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선진화’ 혹은 ‘타협’되었는가?

노동사회

무엇이 ‘선진화’ 혹은 ‘타협’되었는가?

편집국 0 2,460 2013.05.23 11:58

지난 9월 초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당사자들은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이른바 ‘대타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를 받아 노동부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그리고 근로자참여및협력증진에관한법률 등에 대해 일부 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사회에서 ‘노사관계 선진화’를 둘러싼 논의는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전개를 두고 노사정 각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언론 및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노동법 개정 논의의 주된 자리는 일단 국회로 옮겨갔다. 법률개정을 위해서 정부 및 여야가 다양하게 공방을 치르겠지만, 의제를 새롭게 설정하는 등의 새로운 판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금 입법예고된 틀 안에서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참여’정부가 들어선 직후부터 시작된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지루한’ 논의는 일단락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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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안을 발표하고 있는 경제단체장들과 이상수 노동부장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 매일노동뉴스 ]

그 지루했던 논의는 일단락 됐지만

노사관계로드맵 논의가 이렇게 질질 끌리게 된 이유는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의 원칙과 기준에 대해서 노사정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른바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의 ‘유연안정성’을 제도화하는 것을 노사관계 선진화의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동계는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의 유연성이 노동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크게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반대했다. 특히 민주노총의 경우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별도의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한편 사용자측은 노사관계로드맵 논의과정에서 기업경영의 사용자 주도성 및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이 논의석상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가 자신들의 ‘긴급한’ 이해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주요의제를 맞바꾸기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원래 정부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인정 등에 대해서 ‘대타협’과 원칙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의 합의를 거부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부는 결과적으로 ‘합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에 서명했다.

이제 좀 더 성찰적으로 돌아보자. 노사관계로드맵 논의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음 질문들에 구체적으로 답을 구해본다면 노사관계로드맵 논의 및 타협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노사관계 선진화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노사정 각 당사자들은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였는가? 각 당사자들의 조직적 이해관계에 비추어볼 때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는 합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가? 특히 정부는 노사정 관계에서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여야 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에 앞서, 먼저 이후 진행될 노사관계 평가의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자주적 결사 원칙을 인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노동자계급대중의 연대성을 뒷받침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간다.

노사정 이해관계 속 가능성 이미 내재했던 ‘대타협’

노사관계로드맵 논의에서 가장 첨예한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인정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서로 다른 영역의 문제임에도 이 두 문제의 관계는 민주노총이 배제된 상태에서 나머지 노사정 당사자들이 ‘대타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관련하여 양 노총은 모두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 문제는 법률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노사 자율에 맡겨져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조직적 이해관계의 강도는 양 노총이 각기 달랐다. 주로 중소기업 부문의 기업별 노동조합에 조직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노총은 이 문제를 ‘조직의 사활’이 걸린 것으로 인식했다. 반면 대기업 부문의 노동조합이 다수이고 특히 산별노동조합으로 조직형태 전환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민주노총으로서는 이 문제를 두고 단지 노사자율의 ‘원칙’으로서 인식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 한국노총에 비해 이 문제의 조직적 파장을 체감하는 정도가 약했다는 것이다. 

사용자단체는 물론 전임자 급여지급을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사용자들에게 이 문제는 한편으로는 비용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 약화의 측면에서 매우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전임자 임금지급을 기업단위 노사관계 ‘안정’의 편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용자들이 양보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 역시 전임자 임금지급을 노사자율의 문제보다는 ‘원칙적 금지’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특히 노사가 합의하는 경우에는 정부가 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제 복수노조 인정을 둘러싼 각 당사자들의 입장을 보자. 노동계는 원칙적으로 자율적 결사의 원리에 근거해서 복수노조 인정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양 노총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조직적 이해관계의 강도가 크게 달랐다. 민주노총의 경우 비정규노동자 조직화, 산별노조의 건설, 조직확대 및 ‘어용노조의 민주화’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복수노조 인정을 자율적 결사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임과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 발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조직의 정체성 및 발전방향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해했다. 반면 한국노총은 이 사안을 두고 상대적으로 수세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양 노총 사이에 조직경쟁이 전개될 경우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던 점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노총은 ‘원칙적인 찬성’ 주장을 내세웠지만 사실 득보다는 실이 더 큰 문제였다. 

사용자단체의 경우, ‘대타협’에 대한 현대자동차 등의 반발에서 알 수 있듯,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입장을 한목소리로 정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성과 포스코 등 무노조전략을 사용하거나 협조적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대기업들이 심각한 우려를 감안한다면, 복수노조 금지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정부는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였으나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와 마찬가지로 노사가 합의하는 경우에 그 ‘원칙’을 강하게 고수할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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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안을 밀실 야합으로 규정하고 규탄하고 있는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 매일노동뉴스 ]

전임자 임금보다 복수노조에 더 적극적이었다면…

이렇듯 노사정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종합해 볼 때,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유예되거나 완화되고, 복수노조 금지는 유예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타협’의 가능성은 뿌리에서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봐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은 앞서 언급한 노동자계급대중의 자주적 결사와 연대라는 기준에서 볼 때 완전히 엉터리다. 자주적 결사의 원칙이라는 관점에서 복수노조는 기업 단위 또는 초기업 단위를 불문하고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노사관계의 ‘선진화’를 바란다면 필히 관철되어야 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는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비추어볼 때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약한 것이었다. 즉 전임자 임금지급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상황은 기업별 노동조합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할 경우에 한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알다시피 노동자 연대를 촉진하기보다는 가로막아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일각에서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우려하기도 하지만 그 비용은 연대라는 편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기업별노조라는 조직형태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문제들은 초기업적 조직형태를 갖춤으로써, 즉 산별노조를 건설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즉 원칙적으로 전임자 임금지급을 핵심사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업별 노동조합의 물적 토대를 고수하겠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다. 기업별노조의 조직논리에 안주하여 ‘대타협’을 추구한 한국노총의 선택은 자주적 결사와 연대라는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장컨대, 기업별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의 문제는 산별노조의 기본활동 보장과 관련된 문제로 치환되어 제기됐어야 했다. 전임자 임금지급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공공재로서 집단적 교섭권을 확보하기 위해 조합간부 또는 활동가의 일상적인 현장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민주노총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민주노총이 제시했던 노사자율이라는 논리는 원칙적으로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매우 방어적·소극적인 것이었으며 현실적으로 무기력했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관계로드맵 논의에서 기업별 노사관계 중심적 관점을 비판했으며 산업별 노사관계의 제도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그 기조 위에서 중층적 노사관계의 정착 및 활성화를 가져올 장치 마련을 요구했다. 이를 관철시키고자 했다면 민주노총은 노동계의 주도권을 적극적으로 선취할 필요가 있었다. 즉 만약 민주노총이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포기’하고 더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복수노조 금지의 해소를 위해 정부를 견인하고 사용자를 분열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단순히 협상전술의 문제가 아니다. 자주적 결사의 원리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 전체의 편익 면에서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결국 ‘대타협’은 이뤄졌다. 게다가 ‘대타협’은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문제 뿐만 아니라 거기에 가려져 있는, 노동기본권을 해칠 가능성이 큰 사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필수공익사업 해당업종을 확대하고 대체근로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것, △부당해고에 대한 형사상 처벌을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하도록 한 것,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한 것 등은 노동조합의 조직 및 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선진적 노사관계 법·제도의 일면으로 간주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노동부가 서명한 ‘대타협’, 정부 원칙을 충족시키는가? 

이번 논의 결과는 구시대적 조직논리에 의한 막무가내 맞교환으로는 노사관계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법·제도의 구축을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노사관계 선진화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합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 위에서 노사관계에 현실 진단이 가능하고 그에 근거한 법·제도 개선의 방향이 제대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를 주도한 정부는 이를 위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였는가? 긍정적으로 평가내리기 어렵다. 물론 민주화된 한국사회에서 정부가 노사관계를 일방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정부가 노사관계의 민주화를 위한 자기 역할을 방기한 걸 정당화하지 않는다. 노사관계 당사자들, 특히 노사는 이해관계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정부가 민주적 노사관계의 형성, 자주적 결사와 연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정착을 위해 구체적인 방향을 잡고 관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시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의 구축”을 기본 정책목표로 설정한 바 있다.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즉 ‘사회 통합’은 선진적 노사관계 구축의 중요한 상위 지표라고 할 수 있으며, 정부가 스스로 규정한 노사관계 진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도 이는 노동조합운동이 주장하는 자주적 결사와 연대의 원칙과도 부합한다. 그런데 정부가 이번에 서명한 ‘대타협’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는가? 엉터리 맞교환에 편승한 것은 아닌가? 정부는 복수노조 인정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관련하여, 스스로의 ‘원칙’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도록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불투명한 미래, 산별노조로 과감하게 내딛어라 

한국사회 노사정은 비정규노동관련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로 금년 내내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비정규노동법은 여전히 그 앞길이 불투명하고 노사관계로드맵은 엉터리 대타협으로 일단락 짓는 성과 아닌 성과, 어쩌면 최악의 한해를 보낼 처지에 있다. 심하게 말해서 정부는 정치논리에 치였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한건’했고, 사용자는 챙길 것 챙기면서 얼렁뚱땅 넘어갔다. 하지만 노동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노동시장·노사관계 구축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올해를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판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동조합운동은 비록 법제화의 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지라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과 연대에 유리한 제도적 장치의 구축을 위한 논의를 끊임없이 활성화하여야 한다. 특히 산별노조 구축은 단순한 수사에 그칠 문제가 아니다. 산별노조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조적으로 노동자의 자주적 결사와 연대를 이루어내기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은 기업별 노동조합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예 기간’ 동안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직보존의 논리가 조직의 역사적 전망을 발목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더불어 ‘민주적 노동조합 건설’이라는 기조 하에 노동조합 조직 내부의 연대, 조직간 연대의 틀을 더욱 강고하게 해야 한다. 즉 지금과 같은 양 노총의 ‘적대적’ 관계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노동조합운동에 이롭지 않다.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겠지만 진짜로 ‘다른’ 상대들과의 논의석상에서는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됐던 소위 ‘2007년 체제’는 3년간 유예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3년 후가 될때까지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는 말아야 한다. 이번 대타협이 주는 유일한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