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선언 실천과 통일운동

노동사회

6·15선언 실천과 통일운동

admin 0 4,154 2013.05.07 09:30

통일운동사에서 그 어느 해보다도 다사다난했던 2001년 한해가 다 가고 있다. 작년이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원년이었다면 2년째인 올해는 6·15공동선언 합의와 정신에 맞게 통일운동을 실천하는 첫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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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14일부터 16일까지 금강산에서 `6·15 공동선언 발표 1돌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 환송식에서 남북대표들이 통일을 약속하듯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고 있다. (인터넷 통일뉴스)  ]

6·15공동선언과 민간통일운동

모두가 알다시피 6·15공동선언은 한반도정세와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한반도는 냉전시대에서 탈냉전시대로, 그리고 남북은 반목과 대립의 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남북 당국자간의 합의이긴 하지만 미국 등 주변국들뿐 아니라 남한 민간통일운동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6·15선언 이후 당국자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간에 남북간 모든 통일행사나 남한통일운동은 6·15합의의 실천과정으로 봐야 하며, 그 행사도 철저하게 6·15합의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 최고지도자가 합의한 6·15선언은 통일운동을 하는 모든 세력과 집단에게 강령적 차원에서 6·15합의 수준을 넘지 않고, 위상 및 활동과 관련해 합법적이고 대중적으로 할 것을 제시해준 일종의 통일운동의 '가이드 라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에 통일운동세력이 6·15선언을 두고 '통일 강령', '통일 이정표' 또는 '민족자주 선언', '민족대단결 선언' 등으로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6·15선언으로 인해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과거와 같이 통일운동세력과 정부가 갈등과 탄압(피탄압)의 관계가 아니라 6·15선언을 함께 실천하는 각각의 주체로 섰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정부가 이적시 해왔던 범민련 남측본부가 최근 강령과 규약을 6·15선언 수준에 맞게 손질하고 또 합법화운동을 펼치는 것은 분명 6·15선언이 통일운동세력에게 제시한 함의가 아닐 수 없다.

6·15선언 실천을 위해

tongil_02.jpg민간 차원에서 6·15선언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은 북한에서 먼저 나왔다. 이미 북한은 지난해 남북장관급회담, 군사회담, 이산가족상봉 등 당국자 차원의 대화와 교류, 그리고 경협 등이 폭주하는 가운데에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에 남한 사회단체 대표들을 초청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은 올해 1월10일, 금년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해'로 설정하고, 6·15∼8·15 기간을 '민족통일촉진운동기간'으로 정한 바 있다.  

이에 발맞춰 남한에서는 3월 중순 그간 이적단체로 규정되어온 범민련 남측본부, 한총련을 비롯한 전국연합, 민주노총 등 진보적 성향의 40여 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해, 새로운 민간 통일운동 연대조직인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를 결성했다.

이로써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와 통일연대 등 크게 두 축으로 분화·정리되었다. 민화협은 현 정부가 들어선 1998년 대체로 관변성향 및 보수색채 단체들과 정당 등 200여 시민·사회·정당·종교단체들로 구성되어, 주로 남남대화 사업을 해왔다. 민화협이 통일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현 정부의 산물이라면, 그간 재야에 있던 진보적 성향의 통일운동 단체들의 협의체인 통일연대는 6·15선언의 직접적 산물인 셈이다. 이어 5월23일 민화협, 통일연대, 7대 종단이 함께 모여 남측의 '단일한' 공동행사기구이자 북측의 '공식적' 파트너로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추진본부)를 발족했다. 이 추진본부는 6·15∼8·15 기간 중 남측행사 및 남북공동행사의 주체로 나섰다.

이처럼 민간 차원에서는 남북이 교류를 위한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했지만 한반도정세의 주요 축을 이루는 북미관계와 남북 당국자회담은 단절과 소강상태에 있었다. 즉 3월 중순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대북강경 발언을 하자 북미관계가 단절되었고, 남북관계는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따라서 남북 민간차원의 행사는 남북관계의 유일한 끈이자 숨통이었다.

남북간 대규모의 민간자주교류

6·15공동선언 전까지만 해도 남한의 통일운동은 특히 8·15행사를 놓고 운동권내 분열과 다툼, 정부당국과의 힘겨루기 등의 양상을 띠었으나, 6·15 이후 '하나의 세력'으로서 북한과 '자주교류'를 할 수 있는 틀과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동시에 6·15공동선언 실천의 주체역량을 꾸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올해 큰 행사만 보더라도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통일행사는 금강산에서 세 차례(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남북농민 통일대회), 평양에서 한 차례(2001 민족통일대축전) 치러졌다.

남북간의 첫 대규모 민간자주교류는 노동부문에서 시작되었다.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는 4월30일부터 5월2일까지 한국노총, 민주노총,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직총) 소속 노동자 1,300여명이 모여 금강산 `김정숙 휴양소` 앞 운동장에서 개최했다.

`6·15 민족통일대토론회`는 6월14일부터 16일에 걸쳐 남북, 해외 대표단 240여개 단체 6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온정리 금강산호텔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남북농민 통일대회'는 7월17일부터 19일까지 금강산 `김정숙 휴양소` 앞 운동장에서 남측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북측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이 공동으로 개최했다.

각각의 민간자주교류는 정부당국자간 대화가 소강인 상태에서 분단사상 최대 규모의 각계각층이 결집한 행사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노동자, 농민 그리고 각계각층의 남북자주교류는 8·15 평양공동행사를 향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어 올해 남북 민간 차원에서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8·15 민족통일대축전'이 8월15일부터 21일에 걸쳐 평양에서 열렸다. 특히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린 8·15평양공동행사는 남측에서 7대 종단 대표들과 민화협, 통일연대 대표는 물론, 여성, 청년, 노동자, 농민, 문화예술인, 경제인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그야말로 민간 역량이 총망라된 행사였다.  

이처럼 왕성하게 대규모로 진행된 민간자주교류는 몇 가지 의미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이 모든 과정이 6·15선언의 실천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행사의 합의문에는 6·15선언의 지지나 그 실천내용들이 들어 있다. 남북 민간통일행사에 6·15선언이 확고히 자리잡고 말 그대로 '통일의 이정표'로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금강산에서의 세 차례의 계층별·부문별 행사와 8·15평양행사를 통해 남북 민간 차원이 한반도 통일문제의 한 주체로 정착한 것이다. 이는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주체역량의 형성과정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한반도 통일문제에 있어 예측가능성과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민족 차원에서 '통일을 하겠다'는 민간 차원의 주체역량화는 한반도 문제의 주요 축인 미국 등의 강대국 논리나 정권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은 받겠지만 크게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내년 북한의 '아리랑 축제'와 통일운동

올해 민간통일운동은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고, 명암이 교차된 한해였다. 모두가 기억하듯, 8·15평양공동행사에서 불거진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에서의 개·폐막식 문제와 '만경대 방명록 필화사건'으로 인해 김포공항 도착 즉시 방북단 대표 15명이 강제 연행되었고, 뒤이어 강정구 교수와 범민련 남측본부 관련자 등 7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이 사태는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과 DJP 공동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경위야 어떻든 이는 그간 민간통일운동의 성과를 훼손시키는 일이었고,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이 국내정치에 악용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 8·15평양공동행사의 상징처럼 된 '만경대 방명록' 사건은 한편으로 수구우익 언론과 특정 정당에 의해 침소봉대를 넘어 사실이 왜곡된 사건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통일운동의 대중화와 대중설득에 일정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가지 우려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했듯이 올해 민간통일운동은 한반도 통일문제에 있어 주요한 축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6·15공동선언을 실천할 주체역량으로 형성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소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통일운동은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남북이 함께 추진하게 될 것이다. 특히 통일문제는 파트너인 북한과 함께 해결하는 과정이므로 북한의 의도와 일정(日程)을 무시할 수 없다.

2002년은 북한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 행사가 줄지어 있다.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행사와 4월 고 김일성 주석 탄생 90주년, 그리고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행사가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벌써부터 내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아리랑 축제'를 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기간 중에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이 참가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 동력으로 6·15공동선언 2주년과 8·15공동행사까지 남북간 민간교류를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보다 더 대규모의 민간자주교류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내년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이 남북교류를 활성화하고, 6·15선언 실천의 주체역량으로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남북 모두 올해 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생긴, 특히 8·15평양공동행사의 교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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