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노동사회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편집국 0 4,892 2013.05.2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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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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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볼셰비즘은 사회주의 전통의 틀을 깨면서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숙명론을 뒤흔들었다. 이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필연적인 출구가 아니었다. 그 대신 혁명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단순히 역사법칙의 객관적인 결과가 아닌 까닭에 혁명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정치행동이 필요했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의 급진주의자들과 1917~1918년의 노동자계급 투사들, 그리고 좌파의 새롭고 많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정치적 가능성의 의미를 넓혀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냈다.”
―제프 일리
 

1. 반전 투쟁과 사회적 투쟁의 새로운 단계

sooya_01.jpg러시아 10월 혁명은 노동대중의 반전(反戰) 투쟁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을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밝힌 평화에 관한 포고는 모든 나라에서 전개된 반전운동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강령 구실을 했죠. 핵심적인 내용은 무병합·무배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강화, 민족 자결의 존중, 강화교섭에 대한 노동자대표의 참가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53). 1918년에 들어 전쟁으로 인해 쌓인 노동자계급의 극심한 불만은 격렬한 대중적 파업 형태로 표출되죠. 노동자계급의 반전 투쟁과 사회적 투쟁을 동맹국에 속한 국가들과 협상국에 속한 국가들로 대별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일어난 투쟁부터 봅시다. 1918년 1월13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군 수뇌부가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 영토병합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다는 사실이 빈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조속한 강화조약 체결을 간절히 바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동자의 모든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이었어요. 더욱이 그 전날인 1월12일에는 그나마 부족한 밀가루 배급량을 줄인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1월14일에는 다임러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었고, 그 다음날에는 오스트리아 빈과 아래쪽 공업도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조업 중단에 들어갔죠. 

파업은 점점 확대되어 1월18일에는 총파업으로까지 진전되었고, 노동자 7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헝가리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공장 가동이 정지되었으며, 철도운행이 멈추기도 했죠. 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주요 도시들에서 ‘노동자평의회’가 창설되었습니다.
파업 전개의 방식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LPA: 이 당은 사회민주노동당, 사회민주당, 사회노동당으로 여러 차례 당명을 바꾸었음)이 창설한 노동자평의회에서 1918년 1월19일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습니다. 당의 우익 지도자들이 파업을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수사법(修辭法)을 동원했죠. ‘분별력’에 호소한다든지, 군대의 탄압이나 독일 점령에 대한 위협을 강조한다든지, 또는 정부 측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든지 하는 주장이 그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정부는 강화 교섭을 결렬시키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 점령을 포기할 것이며, 폴란드의 독립을 승인함과 동시에 식량제도를 개선하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이런 설득으로 파업은 중지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55).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파업이 쇠퇴할 무렵,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고조되기 시작했어요. 독일군 총사령부와 팽창주의자들은 1917~1918년 겨울에 온건한 평화조약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만한 성과가 있어야만 대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사회주의도 제압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과대망상적인 정복계획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무모한 계획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죠(풀브룩, 2000: 225~226).

베를린에 위치한 기업들의 현장위원(obleute) 대표자들은 1918년 1월28일 회의를 열어 정치적 파업을 실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도의 군수공장에서는 총파업 첫날, 노동자 약 40만 명이 일손을 놓았어요. 파업은 함부르크, 브레멘, 킬, 루르 공업지대와 기타 중심 도시로 확대되었습니다. 곧이어 50개 도시에서 노동자 10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죠. 베를린의 현장위원 414명은 ‘대(大)베를린 노동자평의회’를 조직했으며, 평의회는 민족자결에 기초한 무병합·무배상의 즉시 강화 체결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나아가 파업 노동자들은 모든 나라의 노동자 대표를 강화 교섭에 참가시킬 것과 정치범의 석방, 군부독재와 계엄 상태의 폐지, 식량 공급의 개선 등을 요구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56).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1월30일과 31일, 베를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집회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바리케이드가 구축되는 사태가 벌어졌죠. 한편, 계엄이 강화되었고, 노동자평의회는 해산 명령을 받게 되었는가 하면 대량검거가 시작되었으며 야전 군법회의가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할 만한 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어요. 게다가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자유노조의 우익 지도부 개입으로 현장위원들은 동요하게 되었으며, 파업 투쟁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죠. 조직을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분쇄되었으며, 노동자들은 2월4일 직장으로 복귀했고 활동가 약 5만여 명이 참호로 보내졌습니다.

협상국에 속했던 프랑스에서는 1917년 말부터 1918년 초에 걸쳐 파업이 벌어졌는데, 루아르 강 유역의 금속노동자들이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면서 즉각적인 강화를 요구했습니다. 모든 군수공장에서 작업이 중지되었고, 석탄과 금속 그리고 전력 생산이 멈추게 되자, 정부는 부분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죠.

1918년 봄, 파리와 쉬렌느의 항공기 공장, 클리쉬의 병기 공장과 브레스트의 병기창, 오뎅쿠르와 난 베르의 군수 공장 노동자를 비롯해 기계 노동자, 제강(製鋼) 노동자, 섬유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정부는 곧바로 파업 현장에 군대를 투입하여 파업을 깨뜨리고 파업 참가 노동자들을 전선으로 징집했어요. 그 뒤 5월에는 르노의 빌랑크르 공장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었고 루아르 강 유역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파업은 군대와 충돌을 빚고는 종결되었죠.

영국에서는 전쟁 말기에 계급투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917년의 파업 건수는 730건, 파업 참가자 수는 87만 2,000명(전년 대비 3.2배)이었던 데 비해, 1918년에는 1,223건의 파업에 111만 6,000명이 참가했고, 노동손실일 수는 587만 5,000일이었죠. 노동조합원 수는 1913년 현재 400만 명에서 1918년에는 650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1916년에 설립된 노동자위원회와 전국현장위원 운동이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이 운동은 기본적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했죠. 때로는 현장위원과 노동자위원회가 파업의 발의자 또는 지도자로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운동의 주요 중심지는 스코틀랜드의 공업지구 클라이드였고요. 

영국 노동자들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환영했으며, 전쟁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열성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1918년 1월27일 런던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반전 시위행진이 거행되었죠. 영국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사상과 정치조직의 영향에서 벗어나 노동당의 노선을 지지했습니다. 1918년 당시 노동당원 수는 300만 명을 넘어섰고(전쟁 이전에 비해 100만 명 이상 증가), 1918년 2월에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새로운 규약이 채택되었으며 처음으로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당의 목표를 사회주의로 선언했습니다. 

노동당의 강령적 방침은 1918년 6월에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노동과 새로운 사회질서」라는 문서로 정식화되었어요. 노동당의 이 최초의 강령은 정치 분야에서 언론·출판·주소의 선택·직업의 자유에 대한 일체의 전시 제한 철폐를 규정했죠. 강령은 또 보통선거권 획득과 하원의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철도·석탄광·발전소의 국유화를, 그리고 조건이 허용되는 범위에서 행하는 토지국유화를 주장하기도 했고요. 이러한 새로운 규약과 최초의 강령 채택은 노동당이 급진적 자유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형식의 개량주의로 이행하는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정의 완료를 의미했죠. 

이탈리아의 경우, 전쟁 참가가 경제적·정치적인 측면에서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어요. 군수공업의 발흥은 전통적 산업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1918년 들어 경제적 황폐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죠. 철도와 해운은 운송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농업은 군사 동원에 따른 노동력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거죠. 연료, 원료, 식료 등의 부족이 심각해졌고, 물가가 상승했으며 투기와 실업이 증대했습니다. 카포레토에서 당한 대패배 이후 삼각 공업지대(밀라노, 제노바, 토리노)를 위시해 전쟁과 궁핍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로마와 나폴리 그리고 여타 도시들의 노동자에 대한 정부 탄압이 강화되었습니다. 또 대토지 소유에 대해 분배를 요구한 농민운동을 대상으로 엄격한 탄압이 가해졌죠. 1918년에는 파업 건수가 전년보다 다소 감소(정부당국 통계로는 477건에서 313건으로 감소)했지만, 파업노동자의 완강함은 오히려 증대했습니다. 

sooya_02.jpg미국에서 행해진 노동자의 반전 투쟁은 미국이 협상국의 ‘공급업자’ 역할에서 ‘직접적 참가자’의 역할로 이행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전 세계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한다는 윌슨 대통령의 방침에 반대하여, 세계산업별노동조합(IWW)과 아메리카 사회당(SP) 좌파가 반전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죠. 

1916년 초 IWW는 전쟁 반대 방침을 명확히 밝혔습니다(리처드 O. 보이어 외, 1981: 241). “우리는 모든 전쟁을 저주하며, 그런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 시에는 반(反)군사적인 선전을 하여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고, 전시에는 모든 산업에서 총파업을 단행한다.”는 거였죠. 이런 활동은 사무엘 곰퍼스를 대표로 하는 미국노동총연맹(AFL) 지도부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쟁은 미국 독점자본에 대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자본의 집적을 촉진했습니다. 전쟁 말기에 미국에서는 4만 2,554명의 백만장자가 존재했으며, 인구의 1%가 국부(國富)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죠.

미국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 취약성을 빌미로 정치적 요구를 내건 파업투쟁을 적극 탄압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2월 IWW에 대한 본격적인 검거 선풍이 단행되었어요. 결국 간부 2,000여 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지도자 101명에 대한 재판이 1918년 4월1일 시카고에서 시작되어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음모, 전쟁노력 방해 행위, 동원에 대한 저항 등이었어요. ‘주범’에 대해서는 20년 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대중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죠.

협상국에 속했던 일본에서는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했는데, 중공업(전기, 강철제품, 기계제조)을 포함한 모든 생산부문과 무역 그리고 금융부문이 두드러지게 확장되었습니다. 사회적 계급구성도 근본적인 변화를 드러내게 되었고, 이것은 계급 사이의 내부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죠. 전쟁 말기에는 노동자 수가 250만 명에 이르면서 노동자계급은 자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구성도 변했어요. 이전에는 노동력의 60%가 경공업(주로 섬유산업)에 계절노동자로 고용된 농촌 여성이었던 데 비해, 전쟁 말기에는 농촌에서 떠나온 숙련 남성노동자들이 기간적 공업의 노동자층을 형성하게 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66).

일본의 자본가와 지주들은 전쟁 경기에 따른 큰 이익을 취하기 위해 노동대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물가고와 노동·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경제투쟁을 전개하게 되었고,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노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18년에 107개였던 노동조합 수가 1919년에는 187개, 1920년에는 272개, 1921년에는 300개(조합원 수 10만 3,000명)로 빠르게 증가했죠(?庄兵衛, 1985: 56).

sooya_03.jpg1918년 봄 일본 정부는 러시아에 간섭군을 출병시켰어요. 군인들을 위한 대량의 쌀 비축이 요구되었고, 대(大)미곡상들은 지주와 결탁하여 창고에 쌀을 쌓아두고서 쌀값을 인위적으로 올렸죠. 이 같은 상황에서 인민대중은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 전토에 걸쳐 ‘쌀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쌀 소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계급적 자각과 성장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죠.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에서는 전쟁 말기 협상국들이 선언한 봉쇄와 그것에 따른 식량난으로 민중들이 고통 받고 있었는데, 이런 조건에서 노동운동은 급진화되는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들 나라에서는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물가등기와 투기 그리고 생활 곤궁에 반대하는 파업 투쟁이 확대되었던 거죠. 스웨덴에서는 1917년에 약 1,800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그 다음해에는 3,000건에 이르렀어요. 덴마크에서는 1916년에는 파업이 75건 일어났는데, 1919년에는 504건을 기록했고요. 8시간 노동일과 보통선거권의 확립(스웨덴), 보통선거권의 개정(노르웨이) 등의 사회적·정치적 요구가 제기되었으며, 스웨덴의 좌파 사회민주당은 일원제(一院制) 의회공화국의 슬로건을 내걸었죠.

1917년 4월에는 스웨덴의 도시 베스테르비크에서 식량소동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감자 혁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위원회로 하여금 시의 식량창고 배급 상황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집회와 파업, 청원서 제출, 저장식량의 제공 요구 등의 움직임이 고조되었죠. 많은 도시에서 노동자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4월24일 스톡홀름에서 시위가 행해졌을 때는 병사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연대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또 6월6일에는 스톡홀름의 국회 의사당 앞에서 노동자 3만 명이 집결하여 의회제도 개혁 실시를 요구했습니다. 경찰대와 벌인 충돌로 많은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체포되었죠.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날을 “진정한 계급투쟁 최초의 날”로 불렀습니다.

2. 유럽에서 조성된 혁명적 위기와 혁명―반혁명 정세

러시아 혁명이 승리한 이듬해인 1918년 가을, 제1차 세계대전의 진행과정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유럽 중앙의 열강 국가들에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고갈이 표면화되었던 겁니다. 경작 면적과 가축 두수(頭數)의 감소, 협상국(연합국)들이 벌인 엄격한 경제봉쇄는 열강 국가 국민들에게 극심한 궁핍을 안겨주었죠. 또한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원료 부족이 극심해졌으며, 동원과 소모, 식량부족, 전염병 등의 결과로서 노동생산성이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탄과 철강의 생산도 감소했습니다. 동맹국 가운데 가장 발달한 독일의 산업생산고는 전전(戰前) 수준의 57% 정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전쟁의 피해와 경제적 황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특히 심각했죠.

광범한 빈곤층 대중들의 생활수준 저하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노동대중의 빈궁은 단순히 기아와 생활 빈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세 부담의 가중, 화폐가치의 하락, 집세의 상승, 물가의 등귀, 투기의 횡행으로도 이어졌어요. 전쟁에 따른 피나는 고갈, 참호생활에 대한 공포, 전장(戰場) 후방의 궁핍과 빈곤은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노역제도와 군사·경찰의 박해 ― 제국주의 전쟁의 약탈적 성격을 폭로한다든지, 배타적 애국주의의 허식(虛飾)을 벗긴다든지, 또는 노동자의 기본권리 옹호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탄압 ― 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지배 권력이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억누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경제적 요구와 반전(反戰)을 포함한 정치적 요구는 긴밀하게 결합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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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실질적으로는 핀란드, 폴란드 등의 나라를 독일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조약의 체결 모습과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화. ]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넘게 지속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독일은 당초 속전속결을 계획했으나 서부전선에서 큰 저항에 부딪치면서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특히 프랑스를 침공하는 데서 관문 구실이 된 벨기에에서, 독일은 큰 저항에 부닥쳤어요. 또 프랑스에 대한 영국군의 지원은 서부전선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러시아를 집중 공격하려던 독일의 의도는 난관을 맞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동부전선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러시아의 ‘전시동원’은 예상보다 신속하게 진행되어 어려움을 안게 되었죠. 여기에다 1915년 5월에는 중립을 지켜오던 이탈리아가 삼국 협상 측에 동조해 참전하게 되면서 서부전선에서 교착상태가 장기화되었던 겁니다. 

발칸 지역의 전황도 기본적으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어요. 공중전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우세했고, 해전에서는 영국이 우세했는데, 독일은 ‘무차별 잠수함 공격’으로 맞섬으로써 1917년 4월 초에 미국의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유발하게 되었죠. 미국의 참전은 삼국 협상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에 이은 러시아의 일방적 대독 강화, 즉 1918년 3월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독일로 하여금 서부전선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또 1918년 5월의 부쿠레슈티 강화는 독일에 대해 루마니아의 석유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죠. 그러나 1918년 8월 이후 독일 측은 열세를 면치 못했고, 10월 말과 11월 초에는 독일 군 내부의 반란과 더불어 뮌헨과 베를린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함으로써, 11월11일 무조건 항복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독일 측에 가담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가 항복했고요(배영수, 2000: 511~513).

세계전쟁이 종료될 무렵, 유럽 전역에서는 혁명적 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1917년에 혁명이 러시아를 휩쓸었듯이 1918년 가을에는 혁명이 중부 유럽과 남동부 유럽을 휩쓸었던 거죠. 프랑스 국경과 동해(Hobsbawm의 원문에는 “the Sea of Japan”으로 표기) 사이에 있는 어떤 기존 정부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승리한 쪽의 교전국들조차 안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으며, 더욱이 패전국들 가운데는 어느 나라도 혁명적 위기를 피할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Hobsbawm, 1994: 29).

이런 혁명적 위기는 기대한 것처럼 그렇게 동일한 궤도에서 성숙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은 여러 국가들과 민족들의 복합적인 집합체였습니다. 구체적인 조건들의 차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그것들이 교차하고 있었던 거죠. 교전국과 중립국, 패전국과 전승국, 미해결된 역사적 과제에 있어서 짐이 큰 국가와 작은 국가, 정치적·경제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큰 국가와 작은 국가, 노동자계급의 조직성과 의식성이 높은 국가와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지도성을 발휘할 능력이 큰 국가와 작은 국가, 사회적 세력들 사이의 다양한 역량관계 등이 그 같은 조건들이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상이한 조건에 따른 혁명적 위기가 각 지역이나 국가들에서 어떻게 조성되고 성숙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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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