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안의 파란만장한 ‘인생곡선’ 돌아보기

노동사회

비정규직법안의 파란만장한 ‘인생곡선’ 돌아보기

편집국 0 3,179 2013.05.19 02:15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을 달려온 비정규직법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이 글이 실릴 때쯤에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05년 12월21일 현재, 법안이 막판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각계의 주장과 입장이 나올 만큼 나왔고, 맞붙을 만큼 붙었다는 말이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 남았고, 그 선택에서는 ‘안타깝게도’ 앙상한 힘의 논리만 작용한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취재기자 가운데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법안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법안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 타협의 순간들을 지켜보고, 기록했다. 그만큼 감회도 남다르다. 그런데 막상 감회들을 정리하려드니 별로 할 말이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차별과 고용불안이 계속되는 한 비정규직법은 생성과 진화를 거듭해야 하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법안과 관련된 조직과 사람들의 정치적 관계 변화들을 시간대 순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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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4월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 - 출처 : 매일노동뉴스 ]

등장하다, “최악의 개악안” 욕을 먹으며

2004년 11월, 정부가 비정규직법을 마련했다.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이 뼈대였다. 입법예고도 하기 전에 비정규노동자들이 법안폐기를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의장실을 점거했다. 이는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 타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법안에 대한 가장 큰 반발은 ‘파견 확대’ 부분이었다. 정부 파견법 개정안은 26개 업종에 한해서만 노동자파견이 가능했던 기존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을, 몇 개의 특정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파견사업을 할 수 있도록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했다. 

두 노총과 비정규 관련단체 등 노동계는 일제히 “모든 노동자를 파견노동자로 쓰겠다는 의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안은 노동계로부터 “최악의 개악안”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당연히 노동계 투쟁은 ‘법안 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두 노총은 즉시 공조 체제를 구축했다.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법안 저지 투쟁에 들어갔다.

여당은 당황했다. 당정협의까지 거쳐 제출된 법안인데도, 여론이 나빠지자 당은 정부를 공격하며 발 빼기를 시도했다. 정부는 개악안을 관철시키려는 ‘나쁜 놈들’이었고, 여당은 민의를 수렴하는 ‘좋은 사람들’인 것 마냥, 정치적 역할이 나눠졌다. 여당은 파견법을 현재와 같은 포지티브 리스트로 다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여당 일각에서는 이번에 파견법을 개정하지 말고 기간제법만 제정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여당 내의 이런 제안을 그대로 대입하면 기간제법은 파견법 개정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법’이 되고 만다. 이는 당시 여당 정치인들이 비정규직법을 바라보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그런데 당시 노동계의 시각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노동계는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기간제법보다는, 널리 알려진 파견법 저지를 구호로 내세우는 것이 반발과 투쟁을 조직하는 데 더 수월하다고 봤던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기간제법’이 나중에 갈등의 중심으로 등장할지, 그 누가 짐작했을까.

여당은 2월 국회 처리 ‘배짱’ 없었다

2004년 정기국회와 12월 임시국회에서는 이른바 ‘4대 개혁입법’ 국면이 닥치면서 여당은 비정규직법을 다루지 않았다.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장인 우원식 의원은 당시 “개혁 진보세력이 총집결해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이 모자라는데, 비정규직법으로 개혁 전선이 교란돼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국가보안법은 ‘개혁 진보진영’이 힘을 합쳐야 하는 사안이지만, 비정규직법은 ‘개혁 진보진영’이 갈라져서 서로 힘겨루기를 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개혁여당’은 국가보안법 같은 정치적 의제에서는 ‘진보진영’과 한 몸이 될 수 있지만, 노동자 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경제·사회적인 사안에서는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이런 사유로 2005년 2월 임시국회까지 넘어 온 비정규직법은 회의장 점거 등 민주노동당의 ‘맹활약’으로 인해 2월 국회에서도 저지됐다. 이게 ‘정사(正史)’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점거와 노동계의 강한 반대 때문에 입법이 안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는 2% 부족하다. 국회의석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여당이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이 막았다고 법안을 처리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치판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분들의 착각이거나 난센스다. 오히려 여당은 당시 2월 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 이것은 ‘야사(野史)’지만, 이게 더 ‘진실’에 가깝다.

당시 여당은 노동계의 강한 반대 속에 법안을 처리할 만큼 배짱이 없었다. 낮은 지지도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던 여당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한 비정규직법을 노동계의 강한 반대 속에 강행 처리했다고 치자.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여당은 이를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 이목희 의원은 2월 중순부터 법안처리 유보를 흘리고 다녔다. 민주노동당은 아니나 다를까 여당의 이런 계산 속에 정확히 들어와 줬다.

당시 여당은 법안 처리를 유보하는 대신 두 가지를 건지려 들었다. 하나는 4월이나 6월 국회 처리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여당이 오랫동안 애써온 노사정 대화틀 복원이었다. 그리고 둘 다 거의 성공했다. 전자는 2월 국회 처리 포기를 선언하면서 민주노동당으로부터 ‘4월 심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후자는 4월 노사정 협상을 성사시키며 하나의 ‘전형’을 만드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2월 국회 폐회 직후 여당 의원들은 돌아서서 크게 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권위에 등 떠밀려 타결 코앞까지 갔었는데…

2005년 2월 임시국회 직후부터 국회와 노사정의 물밑에서는 비정규직법 협상을 위한 의사 타진이 시작됐다. 비정규직법 협상은 노동계의 요구이기도 했지만, 정부안의 늪에서 빠져나가려는 여당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3월 들어 사회적 교섭 방침을 두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두 차례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노사정협상 추진도 차질을 빚었다. 노사정협상을 희망하던 여당은 폭력사태를 유발한 전노투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어쨌든 3월17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전격적으로 비정규직법 협상개시를 결정했다. 이로써 4월 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주도의 노사정 협상이 개시됐다. 
협상은 시작됐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각자 입장이 팽팽히 맞선 채 지루한 공방만 이어졌다. 양대노총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사유제한’, ‘불법파견 고용의제’를 핵심적으로 주장했지만, 사용자측은 이런 제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협상은 노동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사건’은 협상장 밖에서 터졌다. 4월1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동계 요구와 가까운 내용으로 비정규직법에 대한 의견을 밝혔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반면 사용자측은 협상을 거부했다. 정부와 여당은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인권위를 강하게 비난했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돌부리”라는 표현까지 썼다. 협상은 인권위 파동이 진정되기까지 약 열흘 동안 중단됐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이 남아있다. 정부 여당이 인권위를 그렇게 맹비난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어쨌든 4월23일 협상이 재개됐다. 인권위 의견의 힘은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노동계는 공세적으로 나왔고, 사용자들은 방어하기 바빴다. 인권위 파동 전까지는 그저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에 머물러 있던 ‘기간제 사유제한’의 도입 여부가 이때부터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국회 회기가 끝나는 4월 말이 다가오면서 일부 쟁점에서 이견절충이 이뤄졌다. 타결 임박을 암시하는 징후들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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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는 비정규직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 출처 : 매일노동뉴스 ]

4월29일, 노동계가 수정안을 냈다. 기간제 사용시 무제한 1년 사용과 사유제한 적용 1년 사용, 총 2년 사용 후 고용의무(소위 ‘1+1안’)가 그것이다. 사용자 쪽은 거부했다. 하지만 여당은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당시 회의를 마치며 이목희 의원은 “최종결단만 남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5월1일 노동자대회를 거치며 민주노총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왔다. 민주노총과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간담회를 가진 뒤의 일이다. 민주노총은 5월2일 협상에서 ‘1+1’ 형태를 수용하되, 특수고용형태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과 ‘1+1 고용의제’의 일괄타결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은 결렬됐다(최근 민주노총은 당시 1+1안은 노동계 수정안이 아니라고 했다).
이목희 의원은 “과욕이 일을 망친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비정규직법 입법유보를 선언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공동 단식농성을 하던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이번에는 민주노총에 발 맞춰줬지만, 6월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법안 처리 무산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셈이다.

“다신 못할 짓” 환노위 점거 이후, ‘입법 쟁취’로

2005년 6월 임시국회가 시작됐다. 여당은 노사정과 비공개로 몇 차례 만나가며 4월 협상 결과를 점검했다. 이견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여당은 “합의된 부분은 합의된 대로, 합의 안 된 부분은 국회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드라이브를 걸었다. 법안소위 심의가 시작됐다. 심의에 동의하겠다고 밝혀 온 민주노동당도 약속대로 심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저지’할 틈만 엿보고 있었다.

결국 기회가 왔다. 이목희 소위원장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반발 속에 “정부안 중심으로 법안을 심의하겠다”고 표명하자, 민주노동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행처리 의도”라고 항의하며, 회의장을 밀고 들어갔다. 점거 농성이 시작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게 “이번에만 어떻게든 막아 주면, 다음에는 민주노총이 투쟁해서 쟁취하겠다”고 했단다.

그래서인지 민주노동당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쏟아지는 보수언론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은 채 ‘얼굴에 철판 깔고’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당은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지 않았다. 대신 “민노당은 가짜 진보”라느니 하면서 정치 공세에 집중했다. 민주노동당이 ‘보호입법’을 막았으므로, 비정규직의 차별과 양산이 계속되는 데 책임을 지라는 식의 공세였다. 사실 여당은 점거가 길어지자 법안 처리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국회 회기가 끝나고, 입법에 실패하자 여당 법안소위원들이 모두 사퇴하는 식으로 또 한 번 민주노동당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웠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환노위 점거는 다시 못할 짓”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 평가는 민주노총에 그대로 전달됐다. 이때부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구호 뿐 아니라 무게 중심을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쟁취”로 옮겼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민주노총의 전술은 ‘2% 부족’해 보였다.

한국노총 ‘최종안’ 파동과 국회 ‘올 스톱’ 폭탄 

2005년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됐다. 한국노총이 정부 때문에 협상이 안 된다며 이번에는 정부를 빼고 노사 당사자 협상을 하자고 여당에게 요구했다. 대신 이번에는 양보를 해서라도 입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단다. 여당은 흔쾌히 이를 수용했다. 그래서 여당 주재로 노사 협상이 시작됐다. 이 협상은 나중에 이경재 위원장이 노사대표자들을 초청하면서, 환노위 차원의 협상으로 격상됐다.

하지만 협상은 한 발도 진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노총과 경총은 4월 협상 초반에 꺼낸 주장들을 다시 들고 나왔다.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국회 회기는 점점 다가왔다. 협상 시점을 넘겼고, 결렬됐다. 

11월30일, 한국노총이 노사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최종안’을 제시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결단’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유제한 없는 기간제한 2년이 핵심이었다. 비정규공대위 활동을 했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사실상 이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을 격렬히 비난하며,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민교협, 비정규센터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들도 민주노총 주장에 힘을 실었다. 노동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진영에서 이를 두고 극심한 상호 비판이 이어졌다. 줄 세우기 풍토가 만연했다.

한편 사용자 쪽과 한나라당은 한국노총 ‘최종안’을 노동계 ‘수정안’ 또는 ‘양보안’으로 지칭하며, 여기서부터 ‘밀고 당기기’를 하자는 태도를 취했다. 조금이라도 더 따내 보겠다는 생각에서 그랬겠지만, 환노위 심의에서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여당은 한국노총 ‘최종안’을 거의 대부분 수용하고 입법을 서둘렀다. 민주노동당은 법안심의에서 ‘사용 사유제한’ 등의 수용을 요구하며 여당과 맞섰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사용 사유제한의 폭을 확대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했다. 민주노동당의 이런 태도는 ‘양날의 칼’이었다. 사유제한을 국회가 수용할 경우에는 입법을 위한 유연한 대처가 되지만,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저지를 위한 명분 쌓기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법안소위는 차근차근 법 조항들을 의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도 의결에 참여했다. 핵심 쟁점을 제외한 대부분 조항들에 대한 의결이 끝났다. 이제 ‘결전의 날’이든, ‘처리의 순간’이든 환노위에서는 뭔가 곧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꽉 들어찼다. 그런데 돌연 국회가 사립학교법을 직권상정 처리했다. 반발한 한나라당이 국회를 뛰쳐나갔다. 국회는 즉시 ‘올 스톱’ 됐고, 비정규직법 심사도 기묘한 순간에 ‘스톱’됐다.

다음 기회에는 ‘이면의 이야기’를

비정규직법은 대강 이렇게 흘러왔다. 며칠 남지 않은 1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정치권이 워낙 변화무쌍한 곳이라서 아직 처리 여부를 확언할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일부러 빠뜨린 것들이 있다. 법안 내용에 대한 평가와 최근 상황에 대한 생각, 정치권과 노사정 이면에서 오간 이야기들이다. 이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할 것이다. 2006년에는 마음놓고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