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을 가슴에 묻고

노동사회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을 가슴에 묻고

편집국 0 3,188 2013.05.19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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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은 한 권의 책을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퇴색하고 곰팡내 나게 하기도 하지만, 세월의 흐름조차 무색하게 고운 때깔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대학에 막 진학해 굶주린 걸인처럼 온갖 책을 섭렵하며 시간만 나면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을 들락거리던 나의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있었다. 바로 정지아 씨의 실화소설 『빨치산의 딸』이었다. 출판되자마자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 되어 15년의 세월을 묻혀 지내던 이 책이 올 여름 복간되었다. 누렇던 표지도 알록달록 새로워지고 세 권을 두 권으로 재편집해 새로움이 더하다. 

작가 스스로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라 평했던 것처럼 초판의 후기를 통해 “나는 한 탁월한 개인보다도 평등한 세상,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단순한 신념만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역사의 일보전진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 품고 살아온 사람들

여기 또 하나의 평등한 세상과 통일된 조국건설을 위해 스러져 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역사가 있다. 류춘도 씨의 『벙어리 새-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지난날 내가 겪었던 전쟁의 그림자는 지금도 또렷하게 나의 몸과 마음을 옥죄고 있다. … 내 속에서 숨쉬고 있는 그들에 대한 기억의 단 한 조각이라도 기록하는 것이, 반세기 전 그때 나의 의지에 따라 역사의 격류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이, 지금 나의 소명이라고 감히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두 책은 같은 시기, 같은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시의 젊은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동족간의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어느 한곳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업보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혹한 고문과 감시와 차별을 온몸으로 떠 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멀쩡한 사지육신이 내 것이 아닌 자포자기로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정지아.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온 이름. 지리산과 백아산이 어떤 곳이던가. 현대사의 핏빛 소용돌이의 핵이었던 곳.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철쭉이 원래는 흰색이었으나 사람들의 피에 물들어 붉게 변했다는 전설이 생긴다 해도 의심가지 않을 곳이 아니던가. 남로당 전남도당 인민위원장이던 아버지와 남부군 정치위원을 어머니로 둔 정지아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붉은낙인’으로 부모와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성장한다. 대학엘 진학해 현실과 역사에 눈을 뜨며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고 『빨치산의 딸』을 통해 부모님과 화해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덧씌워진 천형의 굴레를 오롯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20대 여성이 쓴 글임에도 묵직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일 게다.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해 온 두 여인들

정지아의 소설이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쓴 구전이라면 류춘도의 『벙어리 새』는 자신의 이야기를 50년이 넘는 시간을 벙어리로 살다 무엇에 씌운 듯 써내려 간 한(恨)의 이야기다.

24살의 의대생이던 한 여성이 인민의 해방공간 속에서 온몸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고, 숱한 젊은이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마음의 이끌림을 따라 남하하는 인민군과 함께 전선에 뛰어들어 인민군 군의관으로 조국해방전쟁에 전사가 된다. 낙동강 전선만큼이나 격전지였던 남강전투에 참가해 사회주의를 느끼던 온몸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죽음을 면하고 고향집에 내려가지만 현실은 그의 전적을 가만두지 않고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으로 변신시킨다. 또 한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작가는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이름만 대도 알아주는 산부인과 병원의 원장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남편으로 두고, 인자한 어머니로 50여 년을 살아간다. 비록 ‘붉은낙인’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가슴의 응어리로만 쌓은 채 자식들에게까지 감추며 살아온 것이다.

그 가슴 속 응어리와 한이 전해진 것인지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울컥임을 달래야 했다. 왜 그리 우리 민초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한 건지, 전쟁의 참혹함 가운데 던져진 그들에게 느껴지는 인간미와 서글픔 들이 구절 구절 녹아 든 탓 일게다.
그냥 그렇게 살아오던 대로 살아가도 될 것을 50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픈 속살을 벌려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이야기책을 만들어 낸 것일까?

“니들이 전쟁을 알아?”

간혹 전쟁을 몸으로 체험한 노인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쉽게 나오는 말이다. 이제 그 분들에게 조금은 답할 말이 생길 것 같다.(『빨치산의 딸(정지아 짓고, 필맥 냄. 전2권. 각 9천5백원.)』, 『벙어리 새(류춘도 짓고, 노순택 사진. 당대 냄. 1만1천원.)』

“이제 바람이라면, 식민지 민족의 서러움도 분단의 아픔도 전쟁의 참상도 몸으로 감성으로 느껴보지 못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반세기 넘게 내 속에서 응어리져 있던 것들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을 말과 글로만 접한 젊은이들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함을, 평화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싶다. 더불어 역사의 격랑 속에서 명멸했던 그때의 젊은이들이 뜨거운 눈물과 피를 가진 우리 형제였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더불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숙하나마 이 글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벙어리 새』 머리말 중에서)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