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란

노동사회

파이란

admin 0 4,421 2013.05.07 09:50

"현실은 추하다. 거기에 살고있는 인간도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 그 아름다움 그대로를 그려내고 싶다" - 아사다 지로(淺田次口)
 

첫번째 이야기…이 강재 

movie_01_0.jpg<파이란>의 주인공인 이강재를 관객에게 들이대는 방식은 상당히 무례하다. 행여 길에서 마주쳤다 하더라도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인물, 실수로 돌아보았다 하더라도 그 비루함에 눈을 돌려버릴 오리지날 3류를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대기 때문이다. 

이강재는 <파이란>보다 불과 한 주 전에 개봉해서 각종 흥행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친구>에 나온 폼 나는 깡패들과는 만리장성마냥 높은 벽을 쌓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폼 나잖아’와는 하나도 맞지 않는 쪼잔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밑바닥 깡패다. 깡패라는 단어가 던지는 비장한 울림과는 티끌만큼의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은 구제불능의 밑바닥 인생, 바로 그가 주인공 이강재다. 

주류 사회에서 어긋나는 방식도 여러 가지일 터, <파이란>을 만든 송해성 감독은 관객이 가진 반사회적 정서의 일단에 기대어 주인공을 반(反)영웅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이강재가 가진 온갖 단점들을 가지런히, 차곡차곡 늘어놓은 후, ‘너 그래도 얘 좋아할래? 좋아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던진다. <파이란>을 보면서 놀라운 점은 이런 어려운 작업을 철저히 리얼하게 초라한 일상을 따라가면서도 이뤄 냈다는 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감방이라도 갔다 온 듯한 이강재는, 알고 보면 빨간색 비디오를 미성년자에게 대여한 치사한 혐의로 구류를 살고 나왔고, 씽크대에서 용변을 보며, 빚 받아내는 것조차 정 때문에 제대로 못 해 내지만, 오락실 주인을 상대로 허세나 부려대는 무능으로 똘똘 뭉친 똘마니에 불과하다. 

그의 캐릭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진 듯한 타고난 패자의 모습이다. <파이란>이 30만 정도의 관객밖에 들지 않았음에도, 매니아 군단이 생기고 있는 컬트 무비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 이유도, 이강재의 타고난 실패자의 모습이, 살아오며 무수한 패배의 기억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남루한 기억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사운드 트랙도 들려 오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진부하리만치 다큐멘터리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멋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다. 송해성 감독은 이강재 같은 패배자의 인생에 스포트라이트를 들이대는 일은 실제 삶에서 일어날리 없는 동화란 걸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또한 평생 남의 들러리나 하면서 주변인으로 살아야 될 운명을 가진 떨거지 인생들의 삶이 얼마나 재미없고, 짜증나는 지도…. 

사랑하기 힘든 캐릭터로부터 인생사의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 내고, 누구나 못난 점을 하나씩은 갖게 마련인 관객들로부터 공감의 눈물을 자아내도록 만드는 게 <파이란>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수정>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보기에 고통스러운 이유가 등장 인물들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야비함 때문이듯, <파이란>의 사실주의는 그 남루함 때문에 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만큼은 기적이 일어나고, 인생이 역전되는 걸 사람들은 원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파이란>도 이강재를 위한 작은 기적을 준비해 놓고 있기는 하다. 강재에게서 사랑을 발견하는 중국 불법 취업자, <파이란>이 바로 그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두 번째 이야기…파이란 

또 다른 주인공인 파이란은 중반까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죽어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시적부터 꿈이던 고깃배 한 척을 여수 고향집에 사 주고 싶다는 소망을 채우는 대가로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쓸 운명을 앞 둔 강재에게 파이란의 부고가 날아든다. '부인이 죽었다'. 

부인이라는, 강재에겐 사치스럽고 생경한 단어를 통해 그제사 파이란이 강재가 200만원을 받고 위장 결혼을 한 중국인 노동자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강재가 깡패이기 이전에 영원한 패자이듯, 파이란도 중국에서 온 불법 취업자이기 이전에 한 점의 혈육도 친구도 어떤 권력도 가지지 않은 가장 낮은 존재이자, 소외된 ‘섬’같은 존재다. 아무도 그녀를 위해 웃거나 울어주지 않으며, 단 한 명도 그녀의 존재로 인해 행복해 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고립된 섬인 것이다. 

단돈 200만원을 받고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그녀의 호적상 남편으로 등재된 이강재를 파이란이 사랑하고 믿게 되고, 위장 결혼 여부를 추적하는 관공서 때문에 책상 위에 올려놓게 된 강재의 증명 사진을 보며 세상을 만날 창구를 발견하게 되는 건, 파이란 역시 철저하게 혼자이기 때문이다. 강재가 무심코 던져 주고 간 촌스러운 싸구려 빨간 마후라의 온기조차 파이란에게 애정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오히려 세상 모두가 그녀를 핍박하고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리라. 

강재가 파이란을 처음 접하게 되는 건 서툰 한글로 또박또박 쓴 파이란의 편지를 통해서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역설적으로 ‘이 곳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저와 결혼해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편지 속의 친절한 ‘이 곳 사람들’에는 파이란을 노동력으로 밖에 보지 않고, 그녀를 착취하려고 했던 취업소개소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인 노동자를 어떻게 다루는 지 잘 알고 있음으로 인해, 파이란의 이 편지 글귀는 당혹스럽다. 하물며, 누구에게나 천대와 멸시밖에 받은 적이 없는 이강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강재가 그녀에게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였던 것이다. 

강재는 뒤늦게 죽어서 찾아온 그녀의 이 한 마디로 인해, 자신의 비참한 일생을 울음으로 날려보내고, ‘당신의 아내로 죽고 싶습니다’라는 유언을 지켜주기 위해 생애 최초의 모험과 역모를 감행한다. 그도 남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그 순간, 두목 대신 가려던 감방행을 거절하고 고향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녀의 유골함을 안은 채, 그가 겨우 찾아 낸 구원의 실마리는 무참하게 교살된다. 그들 둘이 서로에게 구원일 수 있었던 그 순간에, 강재가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죽어 가는 강재가, 수줍게 노래하는 비디오 속 파이란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키는 대목에서 이 둘의 상호 구원은 미완으로 끝난다.

세 번째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영화는 못난이들의 연대에 관한 영화다. 가장 낮은 자가 낮은 자를 구원한다는 ‘신약 성서’ 같은 순진함을 기저에 깔고 있는, 어찌 보면 상업적인 성공 가능성을 계산에 전혀 넣지 않고 있는 듯한 순진한 영화다. 톨스토이의 진부한 화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이 영화가 보여 준 해답은, 사람이란 결국 자기를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뻔한 결론이다. 누구나 주목받을 만한 구석이 있고, 사랑받을 자격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조용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모든 마이너리티, 우리 속의 많은 주변인들에게 바치는 연가나 연애 편지다. 

이 영화가 그 남루한 삶의 풍경을 딛고 사랑스러운 영화로 남을 수 있었던 건, 파이란을 맡은 장백지의 청아한 미모나 담담한 연기, 이강재를 연기한 최민식의 깊이 모를 내공 이전에 이 영화가 보여 주는 불발로 끝난 구원의 가능성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떤 사람이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를 따지지 않고, 너도 세상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니가 필요하다고 속삭이고 있다. 아무리 볼품 없는 떨거지들이라도…. 

술 생각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던 송해성 감독(원작은 아사다 지로淺田次口의 『러브 레터』로 대본도 그가 썼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의 작가이기도 하다)은 무지하게 성공한 것 같다. 관객들의 태반이 영화가 끝나고 술집을 찾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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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성 감독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90) 게임의 법칙 (94) 조감독, 본 투킬(96) 각본, 조감독 
카라(99) 감독, 파이란 (2000) 각본, 감독 
* 파이란 사이트 
http://www.fail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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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