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눈에 비친 ‘아파트 공화국’의 모습

노동사회

이방인의 눈에 비친 ‘아파트 공화국’의 모습

편집국 0 4,174 2013.05.29 08:19
 

book_01.jpg한국을 처음 찾은 외국인이 밤중에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 때 가장 놀라는 것이 끝없이 나타나는 교회의 ‘붉은 십자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다음날 아침 일어나 대낮의 서울을 둘러보게 된다면 너무나 많은 대형 아파트단지에 더 크게 놀랄 것이다. 1993년에 프랑스에서 서울을 처음 방문한 이 책의 저자는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며, 단번에 이 현상을 자신의 박사 논문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게 된다.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아파트의 나라’ 한국을 해부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들이 지난 30여년 동안 잊고 있었던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어떻게 모두가 아파트를 꿈꾸고 더 좋은 새 아파트를 열망하는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저자는 서울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도시 정책과 주택 정책, 아파트 개발의 역사, 한국 아파트의 유형학, 아파트단지 양산의 메커니즘, 아파트와 도시 중산층, 한국인들에게 아파트가 갖는 ‘현대성’의 의미, 아파트단지 내의 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한국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

먼저 아파트 개발의 역사를 보면, △1970년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등장으로, △1980년대는 규제완화와 부동산투기가 결합된 아파트 열풍의 시기로, △1990년대 이후는 신도시 개발과 합동 재개발 사업이 그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개발의 역사는 단적으로 신도시와 뉴타운의 홍수에서 나타나듯이 “새 것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아파트단지는 어떻게 양산될 수 있었는가? 저자에 의하면 1957년 매매를 기본 원칙으로 한 주택정책이 공식화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 원칙은 주택을 가격이 매겨지는 상품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이었고, 주택 소유는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자산 취득의 문제가 되도록 하였다. 그 이후 한국에서 아파트단지 양산의 메커니즘은 부유층이 더 값비싼 최신 주택으로 옮겨 가면서 남기고 간 주택을 하위 계층이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해 옮겨 가는 이른바 “주택 여과과정의 원칙”에 바탕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의 아파트는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주도 성장모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노동자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한국의 아파트와 도시 중산층의 문제를 다룬 5장일 것이다. 저자는 단적으로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잡았다”고 지적하고, 아파트 소유가 곧 “도시 중산층의 계층적 표식”이 되었으며, 결론적으로 아파트는 “한국의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파트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은 이들이 전체적으로 도시 중산층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로 해석한다. 

노동자의 내집 마련 열망과 계급적 연대

이를 통해, 비록 저자가 노동자의 주택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국의 노동자에게 아파트는 무엇인가? 1991년 울산의 한 노동조합에서 주최한 “조합원 내집마련 수기” 입선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머님의 상여가 장지로 떠나던 날,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대답조차 없으신 어머님의 상여를 모셔놓고 술 한 잔 올리면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고해드렸다.” 이렇게 ‘우리 집’을 마련한 후, 그 한 맺힌 내집마련의 열망은 어떻게 표상되었을까? 임금인상과 사내복지의 확대를 통해 그 열망이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면, 노동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대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도 결국 ‘도시 중산층의 가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된 것일까? 아니라면 노동자들이 밀집한 아파트단지는 다른 아파트단지와 다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하여 저자가 말하는 한국의 “주택 여과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택 여과과정은 상류계층이 더 값비싸고 좋은 아파트로 옮겨가면서 남겨진 곳에 하류계층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해 옮겨가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이는 비단 도시 중산층 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이 더 나은 주거여건과 교육여건을 찾아 새로 개발된 대단지 아파트로 옮겨가면 원래의 낙후한 주거지역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주해 들어오는 일은 이제 우리에게 그리 낯선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시장의 분절이 주거의 분리와 계층화로 곧바로 이어지고 있다면 노동계급의 “통 큰 연대와 단결”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더 크고 더 안락한 아파트’에 대한 열망만큼은 아파트 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들이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인의 ‘상식’으로 굳어진 이 사태에 문제를 느끼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발레리 줄레조 지음 |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냄 | 1만5천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