딜레마

자가복지, 즉 ‘시장에 맡겨진 복지’의 존재는 민주정권이 추진한 복지개혁 시도를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했던 것 같다. 복지개혁으로 인해 증가하는 국가복지는 자가복지를 침해하고 자가복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혜택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국가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국가의 조세수입이나 사회보험료 수입을 증가시켜야 하는데, 이는 개별가계가 민간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보험료 지출여력을 침해하며 또 개별가계의 저축능력을 침해한다. 또한 조세나 사회보험료의 증가는 개별가계의 사적 이전 여력도 축소시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국가복지는 확대된다 해도 그것이 보험료를 그 전보다 많이 내게 된 ‘우리 식구들’에게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복지축소의 정치는 ‘비난회피의 논리’에 따라 작동된다(Pierson, 1994). 비난회피의 논리는 복지축소가 초래할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모호화 전략, △분할 전략, 그리고 △보상 전략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Pierson, 1994, p. 19~24). 모호화 전략은 복지축소로 인한 손실을 최대한 작게 보이기 위해 축소정책에 관한 정보를 얻기 어렵게 하는 것인데, 이는 급여증가율의 억제 등 점감주의적 방법을 취하거나, 복지축소와 정부정책 간의 인관관계를 모호하게 하거나,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분할 전략은 수급요건 등을 엄격히 함으로써 혜택과 손실의 영향이 집단마다 다르게 가도록 하는 전략이며, 보상 전략은 현재의 수급자에게는 축소 예외조치를 취하거나 민간급여를 늘려 축소에 따른 손실을 보완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한국의 복지개혁은 자가복지를 축소시키면서도 그로부터 나올 비난을 회피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 이들 세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첫째, 국가복지의 확대가 시장에 맡겨진 복지의 작동을 침해하거나 그로부터 얻을 혜택을 축소시킨다고 하여 국가가 복지확대정책을 취하면서 이 확대정책에 관한 정보를 모호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립된 상황에서 정책정보를 모호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모호화 전략은 작동되지 않는다. 

둘째, 시장에 맡겨진 복지는 그 작동과정이 조직화하여 있지 않고 시장에 맡겨져 있다는 바로 그 때문에 그 축소의 영향이 중하위층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데, 정부가 확대하려는 국가복지도 중하위층을 우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장에 맡겨진 복지의 축소와 국가복지의 확대 표적이 동일하다. 따라서 분할 전략도 작동되지 않는다. 

셋째,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국가복지의 발달이 지체되었다. 이는 시간적으로도 그러하고 지출수준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아직 국가복지가 가져다 줄 혜택은 모호하기만 하다. 사회보험료가 해마다 올라 가계에 부담을 주고 있는데도 이것이 가계에 주는 혜택은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져 가기만 한다. 국민연금이 있지만 너무나 먼 장래에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론에는 툭하면 국민연금이 투자를 해서 손해봤다는 기사만 실려 불안하게 만들며, 건강보험도 있지만 법정본인부담금을 비롯한 비급여 항목에 대한 가계부담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게다가 참여정부가 추진한 사회복지서비스는 ‘현찰’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데다 아직은 대상자가 보편화되어 있지 못하고, 실제 서비스 공급자들은 거의 대부분 민간인들이어서 국가정책과 서비스 혜택 간의 인과관계가 깊이 각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보상 전략이 제대로 작동될 가능성도 낮다. 결국 축소의 정치에서 발생하는 비난을 회피하는 데 동원될 전략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는 언제나 수세적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이처럼 비난회피를 위한 세 가지 전략이 모두 작동되지 않는 데다 국가복지 확대의 정치에서도 현재 한국은 결코 유리한 환경에 있지 않다. 노동계급의 권력자원이 낮은 수준에 있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며, 지구화 등으로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다. 결국 민주정권은 국가복지의 확대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것이 시장의 작동에 맡겨진 복지를 축소한 데 따른 비난을 회피할 전략을 활용할 수 없었던 데다, 주된 정책목표인 국가복지 확대마저 이를 추동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지 못한 딜레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3. 결론과 전망

지금 한국 사회는 시장에 맡겨진 복지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오히려 복지가 시장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상황으로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들은 ‘경제’를 주문처럼 되뇌며 ‘성장’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에게 표를 주었으며, ‘내 집값만은 오르겠지’라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뉴타운에 대한 꿈을 깊이 간직한 채,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민간보험회사의 횡포를 이따금씩 보고 겪으면서도 노부모를 위해, 그리고 자식을 위해 오늘도 보험료를 불입하며, 가끔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성실히 사는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민간보험회사에 불입하는 보험료는 아깝지 않지만 ‘이것만 없으면 한 푼이라도 더 저축할 텐데’라는 생각에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보험료는 너무나 아깝고, 치매·중풍 노인을 돌보아 줄 것이라는 정부의 광고는 그저 여러 보험회사가 내거는 광고와 다를 바 없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 공약은 말은 좋지만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다.

이 험한 세상에 ‘자가복지’의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피난민 사회”(김동춘, 2000)인 것이다. 연고복지를 매개로 한 민간보험 가입과 자가복지를 통한 훈훈한 비공식적 이전은 성실한 삶의 표상이요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삶이다. 서구에서는 복지국가가 시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만 한국에서는 민간보험과 비공식적 이전이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복지개혁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보통의 삶’이 작동되는 방식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진행되었다. 서구의 경우에도 복지국가가 확대되는 과정은 곧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것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간섭하는 과정이기도 하였으므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그 ‘갈등’은 서구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것 같다. 이제 이러한 갈등이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는 채로 한국의 복지는 ‘시장에 맡겨진 복지’에서 ‘시장에 점령당한 복지’로 이행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의 복지개혁이 시장에 맡겨진 복지와 그 작동의 원천이 되는 소득파악의 미비로 인한 소득파악의 부담을 떠안고 있었고 축소와 확대의 딜레마에 갇혀 있었던 상황이라면, 이제는 거기에 더해 ‘민간 금융자본과의 싸움’이라는 부담까지 떠안게 되었다. 한국 복지정치가 기존에 안고 있던 축소와 확대의 딜레마에 더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국가 대 시장’이라는 차원의 갈등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복지국가의 앞날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험난할 것이다. 

지구화의 흐름 속에 금융자본에 대항하려면 어떤 전략을 어떻게 구사해야 할 것인가? 이 전략을 찾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으며 필자 역시 이를 제안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방향을 생각해본다면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민간보험의 역사적 효과성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부터 출발하는 것이 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동안 복지와 관련된 국가의 역할은 잘못된 경우가 많았고 제대로 작동되지도 못했지만, 이는 바꾸어 말하면 한국에서는 자본주의화 이후 각종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처가 주로 민간보험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수십 년을 민간보험에 의지하여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한국 시민들의 삶의 질이나 삶의 안정성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복지가 시장에 맡겨지도록 방치한 국가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사회적 위험을 인수하여 이윤을 추구하면서 정작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시민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무관심해 온 민간보험의 책임도 작지 않다. 자가복지를 중심으로 조직된 삶의 방식이 얼마나 취약하며, 또 어떻게 민간보험회사가 추구하는 이윤의 표적이 되어 왔는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인식을 새롭게 하는 전략은, 국가복지 확립을 위한 ‘촉발전략’으로서 나름의 가치를 가지리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 복지가 제대로 의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이러한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조차 이보다 훨씬 더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고, 지속적인 고민을 가지고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 다뤄 나가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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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