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리더십 균열, 그리고 사회적 협의

노동사회

노동운동 리더십 균열, 그리고 사회적 협의

편집국 0 2,776 2013.05.24 12:01

양대 노총의 ‘리더십’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2005년에도 연이어 터진 노조 지도부 비리, 특히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비리와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및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에 따른 도덕성 문제, 정규-비정규직 간의 갈등과 노동계의 대표성 위기, 그리고 소위 계파 간 갈등의 표면화에 따라 노동운동의 위기와 더불어 리더십 위기가 이미 거론된 바 있다. 

그런데 노동운동의 리더십 문제가 더욱 증폭되는 것으로 비춰지는 사건들이 최근 다시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발단은 2006년 9월2일 10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한국노총과 경영계(경총·대한상의)가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 급여 금지 5년간 유예에 합의하고 뒤이은 9월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한 한국노총, 경총, 정부의 무조건 3년 유예 선언이 이루어진 즈음부터였다. 민주노총은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를 ‘밀실 야합’으로 규정하고 한국노총과의 연대를 파기하기로 하는 한편,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정규직법 저지 등을 목표로 11월15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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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9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 매일노동뉴스 ]

노동운동 리더십이 전략적이지 않다는, 새삼스런 확인

하지만 한국노총과의 연대파기를 선언하기 전까지 민주노총 지도부는 무엇을 하였는지, 한국노총·경총·정부 간의 노사관계로드맵 합의를 전혀 예견하지 못하였는지, 총파업은 가능한 것이며 또한 적절한 대응인지, 이번 유예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삼성 등 무노조 기업의 발 빠른 행보와 달리 양대 노총의 모습은 뒤늦은 진흙탕 드잡이로 비추어지는데 이것은 단지 언론 탓인지 등등 숱한 질문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 과정을 통해 양대 노총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합적이지도 또 전략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드러났으며 심지어 ‘리더십 부재’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노사관계 로드맵 협의 과정에서 한국노총의 행보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존립위기’라는 벼랑 끝에 몰린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복수노조 유예에 합의함으로써 사실상 조직된 기존 정규직노조의 이해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복수노조는 결사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창구단일화나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와는 별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설령 타협이나 유예를 고려한다면 창구단일화나 전임자 임금지급과 관련해서이지 복수노조 허용여부 자체는 아니다. 특히 비정규직 및 취약계층, 불합리한 노무관리에 의해 노조결성이 사실상 가로막혀 있는 집단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노총의 결정은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개인 및 집단과의 합리적 거래를 통해 집단구성원의 이익 증진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백번 천번 양보하여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린 결정”이었다고 해도, 그 소가 만약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이라면 노동운동의 목표나 가치의 측면에서 이는 결국 “소를 위해 대를 버린 결정”이 된다. 

반면 민주노총은 구성원의 단기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혁신을 부르짖어 왔지만, 노사관계 로드맵과 관련하여 사실상 ‘무대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리더십 취약이 두드러졌다. 최근 민주노총 대의원들에게 보고된 ‘민주노총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전술 약평’에서 “한국노총이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 배타적으로 사활을 거는 것에 비교해 볼 때 민주노총은 8대 요구안의 쟁취 이외에는 전술적 집중점이 없었다”는 평가가 이루어진 것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더군다나 민주노총 지도부가 다시 총파업을 들고 나온 것이 오히려 공식적 리더십의 붕괴의 징후가 아닌가를 의심하게 한다. 최근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복수노조연구팀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단위노조의 경우 복수노조 시행에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총파업 이전에 민주노총 내부에서 공론화 및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군다나 총파업으로 선언한 기간이 금속연맹, 공공연맹 등의 선거기간과 맞물린다. 또다시 “말로만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총파업 남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적 협의 무력화 누가 좋아할 일일까?

한편 양대 노총은 이번 과정을 통해 노사정 지도부 간의 사회적 협의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한 나라의 노사관계 구조는 단체교섭과 사회적 협의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단체교섭이 결렬되어 파업으로 가고 다시 단체교섭을 하는 것과 유사하게, 사회적 협의 역시 참여 및 불참, 결렬 및 타결이 반복된다. 단체교섭을 한다고 해서 단체교섭주의자가 아니듯이 사회적 협의를 한다는 것이 사회적 합의주의자의 증거는 아니다. 또한 단체교섭과 사회적 협의는 보완적 관계다. 특히 단체교섭으로 다룰 수 없는 새로운 현상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나 산별교섭 전환 등의 문제를 공유하고 논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 사회적 협의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노동계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산별교섭 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더욱 산별 협의 및 전국적 협의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한국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일부 이익대표기제로 활용했고 민주노총은 참여해서도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정지시켰다. 물론 노사정대표자회의 정지가 사회적 협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틀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약화되는 경험은 사회적 협의 자체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런 점에서 양대 노총은 대표자로서 실질적인 자격과 권한을 행사하였는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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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이후 양노총은 공조파기를 선언하고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 매일노동뉴스 ]

‘혁신적 리더십’ 말만 말고 행동 먼저 돌아보길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리더십은 사회변화 속에서 소외되는 새로운 계층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기존의 제도권 리더십과 대비되는 것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와 같은 비제도적 리더십은 사회 변화 및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외부자 포섭을 이루어내면서 사회에 활력을 부여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영향을 준다. 특히 민주노총의 경우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합리적 거래를 통해 구성원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거래적 리더십’에 머무르지 않고 물질적 보상을 넘어선 보다 높은 수준의 조직적·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적 리더십’을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주장하여 왔다는 점에서 한국노총보다 훨씬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리더십은 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특성이 아니다. 크게는 하나의 사회운동 집단이 시민사회 및 국가 전체와 맺는 관계이며, 작게는 사회운동 집단 내에서 집단 구성원들과 지도부가 집단의 목표와 가치, 구성 및 운영방식을 둘러싸고 맺는 관계이다. 따라서 리더십의 취약 혹은 부재, 분파적 리더십이란 그와 같은 관계의 파행을 의미하며, 신뢰의 추락을 뜻한다. 심지어 더 이상 특정 집단내부가, 또 그 집단과 사회 및 국가가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 자체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평가다. 노동계가 경영계 및 국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또 그 관계를 통해 시민들과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하나의 관계다. 문제는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며 이를 위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은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가 단지 떼쓰기 혹은 저항만 하는 집단,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아니라면 또 소위 리더십을 거론하는 집단이라면, 파업을 하든 노사정에 참여하든, 또는 그곳에 참여하지 않든지 간에, 정부 및 경영계 그리고 시민사회와 관계 맺기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2005년부터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계가 보이는 모습은 스스로가 그와 같은 전략적 시야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싸우면 될 뿐 스스로가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어떤 관계 맺기를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언론을, 정부를 또 시민운동을 탓하는 것에는 매우 익숙하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것이야 말로 최악의 관계 맺기이며 최악의 리더십인데도 말이다.  

내부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관계 맺기’ 복원 

최근 사내하청 비정규지회(분회) 다섯 곳과 순차적으로 면담을 하고 300개가 채 안 되는 비정규 노조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설문조사에서 주요하게 질문했던 것은 일상 활동이나 임·단협 혹은 파업 때 상급노조나 연맹이 어떤 지원을 하였고 그 지원은 충분하였는지였다. 아직 수거된 자료를 다 정리하지는 못하였지만 면담결과 상급노조나 연맹의 지원은 매우 불충분하였으며, 오히려 다른 비정규노조들의 지원을 받은 것에 대한 만족도가 더 크다는 답변이 나왔다. 

상급노조나 연맹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변이 100% 솔직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급연맹이나 지도부는 사실상 이들에게 전망은커녕 공정한 자원배분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공공부분 비정규노조 간부는 최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갈등으로 인해 공공부문 비정규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응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정말 우려스럽다는 답변을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자원이 양대 노총의 갈등으로 더 적어진다는 고민이다. 결국 노동계 내부의 관계 맺기 및 리더십은 적어도 비정규문제에 관한한 매우 취약하였다. 그렇다면 정규직 내부에서는 충분한가?      

지난 9월19일 있었던 민주노총 38차 임시대의원대회가 중간에 정족수 부족으로 미뤄졌다. 이에 따라 임원직선제 등 조직혁신안을 위한 규약개정안이 처리되지 못 했다. 지금 시기에 직선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또 직선제가 조직혁신의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인가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몫이 아니다. 다만 세 번이나 대의원대회가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민주노총의 공식 리더십이 무너졌다는 것은 거론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리더십은 “가장 빈번하게 관찰되는 현상이지만 그에 대한 이해는 가장 부족한 현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영계의 리더십, 정치영역에서의 리더십이 거론되고 논의되고 연구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노동계의 리더십은 소수의 인터뷰에 한정되는 관심 밖의 대상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며 그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노동계의 정치사회적 무능력’이라고 규정해도 과도하지는 않다고 본다. 기업수준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임금인상 및 기업복리후생을 쟁취하는 것은 현재 노동계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기적 이해를 넘어서 중장기적 이해, 정치사회적 영향력과 관련된 문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청사진으로 넘어가면 노동계는 무능력으로 일관한다. 더 심하게는 그와 같은 장기적 관점을 갖는 것을 부차적이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문제로 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기업수준의 투쟁에서 보이던 ‘고귀함’이 기업을 넘어선 수준 혹은 해당 조직이나 계파를 넘어선 수준에서는 갑자기 ‘야만’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인 기준의 널뛰기가 슬그머니 이루어지고 공공연하게 용인되는 것이다. 

내부정치 덫에 갇힌 통합전략 구축, 미루면 미래 없다

리더십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지 이를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특히 사람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는 노동계에서 후순위 문제이거나 아니면 아예 거론되지 않는 문제다. 유일하게 거론된다면 노동계 내부 몫을 둘러싼 다툼을 벌일 때 혹은 특정 선거 때, 말을 바꾸면 ‘내부정치에 주력할 때’일 것이다. 심지어 “특정 계파의 찌라시 작업은 열심히 하나 민주노총 혹은 노동계 전체의 전망에 대한 비전작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나온다. 더욱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와 같은 행동이 바로 ‘헌신’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노동계가 시민사회 전체는커녕 노동계 내부에 전망을 제시하는 통합적이고 혁신적 리더십을 키울 수 있을 가능성이 당분간 없어 보인다. 이미 2005년에 예측되었던 대로 노동계의 공식적 리더십의 부재와 비공식적이며 분파적인 리더십의 온존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통합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 구축을 미뤄서는 안 된다. 특정 집단, 계파, 양대 노총을 넘어서는, 세계적이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전국적이기는 한 시야를 다시 한 번 노동계가 회복해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