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의 출발점을 보다

노동사회

촛불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의 출발점을 보다

편집국 0 3,167 2013.05.29 09:59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적극 지지합니다”, “여러분의 파업을 적극 지지합니다”, “민주노총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광우병 고기 막아줘서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민주노총”……. 6월26일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의 제목이다. 조합원이나 조합원 가족이 올린 글들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 “현이엄마”, “주부입니다”와 같은 필명의 보통 시민들이 올린 글들이다. 

아마 민주노총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아니,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총파업이 미조직 시민들로부터 이토록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그런데 막상 몇몇 민주노총 산하 연맹의 ‘조합원’ 게시판에 가 보면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물론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의식하는 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파업은 싫다”는 류의 글들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노동조합이 파업하겠다고 할 때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정작 여론이 파업을 지지하는 쪽으로 흐르자 노조 안에서는 “파업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비등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엇박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 사회의 흐름과 노동운동 사이의 엇박자.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든, 심지어 기대하지 않았던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갈 때조차, 노동운동은 사회와 엇나가고 사회와 거리를 두며 심지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촛불정국에서 노동운동이 맞부닥뜨린 가장 뼈아픈 물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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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조합은 촛불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온라인 커뮤니티를 주목해야 한다. 7월5일 촛불시위에 참여한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행진 모습. ▶ 노동사회 ]

무력했던 촛불정국 속 노동운동… ‘꼰대’가 된 건가?

노동운동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돌이켜보는 데에도 촛불운동은 중요한 참고가 되어준다. 촛불집회 때마다 우리는 ‘82쿡’이니 ‘레몬테라스’니 ‘소울드레서’니 하는 온라인(인터넷) 커뮤니티의 깃발을 보았다. 운동권들에게는 낯선 이름들이었지만, 그 관심과 열성은 어떠한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못지않았다. 이들 온라인 커뮤니티와 노동조합을 서로 견주어보면, 지금 노동조합이 걸린 만성 성인병을 좀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우선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노동조합에 비해 문턱이 낮다. 사실은 민주노총 산하 많은 노동조합들이 기업별노조가 아닌 산별노조를 자임하고 있으므로 노동조합도 문턱이 낮아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민들은 문턱이 실제로 낮아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임금노동자면 누구나 쉽게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별노조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렇다고 초기업 단위 노조의 시대가 시작된 것도 아니다.  

반면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수많은 시민들(그 중 다수는 물론 임금노동자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동체이자 자조(自助)조직이다. 어떤 커뮤니티는 회원만 수십만 명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산별노조급 규모다. 

더구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이를 주도하는 시민들 중 상당수는 여성과 20대다. 이들이야말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가장 ‘안 친한’ 집단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온라인 커뮤니티는 노동조합과는 달리 이들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노동조합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가르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의사결정구조다.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언젠가부터 너무도 중앙집권화되었다. 조합원들은 대의원대회의 결정만을 바라보고 집행부의 지령만을 기다린다. 그런 공식결정 이전에 조합원들의 의견과 여론으로 조직이 시끌벅적해지고 살아 꿈틀대는 일은 요즘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온라인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수평적이다.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고 누구의 결정을 기다릴 것 없이 뜻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행동에 나선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매번 반복될 때마다 회원들의 소통과 의사형성 능력은 더욱더 강화된다. 

관심 영역과 그 폭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동조합이 할 일은 임금단체협상이라는 게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더구나 한국 노동운동은 오랫동안 기업별 체제에 익숙해왔기 때문에 임단협의 쟁점이란 것도 대개 한 공장 안, 한 회사 안의 일들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조합원들도 조합의 틀로는 으레 이런 것들만 고민하면 되겠거니 생각한다. 

이에 반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자. 이들 커뮤니티의 관심 영역은 어찌 보면 노동조합의 관심사들보다 더 보편적이다. ‘82쿡’은 요리 커뮤니티다. 의식주의 ‘식’을 다룬다. ‘소울드레서’는 의상 커뮤니티다. 의식주의 ‘의’와 관련된다. ‘레몬테라스’는 주거 커뮤니티다. 의식주의 ‘주’에 관심을 갖는다. 의식주라는 생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H사에 근무하든 S사에서 일하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임금노동자 가족의 가장 보편적인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지금 우리의 노동조합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비해 임금노동자 공동체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들과 마주하면서 노동조합은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실감했다.
 
세상 변한 줄 모르고 낡은 원칙, 옛 기억이나 읊어대는 사람을 시쳇말로 ‘꼰대’라 한다. 어쩌면 노동운동은 자신도 모르는 새 ‘꼰대’가 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꾸 사회와, 세상과, 시대와 엇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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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조합은 촛불시위 말고도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해야 한다. 한 시민이 시청광장 민주노총 천막 앞에서 민주노총이 나눠 준 유인물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 노동사회 ]

그래도 노동조합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은 이제 낡았으니 내버리고 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노동조합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운동에서도 드러났다. 정권과 정면 대결하는 국면이 되니까 시민들이 가장 먼저 기댄 것은 역시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이 우리 편이 된다면 싸워볼만 하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총파업을 응원하러 노동조합 게시판을 찾기도 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선동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시민들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했다. 총파업은 형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촛불운동을 1968년 프랑스의 5월 항쟁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때 프랑스 노동조합들이 한 역할에 비하면, 우리 노동운동은 이번에 거의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68년에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이 거리에서 경찰한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서 무려 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대중파업을 벌였다.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개량화’되었다고 폄하하는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했다. 한데 노동 현장에 아직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정치파업 반대”의 목소리마저 공공연히 나왔다. ‘개량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꼰대화’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이번에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무튼 노동조합은 여전히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 노동조합운동이 아무리 시대에 뒤쳐졌다고 해도, 이걸 버리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랄 수는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그것 자체로 새 시대의 훌륭한 공동체들이지만, 이들 조직에 노동조합이 해야 할 역할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차라리 온라인 커뮤니티가 구현한 새 시대의 특성들을 노동조합이 따라 배워야 한다. 그래서 노동운동도 다시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노자의 말마따나 “모든 생명력 있는 것들은 말랑말랑하다.” 딱딱해지는 것, 그것은 죽음의 징조다. 

노동운동, 촛불에서 배우자! 말랑말랑해지자!

무엇부터 배울까? 우선 노동조합도 ‘커뮤니티’라는 것, 공동체라는 것, 그것부터 되새겨봐야 하겠다. 노동조합은 임단협 대행해주는 해결사 조직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공동체다. 

어떤 사람들의 공동체인가? H자동차 노동자들의 공동체인가? S조선 노동자들의 공동체인가? 아니다. 고용돼서 임금으로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온라인 커뮤니티 가입하듯이 어렵지 않게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이게 안 되고 있는 것을 현재 산별노조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로 보아야 한다. 보건의료노조가 있다는데 간호사 2, 3명 일하는 개인병원에서는 노조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보건의료노조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한국의 산별노조라는 데가 다 이 정도 수준이다. 그래서 산별노조로는 안 되겠다며 지역일반노조가 대안이라는 분들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산별이 됐든 지역일반이 됐든, 어떠한 형태로든 온라인 커뮤니티 수준으로까지 ‘문턱이 낮아진’ 노조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요 관심사도 임단협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임금노동자가 맞부딪치는 모든 문제들로 넓어져야 한다. 노동조합이 임금 수준을 맞춰주면 그 임금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조합원 개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먹고 입고 잠자는 문제, 이 모든 생활의 문제가 다 노동조합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파업전술에 대해서도 다시 봐야겠다. 그동안 노동조합의 집단행동이라고 하면 파업밖에는 생각나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 생길 때마다 번번이 ‘총파업’만 외쳤다. 한데 막상 이번 촛불정국처럼 총파업이 가장 필요한 때가 되니까 정작 제대로 된 총파업을 하지 못했다. 말로만 총파업을 남발한 게 결국은 총파업의 진지함마저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이러느니 차라리 파업 외의 다른 집단행동 전술들을 더 개발하는 게 낫다. 촛불시위는 분명 훌륭한 한 가지 사례다. 촛불시위 외에도 1천5백만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고 동료 시민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해보자. 그리고 총파업은 비장의 무기로서, 해야 할 때 반드시, 제대로 하자.  

이 정도 이야기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을 잘 안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온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을 실현하자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출발점은 분명해졌다. 우리 시대의 ‘사회운동’, 촛불운동이 등장했으니,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배우고 거기서부터 한 걸음을 떼야 한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다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은 앞으로 영영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