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활동을 처음 시작하는 동지들께

노동사회

노조활동을 처음 시작하는 동지들께

편집국 0 3,030 2013.05.17 10:33

 


shoh_01.jpg지루한 장마의 습기 속에 파묻혀 있던 이곳 광주교도소에도 오랜만에 쾌청한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어제 파기 환송심 2차 심리가 있었습니다. 최종 선고는 3주 후인 7월27일에 열립니다. 2004년 8월20일 구속되어 1심과 2심에서 3년, 2년6개월 형을 받은 다섯 명의 동료들과 대법원 상고심에서 원심이 파기되어 어제 파기 환송심 법정에 서기까지, 벌써 11개월이 지나갔네요.

최후 진술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준비한 글을 씩씩하게 읽어가던 중에 방청석에서 가족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갑자기 목이 메어 마무리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작년 여름 GS-칼텍스(구 LG정유) 파업 지도부로서 저를 ‘강철같은 투사’인 줄만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눈물을 보이고만 것입니다. 잘 읽어 내려오다가 눈물을 쏟게 만든 것은 역시 열두 살, 다섯 살 아들놈들과 홀어머니를 언급하며 선처를 호소하던 대목이었죠.

‘무교섭 모범’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노조 간부를 처음 시작하는 동지들께 하고 싶은 말을 기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감옥에 갇혀 수난을 겪고 있는 저희 처지를 보고, 혹 큰 열정으로 노동조합에 뛰어든 동지들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5년 전인 2000년 10월경, 평범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제가 노조 간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기는 별것이 아닙니다. 임금 협상을 하는데 집회참석을 방해하는 회사측의 횡포에 저항하면서부터였죠. 이름만 걸게 하되 노동조합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회사측의 지배개입은 과거에도, 당시에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5년 전 당시, 부당한 억눌림에 저항하며 솟구쳐 오르던 조합원들의 분노는 화산과도 같았고 그 결과 저도 노동조합에 더 적극적인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머지않아 재판결과와 관계없이 해고될 운명이지만 제가 15년간 일했던 GS-칼텍스의 임금과 복지는 대다수 한국 노동자들과 비교하여 결코 적지 않은 수준입니다. 노동조합의 기능이 임금과 복지의 인상에 그친다고 생각했다면 최소 향후 10년 동안은 노동조합 없이도 사측이 알아서 적당히 맞추어 올려주는 ‘무교섭 관행의 모범(?)’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투쟁도 없고 구속도 없고 해고도 없이 공장 울타리 안의 강요된 평화와 안전이 향후 몇 년은 보장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저희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끈적거리는 손으로 노조의 자주성을 움켜쥐려는 회사의 지배개입에 저항했고, 전체 정규직(천여 명)의 50%에 달하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연대를 외쳤고, 지역사회 발전기금을 주장했으며, 인원 축소 반대와 신규인력 증원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라고 회사에 요구했습니다. 회사는 노동조합더러 “정규직 너희들의 임금수준과 복지는 ‘최고 수준’으로 해 줄 테니 제발 당신들의 경제적 울타리를 넘는 노조 활동은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적이고 안일한 유혹을 거부했습니다. 이 유혹에 빠져드는 순간 이미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며 연대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노동조합은 사원들의 상조회나 회사 총무부 역할이나 하는, 철저히 자본에 종속된 기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당신들이 있기에!

그러나 새로운 열정으로 시작하는 동지들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러한 노력이 현실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노동조합도 작년 파업 결과로 이렇게 6명이 구속되어있고, 30여명 가까이 해고되거나 강제 사직되었고, 조합원 대부분이 정직 등 중징계의 탄압을 받고 바짝 엎드려 있습니다. 결과만 봤을 때 어찌 보면 아니한만 못한 투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힘있는 자본이 큰 맘 먹고 조지면 어찌 이겨내겠습니까? 그래서 연대가 필요하고 뭉침이 절실한데, 어찌 보면 저희들의 작년 투쟁은 전국 모든 노동자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준 연대와 단결의 앞선 손짓이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 “신세 조졌다”고 표현하는 구속을 겪고, 출소 후에도 해고자가 되어 막막한 현실 앞에 서게 될 저희가 새로 시작하는 동지들께 두려움만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열심히 살며 투쟁하겠습니다.

재벌이, 자본이 돈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바꿔나갈 주체는 노동자 이외에 그 누구도 아니기 때문에, 끊어질 듯 이어지며 새로운 힘으로 무장한 동지들이 함께 할 것이므로 이곳에서도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장막처럼 드리웠던 장마철 습기를 모처럼 나타난 햇볕과 바람이 몰아내고 있는 상쾌한 오전입니다. 건강한 여름, 힘찬 투쟁 기원하겠습니다.

2005년 7월7일
광주교도소에서 오승훈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