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과 분단에서 교훈을 배워 새 시대를 창조하자

노동사회

망국과 분단에서 교훈을 배워 새 시대를 창조하자

편집국 0 3,149 2013.05.19 02:40

지난 2005년은 1905년 ‘한일신협약’ 즉 소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서 조선왕국이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던 해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제2차 대전에서 패하여 조선에서 철수한 1945년 8·15로부터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2006년을 맞는 우리 민족은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된 채,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남남갈등만 나날이 심화되는 상태에서 전쟁의 위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100주년이니, 60주년이니 하는 것이 특별할 의미야 있겠습니까마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생각할 때, 100년 또는 60년이라는 세월은 자기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역사의 세월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근·현대 우리 민족사를 간단히 되돌아보고, 우리 민족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진정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조선왕국의 망국과 민족의 분단

1905년의 ‘한일신협약’은 조선왕국이 외교권을 상실하여 독립국가의 자격을 잃게 된 치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조선왕국은 독립국가의 자격을 상실하는 이런 치욕스런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조선왕국 말년 조선의 민중들은 대부분 땅을 갈아먹고 사는 경작농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농업생산성이 낮았던 관계로 사람들이 일년 내 농사를 지어도 가족들이 먹고 남는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왕국은 삼정이 문란하고 가렴주구가  극심하여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서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민란’이 전국 도처에서 일상화했고,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봉기는 조선왕국 왕실 관료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선왕실의 민씨 정권은 청국 군사를 불러들였고, 일본은 청군의 출병을 이유로 조선에 일본군을 출병하게 되었으니, 결국 조선왕국 지배층 내부에서 친청파와 친일파가 갈리어 권력다툼을 하면서, 각기 외세의 무력으로 조선 각지의 민란과 동학군을 진압하려 했었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조선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청군과 일군이 싸우다 결국 청군이 패하여 일본이 조선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태로 진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왕국의 국권을 찬탈한 배경에는 1902년의 ‘영일동맹조약’과 1905년의 ‘미일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약소국가가 과연 어느 강대외세를 믿으면 살길이 열리게 되겠습니까?

문제는 조선왕국의 망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당시 조선왕국의 왕실 관료들이 자국 내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일으킨 민란과 갑오 농민 봉기를 청국이든, 일본군이든, 외세의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려고 했고, 자기 문제를 자기 힘으로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로 일본군은 무력으로 동학군을 말살했고, 드디어는 조선왕국의 독립권까지 집어 삼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 하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겠다고 많은 선열들이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지만, 일본을 우리의 힘으로 물러가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15에 미·소·영·중 등 연합군에 패배하고, 조선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민중들은 연합국들의 국제공약도 있고 해서, 조선에 독립국가 건설의 기회가 왔다고, 8·15를 ‘해방’으로 알고 기뻐하며 맞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단 점령하게 되었고, 이 땅의 정치 지도자들은 다시 미국의 힘에 의존해서 권력을 잡아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람들과 소련의 힘에 의존해서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친미 우익’과 ‘친소 좌익’으로 분열하여 다투게 되었습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는 이승만의 노선을 지지하게 되자, 남한민중의 대부분은 ‘단선단정’을 반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1946년 9월 노동자총파업, 대구 민중봉기, 1948년의 제주도 4·3사건, 여순 군인 반란사건 등이 일어났고,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단선단정 반대’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사태도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나, 유엔헌장 제109조까지도 무시하고,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을 수립했고, 이에 대응하여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을 세워 이 땅에는 친미, 친소의 두 개 국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50년의 6·25라는 남북 간의 전쟁 비극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에서 1953년 7·27 휴전에 이르는 전쟁 기간에 이 땅에서는 300만이 넘는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국토는 초토화돼서 온갖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미소가 분할 점령했던 38선 부근의 제자리에서 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상태를 만든 채 휴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 기간 온통 지구촌 나라들이 미소 양편에서 여러 모양으로 남측 또는 북측에 가담했으나, 역사는 국토를 분단한 38선 부근에서 일단 멈추어 휴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조선왕조 말년에 왕실관료들과 민중 사이의 민족 내부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망국의 비극을 맞았던 우리 민족은 8·15 후의 정국에서 다시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겠다고 남과 북이 각기 미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불러들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습니다. 조선왕국의 망국과 6·25전쟁의 비극 속에는 ‘외세 의존’이라는 사대주의의 공통성이 있었습니다.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없었던 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다수 민중들이 단선단정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미군정과 미국의 힘을 믿고 의지하여,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고 단선단정을 지지한 사람들은 민중의 목소리를 강압으로 말살했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고, 대한민국 정부를 세웠습니다. 미국의 힘을 빌어 통일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한 사람들과 소련제 탱크의 힘을 빌려 통일 국가를 이루겠다고 38선을 밀고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모두 강력한 외국 또는 강력한 무력을 믿었다는 공통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하겠다고 생각한 ‘조국해방전쟁’도, 미국의 힘에 의해 통일국가를 수립하겠다고 생각한 ‘북진통일’도 실패였습니다. 역사의 신은 그 어느 쪽에도 승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대적 군비경쟁, 타도 추구의 50년

6·25 동족상잔의 역사는 다시 위정자들에게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정의 성립을 맹렬하게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이후에도 외세의 힘에 의해 통일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국군의 군작전통제권까지도 미군에게 내준 이승만 대통령은 하루 속히 미국의 무기원조를 받아 북진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휴전협정 제2조 13항목에는 군비의 증강에 의한 새로운 전쟁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반도 외부로부터는 일체의 무기를 들여올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기왕에 존재하는 무기가 낡았을 경우에만 그것을 중립국감독위원들의 감시 하에 교체만 할 수 있도록 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의 이 조항이 한국군을 현대화해서 북진통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중립국감독위원들의 활동을 쓸모없게 만들기 위해서 중립국감독위원들이 속한 국가 가운데 체코와 폴란드는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중립국이 될 수 없다며, 그들에 대한 축출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청년들과 학생들을 동원해서 “체코, 폴란드 중립국 감시위원단 위원들은 당장 물러가라”고 연일 가두시위를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남한 내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판문점 부근으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이승만 대통령은 마음껏 미국 무기를 들여올 수 있게 되었는데 북측이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서 이에 항의하자 유엔군 측, 즉 미군 사령관은 1957년 6월21일자로 “휴전협정의 이 조항을 무효화 한다”고 선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한반도에서는 남북 간 적대적 군비경쟁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남북 간 적대관계의 유지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북핵 위기라는 문제도 초래한 것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남과 북은 치열한 적대적 군비경쟁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적대적 군비경쟁의 과정에서 북측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온통 ‘전 국토 요새화, 전 인민 무장화’라는 노선으로 대응하려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생화학무기’와 ‘핵무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모든 경제적 잉여를 군사력 강화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로 주민들은 빈궁과 굶주림의 고난 속에 허덕이게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측에서도 이 불행한 적대적 군비경쟁 때문에 엄청난 재정이 국방비로 배정되고, 남북 간의 긴장 적대관계를 이유로 군사독재의 유지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낮은 농산물 가격과 낮은노임을 토대로 하는 수출산업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외국무기 구입에 투입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치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망의 확충을 기하지 못한 채, 수백만의 빈곤층과 무주택자 문제 그리고 실직자나 불안정 취업자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여, 계층과 지역 갈등이 계속 심화된 것입니다. 전국의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의 대부분이 소수 일부 자산가들에 의하여 독점되고 있는 현실은 전혀 외면한 채, 경제와 교육의 국제화, 자유화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획득한 이들 기득권층은 지금도 외세인 미국이 우리 민족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미국 깃발을 흔들면서 미국의 비위를 건드릴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군 장성 출신의 어떤 분은 미국의 최신 무기로 평양에 ‘족집게 폭격’을 가해서 김정일만 제거하면, 북조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북녘 땅은 대한민국에 의해서 통일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남한 사람들이 잘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독재에 시달리며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은 모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귀순’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100년 전, 조선왕국의 지배층이 청국이나 일본의 강력한 무력을 빌어 동학 농민군을 전멸시킨 결과로 망국을 가져왔다면, 지금 다시 미국의 최신 무기로 북녘 정권을 타도하려 하면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북한의 당 간부들이나 군사간부들까지도 김정일만 죽으면 모두 두 손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투항하고 나올까요? 아니면 자기들의 수중에 있는 무기로 대남 보복의 포탄을 날리게 될까요? 

지난 50년간 추구한 적대적 군비경쟁 때문에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너무도 많은 살상 파괴력이 축적되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살상 파괴력으로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100년 전 망국의 역사, 50년 전 동족상잔의 역사, 이제 다시 외국의 무력에 의존해서 동족에 대한 타도를 추구한다면, 결과는 민족의 전멸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승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는 상생의 시대 

우리 민족은 평화애호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비록 근년에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용병노릇을 한 쓰라림은 있지만, 유구한 역사 속에서 스스로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일이 없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석헌 선생님이 “세계문명의 쓰레기통”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세계문화를 골고루 흡수하며 그것을 이해하며 살아온 문화민족입니다. 고려왕국 이전에는 인도문화의 에센스라 할 불교를 가지고 살았고, 조선왕국 시대에는 중국문화의 에센스라고 할 유교와 도교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후 현대에는 서양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문화권, 중국문화권, 지중해문화권(서양문화)은 세계 3대문화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은 세계 3대문화권의 유산들을 고루 흡수하여, 그들이 가진 장단점들을 골고루 체험하면서 살아온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민족으로서 동족 간의 갈등문제를 ‘외세의 힘’으로 그리고 ‘무력의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은 민족적 자살 행위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 사회 내부의 양극화 현상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새시대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세계문명사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약육강식의 시대를 넘어 모든 민족,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상생의 시대의 창조를 요구하는 일대전환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의 문제, 한반도 평화제도화의 문제를 미, 러, 중, 일 등 주변 4강의 힘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6자회담’이라는 판을 벌리고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문제의 해결은 결국 주변 강대국들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 자신이 얼마나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려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세계문명사의 전환기를 맞아, 평화를 애호하는 문화민족으로서 자기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새해에는 민족 구성원 간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평화 상생의 시대 창조를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