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

노동사회

개발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

편집국 0 5,128 2013.05.29 08:22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20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크게 변했다. 군부세력의 정치적 독재에서는 벗어났지만 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졌다. 외환위기 이후 불황은 장기화되고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 분야에서 국가가 했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이제 복지국가로 전환했는가? 복지국가의 역할이 미약하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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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2월 3일 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가 구제금융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미셀 캉드쉬 IMF 총재와 악수하고 있다. ]

서구에서 자본주의 국가체제 변천의 개략   

자본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자본축적을 직접 지원하는 역할과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역할로 나눠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의 사회복지 지출은 자본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지만 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한편, 국가의 경제개입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 역사적 성격이 달라진다. 선진자본주의 경제의 자본축적과정을 보면 국가의 역할은 경제발전단계에 맞춰 변화해갔다. 이는 크게 △자유주의 국가단계,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단계, △신자유주의 국가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국가단계에서 국가는 봉건적 특권과 억압의 폐지를 통한 경제적 자유의 확립, 자국 산업보호 등을 통한 자본 육성, 단결금지법 등을 통한 노동 억압 등의 기능을 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성립된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단계에서는 재정금융정책에 의한 경기조절, 반독점, 실업자 보호, 노동기본권 보장, 사회보장 등이 국가가 수행한 역할이었다.

이후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계기로 신자유주의 국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소위 “슘페터적 근로국가”는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벗어나고 정부실패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후퇴시키는 동시에, “자본 경쟁력 강화”를 앞세워 노동자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축소시켰다. 그리고 자본에 짐이 되는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체제를 공격했다. 이렇듯 자본의 공세를 바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국가는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 노동보호 후퇴 등을 통해 친자본, 반노동자적 역할을 했다. 이제 간략하게 살펴본 이러한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자. 

1960~70년대 개발국가, 자본육성 노동억압

경제사학자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이 정립한 바와 같이, 후발국의 공업화과정에서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국가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 기술, 숙련노동력, 기업가 기능 등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국책은행을 설립하여 기업에 시설자금을 융자해주고, 대학과 직업학교를 설립해서 과학기술을 진흥하고 인력을 양성하는 식이다. 명치유신 후 일본의 식산흥업정책(상공업진흥책)이 전형적인 사례로서, 정부는 국영기업을 창설해서 정상 궤도에 오르면 민간에 불하하여 자본가를 육성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박정희 개발독재 당시의 한국 국가체제는 ‘개발국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당시의 국가는 앞에서 언급한 선진국 경험에서 자유주의 국가단계 역할을 수행했다. 구체적으로 정책금융, 수입제한, 수출촉진 등의 산업정책을 매개로 재벌을 육성했고, 카이스트를 설립하여 과학기술 연구인력을 양성했다. 또 공업전문대학과 공업고등학교를 통해서 기술노동자를 양성하고, 노동자를 억압하여 단결금지를 강요했다. 김삼수 교수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1960, 70년대 노동조합들의 대부분은 노동조합의 본질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실질적으로는 회사에 지배당하고 정부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노사협의회에 불과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까지 노동조합은 민주적 설립과 운영을 금지당했다. 

1960, 70년대에는 이러한 개발국가에 의한 국가주도 공업화전략을 바탕으로, 외부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중화학공업-경공업의 분업전개’라는 국제 분업구조의 변화와, 내부적으로는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라는 여건이 맞물리면서 고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개발독재가 개발국가의 필수적인 모습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즉, 한국은 박정희 개발독재 ‘덕분에’ 고도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부작용을 초래한 개발독재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한 것이었다.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개발국가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개발복지국가’가 사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권혁주 교수는 복지개발주의의 두 유형으로서 선별적 복지체제와 포괄적 복지체제가 있는데, 경제위기 이전의 한국과 대만은 선별적 범주의 발전형 복지국가였다고 주장한다. 선별적 개발복지국가의 핵심원칙은 생산주의, 선택적 사회투자, 권위주의이다. 반면 포괄적 개발복지국가는 생산주의, 보편적 사회투자, 민주적 지배체제에 기초하고 있다. 권 교수는 한국과 대만에서는 경제위기 이후 구조개혁의 필요성으로 포괄적 개발복지국가로 향하는 개혁이 개시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민주화와 더불어 경제개혁의 필요성이, 정책결정자들에게 포괄적 복지국가 옹호연합을 위한 제도적 공간을 제공했고, 결국 사회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발국가의 역할을 통해서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필연적으로 독점과 불황, 실업과 빈곤의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응해서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로 이행하는 것이 서구 선진국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험은 달랐다. 1980년대에 들어 세계화의 조건 속에서 선진국 초국적자본의 개방요구와 국내자본(재벌)의 규제완화요구가 거세짐에 따라, 한국 국가는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 전환했다. 1980년대에 이미 개방과 민간주도 국가로의 전환, 규제완화 등이 경제정책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 국가주도에서 민간주도로의 이러한 전환은 민간에서 지배권을 갖고 있는 ‘자본의 주도’를 의미했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케인스주의 복지국가의 확립이 생략됐다는 사실은, 최근 20년간의 한국경제와 민중들의 경험을 해석하고 발전방향을 도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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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의 전환은 소득을 양극화시키고 경기침체를 장기화시키고 있다. 조직노동은 이를 뚥고 가기 위해 자신의 몫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 군산빈민연대 ]

외환위기 충격과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복지체제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독점자본의 확립과 함께 노동기본권을 보장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로 정부는 후퇴했다. 규제를 벗어난 재벌들은 과잉투자를 일삼았고, 그 결과 과잉생산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누적되면서 줄지어 도산하게 되었다. 결국 1997년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덮쳤다. 이러한 외환위기는 당시의 구조적, 순환적, 정세적 위기가 중첩된 것이었다. 1998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7%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가 위축되었고, 이는 본질적으로 선진국의 1929년 대공황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환위기에 대응해 국가는 당연히 케인스주의 복지체제를 확충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IMF는 자본에 대한 규제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려 했다. 실제 당시 이뤄진 재벌개혁을 보면, 지배구조개혁은 사외이사제 등 명목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과다차입 등 행태규제가 약간 추진되었을 뿐이었다.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 등 재벌들의 시장독점지배에 대해서는 거의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정책을 보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신장되었던 노동기본권에 대해서 후퇴 압력이 가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이후 강화된, 노조의 파업행위에 대한 사용자측의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였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노조의 파업에 대해 제기된 손배·가압류 청구금액은 무려 2535억 6,100만원에 이른다. 2006년에도 손해배상으로 187억 2,500만원이 청구됐고, 이 중 노조 간부와 조합원 등 개인에게 청구된 액수가 186억 4,000만원에 달한다.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씨 분신 등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손배소송과 가압류가 잠깐 주춤하는 듯도 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급증하는 추세다.

한편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재벌 대기업 총수의 독점 지배력은 크게 높아졌다. 특히 ‘왕재벌’ 삼성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재벌 대기업에게 단기수익 극대화를 위한 경영을 강제했다. 이로써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사실 외국자본과 재벌은 기본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부실경영을 하는 재벌과 외국자본이 약간의 ‘긴장’을 보이기는 경우가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양극화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노령, 질병, 실업, 장애 등에 따른 소득기회의 제한 등 각종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특히 정규직 임금의 60% 수준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을 상회할 정도로 양산되었다.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지니계수는 1996년 0.283에서 1998년 0.310으로 껑충 뛰었고, 빈곤률은 5%에서 10% 이상으로 급상승했다. 그러나 정부는 케인스 복지국가를 확립하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우리 정부의 소득재분배기능은 매우 취약하다. 선진국에서는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 차이가 30~40% 가량 될 정도로 국가의 소득재분배기능이 큰 데 비해, 한국에서는 2005년 현재 그 차이가 6.6%에 불과하다. 물론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 하에서 국가의 사회지출이 증가하긴 했다. 하지만 1996년 8.2%에서 2000년 12.1%로 높아졌던 중앙예산 대비 사회개발지출의 비중은, 그 뒤로는 제자리걸음을 해 현재는 13%대에 머물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비정규직들은 이러한 빈약한 사회복지 혜택조차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런데 외환위기에 대응해 복지지출을 확대하고 기초생활보호제도를 도입한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에 대해서, “자유주의”, “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등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라 본다. 당시의 사회보험개혁은 민간보험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여’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시장원리를 따라가므로 신자유주의와 정합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회보험에 대한 국가의 재정부담이 크게 증가되지 않는 한 신자유주주의는 사회보험의 적용확대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노동의 탈상품화가 아니라 상품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시민생활에서 국가의 책임증대가 아니라 시장의 역할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신자유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의 전환과 재생산위기 

이렇게 국가는 전통적인 사회적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위험(new social risks)’이 대두되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등장하는 배경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상승과 남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하락, △노령화 즉 노령인구의 절대규모와 비중의 증가, △노동시장이 숙련기술자 중심 수요 증가로 변화, △외국노동자의 이주와 자본의 외국 투자확대 등으로 인한 국제경쟁 심화 등이다. 이러한 속에서 복지국가의 기능이 후퇴되어 종래에는 공공부문에서 제공되던 사회서비스를 사기업에서 공급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서비스 질 저하의 위험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위험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가정과 성적 역할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서, 직장과 가사책임, 특히 아동보육을 양립시키기 어려워졌다는 점, 그리고 취약한 노령가족에 대한 돌봄 필요성이 증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노동시장 변화와 관련해서는, 적절한 임금과 안정된 고용이 보장되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의 부족문제, 시대에 뒤떨어지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거나 평생교육을 통해 기술수준을 높이기 어렵게 되는 문제 등이 있다. 또한 복지체계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연금이 불안정하거나 부족해지고, 민간기관으로부터 불만족스러운 사회서비스를 제공받게 되는 문제 등이 있다. 이런 속에서 국민들의 요구수준은 높아지는 데 반해 세금수입 등 국가의 자원은 세계화에 따른 경쟁으로 인해 삭감을 강요당하고 있다. 국민의 요구와 자원을 조화시키는 국가의 능력이 취약해진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국가체제가 신자유주의 근로국가로 전환한 결과, 한국경제는 전통적 사회적 위험에다가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가중되어 ‘재생산위기’에 직면해 있다. 구체적인 수치가 이를 드러낸다. 우선 2000년 3/4분기에 시작된 경기침체가, 2006년 2월 개편되기 전의 ‘동향지수 순환변동치’를 기준으로 하면 약 7년, 개편 후의 기준으로 하더라도 정점 2002년 12월 이후 4년 이상으로 장기화되고 있을 정도로 거시경제적 재생산 위기가 심화된 상태다. 

이렇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소득분배 악화에 따른 소비침체이다. 고소득층은 저소득층에 비해 소비성향이 낮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악화되면 자연스레 전체 국민경제 수준의 소비성향이 낮아지는 것이다. 또한 사회보장이 확립되지 않은 탓에 우리 국민들은 노령과 질병에 대비해 소득의 12.2%에 달할 정도로 과다한 생명보험료를 감당하고 있다. 이 역시 소비여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출산율이 1995년 1.65에서, 2005년 현재 1.08로 세계 최저 수준으로 급락하여 노동력 재생산이 위기에 빠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가의 사회복지지출이 턱없이 적은 상황에서, 소득이 낮은 비정규직 맞벌이 부부들을 중심으로 자녀 보육비 및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가 빈약한 가운데 심화되는 양극화를 맞이하여, 학부모들은 무리하더라도 자녀들을 소위 ‘상위권 대학’에 입학시키는 데 매달리고 있다. 2007년 4월 발간된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보고서 『사교육: 노후불안의 주된 원인』에 의하면, 대학 입학에 대비한 사교육비 지출은 연간 3조 5천억원(GDP의 4%)으로 가구소득의 무려 19.2%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대학진학률은 1995년의 51.4%에서 2005년 82.1%로  크게 높아졌고,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30명 수준으로 선진국의 두 배에 달하게 됐다. 대학교육의 질은 오히려 저하된 것이다.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케인스 복지국가 

이렇게 전통적 사회적 위험에다 새로운 사회적 위험까지 누적되는 재생산위기의 상황에 대응하여, 신자유주의적 입장은 “국가가 감세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그 성과가 하위계층에까지 확산되는 ‘트리클 다운(trickle-down)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통령 예비후보의 감세정책이 대표적이다. 다수의 주류 경제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편다. 그러나 현재의 투자위축은 전반적 경기침체에 따른 현상으로서, 감세를 하여 기업이윤이 증가한다고 해도 투자가 자동적으로 늘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또 성장률이 높아지더라도 ‘일자리 없는 성장’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일자리가 늘어나더라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 증가’로 귀결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한편, 제도주의적 국가론의 입장에 서 있는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대안으로 “계급 타협에 기초한 민주적 발전-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한다(“재벌을 때려잡으면 서민에게 이익인가”, 『한겨레 21』 659호). 그는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의 핵심요소는 국가의 강력한 산업보호정책에 의한 ‘국가-은행-재벌’ 간의 밀접한 관계이고,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은 개발국가의 지속이 아니라 개발국가의 때 이른 해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가 제한적 또는 선별적인 무역·산업정책을 다시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의 입장에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계급적 관점과 역사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국가의 역할을 두고 산업정책의 복원과 유지만을 강조할 뿐 복지국가의 중요성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은 근본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다수 국민의 입장에서 요구되는 국가의 역할은, 전통적 사회적 위험에 대응해 소득기회가 낮은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케인스 복지국가를 확립하는 것이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자본에 대한 반독점규제와 투기규제가 강화되어야 한다. 재벌총수 일족의 소유경영 독점에서 비롯되는 독재적 지배구조의 개선은 당연히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재벌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 하도급 불공정행위를 규제하여, 중소기업 비정규직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외국자본의 투기적 행동에 대해서도 토빈세와 외환예치제도 도입 등을 통해 규제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둘째, 노동자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 축소가 핵심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 10%의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에도 불구하고 단체교섭 결과를 90% 이상의 노동자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프랑스 방식의 노동시장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또한 정부가 시장임금의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부터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불가피한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과 임금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펴야한다. 불법파업을 핑계로 이루어지는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임금가압류 행태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정부는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에 대한 고용주들의 온갖 부당노동행위를 강력한 감시와 처벌로 막아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대기업 및 공공부문 조직노동자들, ‘세금’ 더 낼 준비해야 

셋째, 국가는 사회복지지출을 더욱 확충해야 한다. 현재 국민들은 사회복지확충을 갈망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 조세와 사회보장기여금 부담을 더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7년 1월 국정홍보처가 성인남녀 2,5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한국인의 의식·가치관”에 의하면, 응답자의 78%는 우리나라 경제수준과 비교해 사회복지 수준이 떨어진다고 답했다. 또한 “세금이 조금 늘더라도 복지수준을 높이는 게 좋다”고 답한 사람이 50%를 넘는 등 복지에 대한 국민의 수요가 무척 높았다. 

이러한 수요에 맞춰 공공복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재정규모를 현재의 GDP 25% 수준에서 일단 OECD 평균인 36%까지 점차적으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 필요한 재정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이다. 복지재정은 조세나 사회보장기여금으로 구성된다. 우선 조세 가운데 근로소득이 아닌 재산소득으로부터 징수하는 법인소득세, 재산소득세 비중을 증가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GDP 대비 법인소득세 징수액과 재산세 징수액은 국제적 기준에 비춰볼 때 별로 높지 않아서 이 부분을 늘리는 것으로는 재정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즉, 소득재분배기능을 높이는 공공사회지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도 추가적인 조세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부유세만으로는 복지재정 수요를 충당할 수 없으므로 빈곤층을 위한 별도의 사회복지세의 도입도 필요할 것이다. 

전략적으로 현재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조직노동자들이, “사회보장기여금을 더 많이 납부하겠다”며 적극적으로 운동을 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 복지국가의 경험을 보면, 실제로 주로 노동자계급의 부담과 연대에 의해 복지비용 부담이 해소되었다. 미국 경제학자 사이크(Anwar Shaikh)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선진 복지국가에서 복지비용은 그 수혜자인 주된 노동자들이 세금이나 사회보장분담금 형태로 대부분 부담을 했다. 즉 그 부담과 수혜의 차이인 순사회임금(Net Social Wage)은 총임금액의 겨우 3~5%(GDP의 1~2%)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산층을 위한 사회복지재정은 세금보다는 노동자 및 고용주 부담의 사회보장기여금으로 조달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사적 보험의 상당 부분을 공적 사회보장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또 소득재분배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