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불감증이 빚어낸 ‘산업재해’, 이천참사

노동사회

규제불감증이 빚어낸 ‘산업재해’, 이천참사

편집국 0 3,673 2013.05.2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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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천 화재참사로 인하여 소중한 목숨을 잃은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사랑하는 가족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유가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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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노동자 900명이 유기용제 중독으로 미쳐서 자살하고 사지마비로 신음하다 죽어갔으며, 1998년 부산에서는 내동창고 공사 중에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하여 27명이 숨지고 16명이 크게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08년 벽두에 이천에서 40명의 고귀한 인명이 화염 속에 쓰러져 갔다. 

건설노동자들이 죽고, 이역만리 타향생활에 고생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죽었고, 방학을 이용해 부모님을 도우려던 고등학생 효자 아들이 죽었으며, 나이 들었으나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을 놓을 수 없었던 나이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또 다시 원진노동자가 태어났고, 또 다시 건설노동자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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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천 화재 현장. ▶ 진보정치 ]

최소한의 안전규정만이라도 지켰더라도…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이러한 사고를 단지 ‘안전불감증’이란 표현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안전불감증이라는 사회적 표현은 이번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이며, 또 다른 참사를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언론에서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가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원인불명의 화인이 점화원에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4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사건의 경과를 정리한 것이지 진정으로 사고가 발생한 원인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이천 참사는 사업주가 ‘최소한’의 안전보건기준만이라도 준수했다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고였다. 즉 이번 참사의 원인은 일하는 노동자가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한 산업안전보건법을 사업주가 지키지 않았고, 사업주를 관리·감독할 노동부가 자신의 책무를 유기하여 발생한 ‘산업재해’인 것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안전한 작업현장을 만들기 위한 노동부의 정책 부재이며, 나아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3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9조는 20억 이상의 건설공사를 할 경우 사업주는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두도록 하여 산업재해예방계획의 수립에 관한 사항 등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며 노동부장관에게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천 참사가 발생한 사업장은 노동부에 신고한 사실이 없다. 이런 기초적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결국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같은 법 제23조는 사업주에게 폭발성, 발화성 및 인화성 물질 등에 의한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를 이행해야 함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참사는 발생했다.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는데 다른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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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10일 화재현장을 둘러본 후 민주노총과 건설연맹이 주최한 기자회견 모습. ▶ 진보정치 ]

정부 산업안전관리 책임자 평균 재임기간은 ‘8개월’

노동부는 사업주의 불법행위에 대한 관리감독을 태만히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현장 감독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1년에 2,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하루에 100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고 마는 참혹한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적극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1997년 『기업활동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작업장 안전보건관리규정 44개가 폐기되거나 또는 완화되었다. 그 이후 관련 업종에서 산업재해는 계속 증가해 왔다. 이런 현황은 2005년 노동부와 산업자원부가 공동으로 용역을 의뢰한 연구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소위 ‘규제완화’를 계속 추진하고 있다.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아무런 정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으며, 결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OECD 최악의 산재왕국에서 1천5백만 임금노동자의 작업환경 조건을 관리·감독하고 정책을 생산하는 곳이 유일하게 노동부 산업안전보건국 하나라는 사실이, 정부의 정책 의지를 잘 말해 준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산업안전보건국장의 평균 재임기간이 8개월이라는 사실이다. 8개월은 업무를 파악하기도 어려운데 정책생산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 몇몇 언론에서 “건설현장의 특성상 관행적으로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각종 안전보건 규정을 준수하기가 어려우며, 노동자 개인도 안전수칙을 소홀히 하고 있다”라며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에 의해 사고가 발생한 것처럼 보도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또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단계 하도급은 명백한 불법행위일 뿐만 아니라, 작업 전에 노동자 개인에게 안전보건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돼 있음에도 전혀 실시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와, 사업주가 무시하고 있는 법적 의무에 대해서는 보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항간의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들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진정 외양간을 제대로 고쳤다면 똑같은 사고가 반복되어 발생할 수 있을까? 정부는 불법행위 사업주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제도적인 보완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노동자가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은 최악의 산재 비용을 어떻게 ‘계산’할까

이제 곧 신자유주의 얼치기 신봉자였던 노무현 정권의 시대가 가고, 자본의 무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재벌을 위해 우측으로 곧장 달려갈 이명박 정권이 집권을 할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경제적 가치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2006년 산업재해로 인하여 발생한 경제적 손실액이 16조에 육박한다”는 사실 자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명박 당선인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은 궁금하다.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얘기하면 기업은 ‘경영권 침해’라는 볼멘소리를 하고, 정부는 소위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의 입을 막고 있다. OECD 가입국이며, 세계 경제규모 12위라는 나라에 살면서 죽지 않고 일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노동자의 현실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