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사관계 로드맵의 실패를 두려워하랴

노동사회

누가 노사관계 로드맵의 실패를 두려워하랴

편집국 0 3,212 2013.05.19 03:25

34개 제도개선 과제를 담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이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2년6개월이 지나고 있다. 한 때 노동계의 기대를 받았던 참여정부가 출범 첫해부터 야심차게 준비했던 이 ‘작품’은, 지금 ‘골칫거리’로 변해있다. 세월은 흘러 국정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뚜렷한 성과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긴 해야 하는데 도대체 논의에 진전이 없으니, 정부도 답답한 심정일 터다. 

그렇다고 법개정 문제를 일방적으로 강행처리 하자니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하다. 때문에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극적인 자세로 입법절차만 밟아 왔다. 입법이 추진되면 노사도 맘이 급해질 테니 대화를 시작하지 않겠냐는, 아주 안이한 태도였다. 정부는 당장 내년부터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시행되는 만큼 노사가 논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계산하고 있었다. 물론 물밑에서는 상당기간 정부와 한국노총, 경총이 노사관계 로드맵을 놓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고 김태환 충주지부장 사망 사건으로 김대환 노동부 장관과 한국노총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대화채널’은 전혀 가동될 수 없었다. 노동부 장관이 바뀌기 전까지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그리고 지난 2006년 2월, 약 2년 만에 노동부 장관이 바뀌면서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정세도 묘하게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 분명 ‘김대환 체제’와 ‘이상수 체제’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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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결국 노동법 개정?

시계 바늘을 3년 전으로 돌려보자. 참여정부는 노동정책의 기조를 “자율적 노사관계 확립을 통한 사회적 대화구조의 정착”으로 잡고 출범했다. 이를 통해 양극화 해소 등 우리 사회의 통합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는 슬로건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과 인수위를 거치면서 노동정책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은 참여정부에게는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책 과제 중에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챙길 수 있는 작품은 바로 법제도였다. 이미 ILO, OECD 등에서 법제도 정비에 대한 권고도 있었고 복수노조 허용 등 풀어야 할 과제도 있었던 만큼, 명분이 확실한 개혁과제였다. 이에 따라 2003년 5월10일, 내부적으로 법제도 개선안을 준비하던 노동부는 방향을 바꿔 공익차원의 제도개선안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법학자 등 15명으로 구성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어차피 법제도 개선에서 노사 의견을 들어야 하는 정부로서는, ‘정부안’보다는 중립적 성격을 가진 ‘공익안’이 그 파급력 등을 감안할 때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법학자 15명이 논의를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노사관계 로드맵은 베일을 벗었다. 2003년 9월에 나온 로드맵에서는 △합법·불법 직장폐쇄 허용, △공익사업 대체근로 가능, △쟁의행위 최후수단 원칙 명시, △쟁의행위 제한 규정을 행위준칙으로 명시(벌칙 조항은 일반형사법 규율과 관련해 재검토), △부당해고 벌칙조항 정비, △정리해고 시 노조협의기간 현 60일을 상한으로 해고규모 따라 차등 설정 등, 이른바 ‘사용자 대항권’이 대폭 강화되어 등장했고, 노동법 개정 과제도 30여개에 이르는 등 엄청난 규모가 됐다. 그리고 ‘로드맵’에는 그동안 참여정부 노사관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대화와 타협” 대신에 “노사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최소화”라는 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새 정부 출범 3년이 지난 현재, 참여정부의 노동개혁 프로그램은 34개 법제도 개선 내용을 담은 노사관계 로드맵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내걸었던 노동개혁 프로그램이 결국 노동법 개정으로만 압축됐다는 것은 정부의 전략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타협’과 ‘노동법개정’은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97년 노동법 개정이나 최근의 비정규법안을 둘러싼 갈등 등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노사관계에서 ‘타협모델’을 내걸어 놓고, 실질적인 정책은 ‘법치주의’ 중심으로 진행했다. 이는 방향은 있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할 ‘디자이너’들이 부재한 가운데, 단기성과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행정 관료들 중심으로 노동개혁이 추진되면서 발생한 문제였다. 노동문제에 있어 참여정부 내부가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부 장관 교체 후 ‘일괄 처리’에서 ‘단계적 처리’로

사실 정부도 34개 과제를 일괄적으로 법개정 한다는 게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지난해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협의 과정에서는 처리해야 할 제도개선 사안이 34개 과제에서 24개로 줄어들기도 했다. 또한 김대환 전 장관이 사퇴 직전까지도 ‘24개 일괄처리’를 신념처럼 주장했지만, 이미 노동부 내부에서조차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논의도 불충분한데다가,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한국노총과도 합의가 어려운 사안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강행처리는 부담이 너무 컸다. 그럼에도 김대환 전 장관은 ‘일괄 처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장관이 교체된 지금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동안 주춤하던 대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민주노총이 빠지긴 했지만 노사정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 제동이 걸렸다는 의미다.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는 지난 3월15일 오후 서울 은행회관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노사관계 로드맵 처리 방향 및 내용에 대해 논의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2년 동안 노사정위에 머물다가 정부에서 입법 절차를 밟던 노사관계 로드맵이 다시 노사정 대화 테이블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노사정은 지난 3월21일에도 부대표들이 만나 로드맵 처리 방향을 논의했으며,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분위기는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만 논의의제가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노사 모두 일괄처리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가 중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논의 사항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일단 두 가지 쟁점에 대화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총 관계자도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내년부터 시행될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24개 과제를 한꺼번에 논의할 경우 효과가 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이미 비정규법안에서 보듯 법안 하나만 놓고도 노사가 격한 대립을 하는데 24개 과제를 어떻게 논의할 수 있겠냐”며 “시급한 복수노조 교섭창구 문제를 빨리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노동부의 입장도 장관 취임과 함께 변했다. 지금까지 노동부는 가능 여부를 떠나 공식적으로 일괄 처리를 줄곧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상수 장관은 얼마 전 로드맵과 관련, “합의 가능하고 시급한 사안부터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일괄 처리 기조를 유지한 김대환 전 장관 체제 당시 노사관계 로드맵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노동부 내 관료들이, 이상수 장관 취임과 맞물려 대부분 교체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노동부 내부에서부터 이미 ‘단계적 처리’로 체질개선이 끝났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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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장관의 교체는 노사관계로드맵 의에 변화요인이 될 수 있을까?

올해는 복수노조·전임자임금이 집중 논의될 듯

이상수 장관이 이처럼 방향을 전환한 것은 로드맵이 노사, 노정관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 이상수 장관이 현재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은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사정 관계의 복원이다. 이상수 장관은 경색된 노정관계가 김대환 전 장관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만큼, 이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크다. 이상수 장관은 취임 전부터 노사정 대화에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취임하자마자, 양대 노총, 경총, 대한상의 등 노사 대표자들을 잇달아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대화 복원에 애를 쓰는 것은 취임 초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노동전문가에 정치인 출신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고자 하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상수 장관은 로드맵이 노사정 관계 악화의 ‘주범’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장관이 바뀌고 노사정이 뭔가 좀 해보려는 이 시점에 ‘사용자 대항권’ 내용이 담긴 20여개 과제를 일괄로 논의한다는 것은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껴 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장관은 잘 알고 있다. 또한 물리적으로도 힘든 여건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수 장관은 로드맵 처리에 있어 유연성을 보일 것이다. 노동부는 로드맵 가운데 노사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노동위원회 위상강화 내용을 담은 노동위원회법 개정 등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계획을 갖고 있다. 또한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는 노사 의견을 존중해 복수노조 허용,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로 압축해 논의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참여정부 노사관계 로드맵은 형체를 잃어버린 채, 이전 정권부터 해묵은 과제로 치부된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문제만 남게 된 형국이다. 

물론 두 가지 쟁점에 대해 노사가 조속히 합의를 이뤄낸다면 직권중재 등 나머지 로드맵의 과제들도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문제를 둘러싼 다툼은 올해 말까지 지지부진하게 갈 가능성이 크다. 노사 모두 양보할 수 있는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노총은 노조 전임자 임금의 경우 ‘조직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용득 위원장 입장에서는 “어설픈 합의를 할 수 없는 상황”이란 의미다. 이런 이유로 정부와 재계가 강하게 반대하겠지만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대한 준비도 부족한데, 노사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경우 다시 한 번 시행시기가 유예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전망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노사관계 로드맵, 참여정부의 결정적 실패작

정리를 하자면, 정부는 출범 초기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실현하길 원했고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내에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이뤄낼 만한 전략도 부재했고 프로그램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노사관계의 무게중심이 단기성과에 급급한 행정관료들에게로 옮겨지면서 노동개혁의 핵심이 노동법 개정으로 정리돼버린 것이다. 비정규법안을 둘러싼 갈등 양상에서 보듯 법안 하나도 개정이 어려운 마당에, 34개 과제를 한꺼번에 논의하고 처리하겠다는 건 그 발상 자체부터 허무맹랑했다. 노동부는 개정 근거로 국제기준을 들먹였지만 영향력이 막강한 공공부문 파업권 제약 등 결국에는 “노사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최소화”가 핵심이었다. 정부는 노사관계 로드맵이라는 노동법 개정으로 그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노사 주고받기’로 34개 과제 처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 경총 이수영 회장 등 ‘대화’를 중심에 놨던 노사 지도부 등장 등 노사관계를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좋은 호기였으나 참여정부는 자신의 ‘무능’으로 이를 놓쳐버렸다. 그 중심에 노사관계 로드맵이 있다. 노사관계 로드맵은 참여정부의 결정적 ‘실패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