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권력’ 시기 혁명의 성장과 전화 (상)

노동사회

‘이중권력’ 시기 혁명의 성장과 전화 (상)

편집국 0 4,795 2013.05.29 08:50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준(準)혁명적 시기에, 사회의 주인은 아니더라도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준비된다. 물론 이 때 공식 국가기구는 여전히 지배계급의 손아귀에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에서 나타나는 이중권력의 초기 모습이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중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특징은 혁명의 제1단계에서 제2단계로 나아가는 이행기라는 점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각과 조직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2단계로 나아가는 이행기이다.”
-레닌, 「4월 테제」 중에서
    

1. 차리즘 붕괴 이후의 국내외 정세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2월 혁명’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중의 강력한 공격은 그 몇 해 전에 3백주년을 맞이했던 로마노프 왕조를 기어코 무너뜨렸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동력과 급격한 정치적 성장이 두드러졌습니다. 2월 혁명의 근본적 특징은 종래에 진행되었던 혁명 때와는 달리, 혁명적 권력기관인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설치됐다는 점에 있었다는 거죠. 이렇게 해서 형성된 ‘이중권력’은 중앙과 각 지방에서 두 개 독재의 결합, 즉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권력과 본질적으로 노동자 및 농민계급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인 소비에트 권력의 독특한 결합을 의미했습니다.

sooya_01.jpg입헌민주당의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는 입헌민주당(카데츠당, 후에 국민자유당으로 개칭)과 10월 혁명당 소속 인사들로 꾸려졌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표했죠. 이는 당시 일련의 정세와 계급적 관계에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2월 혁명은 차리즘이라는 전제권력의 무법적 통치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급격한 변혁이었지만, 광범한 민중들은 혁명을 전후해서야 돌연 정치의 장으로 휩쓸려들었죠. 거기에다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 부분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였습니다. 이들은 의식이나 행동 면에서 광범한 노동자집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부르주아지의 영향은 소비에트 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그 결과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위는 소비에트 내에서도 공고해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렇듯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조직의 자각이 불충분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전쟁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역량이 강화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차리즘의 혹심한 탄압 아래서 조직적인 힘을 축적하지 못했던 거죠. 또한 부르주아지의 정권 장악에는 외국 자본가들의 도움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황인평, 1985, Ⅱ: 123~124).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선언한 정치 강령은 극히 보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에 참여했던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요구, ‘평화’, ‘토지’, ‘빵’, ‘자유’를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었죠. 또한 임시정부는 차르 정권이 협상국과 맺었던 조약들을 재확인했고, ‘최후의 승리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실제 입헌민주당원으로 외무부장관에 있던 밀류코프는 4월 초 “모든 국민은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6월에는 모든 전선에 걸친 총공세를 지시했죠. 이는 전쟁을 계속 수행함으로써 불안정한 이중권력 상태를 붕괴시키고 부르주아 자신들이 온전한 형태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도사려 있는, 민중의 요구에 대한 배반행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쟁 계속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승인과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르주아지의 권력 강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죠. 실제 미국은 제일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1억 달러의 재정원조를 약속하기도 했습니다(김영식, 1989: 253~254).

임시정부는 토지문제에 있어서도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르주아지들의 임시정부는 지주가 소유한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기를 바라는 농민의 혁명적 요구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죠. 그것이 지주의 파산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에도 큰 타격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토지의 대부분은 은행에 저당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지를 몰수한다는 것은 수십억 루블에 이르는 은행자본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가 그 근거였습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토지문제 해결을 헌법제정의회가 열릴 때까지 연기한다고 밝혔습니다(황인평, 1985 Ⅱ: 128~129).  

sooya_02.jpg또한 입헌민주당은 ‘단일·불가분의 러시아’라는 차리즘의 원칙을 존중했으며,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정책을 답습했습니다. 그들은 비(非)러시아계 민족에 대해서는 경제적?문화적 자치권 허용에 관한 약속마저 거부했죠(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1). 게다가 임시정부는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 개선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반면, 은행의 발전, 주식회사의 창설, 독점기업의 사업발전 등을 규제하던 옛 법률들은 모두 폐기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노동자계급의 불만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임시정부의 이런 정책들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강령과 정책은 각기 달랐지만, 소부르주아적 정책 기조가 두 당을 결합시켰던 거죠.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믿지 않은 채 소비에트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두 당은, 임시정부의 위상을 강화하고 대중 속에서 임시정부의 거점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카데트당과 볼셰비키 사이에서 ‘제3세력’ 역할을 자임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혁명의 모든 기본 논점에서 동요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부르주아지와 직접 협조하는 경향까지 드러내고 말았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3).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차리즘이 타도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이상 혁명은 종결되었고 혁명의 목적은 성취되었으며,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혁명의 승리로 말미암아 전쟁의 성격이 변화되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전쟁은 이미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니 2월 혁명과 새로운 조국의 방위를 위해 싸우라고 민중들에게 선전하고 다닌 겁니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스스로를 소위 ‘혁명적 조국방위파’라고 일컬었죠.

돌아온 볼셰비키의 활동

sooya_03.jpg이제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어떤 정책을 내세우고 활동을 전개했는지 살펴봅시다. 2월 혁명 이전, 볼셰비키의 주요 지도자와 간부들은 1914년 전쟁 발발과 더불어 행해진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거나 국외로 탈출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국내의 지도 중심은 전쟁 직후부터 1916년 여름까지 공백상태에 놓여 있었죠. 때문에 스위스에 있었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본부가 1916년 여름에 파견한 페트로그라드의 중앙위원회 러시아 뷰로(집행국)는, 1917년 2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유형지와 국외에서 복귀할 때까지 고립된 채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2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야 볼셰비키당은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3월5일에는 기관지인 『프라우다』를 발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지주 귀족의 정부”라고 규정했고, 임시정부의 정책 활동을 감시한다고 주창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슬로건을 비판했죠. 1917년 3월9일자 『프라우다』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실었습니다(황인평, 1985 Ⅱ: 131).

“임시정부에 대한 감시? 그것이 그들(노동자)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명백한 사실이지만, 부르주아지는 설령 노동자의 감시 아래 있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강령을 수행하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는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남의 힘을 빌려 싸우려 하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해야 한다.” 

sooya_04.jpg한편,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다른 중심 도시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규합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활동 역시 진행했습니다. 작업장과 공장들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죠. 즉, 가능한 많은 노동자들을 통합하는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조합 결성을 촉구했고, 또한 노동조합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적?정치적 지도부인 당과 긴밀하게 힘을 합쳐 활동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적 군대의 편성을 시작했고, 무장투쟁까지 포함한 여러 형태의 투쟁을 노동자들로 하여금 대비하도록 했죠.

볼셰비키당은 군대 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농민대중의 한복판으로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도 전력을 기울였죠. 볼셰비키당의 하부조직들은 매우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전국에 걸쳐 활동을 펼쳤고, 혁명기간에도 대중투쟁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폭풍과도 같은 혁명의 흐름 전체를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에는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것이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2). 이런 와중에 2월 혁명으로 차리즘이 타도됨으로써, 러시아 역사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새로운 정세는 새로운 전략계획, 새로운 전술, 새로운 방침을 당에 요구했습니다. 이렇듯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새로운 전략과 전술 그리고 혁명투쟁의 방침들을 수립하는 데서 지도적,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습니다.   

2. 레닌의 ‘4월 테제’

2월 혁명 초기,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었던 레닌은 「먼 곳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2월 혁명 후 당이 취해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레닌은 지금은 차리즘이 타도됨으로써 ‘혁명의 제1단계’가 끝났을 뿐이며, 노동자들은 영웅적인 정신을 발휘하여 ‘혁명의 제2단계’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밝혔죠. 또한 부르주아 정부가 경찰을 부활시키거나 군주제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동자 의용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김영식, 1989: 257). 

“신정부를 절대 신임하지 말고 절대 지지하지 말 것, 특히 케렌스키는 의혹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것,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이야말로 오직 유일한 보증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의회의 선거를 즉시 시행할 것, 다른 당에 결코 접근하지 말 것.”    

4월3일(4월16일), 9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레닌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요. 레닌을 환영하는 자리에는 수도의 모든 지구에서 다수의 노동자대표들이 파견되었고, 수비대의 각 연대는 병사대표들을 보냈습니다. 볼셰비키당에서는 중앙위원회 러시아 뷰로와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프라우다』의 편집진으로 이루어진 당원들이 레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같이 했죠. 이런 속에서 레닌은 핀란드역 앞에서 장갑차 위에 올라가 역사적인 연설을 했습니다(레온 트로츠키, 2003(상): 416~417). 

“친애하는 동지, 병사, 수병,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들을 통해 승리한 러시아 혁명을 맞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국제노동자계급 군대의 전위대로 맞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 우리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외침에 호응하여 인민이 자기 손에 든 무기를 자국 자본주의 착취자들에게 돌릴 시간이 머지않았습니다. …… 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그리고 그 다음날인 4월4일,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 당 페트로그라드 시위원,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 전국의회의 볼셰비키 대의원들 앞에서, 「현재의 혁명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임무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이 보고의 테제를 4월7일자 『프라우다』가 발표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4월 테제’입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및 전환시키기 위한 당의 방침을 담은 문건이었죠. 

레닌은 4월 테제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특징은 혁명적 제1단계에서 제2단계로 나아가는 이행기라는 점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각과 조직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2단계로 나아가는 이행기이다.” 이외에도 4월 테제의 주요한 내용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황인평, 1985 Ⅱ: 134~146, 김영식, 1989: 260~263, 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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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보프 일당의 새로운 정부는 그들의 자본주의적 속성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이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려 들 것이다.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2) 현재 러시아에서는 차리즘이 타도되었으나, 정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이 불충분하여 권력을 부르주아지의 손에 넘겨준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손으로 권력을 넘겨줄 혁명의 제2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3) 임시정부에 대해 어떤 협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주아 정부인 현 정부에 대해 더 이상 제국주의 정부이기를 중단하라고 호소하는 따위의 요구나,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요구가 더 이상 주장되어서는 안 된다.
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만이 실제로 유일한 혁명적 정부임을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소수로 있는 한, 우리의 과업을 체계적으로, 끈기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대중의 실제적인 요구와 결합시켜 설명할 필요가 있다.
5)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복귀하는 것은 일보 후퇴이다.- 상부에서 하부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친 노동자?고용노동자?농민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행해야 한다.
6)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국내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며, 농민?고용농민대표 소비에트에 그 사용 및 관리를 위임한다.
7) 국내의 모든 은행을 하나의 국립은행으로 즉각 통합하고, 그 활동을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8) 우리의 긴급한 임무는 사회주의를 어디에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소비에트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9) 당의 임무와 관련하여, 
   가) 당 대회의 즉각적인 소집. 
   나) 강령의 개정: 
① 최초의 당 강령이 채택되었던 1903년 이래 혁명운동의 경험이 준 모든 새로운 교훈과 1917년 2월 혁명 후 당이 직면한 새로운 임무를 고려한 것. 
②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것. 
③ 국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코뮌 국가’에 대한 우리의 요구 내용.
④ 시대에 뒤떨어진 최소 강령의 개정. 
   다) 당 명칭 변경: 전 세계 사회민주당 지도자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전철 때문에 당명을 ‘공산당’으로 개칭해야 한다.
10)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와 관련이 없는 혁명적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설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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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ya_05.jpg이렇듯 레닌의 4월 테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투쟁의 모든 측면을 두루 걸쳐 다루었습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추진력에 대해 지적하고 이행의 각 단계를 규정했으며, 당의 경제행동 강령, 특히 농업행동 강령을 제시했죠. 그리고 이 테제는 소비에트 공화제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태를 규정하고 있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데 대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였습니다(황인평, 1985: 140).

레닌의 테제는 1917년 4월24일부터 29일까지에 걸쳐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제7회 볼셰비키당 전국협의회에서 논의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카메네프나 루이코프 등의 반대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당 협의회는 4월 테제의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결국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죠. 그리고 4월 협의회에서 채택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비록 그것이 즉각적인 혁명적 행동의 조짐을 드러내진 않았다 할지라도, 처음으로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구상에 구체적 형상과 특징적 구조형태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Carr, 1985: 102). 이러한 과정을 거쳐 레닌이 기초한 「현 정세에 대한 결의」(이하 ‘결의’)가 탄생했습니다. ‘결의’는 세계자본주의의 현 상태에 대한 기술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합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8). 

“선진 국가들과 한층 발달한 국가들의 경우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 전부터도 존재했지만, 전쟁의 결과로서 그런 조건이 더욱 빠른 속도로 성숙되었다.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는 거대한 성장을 이룩했다.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그 내용이다.” 

레닌은 이런 경향이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유지되는 경우, 이 경향은 불가피하게 착취, 억압, 반동, 군사적 전제의 강화와 자본가의 이윤 증대 등을 이끌게 될 것이지만,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국가권력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이양될 경우, 이런 조건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는 폐절되고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변혁의 성공을 담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죠(USSR Academy of Sciences, 1980, volume 4: 38).
(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