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산재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노동사회

이 땅에서 산재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편집국 0 3,797 2013.05.2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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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이경호 _ 25세,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2002년 산재사고 당함
      강송구 _ 44세, 사출공으로 일하다가 1994년 산재사고 당함
사회: 이서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정리: 『노동사회』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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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과 ‘다른 사람들’을 여지없이 낙오시키는 지독한 경쟁사회, 산재노동자들과 같은 소수자들은 꿈을 꾸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다. 산재 및 장애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은 노동조합운동이 묵과할 수 없는 과제다. 이 땅에서 산재노동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산재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산재노동자협의회 소속 노동자 두 명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어본다.      

산재사고를 겪은 순간을 지금도 기억하세요?

강송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거 잊을 수가 없죠. 

이경호  대부분 산재노동자들에게는 살아가면서 겪은 가장 큰 충격이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죠. 사실 전 지금도 가끔 꿈을 꿔요. 한국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장애인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 꼭 해야 함에도 할 수 없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장애인들도 경제활동도 해야 하고, 자유롭게 이동도 할 수 있어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는데, 못 하게 되는 거잖아요. 삶의 미래, 많이 다치든 적게 다치든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미래 자체가 밝지 않은 거죠. 그렇게 된 계기를 잊을 수는 없죠.

어떻게 하다가 산재를 겪게 되셨어요?

이경호  사실 현장에는 선반밀링공으로 들어갔는데, 어찌하다보니까 선반밀링은 못 하고 용접이나 프레스, 이것저것 잡다한 걸 주로 했어요. 하루는 공장에서 금형이 고장나가지고 그거 고치려고 프레스를 세팅하다가… 근데 그 프레스가 정말 오래, 30년이 넘은 거였거든요. 다 죽어가는 프레스였는데 그게 제 팔위로 내려앉은 거죠, 스물한 살 때.

강송구  나는 사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고로 장애가 조금 있었어. 20대까지는 그냥 철없이 살았지 부모가 다 해주니까.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 아버지가 서울에 가야 된대. 나는 그냥 시골에 있으면서 소 키우고 염소 키우면서 사는 게 제일 편하다 싶었는데, 아버지가 안 된대. 어떡해, 부모가 간다는 데 따라가야지.
 
서울에 왔더니 누나하고 매형이 오락실을 알아봐줬어요. 오락실 일은 그냥 잔돈만 바꿔주면 되니까 괜찮다 싶어서 한다고 했지. 그 때가 스물아홉인가 서른인가 그래요. 근데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생활할 때, 그 때부터 내가 돈 줄게 이거 해 하면 다 했어. 거짓말 안 하고 똥 치우라면 똥도 치웠어. 그렇게 모은 돈이 천만원 정도 됐는데, 그거에 아버지가 좀 보태줘서 가게를 열었지. 근데 하다보니까 짜증나서 도저히 못 해먹겠는 거야. 하루 종일 갇혀서 12시간 넘게 일해 봐야 많아야 만오천원이나 남나 그랬어.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했지. 나 차라리 회사 가서 30만원이라도 월급 받고 일하는 게 났겠다, 네가 좀 알아봐줘라 했지. 쉬는 날 그 친구랑 같이 돌아다녔는데, 진짜 힘든 거야. 내가 장애를 갖고 있으니까…. 안산, 김포, 구로 공장 있는 데를 전부 돌았는데 안 받아줘요. 계속 퇴짜 맞다가 결국 그 친구가 일하는 데로 어떻게 들어갔지. 가니까 그 친구하고 사장님하고 아줌마 한분하고 서이가 있더라고. 내가 할 일은 사출금형이었는데 한 손으로 해도 할 만 하더라고. 해서 거기서 한 6개월을 일했지. 그러다가 설날이 돌아왔는데, 참 사장이 마음도 좋고 한 사람이었는데… 그 때 사장이 일감을 못 가져와서 한 보름을 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설이 오는데도 뭘 줄 생각을 안 해. 해서 내가, 저희도 명절을 보내야 하는데 공장이 어렵긴 하지만 조금만 어떻게 해달라고 좋게 얘기했지. 그러니까 버럭, 일도 안 하고 무슨 돈타령이냐고 그래. 그래서 아줌마까지 꼬셔서 직원들이 싹 관뒀지.

그러고는 다시 돌아 다녔어. 안산에서만 한 50군데 갔나 그래. 그 친구랑 같이 돌아다녔는데 회사들이 그 친구는 받아주는데 나는 안 받는 거야. 그 친구는 나보다 장애가 조금 나았거든. 그치만 둘이 같이 있어야 의지도 되고 그러잖아. 그래서 딴 데를 알아봤는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는 거야. 정 일을 하려면 한 달간 월급 없이 일해 봐라 봐서 쓸 만하면 그 때부터 월급을 주겠다는 거지. 결국 부천에 있는 장난감 만드는 데 그렇게 취직을 했어요. 첫 날 가니까 공장장이 바쁘다고 사출금형 기계 4대를 나 혼자 다 보래. 그래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제품이 기계에 걸렸더라고. 그래서 기계 뒷문을 열고 그 불량품을 잡아 당겼는데, 금형이 오작동하더니 내 팔 위로 떨어진 거지. 원래 사출금형은 문을 열면 작동 안 하게 되어 있는데, 회사가 일 빨리 하게 한다고 안전장치를 제거해놨던 거를 난 몰랐던 거지.

한 십분을 협착된 상태로 그러고 있었어. 사장은 사무실 안에 있었는데, 현장에서는 나 혼자 작업하고 있었으니까. 한 네 번 외치니까 사장이 사무실에서 나오더라. 그래 병원으로 갔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음속으로 믿음이 있었어요. 난 된다, 이거 다 낫고 이 손 옛날처럼 다시 쓸 수 있을 거다 했는데, 안 되는 거야. 병원에 너무 늦게 간 거지. 손가락이 남긴 남았는데 기능이…. 거기가 산재보험에 가입 안 된 사업장이었는데 산재처리는 사장이 어떻게 해주더라고.      

이경호  저는 현장 가서 1년 좀 안됐을 때 다쳤거든요. 근데 그 때 40, 50대 노동자들이 하는 얘기가 뭐였냐면, 3개월이나 6개월 안에 어디하나 찢어져서 꿰매야 액땜을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크게 사고 난다는 거였어요. 저도 팔 이렇게 되기까진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조그만 공장에서는 기계에 안전장치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 불법이지만 안전장치 없이 하는 게 작업속도가 훨씬 빠르니까. 프레스 같은 경우는 거의 두 배 차이가 나요.  
            
산재처리 과정에서는 문제가 없었나요?

이경호  문제 있었죠. 되게 황당했는데, 그 사업장이 문제가 많은 사업장이었어요, 1년에 4명 이상은 손가락 절단되는. 직원이 40명 정도 됐었는데, 저 다음에 그 해에만 3명이 더 다쳐서 노동부에서 문 닫으라고 했대요. 그런데 명의변경만 했어요. 

입원하자마자 사장이 왔어요. 전에 사고 난 것도 워낙 많으니까, 은근히 공상처리를 하자고 돌려서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병원에 6개월 정도 있었는데 치료비가 4천만원이 넘게 나온 거예요. 공상으로 하면 의료보험 처리가 안 돼요. 저 같은 경우는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모가지니까 보험처리하면 사고라는 게 금방 들통 나거든요. 전부 생돈으로 때려 막아야 하는 거였죠. 근데 사장이, 내가 2억 줄 테니까 치료비하고 해서 적당히 합의보자, 그런 얘길 해요. 사실 집에 빚도 있고 해서 고민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담당의사하고 면담을 했더니 앞으로 2년 넘게 치료를 해야 된대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산재처리하기로 결심했죠.

서류 작성해서 갔더니 사업주 날인을 못 찍겠다고 버티더라고요. 도장 한 번 찍어주면 예전에 있던 사고나 앞으로 나는 사고까지 다 들킬 테니까, 더군다나 산재보험도 가입 안 하고 개기고 있었으니…. 그것 때문에 한 일주일을 싸우다가 그냥 사업주 날인 없이 서류를 제출했어요. 사업주 날인 없어도 되는 거는 병원 원무과에서 대충 가르쳐주데요. 퇴원 날짜 다가오는데 돈은 받아야 하겠으니까. 어쨌든 그 회사 지금도 잘 돌아가고 있어요. 명의 바꿔서. 두 번 바꿨대요. 근데 웃기는 건 그 사장도 산재환자라는 거예요. 손가락이 4개가 나갔어요.              

산재라는 경험은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는 거잖아요. 포기해야 하는 것도 생기게 되고.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을 거 같은데. 

이경호  제가 초등학교 때 바이올린을 했어요. 근데 고등학교 들어와서 좀 놀기도 했고 집에 돈도 없고 해서 음대를 못 갔어요. 별로 맘에 들지 않는 과에 갔는데, 그래서 돈 좀 벌겠다고 공장에도 갔던 거였거든요. 바이올린을 되게 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크로스오버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보고 나도 그런 거 해 보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다, 그랬어요. 근데 지금은 아예 오른손을 못 쓰게 됐으니까, 바이올린 활을 못 잡게 됐으니까…. 바이올린 꿈을 접어야 했죠. 다치기 전에는 계속 개인교습 받아가면서 하고 있었거든요. 꿈이었는데 진짜. 

강송구  난 아주 어려서 달리기를 잘 했어요. 그래서 그거 선수 되는 꿈을 딱 갖고 살아왔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사고가 나면서 다 깨져버린 거야. 그 때부터 뭐 꿈이라고 할 게 사라져버렸고, 이 손을 고쳐야 한다 그 생각만 갖고 살았지. 돈을 벌어서 수술 한 번 해봐야겠다, 오직 그것만 갖고 밀고 온 거야. 그러다보니까 돈 되는 건 무조건, 참 악착같이 모았지. 그렇게 어느 정도 모아서 병원에 갔더니 너무 늦어서 안 된다는 거야. 사고난지 거의 20년이 넘은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서울대병원에서 검사를 다 했어. 다 하고 수술날짜를 잡으려니까 집에서 반대하더라고. 수술해서 안 나으면 돈만 날리는 건데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는 거지. 난, 내 소원이다, 되든 안 되든 수술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다, 그렇게 우겼지. 내가 해보고 싶은 소원이었으니까, 누구한테 손 안 벌리고 돈도 내 스스로 모아서 했으니까…. 결국 너 알아서 하라고 허락을 받아서 병원에서 날짜를 잡았어. 서울대병원에서, 여름 6월인가 7월인가로 잡았지. 그런데 4월달에 산재사고가 난 거야, 4월20일에. 그러고 또 다쳐버리니까 그 꿈도 접어버렸지.  

지금은 후회 같은 건 없어. 내가 이 몸뚱이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마운 거야. 여기 산재노협 사무실에 나와서도 일하지만, 새벽에 우유배달도 하고. 우유배달 한다고 창피하고 쑥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지금 이 몸뚱이로 그거라도 할 수 있으니까 고마운 거야. 손 발 성해도 노는 사람도 있는데, 난 이렇게 몸이 불편하지만, 니네들이 하찮게 볼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 몸 갖고 우유배달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고맙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거야. 

산재를 겪은 후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게 있다면?

이경호  사람이 제일 좋아요. 가족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실 가족은 너무 당연한 거고, 친구나 애인이라든가 이런 걸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 다쳤을 때 여자친구가 많이 힘이 돼줬어요. 내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옆자리를 안 뜨고 지켜보고, 그게 많이 힘이 돼줬죠. 얘기도 많이 해주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필요한 것 같아요. 

강송구  나하고 경호하고는 가정 갖고 있냐 혼자냐 거기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애. 막 사회에 나가서 꿈을 펼칠 때 같았으면 마음을 지탱하기가 더 힘들고, 사회생활 하다가 다치면 좀 더 적응이 되는 면이 있고. 근데, 주위사람이 대화를 해주는 게 정말 소중해요. 주위 사람들이, 너는 이미 이렇게 됐으니까 현실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얘기해주는 것. 사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안 다쳤을 때의 기억, 그 상황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야. 이걸 본인이 어떻게 빨리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뀌는데, 거기서 가정이 있고 없고 따라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애. 어쨌든 현실에 지금 내 상황에 맞게 힘을 키워가면서 살아가는 되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옛날보다 더 열심히 살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안 되면 좌절로 떨어져요.  

이경호  병원에 6개월 동안 있었을 때, 제 처음 병실이 8층이었거든요. 근데 6개월 동안 8층에서 반지하까지 내려갔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들 중에 그걸 혼자서 극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아무리 혼자 발버둥을 쳐도 현실의 벽에 부딪치거든요. 저도 진짜 짜증 많이 냈어요. 오른손잡인데 왼손으로 밥 먹어야 되니깐 짜증나죠. 안 되니까. 젓가락도 확 집어던져버리고…. 제가 그런 짓 많이 했거든요. 물론 그런 걸 다 받아줄 수는 없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런 짜증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얼마나 잘 컨트롤 해주느냐가 중요하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친밀한 관계가 소중하고 가장 큰 힘이 되겠지만, 사회적 관계도 중요할 텐데요. 지금 소속되어 있는 산재노동자협의회 등 사회적 틀들은 어떻게 만나게 됐고 어떤 의미였는지.

이경호  제가 있던 사업장이 외국인노동자가 30명이 넘고 한국노동자는 별로 없었어요. 복지시설도 되게 안 좋았고 임금수준도 바닥인데, 거기다가 3개월에 한 명씩 손가락 잘려나가니 누가 거기서 일하고 싶겠어요. 그래서 일반노조 가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가 다친 이후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엄마 손잡고 집회장에 따라다니고, 대학 다닐 때는 학생운동을 하는 척도 해봤는데요. 근데 산재노협을 통해서 이게 진짜 내 경험이 되니까,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고 그래야 하나, 아무튼 주변에서 서성대던 거랑은 다르더라고요. 내가 다친 현실과 다치지 않은 현실이 차이점이 있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또 미조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현실은 지금도 굉장히 암울한 상태거든요. 할 수 있으면 누군가는 바꿔야 되잖아요. 누가 됐든 어느 조직이 됐든 바꿔내야 되는 거잖아요. 굳이 노동권 얘길 꺼낼 것도 없이, 비정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현실, 내가 겪어본 그 암울한 현실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거기 때문에, 산재노협 활동은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강송구  다치기 전에는 노동조합이나 그런 거 몰랐지. 어렸을 적에는 데모하는 거 보면 밥 먹고 저렇게 할 일 없나 그랬는데, 다치고 나서는 내가 부딪치는 벽이 워낙 많으니까 집회하고 투쟁하는 게 어떤 의미라는 걸 알게 됐지. 산재노동자협의회는 병원방문으로 알게 됐어요. 내가 시련에 빠져 있는데, 이것저것 처리도 나 혼자 해야 했는데, 산재노협 사람들이 병원에 온 거지. 와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이런 단체가 있다, 한 번 사무실 와서 상의를 해봐라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왔어요. 

근데 옛날 다친 사람하고 요즘 다친 사람들은 엄청 차이가 있더라고. 지금은 그래도 산재가 뭐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환자들도 뭘 잘 몰랐으니까, 이런 단체에서 일 처리를 해주는 데 고마움을 느꼈죠. 어쨌든 나도 내가 받았던 만큼 병원 방문도 하고 해야지 하면서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게 마음같이 안 되더라고. 마음은 있는데 이게 안 돼. 여기는 총각이니까…. 가정 갖고 그러면 여기 나와서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도 없는 거고, 지금은 그런 게 조금 안타깝더라고. 

이경호  다치고 나서 한동안 전에 갖고 있었던 꿈을 포기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두드리면 열린다는 문구가 성경에 있잖아요. 사실 작년까지 고민하다 결정을 했는데, 내가 전에 갖고 있던 꿈을 다른 방법으로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요. 한 고비를 넘기면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다시 음대를 가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작곡공부를 하려고요. 꿈이 모습을 조금 바꾼 거죠. 같은 기둥에서 내 현실에 맞게. 

산재를 겪은 후의 모습은 잘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고 우울증에 빠져서 다시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사람도 있고, 개인의 의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에요. 근데 저는 여기에는 사회책임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산재노동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사회 조건은 대부분의 산재노동자들이 새로운 꿈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고 생각해요. 산재환자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현실에 맞는 꿈을 꿀 수 있도록 사회 조건이 갖춰져야죠. 

산재를 겪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는데, 이 경험 때문에 인간성 등에서 변한 것이 있다면?

이경호  산재는 사람을 참 독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동전의 양면,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하는데, 독한 사람에게 좋은 사회구조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는 거죠. 사람이 독해져야 잘 산다는 것을 아는 거죠. 질기고, 굉장히 독하게 변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취직이 정말 어려워요. 지금 이력서를 50군데 넘게 넣었는데, 전화가 한 군데서도 안 와요. 들어보니까 산재 당한 사람이 들어오는 걸 꺼린대요. 불길하다고. 

강송구  지금은 현실에 맞춰가면서 살아야 하니까 사실은 사는 게 좀 힘에 부쳐.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가끔 옛날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 갈수는 없잖아요. 주변 사람들이 많이 보조를 해주지만 결국 혼자다,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사회복지제도 같은 걸 많이 늘려서 그런 짐을 나눠 들어야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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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1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