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민주주의와 양극화 그리고 진보운동의 과제

노동사회

촛불민주주의와 양극화 그리고 진보운동의 과제

편집국 0 3,235 2013.05.29 10:01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대의정치를 제도화함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사회적 시민권을 확보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행적인 궤적을 보여 왔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386세대’ 주도의 민주화운동은,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활성화와 민주정부 수립 및 정권교체를 성사시키며 탈권위적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제도화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1997년 초 노동법개악 저지투쟁에서부터 작금의 광우병 쇠고기 규탄 촛불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의 전횡에 항거하는 급진적 시민정치의 민주역량으로 계승·진화되고 있다. 

한편 1990년대의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민주정부들의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 담론이 우리 사회 전반에 관철되고 있다. 이는 대기업 중심의 수익독식 체제 및 노조운동의 ‘폐쇄적’ 활동 관성과 맞물려 사회 불평등의 양극화구조를 확대·재생산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참여정부 시절 민생경제의 파탄은 역설적으로 정치지형의 보수화를 초래하여, ‘공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표방하는 이명박 정권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신보수정권의 권력 독점에 맞서는 촛불민주주의  

bhlee_01.jpg지난해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 승리로 10년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에 이어, 올해 4월 총선에도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확실한 보수세력인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등이 약진했다. 이로써 명실 공히 보수적인 정치권력체제가 굳건하게 확립되었다. 이 같은 정치권력의 급격한 보수화는 이미 참여정부의 국정실패를 통해 예고되었던 바였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지난 5년 동안 심각해지는 민생문제에 대해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무능한 ‘좌파(?)정권’에 대한 당연한 민심이반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경제 살리기’의 선거정치 프레임을 적절하게 내세운 한나라당은 날로 심화되는 사회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다수의 국민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집결시켜 정권 탈환에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회·지자체를 모두 장악하고, 재계와 보수언론의 든든한 후원에 기반하는 막강한 신보수 권력체제를 갖추었다. 

그런데 ‘747 MB노믹스’를 내세우며 의기양양하게 출범하였던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의 아마추어적 국정기획, ‘강부자 내각’ 파문, 무모한 교육경쟁력 강화정책, 그리고 급기야는 미국 쇠고기 수입협정의 일방적 강행을 통해 독단-무능-졸속의 국정능력을 드려내며 임기 초부터 스스로 권력 기반을 파탄내는 지경에 놓여 있다. 그 결과 국정 지지율이 20% 미만으로 추락하는 등 급속한 민심이반에 직면하였을 뿐 아니라, 5월 초부터 시작된 자발적인 시민참여의 촛불집회가 1987년 6월 항쟁을 방불케 하는 심야 가두시위로 확대·발전되면서 정권위기의 상황에까지 봉착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오만불손한 통치스타일에 저항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광장 등에서 ‘촛불민주주의’의 진지를 구축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 의사를 표출함으로써, 권위적인 신보수정권에 맞서는 거대한 대항세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생계형 보수화’와 ‘시민정치 급진화’의 공존

6개월여의 짧은 기간 동안, 대선과 총선을 통해 보수정권에 국민적 지지가 압도적으로 모였다가 동시에 현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행태에 대한 시민사회의 급진적 저항세력화가 진행되었다. 우리 사회 특유의 역동적인 정치격변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지형의 변동은 그 경과의 역동성과 의외성 못지않게, ‘생계형 보수화와 시민정치의 급진화’로 집약되는 우리 민주주의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중성은 촛불집회에 수만,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가해 “쇠고기 재협상, MB 아웃”을 외치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동시간대에, 기륭전자, 이랜드, KTX, 코스콤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천일 또는 수백일째 일자리 사수를 위한 생존권 투쟁을 외롭게 지켜나가는 장면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오뉴월 촛불집회들을 통해 우리 시민사회는 ‘보이는 손’(국가권력)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 의사를 능동적으로 표출하고 실천하는 적극적인 시민들이 다수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논리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시장)의 파괴적 지배력이 날로 강고해지면서 비정규직들의 ‘부서진 미래’가 일상화되고 ‘88만원 세대’의 절망이 메아리치고 있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시정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민행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우리 민주주의의 이 같은 양면성에 대해 어느 연구자는 “자유주의적 개혁단계로부터 사회개혁적 단계로의 이행과정에서 겪게 되는 과도기적인 병목현상”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작금의 혼란스런 국면이 진보적 민생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위한 성장통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미국식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democracy without labor)로 귀착될지가 진보-보수진영 간의 힘겨루기와 ‘내공 실력’에 의해 가름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내부 분단을 심화시키는 노동 양극화 속에서 날로 확대되고 있는 자유(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실질) 민주주의 간의 간극을 해소하는 것은 진보운동의 시대적 책무라 하겠다. 노동양극화를 치유·극복하는 ‘제2의 사회경제적 민주개혁’을 위해서 진보운동의 급진적인 재정비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금의 촛불집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이는 손(국가)의 독단에 맞서는 적극적 시민역량을, 보이지 않는 손(시장)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한 진보개혁세력의 대중적 기반으로 전환·진화시키기 위한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과 실천 조직화가 도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적 싱크네트워크’ 추진해 볼 만 해

이러한 진보운동의 주체적 재정립을 위해서는 특히 조직노동과 시민사회운동의 전면적인 자기혁신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노조운동은 조합원 이익대변 위주의 폐쇄적 실천방식에서 벗어나 노동 양극화의 분절구조를 가시적인 실천으로 혁파하려는 사회개혁적 운동의 전범을 창출·확산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운동의 경우에도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의제에 경도된 기존의 활동관행을 탈피하여 사회경제적 구조문제에 보다 주력하는 실천의제의 재조정이 요망된다. 

아울러 작금의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거대한 국민적 민주역량이 건재하고 그들의 새로운 운동방식에 오히려 진보진영이 뒤좇는 형국에 대한 분명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한다. 조직노동과 시민사회운동 모두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시민과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소위 ‘진보적 현장소통’을 강화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운동과 시민사회운동 간에 존재하는 불신과 오해의 틈새를 메우고, 사회개혁적 민주주의의 성취를 목표로 하여 전략적 지향과 전술 실천을 굳건히 공유하는 진보적 연대가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안적인 반신자유주의적 담론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인 만큼, 여러 진보운동단체들의 전략기획 역량을 총화·결집할 수 있는 ‘진보적 싱크네트워크’(think network)를 연대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대중들이 개체화된 존재로서 각박한 시장경쟁의 희생자로 전락·안주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보적 개혁세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연대적 담론과 공동체적 생활세계를 수용·내면화하는 성찰의 계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 구체적인 과정에 새로운 진보운동의 활로가 있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