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독재에 맞서는 '대장정'을 기대하며

노동사회

시장독재에 맞서는 '대장정'을 기대하며

편집국 0 4,944 2013.05.29 08:23

올해 6월, 우리사회에 민주화를 안겨준 1987년 시민항쟁 20주년을 맞아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당시를 회고하면 아직도 철권통치의 제5공화국을 무너뜨린 길거리의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되었던 민주화의 역사가 20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벅찬 기억으로 민주주의를 되뇌기보다는 그 형해화에 더 우려하게 되고, 고통어린 민중의 재등장에 주목하는 자조의 목소리가 적잖은 게 현실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2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통해 온 국민이 주인되는 참민주주의 세상을 열어가기보다는,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차별과 불안에 시름하도록 만드는 소위 '20대 80의 양극화 사회'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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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조합운동 내에서도 대기업 조직노동과 중소기업 비정규.미조직노동 간의 양극화가 커지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 GM대우 창원비정규직지회 ] 

누가 한국사회 노동양극화를 부정하랴 

지난 20년 동안 우리사회에서는 비정규직의 급증과 노동시장 분절화에 의해,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조직노동자들과 다수의 중소기업 미조직 비정규노동자들 간에 소득 및 근로조건 격차가 날로 확대되어 왔다. 보다 엄밀하게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전 10년 동안에는 그 격차가 완화되지도 크게 두드러지지도 않았지만, 경제위기를 거쳐 최근에 이르는 후반기 10년 동안 그 격차는 급속히 심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림1]에서 알 수 있듯, 500인 이상 대기업과 비교하여 10~29인 규모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상대적 임금수준은, 1993~97년 사이에 70~73%였던 것이 1998년 이후 급감하여 2005년에는 60% 미만으로 떨어졌다. 기업복지 비용의 추이를 보여주는 [그림2]에서 역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복지격차가 1990년대 전반기부터 벌어지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기 이후 현재까지 계속 확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1] 기업규모별 임금격차 추이 
(500인 이상 기업=100, 단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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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기업규모별 종업원 1인당 기업복지비용의 증가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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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90년대에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노동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것과 더불어,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비정규노동자 수가 급증하여 우리사회의 고용구조가 크게 악화되었다. 1992년 당시 전체 임금노동자의 42.6%에 달했던 임시직과 일용직 노동자의 비중은 1998년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5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2001년 통계청 실태조사에서 737만명(전체 임금노동자의 55.7%)이었던 비정규노동자의 규모는 2006년에는 847만명(55.0%)으로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동일 조사에 대해 상이한 추계방법을 적용하는 정부 발표 비정규직 고용규모 역시, 2002년의 384만명(27.4%)에서 2006년의 546만명(35.5%)으로 늘어났다. 

사용자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해 불안정한 고용이 양적으로 크게 늘어난 것만이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2006년 기준으로 이들의 월 급여 수준은 정규직의 51.3%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격차가 너무나 현격하다는 사실에서도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심각성이 찾아질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 간의 보상격차를 반영하듯, [그림3]에서와 같이 소득불평등의 여러 지표들은 1990년대 중반 한때 하락하였다가 1997년의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그 기조를 최근까지 유지하고 있다.  

민주화와 양극화의 모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

지난 20년 동안 우리사회에 어떠한 일들이 발생했길래 이처럼 노동양극화가 심화된 것일까? 우선 거시적인 배경원인으로 지난 1990년대,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 경험했던 구조변동을 꼽을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하향질주의 무한경쟁을 가속화하는 ‘세계화’의 물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범지구적 차원으로 전일화되어 왔다. 우리경제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에 따른 자유무역질서의 확립에 의해, 그리고 외환위기에 따른 전면 개방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예외 없이 세계화의 시장전제주의(market despotism)에 시달리게 되었다. 

두 번째 구조변동으로는 소위 ‘디지털 불평등(digital divide)’ 사회의 도래를 들 수 있다. 정보·지식경제로의 이행이 현실화하면서 기술혁신에 의한 고용 없는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정보재의 생산과 유통에 있어 승자독식의 게임법칙이 지배함에 따라 고급지식노동과 단순육체노동 간의 차별적 이질감이 현저하게 대두된 것이다. 아울러 탈산업화와 고학력화는 노동의 개체화를 강화하여, 노동자집단 내부의 연대의식 토대를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림3] 소득불평등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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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외부요인들을 세계 보편적인 구조변동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특수한 요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정치민주화가 역설적으로 노동양극화를 추동해온 경향에 대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정치민주화를 통해 개발연대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해체된 후의 빈자리를, 재벌-관료-언론권력이 주도하는 보수적 민주주의 질서가 채우면서 중산층 몰락과 계층구조 양극화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즉, 1987년 이전에는 개발독재에 의해 강압적으로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및 복지수준이 하향 평준화됐던 데 비해, 이후 정치민주화와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노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대기업 조직노동과 중소기업 비정규·미조직노동 간의 근로생활 양극화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양극화의 모순관계’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민주개혁의 담론각축에서 시민사회운동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운동의 계급연대투쟁에 대한 대중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위축·쇠락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우리사회에서는 정치민주화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국민적 연대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체제가 성숙·발전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보수권력연합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성과가 형해화됨으로써 사회불평등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단기수익 극대화전략이라는 ‘진리’와 민주정부 ‘무능’   
      
이러한 노동양극화 또는 노동조합운동의 연대성 위기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주범으로는 새로운 자본수취 방식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98년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개방경제체제가 전면적으로 확립되는 가운데, 대기업들의 경영방식이 ‘초단기적 수익관리’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외환위기 직전까지 유지됐던 부채 의존적 투자확대 전략의 쓰디쓴 실패경험과 주식시장을 매개로 한 해외자본의 영향력 행사 등으로 인해, 우리 대기업들이 수익구조 개선을 최우선시하는 경영체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대기업들 대부분은 경제위기 상황을 활용하여 정규인력을 대량 감축했고, 비정규직노동의 대체 활용 및 사업구조의 외주화 등을 통해 상당한 인건비 절감을 도모했다. 더불어 자신의 시장지배력을 내세워 중소 협력업체들을 수직계열화하고 이들에게 수탈적인 하도급 계약조건을 강요하여 왔다. 실제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서 1997~2002년 사이 대기업의 하청계열화 비율은 57.6%에서 63.9%로 크게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납품단가율은 2001년의 2.6%에서 2003년의 6.6%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단기수익관리를 최우선시하는 경영방식이 대기업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각 산업의 정상에 위치하는 원청 대기업들은 엄청난 수익실적을 거두는 반면 종속적인 지위에 놓인 하청중소기업들은 빈사상태에 내몰리는 경제·산업구조의 양극화문제가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개발연대 시대에 원청 대기업들이 각 산업의 선단을 이끌며 수출성장의 수익 일부를 중소기업 등의 경제부문과 공유해오던 수익환류(trickle-down) 효과가 소실되고, 이제는 이 원청 대기업들이 오로지 자신의 수익성 증진을 위해 하청 중소기업들을 압박·수탈하는 살벌한 ‘수익독식체제(squeeze-up system)’가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 및 주변노동부문 간의 경제불평등 확대재생산구조가, 대기업부문의 내부자와 외부자 간 노동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물적 토대라고 하겠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 탄생된 일련의 민주정부들은 우리사회 노동양극화를 제어하기보다는 오히려 촉진시키는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정책을 통해 경제개방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함으로써 노동양극화를 가속화하는 선행조건을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정책을 전면 수용·추진함으로써 사회불평등과 노동양극화의 현실조건을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현재의 참여정부는 정치개혁과 이념재정립 그리고 지역개발 등의 개혁의제에만 몰입한 채, 이전 정부들로부터 크나큰 빚으로 인수받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책이슈를 뒷전에 두고 있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소위 민주정부들은 재벌 대기업 중심의 독식경제체제를 제어할 만한 통제능력과 정책수단을 보여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발연대와 마찬가지 ‘경제성장 지상주의’의 정책담론에 사로잡혀, 성장-분배 또는 경제효율-사회형평의 선순환을 구현하는 사회민주개혁모델을 도외시함으로써 결국 노동양극화의 확대재생산에 적잖은 역할을 하였다.       
      
노동조합운동은 양극화책임에서 자유로울까?


이처럼 1987년 이후 20년 동안 사회구조 변동, 자본수취체제 변화, 민주정부들의 정책실패 등에 의해 노동자들 간 차별과 불평등은 꾸준히 심화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을 저지하고 노동 연대성을 보존·강화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의 마땅한 책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날로 확대되어온 노동양극화의 현실이 여실히 말해주듯, 노동조합운동은 외부 도전들에 맞서 계급적 연대성을 지켜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내부 주체적인 문제로 인해 노동양극화의 확대재생산을 실질적으로 ‘방조’함으로써 스스로 연대성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는 지적들도 심상치 않게 제기되어 왔다. 

1987년 직후 노동운동의 분출기에는 사업장 안의 경영독재와 사업장 밖의 국가탄압이 맞물려 있던 노동통제구조를 동시에 허물기 위해, 지역·업종 차원의 연대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노동조합 주도의 전투적 투쟁에 의해 특히 대공장들을 중심으로 조합원대중들이 경제적인 성과들을 향유하게 되면서, 점차 노동조합운동의 보수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한 대공장노조들은 대부분 소속 대기업들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점지대의 배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기업별 조직 및 교섭체계 하에 안주하면서, 그들은 전체 노동자의 연대적인 이해에 충실하기보다는 소속 조합원의 실리를 전투주의적인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도구적 존재로 변질되었다. 한때는 대공장 노조운동이 선도적인 임금교섭투쟁을 통해 전체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견인하기도 했으나, 중소기업들의 지불능력 제약으로 인해 ‘그들만의 독점지대 공유’로 변질되면서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를 현재화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기업 내부노동시장의 임금 및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치중하던 대기업노조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개혁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대기업노조들은 소속조합원들의 고용보호를 위한 투쟁에 주력함으로써 기업별 조직체계의 협애성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처럼 중소사업장 및 비정규노동자들의 대다수가 미조직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업별 조직체계에 안주하여 조합원의 실리주의에 복무했던 대공장노조들의 폐쇄적인 활동방식은, 노동양극화와 연대성 위기를 확대 재생산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해에 대공장노조들의 산별 조직전환이 대거 이루어졌다. 이로써 기존 기업별 활동체계를 허물고 연대성의 가치를 적극 구현해나갈 수 있는 조직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약소하나마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허구적 민주주의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노동운동의 재건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장독재 뚫는 새로운 ‘대장정’을 기대하며

지난 20년의 민주화 역사는 한편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을 통해 군부독재에 의해 지배되던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의 외압과, 관료-재벌-언론의 국내 권력복합체에 의해 지지되는 시장독재의 등장을 통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심각히 왜곡·퇴행하였다. 앞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했던 노동양극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이로 인해 우리사회의 연대성 위기는 날로 심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미FTA가 체결되고 비준을 앞두고 있다. 완전개방의 경제체제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들의 ‘개혁정책’은 민생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여기에다가 연말 대선을 통해 정치지형이 더욱 보수화되리라는 예상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치경제적 상황을 마주하면서, 노동양극화의 치유 전망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굴의 투쟁으로 군부독재의 압제를 뚫고 민주화를 쟁취한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또 목숨을 건 노조건설투쟁으로 만방에 인간선언의 종소리를 폭발적으로 퍼뜨렸던 노동자대투쟁의 치열함으로, 당면한 시장독재를 극복하고 노동민중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진정한 사회경제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노동운동의 대장정’을 다시금 선언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