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권력’ 시기 혁명의 성장과 전화 (하)

노동사회

‘이중권력’ 시기 혁명의 성장과 전화 (하)

편집국 0 5,678 2013.05.2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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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중단됐던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가 지난 호부터 재연재되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형성된 소위 ‘이중권력’의 성장과 전화를 다루며, 모든 연재분은 연구소 홈페이지(
www.klsi.org)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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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력을 향한 노동자계급의 투쟁 

노동자 구성과 상태


sooya_01.jpg당시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 상태는 유럽에서 평균적인 수준이었습니다만,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요소들과 함께 극히 후진적이고 반(半)가부장제적 토지관계가 결합돼 있는 특징을 보였죠. 레닌은 이러한 러시아 현실을, “가장 후진적인 토지소유제도 즉 한편의 가장 야만적인 농촌과, 다른 한편의 가장 선진적인 산업·금융자본주의와의 모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낡은 억압형태와 새로운 억압형태가 결합된 결과로 도시와 농촌의 노동대중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26).

러시아 제국주의의 또 하나 특징은 몇몇 주요 산업부문을 지배하고 있는 외국자본에 대한 종속이었습니다. 남 러시아의 철강업과 석탄부문은 프랑스와 벨기에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고, 석유부문은 영국자본, 전기부문은 독일자본이 지배하고 있었던 거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상황을 보면, 이들 산업부문에 투자된 외국자본 비중은 52%, 전체 평균으로는 약 3분의 1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풍부한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존재가 외국 독점체가 러시아에서 막대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던 거죠. 

한편, 1917년 당시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이 우세한 국가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총인구는 약 1억 5,920만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8%만이 도시에 살고 있었고 82%는 농촌에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1917년 당시 임금노동자 수는 1,850만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핵심적 범주인 산업노동자 수는 354만 5천여명이었습니다. 운수부문에는 126만 5천명, 건설부문에는 125만명, 농업부문 450만명의 노동자가 취업하고 있었죠(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26).

당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관계에서 균질적 성격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출생으로 보면 대다수가 제1세대 농민들이었습니다. 제2세대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죠. 또한 많은 노동자들은 토지 보유의 특수성 때문에 혈연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농민층과 밀접한 결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한편으로는 세습적인 기간적 노동자계급 본래의 계급의식 발달을 지체하게 만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광범한 빈농대중을 혁명적인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죠. 실제 세계 제국주의 전쟁 기간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군대 내에서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점점 확대되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26). 

한편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권익을 지키기 위한 법 제도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진노동자들의 부대는 이런 조건에서도 혁명적 투쟁을 전개했고, 그 중핵을 구성한 것은 대산업 기업의 숙련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또한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정의를 위해서 투쟁했고, 무권리 상태와 억압 그리고 권력자의 전횡에 반대해 저항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죠. 

이렇듯 러시아의 경제·정치적 발전은 서구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훨씬 더 명확하게 제국주의 단계 특유의 심대한 모순을 드러냈으며, 그 때문에 러시아는 제국주의 연쇄의 약한 고리로 전화했습니다. 하나의 결절점으로 집적된 이런 모순들이 세계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첨예화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 인민들에게 특히 견디기 힘든 곤경과 궁핍을 안겨다 주었던 거죠.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제1차 러시아 혁명 시기에도 정치적으로 각성된 모습을 보였으며, 다른 대중들에 대한 지도에서도 풍부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혁명이 퇴조하고 반동이 기승을 부리던 매우 어려운 시기에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차리즘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대중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 와중에 볼셰비키의 역할이 두드러졌죠. 볼셰비키는 근로대중의 모든 층을 투쟁의 대열로 나서게 하고, 다양한 혁명적 조류들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일의 투쟁으로 집약시켰습니다(황인평, 1985 Ⅱ: 146). 또한 볼셰비키는 차리즘의 전제지배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사상적·정치적·조직적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오랜 기간에 걸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노동조합이 급성장했습니다. 1917년 3~4월 50만여명이었던 노조원의 수는 10월에는 3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노동조합은 산업노동자의 대부분을 조직했습니다. 당시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노동조합은 금속노조와 섬유노조였는데, 노조원 수가 각각 52만 6천여명과 57만 1천여명에 이르렀죠(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44).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관리

1917년 3월에는 소비에트와 병행하여 기업체들에서 공장위원회가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대중의 혁명적 창의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조직이었죠. 공장위원회는 파업위원회에서 성장한 것이었지만, 그 기능은 파업위원회보다는 훨씬 컸습니다. 공장위원회는 공장 또는 각 직장에서 열리는 노동자집회에서 선출되었고, 노동자가 어떤 노동조합에 가입해있든 관계없이 기업의 모든 노동자들을 결집시켜,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익을 지키는 것을 임무로 했습니다. 또한 공장위원회는 일상적인 기능으로서 공장운영에 적극 개입했고, 혁명적 질서를 강력히 밀고 나갔습니다. 기업가와 경영진의 활동을 통제하고, 자본가의 생산 방해 기도를 저지했고, 또 때로는 기업 경영을 인수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러한 공장위원회는 볼셰비키의 확고한 거점이 되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44). 

그 결과 공장위원회의 조직 규모는 노동조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어요. 1917년 3월에 벌써 전국적으로 200만명이 가입했습니다. 이는 전체 공장노동자의 75%에 해당하는 것이었죠. 국영기업이나 대기업의 경우에는 더 빨리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장위원회가 설치된 공장은 전국에 걸쳐 920여개에 이르렀습니다(S. Smith, Red Petrograd: 9~13, 80~86, 이정희, 2003: 43~44에서 재인용). 공장위원회의 활동내용은 시기에 따라서 변했지만, 근본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는 혁명을 수호하고 공장가동을 지속하는 것이었습니다(이정희, 2003: 58).

노동자 관리 또는 통제(Workers’ Control)를 요구하는 운동 역시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1917년 여름 당시 여기에 참여한 노동자의 수는 280만여명으로, 당시 러시아 산업노동자의 4분의 3에 해당했죠. 통제와 관리를 시행한 주체는 공장위원회와 관리·경영위원회였습니다. 노동자 관리위원들은 원료와 연료의 재고를 점검하고, 기계와 완제품의 공장 반출을 감시하며, 금융활동을 감찰함과 동시에 임금과 해고 문제에 개입하고, 기업에 대한 감시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통제·관리는 자본가의 전횡을 억제하고 기업에 대한 파괴행위를 저지하는 데만 그 의의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즉, 노동자 통제 또는 관리를 요구하는 투쟁과 그것을 시행하는 운동 속에서, 노동자들은 경영상의 기법과 정치적 경험을 획득하고, 스스로의 계급적 자각을 높여나감과 동시에 혁명적 창의성을 확대하기도 했다는 의미입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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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동자 통제 및 관리운동의 의의는 그 발생 배경에서 한층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870~1914년에 걸쳐 진행된 러시아의 산업화는 주로 대기업 위주였고, 그 대기업들의 70%는 국영기업이었죠. 즉, 외국에서 초빙된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이들 기업의 경영자들은 전제 정부가 파견한 고위관리나 군대장교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영구조 속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는 지배와 굴종만 존재할 뿐이었고, 노동자의 기본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았죠. 이러한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수탈행위는 전제 정치의 직접적 반영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제기될 경우에 형태가 매우 격렬했고 종종 정치적 성격을 띠었습니다(이정희, 2003: 47~48). 이러한 배경이 노동자 통제 및 관리운동 성장의 밑거름이 된 겁니다.

한편, 공장위원회와 병행하여 또는 그 산하 기구로서 노동자 민병대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서 ‘민병대’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차리즘의 반격에 대항하고 공공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무장시민의 자원경찰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와 부르주아지들은 차르 정권의 반격 위험이 줄어들고 그 대신 계급갈등이 더욱 심화되면서 노동자 민병대가 해산되기를 바랐죠. 노동자들은 이에 반해 이것을 자신의 자유를 수호하는 군사적인 조직기구로 만들고자 했고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 민병대는 ‘적위대’라는 명칭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적위대는 공장위원회 산하에서 더욱 정치화되었습니다. 계급 지향적이며 공격적인 무장 조직으로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이정희, 2003: 42~43). 노동자들은 적위대를 발판으로 삼아 공장을 경비하고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며, 식량의 공정한 분배를 감시했습니다. 소비에트는 적위대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결정을 시행할 수 있었죠.

권력 쪽에 다가 간 노동자계급

이렇듯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사이의 7개월이라는 기간은 가장 첨예한 계급투쟁 시기였습니다. 노동자들은 당면한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재빠르게 당과 노동조합 건설에 착수했고, 한편으로 고용주들 역시 결정적인 결말이 닥쳐왔음을 깨닫고 그들의 결사체를 만들어 경제·정치적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죠(Foster, 1956: 239). 이런 속에서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계속됐습니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러 고비를 겪었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서 볼셰비키는 대중조직의 중심인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와 농민대표 소비에트, 그리고 병사위원회 속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벌였죠.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1917년 3월 중에 벌써 전국 각지에서 구성되었습니다.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 그리고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등은 4월18일(5월1일)의 무장시위 투쟁, 6월18일(7월1일)의 대규모 시위 전개, 그리고 7월4일(7월17)의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을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투쟁 등의 중심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17년 10월25일(11월7일), 노동자·병사·농민대표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러한 ‘10월 혁명’은 국제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운명을 자신들의 손에 거머쥐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따라 그것을 이끌 정도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국제노동자계급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서 새로운 단계를 펼쳐 놓았죠.

4. 혁명의 평화적 시기와 무장봉기 방침

2월 혁명과 전제 타도는 광범한 대중들을 운동으로 이끌었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사건들에 적극적이고도 자주적으로 관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레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죠. “러시아는 지금 들끓고 있다. 10년 동안 정치적으로 활동을 멈추고서 차리즘의 무서운 압제와 지주나 기업주를 위한 비인도적 고역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억눌려 있었던 수백만 또는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각하여 정치 국면에 열성적으로 나서게 되었다”(Lenin, “The Russian Revolution and Civil War”, 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42에서 재인용).

인민대중의 자주적 행동은 수많은 대중집회, 회의, 토론, 시위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내걸었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아래서는 ‘임시정부 타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 방향을 지향한 것이었죠. 이러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객관적 기초는 임시정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로마노프 왕조가 타도된 후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7년 3월3일(3월16일)과, 볼셰비키가 이끈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선포된 10월25일(11월7일) 사이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두 개의 권력이 병존하면서 대립하던 이중권력 시기였습니다. 이렇듯 부르주아 정부와 프롤레타리아의 ‘합법적 반대파’ 사이 입헌적 협력관계로 간주된 이중권력은 본질적으로 멘셰비키적인 것이었죠(Carr, 1985: 88).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그 당시 소비에트는 사실상 멘셰비키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볼셰비키는 대중조직 가운데 가장 핵심 조직이었던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와 농민대표 소비에트, 그리고 병사위원회 속에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물론 ‘혁명의 평화적인 시기’에도 크고 작은 투쟁들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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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 투쟁부터 7월 봉기까지

1917년 4월18일(5월1일), 러시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임시정부의 외상 밀류코프는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게, “임시정부는 차르 정부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지킬 것이며,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을 확인하는 내용의 각서를 보냈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던 러시아 인민들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과 격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죠.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틀 뒤인 4월20일에야 밀류코프 각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은 가두로 진출하여 임시정부가 위치한 마리아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병사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을 중지하라”, “밀류코프를 타도하라” 등의 요구를 담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진했죠. 노동자들이 여기에 합세했고, 시내에서는 대중집회가 열렸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4월20일과 21일 그리고 22일, 볼셰비키는 당 중앙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22일 열린 중앙위원회에서는 시위 때에 내걸었던 “임시정부를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모험주의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레닌의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죠. 이 슬로건은 봉기에 대한 호소를 의미하며, 이것은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지향하는 당의 노선에 배치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4월 시위는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에는 권력 위기의 발단이 되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및 전화하는 한 계기가 되었죠. 4월의 거대한 폭풍은 소비에트, 2월 체제, 더욱이 대중들 스스로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록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했지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거대한 개입은 정세를 변화시켰고, 혁명운동 전반에 추진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불가피한 세력 재편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레온 트로츠키, 2003(상): 487). 이러한 4월 위기를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5월 초 새롭게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6명의 소비에트 대표자, 즉 사회혁명당 2명, 멘셰비키 2명, 독립사회주의자 2명을 입각시킨 것이었죠.

그러나 6월에 제2의 정치적 위기가 발발했습니다. 1917년 6월18일(7월1일) 페트로그라드에서 50만명 규모의 대중시위가 전개된 것입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독일과의 단독 강화 반대”, “영국·프랑스 자본가와의 비밀조약 반대” 등 볼셰비키가 내세운 슬로건은 시위참가자들의 외침 속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시위는 노동자 세력과 수비대가 점점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나아가 대중이 임시정부를 불신할 뿐 아니라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측이 취하고 있는 부르주아와의 협조정책 역시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1917년 여름에는 많은 종류의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5월22일에 열린 ‘제1회 전 러시아 농민대표자대회’는 사회혁명당이 지배하는 형국이었고 투표를 통해 임시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같은 달 말에 개최된 ‘페트로그라드 공장노동자대회’는 볼셰비키가 다수를 획득한 최초의 대표조직체였죠. 이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한 시범적 본보기였습니다. 6월3일부터 24일에 걸쳐서는 ‘제1회 전 러시아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 822명 가운데 사회혁명당 소속은 285명, 멘셰비키 소속은 248명, 볼셰비키 소속은 105석이었죠(Carr, 1985: 109). 대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와의 연립을 인정하고 임시정부의 정책은 올바른 것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1917년 7월4일(7월17일)에는 다시 페트로그라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50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7월의 대중봉기는, 전선에서 러시아 군의 공세가 실패함에 따라 입헌민주당이 정부에서 탈퇴하면서,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군대를 수도에서 축출하려 한 데서 발단된 것이었죠. 시위는 4일 동안 계속되었고, 규모에서도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또한 시위대는 54개 기업 소속의 대표 90명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표들이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와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 대해 모든 권력을 장악할 것을 제안하였죠.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대중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대신에 대중들의 시위를 ‘볼셰비키의 음모’라고 규정했죠. 또한 시위대가 궁전으로 행진하는 도중에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도발적인 총격을 가해, 수도의 거리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피로 물드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56명이 죽고 650여명이 부상당했죠.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페트로그라드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이에 따라 전선으로부터 호출된 군대가 노동자와 혁명적 병사·수병을 무장해제시켰죠. 체포가 시작되었고, 『프라우다』의 편집국과 인쇄소는 분쇄되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50).

sooya_04.jpg반혁명 쿠데타의 좌절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성장

7월 시위사태는 러시아의 정세와 각 진영 사이의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최종적으로 반혁명 진영으로 옮겨감으로써, 부르주아 진영과의 협조정책을 완성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중권력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부르주아 진영이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도하는 소비에트 역시 부르주아 정부에 협조하는 기구가 되었습니다(황인평, 1985: 155). 7월7일, 정부는 일련의 탄압조치들을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전쟁 및 해군장관이었던 케렌스키가 장관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수상직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케렌스키의 ‘7월 정부’는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서로를 무력화시키고 있던 민주주의 진영과 부르주아 진영이 양 진영 위에 군림하는 ‘진정한 권력자’를 추대하기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레온 트로츠키, 2004(중): 212). 

그러나 임시정부는 혁명세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볼셰비키들은 적기에 후퇴하면서 당의 기간요원들을 위험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결국 힘을 동원하여 단독 정권을 수립한 임시정부의 행동은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만을 앗아간 된 셈이 된 것이죠.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제6회  볼셰비키당대회가 1917년 7월26일부터 8월3일에 걸쳐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습니다. 대회는 반합법 또는 비합법으로 개최되었습니다.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레닌은 대신 「정치 정세에 대하여」라는 테제와 「슬로건에 대하여」, 「혁명의 교훈」 등의 논문을 보냈는데, 이 글들이 대회 결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회의 결과, 볼셰비키는 “현재 권력이 사실상 이미 반혁명 부르주아지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평화적인 발전과 소비에트로 권력이 순조롭게 이양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결의를 밝히기에 이르렀죠(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1).

또한 그 대회에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일시적으로 사용하지 말자는 레닌의 제안이 논쟁 끝에 채택되었습니다. 이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지도하는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에 대한 순응의 도구로 변했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소비에트 일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볼셰비키는 모든 노동자대중의 조직, 특히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병사위원회, 농민위원회를 반혁명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만 했습니다. 상당수의 프롤레타리아 중심 지역에서 소비에트는 여전히 혁명적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대회는, 국가적인 위기와 대중투쟁의 심화에 따라 모든 혁명세력들이 무장투쟁의 성공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방침을 채택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1). 볼셰비키 당이 드디어 ‘무장봉기’ 방침을 결정한 것입니다.

한편, 반혁명세력은 군사독재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임시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 대표들과 협의하여 코르닐로프 장군을 ‘국가의 구원자’로 지목했고, 그는 7월18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죠. 이는 반혁명 쿠데타의 초석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성격을 은폐하기 위해 국정회의 소집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국정회의가 열린 8월12일, 모스코바에서 노동자 4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파업을 벌어졌고, 이 파업으로 인해 반혁명 계획은 좌절하게 되었죠. 이에 따라 군사독재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무력동원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코르닐로프는 8월25일 제3기병 군단을 남서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군사와 민정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인도할 것을 요구했죠.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쿠데타가 그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수반 케렌스키는 처음에는 코르닐로프의 음모 준비에 동조했지만, 쿠데타가 점점 구체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코르닐로프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의 군부대 복귀 명령을 거부하자, 케렌스키는 자신의 개인적 권위만으로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기도 했죠. 사실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의 충돌은 이전부터 발전되어온 불가피한 결과였고, 또한 이러한 현상은 이중권력의 모순이 개인적 야망이라는 격정적 언어로 번역된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레온 트로츠키, 2004(중): 217).   

sooya_05.jpg이처럼 복잡한 정세 속에서 볼셰비키당은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임시정부와 그 주축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대응하여 반격을 조직했습니다. 각지에서 소비에트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8월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권력에 대하여」라는 볼셰비키의 결의안을 채택했고, 10일 후에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죠.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저지된 것입니다.

당시 대중투쟁은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로 고양되었고, 그 선두에는 노동자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1917년 상반기의 파업이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분산적으로 제기됐던 데 비해, 가을의 파업은 산업 전반에 걸쳐 있었고 정치적 성격 또한 강하게 띠었습니다. 특히 9월1일, 노동자 11만명 이상이 참가한 우랄 지역의 정치적 총파업은 슬로건으로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의 즉시 소집”, “반혁명 독재 타도”, “프롤레타리아 혁명 만세” 등을 내세웠죠. 이에 뒤이어 철도노동자와 유전노동자, 그리고 탄광노동자 등의 파업이 이어졌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4).

한편, 농민들도 점점 적극적으로 혁명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어요. 임시정부가 결코 그들이 바라는 대로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불만과 분노가 고조된 겁니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군대의 마지막 빗장까지 열어젖혔습니다. 즉 노동자들이 농민전쟁을 이끌었기 때문에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도시의 봉기를 진압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던 거죠(레온 트로츠키, 2004(하): 31). “농민에게 가을은 정치의 계절이다. 들판의 농작물은 전부 다 벤 상태였고, 환상은 풍비박산되었으며, 참을성은 다했다. …… 공격적이고 난폭하고 격렬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되어, 이 운동은 쇠, 불,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장원을 파괴하고 불태운다.”(레온 트로츠키, 2004(하): 43). 이렇게 9월과 10월에 걸쳐 일어난 농민쟁의 수는 러시아의 6개 지역에서 3,500건이 넘었습니다. 그 투쟁들은 매우 대중적이고 결렬해서 농민전쟁의 성격마저 띠었죠. 

또한 이러한 봉기의 영향으로 군대 내에서, 특히 페트로그라드와 모스코바에 인접한 전선에는 볼셰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러시아에 사는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해방투쟁도 고양되었습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보편적인 민주주의 혁명의 조류, 이를 테면 지주에 대한 농민투쟁과 피억압민족들의 민족해방투쟁 등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전국적 차원의 투쟁으로서 성격을 갖고 불가항력적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속에서 부르주아 권력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게 되었고, 카데트당 역시 정치적으로 파탄지경을 맞았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도 마찬가지로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경제적 파국이 임박해졌고, 침체와 기아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갈수록 악조건을 맞고 있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6).

무장봉기를 선택한 볼셰비키  

한편, 이런 상황 속에서 레닌은 봉기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제기했습니다. 볼셰비키당이 노동자계급 내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군대 내에서도 거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 시기에 또 결정적 지점에서, 즉 페트로그라드 및 모스코바 양 수도와 중앙에 가까운 전선에서 압도적인 세력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그러한 주장의 근거였죠. 9월12일에서 14일 사이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페트로그라드위원회와 모스코바위원회 앞으로 레닌이 보낸 글,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볼셰비키는 양 수도의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자신들의 손에 장악할 수가 있으며 또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8). 계속된 전쟁 속에서 갈수록 전선은 붕괴되고, 정부는 약화되고, 또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되고 있던 상황이었죠(레온 트로츠키 2004(하): 85). 

당시 레닌은 봉기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조언을 당에 보냈습니다. 그의 논문 「국외자의 조언」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전투술의 주요한 규칙을 강조했습니다. 첫째, 결코 봉기를 즐겨서는 안 될 것이며, 봉기를 개시했을 경우 끝까지 확고하게 결말지을 것. 둘째, 결정적인 지점에, 결정적인 순간에 극히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킬 것. 그렇지 않으면 준비와 조직 면에서 유리한 상대방이 봉기군을 분쇄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일단 봉기가 개시되면 최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고, 반드시 실패 없이 공격을 감행할 것. “수세는 모든 무장봉기의 죽음이다.” 넷째, 적을 기습할 태세를 갖추고 적의 군세가 분산되어 있을 때 호기를 포착할 것. 다섯째, 사기(士氣)의 우월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매일 일정한 성공을 거둘 것(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68). 

또한 10월10일(10월23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핀란드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막 돌아온 레닌이 정세에 관한 보고를 했고, 위원회는 이를 기초로 봉기준비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죠(황인평, 1985, Ⅱ: 173).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국제정세(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장하고 있는 사실의 단적인 표현으로서 독일 해군에서 일어난 반란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의 압살을 목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이 강화를 체결하려는 점)와 군사정세(러시아의 부르주아지와 케렌스키파가 페트로그라드를 독일에게 넘겨줄 결의를 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 거기에 프롤레타리아의 당이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한 점, 이 모든 사실은 농민의 봉기나 민중의 신뢰가 우리 당으로 모인 점(모스코바의 선거)이나 제2의 코르닐로프 음모가 준비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페트로그라드로부터 행해진 군대의 이동, 코사크의 페트로그라드 진주, 코사크의 민스크 포위 등) 등과 어우러져 무장봉기를 일정으로 올리게 한다.”

이런 정세분석을 토대로, 당 중앙위원회는 무장봉기가 불가피해졌으며 그 조건이 성숙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의 모든 조직에서 그 결의 내용을 지침으로 하여 모든 실천적 문제(북부지방 소비에트대회, 페트로그라드에서 군대 철수, 모스코바와 민스크 주민의 행동 등)를 토의하고 해결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봉기 준비가 결정적 단계에 돌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봉기를 실제로 지도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아래에 특별기구,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중앙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수비대, 발트 함대, 기타 조직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직접지도를 받아 활동했죠.

sooya_06.jpg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국의 주요 지역에서 무장행동을 위한 계획적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약 5만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제3회 볼셰비키 전시(全市)협의회’가 10월11일 열렸고, 그 결과 봉기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또한 약 7만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모스코바 지방분국 역시 봉기에 찬성했습니다. 이외에 9월과 10월에만도 당원의 대부분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지방, 군, 시, 관구 등에서 협의회가 열렸습니다(황인평, 1985, Ⅱ: 174).

한편, 소비에트가 볼셰비키당으로 넘어가면서 적위대의 상태는 급변했습니다. 탄압당하거나 용인되었던 적위대가 이제 권력 장악에 나선 소비에트의 ‘공식기구’가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종종 소비에트의 허가를 요청할 뿐 스스로 무기를 찾아 나섰죠. 9월 말부터 계속해서, 특히 10월10일부터 봉기준비가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봉기 한 달 전부터 수도의 수많은 공장에서 군사 활동, 주로 소총 사격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10월 중순이 되면서는 무기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달했죠. 일부 공장들에서는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한 중대에 입대하기도 했습니다(레온 트로츠키, 2004(하): 237).

혁명 무장력의 골격은 전국 도처에서 편성된 노동자 적위대였습니다. 페트로그라드와 그 근교의 경우, 봉기 당시 노동자 적위대가 약 2만 3천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주로 금속노동자들이었죠. 적위대를 위한 무기는 군수공장의 노동자들이 제조하고 수리했습니다. 각 공장에서는 혁명적 병사의 지도 아래 적위대가 군사훈련을 받았죠.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 양 수도에 가까운 북부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의 병사, 발틱 함대의 수병들 역시 볼셰비키의 확실한 지주였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봉기를 개시하기 위해, 적위대, 도합 30만명 이상에 이르는 전사를 배치한 육군과 해군 등의 3대 주요 세력의 연합작전을 계획했습니다. 혁명 세력들은 수도에서 권력탈취를 위한 결정적인 전투를 목표로 준비를 해나갔죠. 이들은 배후에서 수백만 노동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볼셰비키협의회가 열렸고, 노동자적위대의 편성이 진행되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71).  

농민전쟁 역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민족해방운동도 격렬해지고 있었죠. 나라는 지속적으로 몰락하고, 전선은 붕괴되고 있었으며, 정부는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는 창조적 세력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죠. 모든 문제는 권력의 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문제는 곧바로 소비에트대회로 직결되었습니다(레온 트로츠키, 2004(하): 112). 

(다음호에 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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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일, 1994, 『반역의 세계사 [하]』,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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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프, 1989, 『소비에트 노동조합운동사』(최규엽 역), 친구. 
이정희, 2003, 『러시아 혁명과 노동자』, 느티나무.
Carr, Edward H. 1950~1978,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History of Soviet Russia),  이지원 옮김, 1985, 『볼셰비키 혁명사』, 화다.
Foster William Z. 1956, Outline History of the World Trade Union Movement ,International Publishers·New York.
Hobsbaum, Eric, 1996, The Age of Extremes, A Division of Random House, Ins. New York, 이용우 옮김, 1997,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상)(하)』,까치.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 1976,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roblems of History and Theory volume 3,―Progress Publishers Moscow.  
Trotsky, Leon, 1932,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translated by Max Eastman, Library of Congress, 최규진 옮김, 2003~2004,『러시아 혁명사(상)(중)(하)』,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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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