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의 지루한 변명과 발랄한 결의

노동사회

어느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의 지루한 변명과 발랄한 결의

편집국 0 3,734 2013.05.29 10:17

미리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앞으로 이 글은 구구절절할 것이니까. 내가 하고 있는 ‘사교육’ 시장에서의 일이란 것이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러니만큼 이 글은 구구절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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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육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은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일등을 만드는 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초등학교의 일제고사 모습.  ▶ 한겨레 ]

공교육의 목표와 사교육의 경쟁력

일단 사교육이란 것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면 한다. 흔히 사교육은 공교육과 대칭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제공’하는 교육체계의 바깥에서 사적인 ‘거래’를 통해 형성되는 교육 시장을 우리는 사교육 시장이라고 부른다. 

흔히들 한국을 ‘사교육의 나라’라고 한다. 아주 어린 나이의 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 심지어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까지 꾸깃꾸깃 구겨진 돈을 들고 와서 사교육 시장에서 무엇인가를 배워 간다. 이게 참 아이러니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거의 모든 것은 공교육 체계를 통해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공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혹은 공교육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교육 시장 앞에 줄을 선다. 그리고 이들은 ‘공교육 허무론’을 호소한다. 공교육 체계를 통해 배우고 공부한 것들이 졸업과 동시에 쓸모가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교육을 탓한다. 그리고 공교육이 사교육처럼 경쟁력을 지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운 것들, 교과서적으로 암기한 지식, 교과서적 서술 방식을 따라가며 은연중에 익히게 되는 논리성과 합리성, 다양하게 학습되는 인간과의 관계 맺기, 공동체적 삶의 경험 등은 학교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교육의 알맹이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교육은 할 만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공교육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공교육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은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공교육이 감당할 수없는 짐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이 감당할 수 없는 짐, 그것은 ‘일등을 만드는 일’이다. 궤변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사회가 원하는 인재는 백점을 자주 맞는 학생이 아니라 언제나 일등을 유지하는 학생이다. 즉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는, 남보다 잘하는 것을 더 인정해준다. 그리고 일등, 즉 승자에게는 모든 것을 독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불행히도 공교육은 일등을 만드는 시스템이 아니다. 모든 학생들이 고루 도달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러니 학교 교육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학교에서는 사람 되는 방법을 배우는데, 학교 밖에 나오는 순간 일등이 되는 투쟁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 당황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비쳐오는 서광, 그것이 사교육이다. 사회가 흉포해지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질수록 사교육은 호황을 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좀 미묘해진다.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보다 ‘1등’이 필요한 사회

앞서 사교육은 일등을 만드는 교육이라고 했다. 이 얘기를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사교육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교육도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도 아니다. 전자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후자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사교육이 일등을 만드는데, 사교육이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들지 않다니 이 무슨 얘기냐! 답은 간단하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일등일 수는 있지만 일등이 언제나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일등은, 한마디로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다. 무엇이 되었건 테스트를 잘 보면 일등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시험의 평가 항목들 중에 수험생의 창의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누군가 이 시험에서 일등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이 사람에게 창의력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보통 ‘능력’이라고 하면 한 두 가지의 테스트로 알아낼 수 없는 여러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나는 성적이 엄청나게 좋은 고등학생들이 기본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에 있어 결핍을 드러내는 경우들을 숱하게 봐왔다. 이 학생들은 ‘시험지를 푸는 기계’에 가깝다. 사교육은 시험이라고 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패턴을 꾸준히 학습시켜 일등을 만들지언정, 시험지 바깥의 것에 대해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회는 어쨌든 일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교육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내가 느끼는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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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를 한국어처럼 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지지하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영어마을 모습. ▶ 한겨레 ]

학생운동권 출신 학원 선생의 딜레마?

나는 앞서 내가 느끼는 딜레마를 긴 분량을 할애해 설명했다. 이렇게 긴 분량을 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운동권 출신이 사교육 시장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라고 사람들이 흔히 호기심 갖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즉 딜레마를 느끼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던 내가, 사회 불평등 구조의 재생산을 주도하는 시장에 있다 보니 참 괴롭네요.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결국 학원 선생도 ‘노동자 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이런 답들. 실제로 사회진출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런 답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 ‘죄책감’없이 종사할 수 있는 직종은 내가 보기엔 없다. ‘금융세계화가 세상을 망치는 마당에 금융권에 종사할 수는 없지. 제3세계 민중의 노동을 착취하는 더러운 스포츠 용품회사에서 근무할 수는 없지. 제약사업이야말로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야. 아, 출판업은 나무를 베는 반환경적인 사업이로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엉뚱한 딜레마에 도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그 자체가 착취를 당하면서 남들을 수탈하는 과정에 불과한 거로군.’ 이런 식이다. 

그러나 ‘오십보백보’라는 옛 말씀을 떠올리며, ‘그래도 오십 보를 물러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최대한 ‘깨끗한’ 직업을 찾아보자고 두리번거리다 보면, 눈에 걸리는 직종들이 있다. 기자(보수 언론사는 말고)나 PD(그것도 시사교양 PD), 사회단체 활동가, 농사, 선생님, 학자, 작가…… 뭔가 ‘양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들을 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물론 이 이미지는 실상과는 별개로 생긴 전통적인 이미지들이다. 심지어 이 와중에 언론고시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그래도 나는 보수언론엔 지원서를 쓰지 않아”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생활인’으로서 학원 강사의 변명과 결의

나는 깨끗한 직장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치사하다고 느낀다. 치사해지지 않으려는 치사함보다 더 치사한 것은 없다. 자신의 삶을 무균질의 인큐베이터에 가두는 꼴이다. 건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 직장에나 들어가서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책에서만 읽었던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에 직접 편입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갈등과 고민들을 모두 껴안으며 해결해나가는 사람의 단단함을 보면 기분이 좋다. 열심히 사는 생활인이기도 하려니와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더럽고 치사한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여사원에게 커피 심부름 시키는 것쯤은 저지할 수 있는 소박한 정치력과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프로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인정받는 사람들이 좋다. 이것은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현장에 투신하겠다던 옛 선배들의 결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자신의 사상에 떠밀려 스스로의 삶을 미뤄두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대로 가야하지 않을까? 사상을 안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마 원래의 취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교육 공간을 통한 ‘능력 있는 사람’ 만들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해서, 지금 사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요즘 나의 고민은 사교육이라는 곳에서 정말 ‘능력 있는 학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일단 기본적인 논리력과 합리적 사고력을 지니고 있어야(예를 들어 경쟁과 소유가 삶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사회의 필요에 의해 소모당하지 않을 수 있을 터다. 또한 능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해결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다양한 규모의 집단 내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사고력과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이를 통해 타인의 삶 역시 지지하고 긍정해줄 수 있는 관용을 지닌 사람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친구들이 어떤 학생을 따돌리는 게 전체적인 분위기라고 해서 거기에 편승하는 것은 못난 짓이고, 혼자 숨어서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찍는 것보다는 여럿이 모여서 함께 토의해보는 것이 성적이 더 잘 나오는 지름길이고, 성적이 아무리 좋아봤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으로부터 낙오된다는 것을 아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 능력 있는 학생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해야 함에 있어 사교육 공간이란 것은 크게 비관할 만한 것도 낙관할 만한 것도 아니다. 

세상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사교육 공간에도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러쿵저러쿵 살아간다. 좋은 사람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나쁜 놈도 있고 무능력한 사람도 있다. 돈 많은 사람이 더 유리하고 헛똑똑이들이 이용당하는 곳이다. 나는 적당히 돈을 벌며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나름의 공부를 하고 있다.

사교육 소비자 혹은 불매운동가들에게 드리는 충고  

다만 사교육 서비스의 제공자로서 사교육의 소비자가 되려는 분들, 혹은 소비자가 되기를 꺼려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경험적 충고를 드리고 싶다. 첫째, 사교육에서 어설픈 정의감은 별로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논술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진보적인 사고를 소개하겠다는 포부 같은 것은 접는 것이 좋다. 대신 건강한 비판력과 합리적 사고력을 지닌 학생이라면 나름의 기준에서 보수건 진보건 부족함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 사교육은 비싸다. 그러나 비싼 값을 하는 사교육 시장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선생님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아이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억지로 공부시키면 애들이 잘하겠거니, 그래도 억지로 시키는 게 더 낫겠거니 하는 것은 안일한 믿음이다.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겐 차라리 책을 읽히고, 책도 싫어하는 아이들은 차라리 수다를 떨게 하는 것이 훨씬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 하긴 요즘 아이들은 친구들이 다 학원에 나가니 친구들 만나러 학원에 온다. 

셋째, 앞서도 말했거니와 사교육이 만드는 것은 일등이지 능력이 아니다. 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잘 생각해보지 않고 무작정 사교육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이 누구이건 간에, 아이들 앞에서는 부모가 되고 선생님 앞에서는 학부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아이의 성적과 진로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걱정에 대해 터놓고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사교육 반년 받는 것보다 (성적 향상에 있어) 더 좋은 교육 효과를 낳는다.

이명박 시대, 어쨌건 시장은 부푼다… 암울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때 주위에 있던 선생님들의 반응은 일단은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가 대통령이라니……. 나라가 어찌될까!” 그러나 곧 분위기가 명랑해질 수 있었다. 뭐 어쨌든 덕분에 돈은 많이 벌겠군! 서울 교육감 선거가 끝났을 때도 비슷했다. 어찌 저런 사람이 교육감을! 그러나 곧 명랑해졌다. 어쨌든 학원업은 전에 없이 호황을 누리겠으니 돈이나 벌자. 참으로 답답하고 수상한 시절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