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부른 오월노래

노동사회

금강산에서 부른 오월노래

admin 0 3,876 2013.05.07 09:04

"4월30일 새벽 다섯시 반, 여의도를....벗어난 임대버스는 아직 잠에서 덜 깬 한강을 끼고 막 올림픽 대로를 접어들고 있었다. 금방 비라도 뿌릴 듯 낮게 가라앉은 하늘이 어제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한 위원장을 두고 길을 떠나는 우리의 방북 길을 무겁게 하였다." 

55년 분단을 뛰어넘기 위한 4개월 간의 진통 

nambook_01.jpg지난해 12월12일 금강산에서 열렸던 남북노동자 통일 대토론회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2001년 노동절을 서울에서 공동 개최 할 것을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조선직총)에 제안하였다. 이에 조선직총은 양대 노총이 합의한다면, 그동안 민주노총이 추진해온 2차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와 함께 노동절 공동행사를 서울에서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 확인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양 노총 실무자들은 이 역사적이고 중대한 제안을 이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쪽에서조차 두 노총이 한번도 함께 하지 못한 노동절 행사를 북쪽과 세 조직이 함께 한다는 것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노동절 공동행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환영하였으나 막상 행사 내용과 기조, 일정 등 구체적 검토 단계에서는 쉽게 의견을 접근시키지 못하였다. 조직 내부의 일부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각들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실무자들의 바쁜 마음과는 상관없이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까지 맞물려 논의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렇게 21세기를 맞았다. 남측의 합의된 연락을 기다리던 북측은 민주노총의 대회 직후 1월23일 신임 집행부에 대한 당선 축전 형식을 빌어 토론회에서 합의한 '남북노동자 연대기구 구성' '남북노동자 5.1절 기념대회'와 '통일축구대회'의 성과적 개최를 위한 남측의 긍정적 호응을 촉구하였다. 양 노총은 상호 입장 차이가 나는 부분을 그대로 안고라도 빨리 만나 구체적 논의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판단으로 1월29일 금강산 혹은 제3국에서 실무회담을 가질 것을 북쪽에 제안하는 전문을 보냈다.

북측의 뜻밖 제안,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몇 차례 전문이 오간 끝에 3월10일 때늦은 폭설로 장관을 이룬 금강산에서 실무회담이 열렸고, 여기에서 북측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가지 주객관적 정세를 감안할 때 서울에서의 노동절 공동행사는 상호 부담이므로 이 행사를 금강산에서 개최 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북측이 지적하는 주객관적 정세란 미국의 부시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선회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강경책과, 남측 일부 보수세력의 동조, 대우사태 등으로 인한 남한 내 노정간의 갈등심화 등으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절 공동행사가 지난해 6·15 공동선언을 대중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남북간 화해협력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키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제2차 정상회담을 추동해내는 디딤돌로 되어야 하나 오히려 그 반대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회담에 참석했던 남측 성원들은 갑자기 받은 제안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으로 장소를 변경해서라도 행사를 성사시키고자 하는 (미국으로 말미암아 영향받고 있는 남북 당국의 공식적 관계와는 상관없이 민간 대중의 교류와 협력은 계속 유지 확대해 가고자 하는) 북측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래도 해야한다! 북측을 이해한다!

양 노총은 각자 조직의 회의(3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 (3월 17일 한국노총 산별대표자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양쪽 모두 북측의 제안을 적극 받아 안기로 하였다. 조합원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3월 20일 두 조직의 논의 결과를 북측에 통지하고 양 노총이 각 300명씩 600여명의 참가단을 구성해 방북할 계획임을 알렸다. 이후 구체적인 행사계획 수립을 위해 접촉 또는 전문답신을 요청하였으나, 3월이 다 가도록 북으로부터는 답신이 없었다. 또다시 실무자들은 애를 태웠다. 4월 들어 다시 전문이 오가고 4월19일∼22일 양 노총 통일국장은 방송사 관계자를 대동하고 다시 금강산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남북 실무진은 행사 일정에 대한 세부안을 조율하고 확정하였으며, 방송보도와 관련해서도 북측 방송관계자가 나와 별도로 협의하였다.

이때까지도 이번 행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지도부는 실무합의 내용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현실화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실무자들은 약 1주일간의 짧은 시간에 모든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꼬박 세울 수밖에 없었다.

통신방법이라고는 제3국을 통한 팩스전문밖에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세 조직이 합의해 가면서 준비해야 하는 준비작업은 참으로 난해하였다. 여기에 경찰의 대우차 노조원 폭력사태와 4월27일 금융노조 간부들에 대한 법정구속, 이남순 위원장의 단식농성돌입 등 노정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분단 55년 만에 최초로 이루어지는 남북노동자들의 만남과 어우러짐이 민족 모두의 축제로 되지 못하고 반쪽 행사가 될 것이 우려되었다. 거기다가 정부당국은 끝내 민주노총 이규재 통일위원장의 방북을 불허함으로써 스스로의 옹졸함을 시위하고 남북 노동자들의 통일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함께 간다

그러나 우리는 굳세게 출발하였다. 속초 항에서 이규재 부위원장의 승선 문제로 인해 무려 7시간을 싸웠다. 그리고 출항시간을 5시간이나 넘긴 오후 7시에야 설봉호는 닻을 올렸다. 끝까지 조직 결의를 관철시키려는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어떻게든 민주노총 동지들과 함께 가야겠다고 버티는 한국노총 조합원들의 공조투쟁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규재 부위원장의 동행을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이 행사는 성사시킨다'는 세 조직의 합의와, 이 행사의 역사적 의미보다 더한 명분은 없었기에 우리는 당국의 옹졸한 처사를 규탄하면서도 대다수가 승선하였다.

속초 항을 떠나 장전항으로 향한 설봉호 선상에서 초청문예패 '희망새'로부터 통일노래를 배우며 양노총 조합원들은 격앙된 가슴을 진정하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북녘 행이 처음인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몇 시간 후면 밟아볼 또 다른 조국의 땅과 북녘 형제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긴장과 설램으로 밤바람 차가운 갑판을 서성거렸다. 당초 예정시간을 5시간이나 넘긴 밤11시가 넘어 도착한 장전항에는 뜻밖에도 리진수 부위원장을 비롯한 직총 간부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500여명이 훨씬 넘는 남측 참가단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북녘형제들의 손을 마주잡으며, 우리는 방북 투쟁으로 하루종일 지친 심신과 여독이 모두 봄눈처럼 녹았다.

설봉호와 해상호텔로 나뉘어 조합원들이 모두 잠든 장전항 터미널 앉은뱅이 의자에 마주앉아 세 조직 실무진은 내일 있을 행사에 대한 마지막 점검회의를 하였다. 팩스로만 주고받은 세부행사 진행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수정하다 보니, 회의는 새벽 4시를 훨씬 지나고 장전항 너머 동해에서는 어느새 여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통일했노라!

5월1일 아침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으나 안개가 덮여 금강산 정상은 볼 수가 없었다. 참가자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장전항에서 약 5Km 떨어진 온정각(현대 측에서 지은 관광휴게소)으로 집결하였다. 이번 행사를 위해 북측이 힘들여 닦은 김정숙 휴양소 앞 운동장(행사장)에는 벌써 북녘 노동자 형제들이 자리를 잡고 남측 참가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손에 단일기를 든 남측 참가자들과, 기다리고 있던 북녘 노동자들은 북측 철도연맹 여성 취주악대가 연주하는 '반갑습니다'를 목청껏 부르며 어느새 하나가 되었다.

세 조직 통일국장들이 번갈아 사회를 맡아 진행한 5·1절 통일대회 본 행사에서 세 조직의 대표들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뜨거운 환영사를 하였다. 이어 대회 연설에서는 세 조직 대표들 모두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지 관철하여 민족 통일을 앞당기는데 노동자들이 앞장설 것을 다짐하였으며, 최근 남북화해 협력의 기운을 방해하려는 일부 제국주의자들의 준동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본 행사가 끝나고 북측이 정성껏 준비한 환영공연이 이어지고, 이어 남북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체육 오락경기가 펼쳐졌다. '공 안고 이고 달리기' '륜 안에서 공몰고 달리기' '밧줄 당기기' '통일열차 이어달리기' 등 학동시절 운동회 때면 동무들과 늘 하던 그대로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서로 함께 안고 뛰고 넘어져 뒹굴었다. 

오전 행사가 끝나고 점심시간, 북측에서 준비해온 곽밥(도시락)을 야외에서 먹기 위해 "남측 참가자들은 버스에 타라"는 안내방송이 있자 갑자기 남측 참가자들이 자리에 그냥 주저 앉은 채 "같이 먹자!" "같이 먹자!" 를 연호하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가슴이 메어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같이 먹자! 같이 먹자!"(먹을 때 같이 먹고 굶을 때 함께 굶자!)는 이 진한 형제애를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할 수 없이 북녘 형제들이 곧 뒤따라 올 것이니 걱정말고 차에 오르라고 거짓말을 하여 달래었지만 목이 메었다(북측 동포들은 오후 행사 준비 때문에 행사장 주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둥켜안고 뒹굴고 업어도 보고

가라앉은 하늘에서 기어이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2시 예정대로 남북노동자 축구경기가 열렸다. 축구경기는 남북 선수들을 혼합하여 '자주팀'과 '단합팀'으로 나누었고, 북쪽의 고운 누이들이 선수 전원에게 정성껏 마련한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승부와는 상관없이 서로 등을 두드려주고 일으켜주며 1:1 무승부를 만들어(?)냈고, 경기 내내 선수들과 하나가 된 응원단의 뜨거운 열기를 내리는 비도 식히지 못했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남북 문예일꾼들이 교대로 무대에 나서 솜씨를 자랑한 '남북노동자 합동공연'에서 북측은 노동자 문예일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노래솜씨로 행사 참가자들을 한껏 흥겹게 하였다. 특히 공훈배우 오성희씨가 우리 귀에도 익숙한 '휘파람'을 부르며 무대 밑으로 내려와 남측 참가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출 때는 환호와 합창이 어우러졌고, "한번 더"를 연호하는 참가자들의 열광에 그녀는 연거푸 두 곡을 더 부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노들 강변' 등 흥겨운 우리 민요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모든 참석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일기와 세 조직의 깃발을 앞세우고 통일 열차놀이를 하며 온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잘 있거라 금강산! 또 만나요 형제들! 

잡은 손과 걸은 어깨를 풀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폐막행사가 진행되었다. 하루종일 높게 펄럭이던 단일기를 내리면서부터 여기저기서 시작된 흐느낌은 양쪽으로 늘어서 환송하는 북쪽형제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남쪽 참가자들이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끝내 통곡으로 변했다. '잘 가시오',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삽시다.' 남북 형제들의 애타는 절규에 취재하던 기자들도 함께 울었다.

5월2일, 전날의 감동과 아쉬움에 동지들과 어울려 밤이 깊도록 술잔을 나눈 참가자들은 쓰린 속으로 구룡연 지구 등반에 나섰다. 직총 간부들과 북측 민화협에서 파견한 여성 안내원(도우미)들이 동행하여 소상하게 해주는 해설을 들으며, 빼어난 금강산 절경과 깨끗하게 보존된 자연에 감탄하였다. 가파른 길에서는 잡아주고 끌어주고, 안개 서린 구룡폭포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아쉬움에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설봉호는 장전항을 뒤로하였다. 50년 긴 그리움 끝에 이틀 간의 짧은 만남, 우리는 꿈을 꾼 것일까? 참가자들은 말이 없었다. 고난의 세월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북녘 형제들의 안쓰러운 얼굴들이 스쳐가고, 꾸밈없이 정성을 다해 맞아주던 형제들의 따뜻한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우리는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한 것인가? 먹물 같은 파도를 가르며 군사분계선을 넘는 유람선 '설봉호'의 긴 고동소리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후 기

백 명이 천 명이 되고 천 명이 만 명이 되고, 백 만이 되고 천 만이 되어 만나고 오가면 그것이 곧 통일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패권을 확대하기 위해 온갖 명분으로 군비경쟁을 강요하고, 남북관계를 다시 냉각시키려 하는 엄중한 시기이다. 그들에게 우리 노동자 민중의 평화와 통일 의지를 시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이 행사를 성공시킨 가장 큰 힘이었다. 워낙 어려운 조건 속에서 준비하다 보니 많은 혼선과 시행착오가 있었다. 때문에 여러 불편함이 많았음에도 내색 없이 협조해주고 격려해준 참가자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또한 급한 일정으로 인해 과중한 요청을 계속 하였음에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고 이번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통일부 실무자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특정인에 대한 옹졸하기 짝이 없는 처사로 이 역사적인 행사의 의미를 반감시킨 정부 당국에 강한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