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와 촛불시위

노동사회

한국 민주주의와 촛불시위

편집국 0 3,873 2013.05.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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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자발집단에 기초한 이성적 군중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실시간으로 공유함으로써 직접행동과 토론의 끊임없는 성찰성을 드러낸다. 한 시민의 촛불시위 인터넷 생중계 모습. ▶ 한겨레 ]

지난 5월 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어느덧 두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72시간 릴레이시위와 6월10일 100만 촛불대행진을 거치면서 도심에 넘실댔던 장엄한 촛불의 바다는 ‘주체의 귀환’이 주는 흥분과 감동을 맛보게 했다. 배후 없는 자발성, 위험사회와 생활정치 이슈의 등장, 비폭력 평화집회, 축제적 시위문화, 거대한 군중 규모, 토론과 직접행동이 어우러진 ‘이성적 군중’의 자기 성찰성, 디지털 1인 미디어의 활약 등 촛불시위는 지난 수십 년의 사회변동을 반영하는 놀랍고도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CEO 대통령의 불안한 독주와 닫힌 정치민주주의

사회운동의 발생동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이라는 생활정치적 이슈가 이 거대한 시민행동의 ‘촉발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졸속으로 처리된 쇠고기 협상만이 이 거대하고도 그칠 줄 모르는 촛불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도 주지의 사실이다. 교육 자율화, 한반도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등을 비롯한 개인의 삶과 생계, 공동체와 환경을 위협하는 정책이 대책 없이 남발되었던 데다, 꿋꿋하게 추진된 이른바 강부자 내각과 고소영 인사 등은 이러한 정책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더했으며, 국제유가 폭등으로 인한 물가불안은 “그래도 경제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마지막 기대마저 허무는 요인이 되었다. 

이 같이 위협과 위기를 내재한 정책과 인사가 추진되는 방식이야말로 시민들의 정서적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훼손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IMF 관리체제 이후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와 경쟁사회를 향한 거대 경향에 묻혀버렸던 민주주의의 가치와 열망은 사실 우리사회가 역사로부터 학습한 무엇보다도 소중한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인수위원회에서부터 그 무원칙과 무모성이 부각된 바 있지만, 이른바 CEO 대통령이 보여준 소통 없는 독주와 미숙한 정치행태는 시민들의 민주적 정서를 봉인하는 망치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민주주의의 관을 봉인하는 이러한 때 아닌 망치 소리는 ‘독재의 추억’을 일깨우기에도 충분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민 일반의 불안은 이미 대선 과정과 결과에 원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세간의 평과 함께 대선에서의 60%대의 최저투표율, 총선에서 40%대의 최저투표율은 제도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과 여당의 압승이 국민들의 ‘불안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민들은 어쩌면 이처럼 불안한 선택에 따른 아슬아슬한 인내의 시기를 겪었으며, 마침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민행동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거대한 사회변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성찰하도록 한다. 계급적 빈곤과 궁핍이 결속을 가져왔던 산업사회의 저항과 달리 안전, 건강, 평화, 환경 등 탈근대적 위험사회의 쟁점들이 새로운 저항의 가치로 등장하고 있었음에도, 한국의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 체계는 이 같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욕구를 수용하기에 너무나 닫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촛불시위는 계급이나 이념에 기반한 조직적 동원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민행동의 새로운 동원방식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촛불시위를 통해 온라인 공론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자적 대중’이 놀라운 규모의 시민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동원의 질서가 구축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촛불집회는 2002년 이후 정치사회적 이슈에 따라 출현하는 일종의 ‘불연속적 관례화’의 경향을 갖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새로운 정치참여 방식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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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시민단체가 갖는 시민직접행동의 한계를 극복한 ‘제4의 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다. 7월5일 "국민 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문화제"가 열린 시청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 노동사회 ]

이슈와 공간 넘나드는 전자적 대중과 이성적 군중

1990년대 한국의 시민사회를 재구조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 혹은 비정부기구(NGO)의 등장이었다. 정부와 의회, 정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조건에서 시민단체는 시민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제도화된 조직으로 크게 성장했다. 시민단체는 그간에 정치경제 개혁운동의 과제들을 추구함으로써 큰 성과를 얻었고, 특히 참여정부 시기에는 제도화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시민단체들은 회원들이 대면적 관계를 갖기보다 상근스텝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메일 리스트 조직이라는 점에서 조직특성상 ‘제3의 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시민단체는 언제나 시민직접행동의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 조직이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시민사회를 재구조화하는 요소는 무엇보다도 온라인 공론장과 이를 매개로 작동하는 다양한 형태의 회원조직들이었다.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전자정보 공간을 매개로 형성되는 전자적 대중은 산업사회의 원자화된 대중과는 달리 통신기술과 뉴미디어로 네트워크화되어 전자적 공론장을 주도하는 공중을 형성한다. 이러한 전자적 공중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민으로 등장했다. 전자적 대중을 역동적 시민으로 전환시키는 조직적 기제는 최근 인터넷공간을 매개로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는 토론방, 카페, 미니홈피, 블로그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자발적 집단들이다.

이 같은 자발집단은 일시적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상시적이거나 필요에 따라 재활성화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이러한 자발집단은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소속의식은 있다고 하더라도 구속력이 미약하며, 자유롭고 느슨하게 운영되는 회원조직이라는 점에서 ‘유연자발집단’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조직화 방식은 이처럼 유연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집단에 따라 일시적이지만 강한 소속감과 참여를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유연자발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양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연자발집단은 특정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이슈와 관련해서 시의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집단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사건 이래 새로운 시위양식으로 확산된 촛불시위는 여러 가지 이슈와 함께 재생산되었는데, 2004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 2008년 현재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등은 거대한 시민적 저항을 보여주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세계를 주목시킨 길거리 응원까지 포함해서 이 같은 대규모의 시민행동은 실제로 인터넷상의 유연자발집단을 동원의 핵으로 하고 있다. 

2008년 들어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연령층이 낮아지는 경향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감성적 코드가 새로운 세대들은 유연자발집단에 훨씬 더 적응적이다. 이들의 시위형태가 평화적이고 축제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도, 인터넷을 통한 유연자발집단에서 공론화의 과정을 거친 후 고도의 ‘이성적 군중’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유연자발집단에 기초한 이성적 군중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실시간으로 공유함으로써 직접행동과 토론의 끊임없는 성찰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2002년 대선에서 정당을 무력하게 만든 이른바 ‘노사모’와 같은 정치인 지지 네트워크는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유연자발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인의 지지집단으로서 팬클럽뿐 아니라 취미활동을 위한 문화동호회, 다양한 문화비평그룹 등이 문화적 이슈들을 공론장을 통해 정치화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지지집단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네트워크는 정당보다 의미 있는 사회자본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 같은 다양한 유연자발집단은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토론을 통해 문제를 공유하면서 오프라인에서의 시민행동으로 연결됨으로써, 불연속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관례적인 정치참여의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연자발집단이 갖는 이슈의 무제약성, 규모의 무제약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활동공간의 무제약성 등은 탈근대적 사회변동을 반영하는 완전히 새로운 결사체의 특징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유연자발집단은 제3의 결사체로서 시민단체가 갖는 시민직접행동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제4의 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민주주의, 신갈등사회에서 새 질서를 만들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은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애써 모른 체한 셈이다. 이 점에서 촛불집회는 거대한 사회변동과 그에 따른 시민사회의 욕구를 거스르는 정권의 무모한 역주행이 빚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사회변동의 특징은 ‘신갈등사회’라는 개념으로 드러낼 수 있다. 신갈등사회에서 사회갈등은 갈등의 원인과 전개과정 나아가 갈등의 결과에 있어, 산업사회의 사회갈등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갈등의 이슈는 계급이나 민족과 같은 해방적 이슈에서 일상적 삶과 관련된 생활정치적 이슈로 바뀌고 있으며, 갈등과정은 일상화되고 제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나아가 갈등의 조율기제는 강력한 국가 중심의 사회통합 구조가 아니라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협치하는 방식을 통해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독주는 신갈등사회의 가장 위험한 뇌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그간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표현과 참여의 ‘이원적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제도화된 조직으로서 시민단체와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직능단체의 활동이 한 축이라면, 직접적 시민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 정치의 주체로서의 제4의 결사체가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를 재구조화하는 이 같은 주체들은 우리사회의 공적 질서의 재구성을 확대해 왔다. 조직화의 수준이 높은 단체는 정부 및 시장영역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그리고 제4의 결사체로서 유연자발집단들은 사적 이슈를 공공화하거나 촛불시위와 같은 직접행동을 통해 시민정치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민행동 속에서는 조직화된 단체와 유연자발집단의 연계가 작동할 수도 있다. 

이제 이 같은 한국 시민사회의 변화는 대의민주주의의 개방을 통한 참여민주주의의 적극적인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질서 가운데 제도화 수준이 높은 조직들은 제도적 수준에서 정부와의 파트너십을 확대함으로써 시민사회에 위치하면서도 공적 기구의 재구성에 제도적으로 결부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4의 결사체는 거대한 시민행동을 끌어내는 위력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자발성과 탈중심성으로 인해 여전히 시민사회의 공론영역에 위치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일종의 ‘자기 제한적 시민행동’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를 통한 참여의 정치와 제4의 결사체를 통한 공론 형성과 직접행동의 정치가, 우리사회에서 대의민주주의의 개방을 요구하는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질서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행동이 아무리 자기 제한적이라고 하더라도, 제도정치를 강하게 압박하고 제도의 개방을 얻어낼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한 축으로서 의의는 획기적으로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촛불이 요구하는 건 제도정치의 변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는 지난 20년간 성취한 민주주의의 성과가 우리 국민들에게 무엇으로 남아있는가를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아가 촛불시위는 이념과 계급에 기반을 둔 조직행동을 뛰어넘은 자발적 시민행동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분단체제의 우리사회에서도 이념과 계급의 시대가 종료되고 새로운 저항의 전선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계급의 구심이 약해지고 공공정책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시민들은 점차 위기와 위험의 현실로 내몰리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현주소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는 적나라한 시장경쟁에 대한 저항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 정부의 자율화 및 민영화 정책들은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위협과 불안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갈등이 지속적으로 예고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민주화 20년의 성과를 발판으로 참여민주주의를 확장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개방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촛불집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도정치의 ‘복원’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 정당의 개방을 통한 제도정치의 ‘변화’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갈등의 원인과 이슈가 변하고 갈등의 전개양상이 달라졌다면 사회통합의 정치과정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