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마케팅’이라는 유령이 광장을 배회하고 있다!

노동사회

‘애국마케팅’이라는 유령이 광장을 배회하고 있다!

편집국 0 3,308 2013.05.19 03:33

4년 전인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광의 도가니 한구석에서 파시즘이니 쇼비니즘이니 등을 염려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주장을 이내 접었거나 아니면 매우 조심스레, 돌려서, 살살 이야기했다. 대중의 잠재력과 가능성도 간파하지 못한, ‘오만한 지식인의 결벽증’이라는 집중포화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도 “지나간 한여름 밤의 추억이겠지”하며 잊었다.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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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응원 아니면 ‘응원빨’ 떨어지나? 

그때의 ‘광풍’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그땐 우리 대표 팀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을 연파하며 4강에 오르는 과정에서 생성된 광풍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회를 한참 남겨놓은 상태에서 자본과 미디어가 낯 뜨거운 경쟁을 벌이며 거리응원 쟁탈전에 뛰어들어 ‘이상열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기에 윤도현, 붉은악마, 서울시까지 능청스레 등장해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4년 전 하나가 되었던 모습은 간 곳 없고, 사분오열에 이전투구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들여다보면 핵심은 축구가 아니라 거리응원이다. 자본은 축구 경기에서 ‘멋진 승리’를 원하는 대중의 바램을 거리응원에 기반한 ‘애국마케팅’으로 증폭시켜 소비로 연결케 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때문에 록버전 애국가의 윤도현이나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악마 등 국가주의를 자극하는 문화집단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맥락은 언론에서도 익히 보도된 것처럼 거리응원의 집중점인 서울시청 앞 광장을 두고 SKT와 언론사, 그리고 KTF와 현대자동차라는 양대 연합군이 벌인 쟁투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서울시가 SKT 연합군에게 팔아넘긴 시청 앞 광장은 이미 노동자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상업자본의 거점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리응원을 들여다보자. 언젠가부터 우리는 ‘제대로’ 응원하려면 거리에 나가서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무래도 붉은악마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면서 거리에는 큰 전광판이 들어섰다. 전광판에는 다양한 (광고)이미지를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계방송까지 가능하다. 초기에는 골수 축구팬 수백명이 그 전광판 앞에서 ‘날밤’을 새우면서 응원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십만명이 모인 무대도 익숙하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거리로 불러내는가? 옛날처럼 집에서, 다방에서, 식당에서 응원을 하는 것은 ‘응원빨’이 떨어지는가? 수만명이 거리에 한데 모여서 응원을 해야만 그 ‘기’가 선수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과거 박통 시절 박스컵 대회 때의 구시대적(?) 응원도 그 열정은 지금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1970년대에도 ‘거리응원’이 있었다. 복싱 세계타이틀전, 축구 국가대항전, 고교야구 결승, 올림픽경기 등이 있을 때면 사람들은 거리에서 삼삼오오 모여 전파상 유리 너머 진열대 위의 TV를 보면서 그야말로 가열차게 응원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시절 ‘전파상응원’과 지금의 거리응원을 구별짓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스펙터클’이다.  

월드컵 스펙터클, 애국마케팅의 전방위 압박전술  

『스펙터클 사회』라는 책을 쓴 논쟁적 학자 기 드보르는 미디어시대의 스펙터클을 “권력이 거짓 화해와 탈정치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제도적, 기술적 수단”으로 규정하고, 아편과 같이 사회적 주체를 마비시키고 그들을 가장 긴급하고도 현실적인 삶의 주제로부터 격리시킨다고 역설한다. 스펙터클은 소비, 서비스, 오락 등의 문화적 기제를 통해 관료적 통제와 자본의 간섭을 우리의 여가와 일상에까지 침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2002년 붉은악마의 주도 하에 거리응원이라는 스펙터클이 창조됐다. 그리고 2006년 현재, 이를 둘러싼 더욱 증폭된 대중의 욕망은 서울시와 SKT의 ‘짝짜꿍’을 낳았고, SKT는 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의 미디어매체와 함께 우리에게 ‘나가서’ 응원하라고, 거리응원의 스펙터클에 동참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미 지상파 방송 3사는 ‘삼일절’을 ‘축구절’로 만들어버린 바 있다. 우리는 축구를 좋아할 권리만큼 싫어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또 축구를 볼 권리도, 보지 않을 권리도 있고, 거리에서 응원할 권리도 있지만 집에서 응원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는 거리응원에 ‘애국의 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부추기면서 기업마케팅의 공간으로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고객’이 되고 있는 것이다. 

거리응원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반박한다. 이러한 비판은 대중의 주체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금의 대중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물론 쉬이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나름의 판단능력을 가진 동시에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자본이 국가를 불러들이며 ‘전방위 압박전술’을 구사하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대중의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는 의혹은 역시 지우기 어렵다. 단순하게 TV 속 광고를 보며 충동구매를 하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2002년의 광기를 파시즘으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혹자는 이를 반박하며 자기는 스스로 원해서 거리에 나갔다고 하기도 한다. 역시 한쪽으로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파시즘의 발흥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도 일리가 있다. 파시즘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저자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은 대중에게 거대한 집단적 창조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을 육감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당시 우리의 모습은 그와 어딘가 비슷했다. 

‘축구’를 위하여, 월드컵 광풍을 성찰하라 

지금 자본은 미디어와 동맹을 맺고 ‘애국’을 들먹여가면서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여 ‘하나’되어 집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겉포장을 뜯어내 보면 이는 결국 대량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소비로의 초대이다. TV 시청을 휴식이 아니라 소비를 준비하기 위한 일종의 ‘노동’으로 개념화하는 미디어연구자들에 따르면, 방송국은 기업에게 ‘광고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를 파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보면 서울시가 광장을 SKT 등에게 팔아넘긴 것은 사실 시민들을 넘긴 것이다. 이는 월드컵 열기의 뜨거움에 녹아서 대충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본이 국가를 들먹이며 우리를 밖으로 불러내려는 전략을 경계하고 이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은 민족주의와 상업주의라는 두개의 축에 의해 세계 최대의 이벤트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 이면 월드컵의 경제사회적 토대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다국적 거대기업은 새로운 시장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파고들기 위해 이들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즉 월드컵을 택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서구사회 국가들의 잔치인 올림픽에서 이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남한의 기업들도 월드컵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했다. 또 방송사는 시청률을 위해, 신문사는 광고수입을 위해 월드컵이 마냥 커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열광하는 월드컵이라는 축제는 한편으론 노동착취에 기반하고 있다. 32조각으로 이루어진 축구공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여성인력 착취와 10세 미만의 어린이들의 노동에 의해 꿰매진다. 이들에게 축구공은 운동도구도 열광의 대상도 아닌 생계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시청 앞 광장에서 ‘빨갱이’ 티를 입고 함께 도취되어 꾸는 꿈은 어떤 현실을 먹고 자라나는 것일까? 당신이 진정으로 축구를 좋아한다면 열광에 앞서 좀 더 깊숙한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