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노동사회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편집국 0 3,413 2013.05.29 09:52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지 않았던 시절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제는 “예술인과 교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노동자가 아닌 것이 자랑스러워 노조를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를 모범 사례로 추켜세우는 분이 대통령이 됐다. 노동과 근로, 두 단어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는 것일까?

book_01.jpg현장에 뿌리박은 따뜻한 수다

오랜만에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반가운 이름,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신간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를 읽다보면 그런 의문들은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사라져버린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종강 소장의 글들은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는다. “‘근로’는 순종적인 노동자를 바람직한 상으로 설정해 놓고 노동자들을 길들이려는 지배층의 간교한 술책”이라고 높은 톤으로 내지르지도 않고,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동자”라며 운을 떼어 줄줄이 설교를 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그의 삶에서 겪어 왔던 경험으로 친근하게 수다를 떨 뿐이다. 독자들은 그저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는 기분으로 편안히 책을 읽고 덮으면 된다. 그리고 나면 ‘노동과 근로의 차이’와 같은 추상적인 의문은 ‘일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으로 끌어내려져 있다. 이런 말하기 방식이 가능한 것은 그의 30여 년 노동운동의 삶이 고스란히 ‘현장’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신간은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하종강 소장이 홈페이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 중에서 추린 것이다. 자연히 기준을 세워 분류해 각 부를 구성했을 텐데, 독자들은 각 부의 성격에 너무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마지막 6부를 제외하면 그는 매 글마다 종알종알 즐겁게, 혹은 진지하지만 차분하게 경험에서 느낀 감상들을 풀어놓는다. (6부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들을 추린 것인데, 사실 신문 칼럼에서조차 하종강 소장의 ‘수다’스런 말하기는 그 향기를 진하게 풍긴다.)

굳이 분류를 해본다면 1부는 삶에서 만난 감동과 울림의 순간들, 2부는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상담에서 만난 사람들, 3부는 그의 친구들과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기억, 4부는 노동뿐만이 아닌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한 소회, 5부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런 분류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

희망의 원천에서 실천을 고민하다

책을 읽다보면 참 신기해진다. 전경으로 제대한 뒤 다섯 손가락을 잃고 산재노동자가 되어 노동조합운동에 투신한 노동자, 노동조합이 생기고 처음으로 인사를 받아보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는 백화점 엘리베이터 노동자의 고백, 2층에서 떨어진 아이를 차마 투쟁 중이었던 자신의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던 병원 노동자의 슬픔 등 건조하게 글로 써놓고 보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들을 그는 친근한 친구의 수다처럼 풀어놓는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하고 듣던 수다가 어느새 끝나고 다음 글을 읽을라치면, 그가 그랬듯이 “목이 콱” 잠기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크레인에 올라가고 지하철 선로에 몸을 묶으면서 승리했던 투쟁의 기억들, 9년 만에 복직되어 노동조합 위원장이 된 노동자가 “법대로 하자”던 관리자에게 해고 기간에 체득한 법 조항을 조목조목 들이대 싹싹 빌게 만든 이야기, 유니폼 말고는 옷이 없어 노동조합의 사복 착용 지시에 며칠간 잠옷을 입고 출근하며 노조의 단결력을 과시했던 노조간부 등의 얘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면서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온다. 젊었을 때 기절할 때까지 심문을 받으면서도 남자친구의 소재를 말하지 않았던 아내, “개 뿔 나면 장난감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 모든 강아지 장난감에 뿔을 달아놓은 아이들, 그리고 이들이 합심해서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남편에게 항의하며 현관에 대자보를 붙여놓고 방안에서 곤히 자고 있더라는 얘기까지 듣고 나면 하종강 소장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30여 년간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하종강 소장이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다 듣고 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보통 말하듯이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지거나 질린 상태’가 된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실천적 고민이 크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갑자기 던져지면서 막막해진다는 뜻이다(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그랬다). 하지만 막막하다고 답답해 할 일은 아니다. 하종강 소장이 말하는 것처럼,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냄 | 1만2천 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