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대안학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노동사회

우리 아이가 ‘대안학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편집국 0 6,036 2013.05.29 10:17

내가 사는 부근의 어느 고등학교는 서울대에 학생을 많이 입학시키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 그 학교 우등생은 점심시간에 밥을 먼저 먹는 특권이 있다고 한다. 밥을 먹을 때 줄도 다르게 선다고 한다. 충격스런 얘기다. 이러다간 성적에 따라 반찬도 달라질 수 있겠다. 요즘은 명문대학교에 가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어도 별 이상스럽지 않게 되었다. 학부모조차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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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안학교 중의 하나인 간디학교 학생들의 연극 공연 모습  ▶ 간디학교 ]

밥도 성적순으로 먹는 학교

성찰이 필요한 삶의 가치는 외면 받기 일쑤고 이제 세상은 ‘시장’이 모든 걸 지배한다. 아니 모든 것의 기준은 시장의 논리다. 돈이 되는가 아닌가가 가치의 척도다. 교육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교육시장”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르렀다.

‘학교 자율화 3단계 방안’,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학교 선택제’, ‘대입자율화’ 등등. 이명박 정부는 다양한 교육방침을 쏟아내고 있다. 많기는 왜 이리 많은 지 도통 잘 모르겠다. 교육전문가들은 MB 정부가 지역-학교-교사-학생으로 이어지는 ‘경쟁’과 ‘평가’ 체계를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정부 지원의 ‘선택’과 ‘배제’, 교육 시장 확대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경쟁’, ‘평가’, ‘서열화’. 이 세 개의 단어가 마치 주술과도 같이 한국 교육을 집단 광기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각종 학원이 많은 걸 알 수 있다. 교회 수와 비교해도 더 많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다. 초등학교 3학년인 작은 딸은 방과 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친구들은 거의 다 학원에 다닌다. 그래서인지 학원에 보내는 게 친구를 만들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말도 있다. 나도 딸을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 학원에 보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진다.

“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공교육을 바꿔야지”

큰 딸이 중학교에 갈 즈음 교육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물론 내가 고민을 깊이 한 것은 아니다. 나야 항상 하숙생처럼 살고 있었고, 마침 그 때는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진행 중이어서 그럴 틈도 없었다는 핑계도 있다. 큰 딸을 대안학교에 보내자고 고민 많던 집사람이 내게 얘기했다. 부부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아니 우리도 그렇게 컸는데 무슨 대안학교를 보내? 그냥 모두가 겪는 걸 보고 자라게 하는 게 맞지. 어차피 학교 밖으로 나오면 알게 될 현실인데 처음부터 보는 게 낫지.”

내 얘기였다. 그래 봤자 아이들 교육에 대해선 발언권이 별로 없는 내 얘기가 집사람에게 통할 리 없었다. 

내 고민을 들은 한 노조 사무국장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뭘 다르게 키워요? 공교육을 바꿔야지. 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자식만 다른 교육을 시킨다는 게 영 맘에 걸려요” 라는 충고를 건넸다. 하지만 결국 우린 대안학교를 선택했고, 아예 대안학교 부근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했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인 셈이다. 

대안학교가 어떤지 처음 직접 목격한 것은 경북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에서였다. 아는 사람의 딸이 다녔는데 마침 내가 간 날 학교에서 ‘패션쇼’가 열렸다. 한 학생이 만든 옷을 다른 학생들이 입고 무대를 거니는 게 진짜 패션쇼와 다를 바 없었다. 옷을 만든 아이는 ‘앙드레 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중학교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보다는 자기 전공을 살리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는 정말 감동했다. 우리 딸이 그렇게만 성장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의 후배가 무주에 있는 푸른꿈 고등학교에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 학교의 학생과 맥주도 한잔 했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게 좋았다. 

대안학교 입학에는 부모 면접이 중요하다. 그 때 만난 선생님은 “보통의 경우 노동운동하는 사람의 자식들이 더 보수적이기 십상”이라고 했다. 부모의 삶을 보면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짐작컨대 자식들과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rootshim_02.jpg“솔직히 아이를 키우는 데 자신 없으시죠? 우리가 키워 드릴께요” 

그 한마디에 나는 결심했다. 다행히 그 학교의 특별 전형에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사회공헌 부모’의 자식도 해당되었다. 그리고 그 사회공헌이라는 게 나처럼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동안 나는 운동을 하면서도 자식을 번듯하게 성장시킨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 부러웠다. 여기서 ‘번듯하다’는 말에는 좋은 대학 입학이나 좋은 직장에의 취직을 바라는 얄팍한 심정이 깔려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분명히 선택해 환경운동을 하든지, 대학을 가지 않고 NGO의 길을 선택한 경우도 부럽긴 마찬가지다. 나는 장차 우리 자식들이 자기 길을 분명히 선택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21세기와 더불어, 비정규직과 더불어 사는 삶

어느새 큰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어느새’라는 것은 그만큼 딸의 교육과 성장에 해 준 것도 없고, 무관심했다는 반성을 담고 있는 말이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안 들어가는 일이 잦으면서, 대화다운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딸은 훌쩍 커버렸다. 그나마 올해 초 촛불집회가 기회가 되어 광화문 거리를 손잡고 걸으면서 제법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웃기게도 내가 이명박 정부에게 유일하게 고맙게 생각하는 일이다.

“21세기의 더불어 사는 삶”. 딸이 다니는 학교가 내세우는 가장 큰 신조다. 그러나 “모든 대안학교가 대안을 찾아 가는 과정 중의 학교”라는 말처럼 아직 실험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다만 딸이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가는 공동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느 날 우연히 들여다 본 딸의 메모장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있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 데 재능이 없는 사람은 어떡해? 일찌감치 주제파악하고 남들처럼 조용하게 살다 죽어? 아니면 성공 못할 거 뻔히 알면서도 몸이 부서져라……. 어떻게 해야 돼?” (TV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 3/29 97화).

이 글을 쓴 까닭은 뭔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말일 게다. 학교 숙제로 낸 어떤 글에서는 “교수들 머릿속 안에 원하는 답이 나와 있다. 그래서인지 다수의 학생들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이 더 높아지기보다는 그저 얌전히 대학이나 잘 들어가서 안정된 직장, 편안한 노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게 우리나라 학생들의 생각하는 힘은 점점 떨어져 간다”라고, 제법 분석을 하고 있기도 했다.

딸네 학교에서 방학을 맞아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한창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싸우고 있던 매향리 주민, 이주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농민들을 모시고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 내가 섭외를 맡은 케이티엑스(KTX) 노동조합의 간부는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설득력 있게 얘기해 주었다. 그날 이후부터 내가 주말집회에 나가면서 딸에게 “오늘 비정규직 집회에 간다”고 말하면 “응, 아빠 고생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마나 대안학교에 보냈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런 교육을 공교육에서 시도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게 교육이 아니던가? 

나는 작은 딸도 될 수 있으면 대안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고민이 많이 되긴 하지만 성적과 경쟁보다는 다른 것을 그 나이에 보았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다. 물론 대안학교가 또 하나의 혜택이고 선택된 자들만의 것임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특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는 것도 또 다른 ‘현실’임은 분명하다.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지 않는 것 

“아무도 학교에서 우리가 졸업하고 나가서 일할 사회가 이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비정규직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조합원을 집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 조합원 같은 졸업생이 매년 수십만 명씩 살벌한 사회로 나오고 있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채.

언젠가 인터넷 신문 『레디앙』에서 인터뷰를 했던 KTX 민세원 전(前)지부장은 공교육에 대해 “질 좋은 소모품을 생산하는 교육”이라고 표현했다. “성적지상주의, 출세지향주의, 이기주의로 점철된 교육과정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사고할 수 없게 한다”는 게 자신의 경험에서 느끼는 교육 현실이라는 얘기였다. 

사실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경쟁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무릇 자본주의가 그렇듯이 ‘내 것’에 대한 기대와 애착은 쉽게 버릴 수 없다. 마찬가지의 태도를 나는 내 자식들에게 보이고 있다. 나는 내 딸이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면서 살기를 바라지만,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전두환에 대한 반대 데모를 했을 때 내 부모가 보이셨던 태도를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아들이 대학 졸업장마저 못 가졌을 때 그 아들이 겪어야 할 인생에 대한 걱정을 하셨을 게다. 사실 조건이 어려워져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주머니에 이력서를 잔뜩 넣고 취직을 하러 다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에 고졸 학력으로는 만만한 곳이 없었다. 해서 다시 공장에 용접공으로 위장취업이 아닌 ‘취업’을 했던 경험이 있다. 우리 부모가 나에 대해서 했을 그 고민을 이제 나도 하게 된다. 
교육은 돈이다

최근 손낙구 전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이 쓴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책을 보니, ‘부동산 재산격차 → 소득과 수입의 격차 → 사교육비 격차 → 지식의 학력격차’로 이어져 과거의 ‘우골탑’이 ‘아파(트)탑’이 된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높아진 사교육비로 인해 “8억대 아파트에 살면 28명이 서울대에 합격하고, 7억대 아파트에 살면 22명, 5억대 아파트에 살면 12명이 합격한다. 4억은 9명, 3억은 8명이 합격한다”는 것을 통계로 입증하고 있다. 교육환경이 우리가 자랄 때와 비교하면 크게 달라졌다. 지난 9월7일 한국은행 국민소득 통계를 보면, 상반기 교육비 지출액이 15조 339억 원으로 작년에 비해 9.1%나 상승했다. 그렇게 부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교육 혜택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교육과 돈의 문제는 주변에 흔히 있다. 내겐 두 명의 처형이 있는데 사업을 하시는 한 분은 큰 아들이 중학생일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처조카는 아마도 한국사회의 주도적인 위치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아주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다른 한 분의 아들들은 전문대학을 나와 뚜렷한 직업이 없이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1년에 1,000만 원이 넘는 등록금, 아니 그 이전에 엄청난 사교육비는 아무나 부담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큰 딸은 대안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특별한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 다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학부모 사이의 묵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수학 등 떨어지는 과목에 대해서는 학부모가 직접 나서서 가르치기도 한다. 수학이 젬병인 큰 딸은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그리기와 무대 연출에 빠져 지낸다. 어떤 날은 컴퓨터를 하루 종일 붙들고 있어 집사람과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딸이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만 집사람은 그 다음도 고민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앞가림을 하면서 살려면 대학이라는 관문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집사람의 논리인데, 솔직히 그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경쟁을 넘어선 교육, 꿈일까?

내 인생에서 전두환만 안 만났으면 나는 아마 지금쯤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교직과목도 이수 중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와 학교에 돌아가 보니 교직과목의 혜택이 사라져 버렸다. 전교조 때문에 해고 되었다가 10여년 만에 복직하게 된 친구에게 “야, 천만원 줄께 나한테 교사 자격 팔아라”라고 농담한 기억도 있다. 아마도 젊은 시절 야학을 하면서 느꼈던 게 오래가나 보다. 

큰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담임선생님에게 메일을 한번 보냈다. 당시 민주노총에서 일하던 나는 내 직장을 밝히고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덕분에 학교에 한 번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어쩌면 지위를 이용한 ‘경고’였는지 모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의사셨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들은 유독 아버지를 학교에 오시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약이라도 한 첩 먹고 싶은 걸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희망과 현실에서 내가 선생님들을 대하는 태도 사이의 모순!

고등학교 때 세계사 선생님은 “객관화된 주관적 인식을 가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어려운 말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교육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선생님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경쟁과 입시지옥을 넘어 우리 아이들이 그런 행운에 보다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선생님의 지위조차 흔들리는 ‘도떼기 교육시장’에서 그건 아무래도 꿈에 그칠 것 같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