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의 징검다리를 놓다

노동사회

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의 징검다리를 놓다

편집국 0 4,155 2013.05.29 08:27

2003년 10월31일. 롯데칠성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어느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술이나 노름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이 남자는 롯데칠성에서 6년 5개월간 일을 했고, 자신이 청춘을 다 바쳐 일했던 회사에 1억 8천만원의 빚(미수금)을 진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겨놓은 빚은 고스란히 산 자의 몫으로 남아 가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가압류시켰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롯데칠성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또다른 남자가 운전하던 차 안에서 신호대기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 남자역시 회사 측에 갚아야 할 빚(미수금)이 있었다. 그는 회사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일부는 여기저기서 빌려 갚았으나 약 2,000만원 정도를 못 갚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직장 선배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단다. 그 직장 선배도 회사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관계로 돈을 빌려주지 못하자 “머리 좀 식힐 겸 낚시라도 다녀오겠다”며 차를 빌려 달라고 했고, 돈 대신 차를 빌려준 직장 선배는 자신의 차 안에서 죽어 있는 후배의 시신 앞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그 선배는 3년 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유통노동조합 식음료유통본부의 위원장이 되었다.

yglee_01.jpg

돈 벌러 들어간 직장에 돈 내고 다니는 기막힌 사연

국내 굴지의 음료업계인 롯데칠성, 해태음료, 동아오츠카의 영업사원들은 회사의 매출 압박으로 인한 부채 증가와 가족에게까지 이어지는 채무 독촉, 손배 가압류 등으로 생계는 물론 생존까지도 위협받고 있다. 이는 언급한 음료 3사뿐 아니라 동종업계인 코카콜라나 제과, 빙과, 제약 등 유통업계에도 이미 만연해 있는 ‘관행’이다. 위의 대형 음료 3사들은 경쟁업체보다 매출 실적을 늘리기 위해 영업사원들에게 ‘가판’(실제 판매되지 않은 물건을 전산망을 통해 판매된 것처럼 조작하는 가짜 판매 방식)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영업사원들은 팔리지도 않은 물건에 대한 수금 압박에 시달렸으며 지점장의 지시, 혹은 묵인 하에 가판된 물건을 20~40% 싼 값에 덤핑 처리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 차액이다. 

지점장, 즉 회사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덤핑의 차액을 모조리 영업사원들이 갚고 있는 것이다. 월급을 받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미수금을 갚는 데 쓰이고 있다. 또 퇴직금 중간정산을 통해 갚기도 하고 회사 측에서 소개해 준 대출업체에서 대출을 받아 미수금을 갚기도 한다. 이렇게 하다가 미수금을 갚지 못할 상황이 오면 회사는 영업사원을 면직처리 시키고 공금횡령, 업무상 배임 등으로 소송을 건다. 아들이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동네잔치까지 벌인 영업사원의 부모들은 졸지에 회사 돈을 훔쳐 쓴 도둑을 키운 부모가 되어 동네를 떠나야 했다. 또한 음료 3사는 영업사원들의 입사 시 신원보증인을 세우게 하고, 가판으로 인한 빚 부담을 결국에는 신원보증인에게 떠넘겼다. 신원보증인 대부분은 영업사원들의 가족이므로 음료업체의 과당경쟁이 영업사원들의 가족과 친지들의 생계까지 송두리째 흔드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빚이 생기는 현실에 처해 있는 영업사원들이 쉽사리 회사를 그만 두지 못하는 이유를 김용수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영업사원은 현금을 만진다는 이유로 입사과정에서 가족이나 친지 등의 신원보증을 요구한다. 민사 소송에는 100%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회사가 영업사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면 최대한 승소하더라도 본인은 물론 보증인에게까지 경제적 부담이 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또한 영업사원 입장에서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위치에서 다달이 나오는 월급의 유혹이 일단 크고 거기에 더해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직원들도 다들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보상이 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또한 김 변호사는 “조직화를 통한 대응이 그나마 영업사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영업직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모 회사도 상황 자체는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회사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회사는 영업사원들을 압박해 횡령 ‘자인서’와 ‘변제각서’를 쓰도록 한다. 영업사원들이 자필로 쓴 자인서와 변제각서는 소송 시 영업사원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자인서를 쓰지 않은 영업사원은 매일 한 두 시간씩 퇴근도 못하고 지점장과 면담을 해야 하는 등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선택은 오직 하나, 자인서를 쓰지 않으려면 퇴사해야 하고 퇴사하려면 남아있는 미수금을 몽땅 갚아야 한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횡령했다고 자인서를 쓴 영업사원이 계속 근무를 하며 판매와 수금을 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영업사업이 횡령한 것이 아님을 회사가 인정하는 것이다. 영업사원이 정말 공금을 횡령하고 회사의 지시 없이 덤핑으로 할인판매를 했을 경우, 상식적으로 그 영업사원에게 같은 일을 계속 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yglee_02.jpg
[ 지난 4월 11일 서비스연맹은 롯데호텔 앞에서 부당영업관행 시정과 노조탄압 중지, 성실교섭 촉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


상상초월 부당노동행위와 경찰의 살인질주 감시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4년 5월4일자 『한겨레』 신문에는 “음료회사 판매량 올리기 횡포”라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현재 일어나는 부당영업에 대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음료유통 영업사원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미수금의 액수는 더 커지고 그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으며 객관적인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영업사원들이 스스로 뭉쳐서 ‘조직’을 결성했다는 것이다. 영업사원들은 ‘서비스·유통노조 식음료유통본부’라는 이름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난 3월11일 창립총회를 거쳐 민주노총 민간서비스연맹에 가입했다. 창립총회 전날과 당일, 회사측의 방해 공작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해서 차에 올라탄 영업사원들을 섬으로 끌고 가 감금시키는가 하면, 일요일이었음에도 “무조건 출근하라”는 업무지시를 내리고, 총회 장소에 나타나 총회에 참석하러 온 조합원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는 등,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는 이미 ‘도’를 넘어 섰다. 창립총회 이후에도 대전에 근무하는 직원을 안동으로, 광주에 근무하는 직원을 진주, 부산 등으로 부당발령 시켰고, 식음료 유통본부의 위원장(김정일)이 근무하는 롯데칠성 서광주 지점은 아예 폐쇄하였다.

음료유통업계의 관행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런 부당함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음료유통 노동자들은, 지난 5월7일부터 19일까지 2주간의 전국순회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순회투쟁기간 중에 벌어졌던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와, 미행, 채증, 도촬 등 경찰의 노조 감시행위는  책 한권을 쓰고도 모자랄 지경이다. 일례로 목포에서 미행을 하던 차량에 다가가 “왜 미행을 하느냐”고 묻던 식음료의 조합원 한 명을 그 차량에 매단 채 시속 80km의 속도로 약 400m 가량을 질주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확인 결과 ‘살인 질주’한 차량의 운전자와 동승인은 목포 경찰서 정보과 정보2계 소속의 경찰로 밝혀졌다. 그들은 항의하는 식음료 유통본부 조합원들에게 “없던 일로 하자”고 회유하면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공무집행 방해로 처넣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인간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회에서 정상적인 양심을 가졌으되 힘이 없었던 노동자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통속의 진리를 깨우쳤고, 서비스연맹을 통해 ‘단결된 조직과 연대의 힘’을 경험했으며, 순회투쟁을 통해 예전엔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서 ‘가슴 벅찬 동지애’도 느끼게 되었다. 서비스연맹은 민주노총 법률원을 통해 영업사원들의 소송 진행을 돕고 있으며 각 지역별로 연맹의 간부들을 배치해 식음료본부 조직확대사업에 투입 하는 등, 직업의 특성상 조직화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영업사원들의 노조 결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복수노조 시비문제로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는 사측에 대응해 교섭응낙가처분 신청을 진행하고 있으며, 오는 6월7일에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유통노동자들의 증언대회를 열어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유통업계의 피폐한 실상을 파헤칠 예정이다.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노래

식음료 유통본부의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가난하다. 자녀들이 학원을 못 다닌 지는 이미 오래, 이제 곧 살던 집에서 쫓겨날 사람도 있고, 아픈 아이를 치료할 병원비가 없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하는 젊은 아빠도 있다. 

하지만 식음료 유통본부의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형형한 눈빛을 띄고 있다. 이들을 보며 베트남 소설 『사이공의 흰 옷』에 나오는 글귀가 생각난다. 

“인간의 가능성이 짓이겨지고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조차 극복하기 위해 예기치 못한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아이 치료비 때문에 공금 횡령했다고 자인서 쓰라”고 덮어씌우는 비인간적인 회사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식음료 유통본부 조합원들은, 
털 끝 만큼의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채 죽어간 동료들의 한을 풀기 위해 싸우는 식음료 유통본부 조합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음료 3사에 입사해서 승진할 날만 바라고 뼈 빠지게 일하는 비정규직 후배 노동자들의 근무조건 개선을 위해 싸우는 식음료 유통본부 조합원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의 징검다리를 놓으며 오늘도 스스로 ‘기적’을 만들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