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모범 사용자가 될 수는 없는가?

노동사회

정부, 모범 사용자가 될 수는 없는가?

편집국 0 3,059 2013.05.23 11:55

지난 8월8일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대책의 주요 내용은 △반복 갱신 기간제 근로의 무기계약화 및 비정규직 사용규모의 적절한 관리장치 마련,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요인 제거 및 처우개선, △위법·탈법적 비정규직 사용관행에 대한 지도 감독 강화, △합리적인 외주화(간접고용) 기준 정립 및 외주근로자 보호 관련 제도개선, △ 정부차원의 비정규직 대책의 추진체계 구체화 등이었다. 

민주노총 공공연맹을 비롯한 공공부문 노조 입장에서는, 사실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뒤늦게나마 실태조사 및 대책 수립을 준비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2001년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2003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에서부터 최근 KTX여승무원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공공부문의 비정규직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해 왔고, 심지어는 비정규직 양산의 선도적 역할까지 맡아온 것이 그간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축소 발표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규모

정부가 밝힌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고용노동자 1,553,704명 중 311,999명으로서 20.1%에 달한다. 공기업 및 산하기관은 26.3%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조사결과의 ‘정확성’을 놓고 논란이 많다. 비정규직 대책의 ‘실효성’ 이전에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수준에서부터 논란이 제기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조사결과는 ‘무기계약근로자’를 정규직으로 간주함으로써, 관행상으로 계약이 갱신되는 공공부문의 광범위한 상용직(정확히는 ‘상용계약직’)을 비정규직 대상에서 제외했다. 때문에 중앙행정기관(11.1%)과 지방자치단체(18.8%)의 비정규직 규모가 축소되어 발표됐다. 현재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상용직은 10만명 가까운 규모로 추산되고 있기에, 이 상용직이 통계에 포함될 경우 비정규직 비율은 치솟게 된다. 둘째, 지방자치단체, 교육부문, 공기업과 산하기관에 널려있는 간접고용(외주)노동자는 이 통계에서 제외되어 있거나 간접고용사업장의 ‘정규직’으로 포함되어 있다. 결국 비정규직 규모 역시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우리는 정부가 비정규직문제의 사회적 심각성을 애써 축소하거나 외면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정부 대책의 실효성과 적정성을 짚어보자.

정부 비정규직 대책의 실효성과 적정성

첫째, “반복 갱신 기간제 근로의 무기계약화 및 비정규직 사용규모의 적절한 관리장치 마련” 부분을 보면,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대책의 목표가 정규직화가 아니라 ‘무기계약화’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반복갱신업무(상시, 지속적인 업무)의 기간제 노동 종사자를 상용계약직 수준에서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나처럼 공공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무기계약화가 곧 비정규직노동자의 처우와 지위에서의 차별을 한층 더 제도화시킬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현재 공공부문 사업장에서 “상시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업무”는 과거 정규직이 수행했던 과제를 비정규직 중심으로 전환했거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상시, 지속적인 업무임에도 합리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무기계약화의 예외를 설정했는데, 예외조항이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무기계약화라도 될 수 있는 비정규직의 규모가 한층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정부가 밝힌 무기계약화 대상 규모 역시 겨우 17% 선에 머물고 있다.

둘째,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요인 제거 및 처우개선” 부분과 관련하여, 정부는 사업장내 ‘비정규직 고충처리시스템’을 도입하여 차별금지를 점검하고, 청소, 경비 등 저임금근로자의 임금수준 개선을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공공부문에서 차별금지와 임금수준 개선조치는 관련 예산의 후속조치가 수반되어야 가능한데, 정부 대책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저임금노동자인 청소 및 경비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관련하여 제시된 ‘예산집행까지의 적정임금인상률’이나 ‘퇴직금, 사회보험료의 별도 편성’ 역시 임금표를 예산편성지침으로 적극 제시하지 않는 한 실효성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왜 예산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셋째, “합리적인 외주화(간접고용) 기준 정립 및 외주 근로자 보호 제도개선”과 관련해서도 외주화 기준과 외주노동자 보호제도에 대한 적정성과 실효성 논란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외주화 기준과 관련하여, ‘핵심업무’와 ‘주변업무’를 설정하고 주변업무 중심으로 외주화를 인정하고, 핵심업무에 대해서도 ‘합리적 기준’을 토대로 예외를 인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핵심업무와 주변업무로 구분한 것 자체가 ‘주변업무의 구조조정’을 아예 제도화하고 있고, 핵심업무의 경우에도 합리적 기준이라는 미명아래 광범위한 예외를 설정함으로써 대책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앞서의 “상시, 지속적인 업무 종사자의 무기계약화”와 관련시켜 보면, 한편에서는 무기계약화, 또 한편에서는 외주화 허용이라는 정책방향의 모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외주노동자 보호와 관련하여서는 외주용역 계약 시 낙찰하한율을 조정(조달청 용역원가의 87.7%)하고 적격심사를 제도화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용역원가의 100% 낙찰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낙찰가 하락 및 저가 낙찰은 피할 수 없고, 그만큼 외주노동자의 노동조건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외주노동자의 임금수준은 현재 원청노동자 임금의 5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따라서 낙찰가제도 자체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적격심사제도에 대한 근본적 보완책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외주노동자의 보호방안 역시 공염불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외주노동자의 보호방안과 관련하여, ‘원청사용자의 책임’을 명기하지 않을 경우 이 제도의 실효성은 더욱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넷째, “정부차원의 비정규직 대책의 추진체계 구체화”와 관련하여 △총리훈령의 제정, △행정인프라구축, △추진실적의 평가·보상체계 도입 등을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시행방침이 없어 제도의 적정성과 실효성에 대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태다. 다만 행정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제시된 ‘국정현안 정책회의-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추진위원회-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추진단’의 업무수행체계는, 그동안 공공부문 비정규직과 관련한 정부 차원의 책임 있는 대책 기구가 미흡했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그나마 진전된 구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공공부문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이 봇물 터지듯 분출되었으나 1차 책임주체인 정부에 대해 마땅히 호소할 데조차 찾지 못했던 것이 과거의 흐름이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우리는 모처럼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노력을 전개했지만, 구체적인 정책 추진방향과 세부내용에 있어서 그 실효성과 적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대목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문제는 인력정책과 인건비예산관리의 핵심적 내용이기 때문에, 예산 조치를 통한 근본적인 정책전환이 수반되지 않으면 실효성과 적정성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대책에는 이러한 실효성과 적정성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이제부터 그 근본 문제를 검토해보자.  

‘마지막 고용자’를 포기한 악덕 사용자

서구의 사례를 미뤄볼 때 공공부문은 노동시장에서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고용자(the state acting as employ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공공부문은 불황기에는 인력을 확충하여 노동시장의 불안정 요인을 흡수하고, 동시에 불안정 노동계층을 안정화(정규직화)하여 노동시장의 안정성을 ‘선도’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공공부문 인력정책과 노동시장은 1998년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시작된 이후 이러한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치닫고 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정부산하기관의 25% 이상의 정규인력이 감축되었고, 그 자리는 대규모의 비정규직이 차지했다. 이슈가 되었던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인력관리공단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특히 공기업은 더욱 심각하다. 민영화, 자회사 정리, 업무 외주위탁의 구조조정을 거쳐, 전체 정규인력의 40% 이상이 공공부문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일부 정규직일자리만이 안정적으로 지켜졌을 뿐, 빈자리의 상당 부분은 비정규직, 외주노동자로 대체됐다. 예를 들어 지금 300명 수준의 KTX여승무원의 고용문제가 여전히 “안개 속에 묻혀있는” 철도공사도, 그 이전 구조조정 과정에서 7천명 이상의 정규직노동자가 쫓겨난 경험을 갖고 있다.   

단지 구조조정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공공부문에 대한 강압적 ‘경영혁신’이 구체화된 2001년 이후, 효율성과 경쟁의 미명아래 공공부문에서의 외주위탁,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규인력의 지속적 감축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노동자의 한시적 고용이 줄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공공부문은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고용자가 아니라 노동시장의 불안을 선도하는 ‘악덕 사용자’로 바뀌었다. 정부가 계속 내뱉고 있는 공공부문의 예산편성지침과 경영혁신추진지침, 경영평가지표는 바로 이러한 악덕 사용자의 무기였다. 

이러한 양상은 지방자치단체 직접고용부문(상용직)도 예외가 아니다. 대규모의 외주용역화로 수만 명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외주용역계약과 관련한 밀실 거래, 임금의 횡령, 상시적인 고용불안 위협 등 곳곳에서 이들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악덕 사용자’의 만행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논란 없애려면 근본적인 정책변화 의지 보여라

결국 문제는 정부의 근본적인 정책방향이다. 지난 시기 이러한 공공부문 인력정책의 근본적 문제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문제를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공부문 비정규직문제가 심각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정부는 귀를 닫았고, 길거리로 나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과 절규에 찬 요구는 허공의 메아리로 휘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정부 대책에 대한 실효성 및 적정성 논란 역시 정부가 스스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에 대한 자기비판과 근본적 대책 마련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력정책과 예산관리방침 자체를 변경하거나 개선하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이 구체화된 지금까지도, 이를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할 기획예산처는 2007년도 ‘예산편성지침’과 관련하여 어떠한 개선책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공기업과 산하기관의 2006년 경영평가 과정에서 경영진이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기간제법을 앞에 갖다 놓고 현존 비정규직의 정리 여부에만 몰두하여 ‘악용 의지’를 구체화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정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실효성과 적정성 논란은 바로 이러한 정책 방향을 변경하고 관련 제도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노력들을 구체화시킴으로써만이 잠재울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에 귀 기울이고, 적절한 대책을 신속하고 책임 있게 강구해야 한다. 사용자의 법 위반 및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서 강력한 공권력을 발동하고, 관련 제도와 정책의 미비사항에 대해서는 신속히 제도개선의 단초를 구체화함으로써, 정부가 ‘모범 사용자’(model employer)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하고도 근본적인 해답을 외면하고 현상적인 가지치기에 머무르는 정책 방향은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유발시킬 뿐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