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선언 10년 한국 민주주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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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선언 10년 한국 민주주의 진단

편집국 0 3,281 2013.05.13 10:58
 

sjkim_01.jpg민 주이행 17년을 맞은 한국정치는 지금 중요한 전환점에 직면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대통령 탄핵, 그에 이은 17대 총선을 거치면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던 ‘3김정치’는 결정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3김정치를 거치며 파탄상태에 이른 대의민주주의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보수독점의 정치지형에 의미 있는 균열은 생겼지만,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보수냉전 헤게모니 구조는 제한된 권력이동과 또 이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 개혁세력의 거센 공세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정세이다.

이 모든 사태를 깊이 있게 분석할 지면이 할애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짧은 글은 김영삼 정부 이후 한국정치의 흐름을 대의민주주의 파탄과정과 참여민주주의 성장과정으로 나누어 개관해 본 다음 후자의 성장이 어떻게 한국 민주주의를 파국에서 건져내어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형적 민주이행, ‘경력추구자’의 정치

한 국 민주주의의 견실한 성장과 공고화를 늦춘 첫 번째 원인은 1987년 민주이행의 기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학생과 시민들이 6·29 선언 이후 정치전선에서 완전히 퇴진하자, 한국정치의 제도적 틀은 정치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인들의 정략적 담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담합의 결과 한국 현대정치사를 지배했던 보수 독점의 정치지형은 온존되었으며 새 정치세력이 정치사회에 진입해서 독자세력을 구축할 가능성은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버렸다.

기형적 민주이행의 결과 진보적 사회정치개혁에 대한 신념과 실천의지를 지녔던 ‘신봉자들(believers)’은 정치사회에서 배제되고, 정치적 ‘경력추구자들(careerists)’이 보수독점의 정치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 나서면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신봉자라기보다 정치적 경력추구자들의 보스가 되었다. 두 김씨의 ‘3당통합’과 ‘DJP 연대’를 통한 집권 방식은 정치적 경력추구를 위한 대표적 정략이다.

보수일색의 정치적 경력추구자들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를 지역적 대립구도로 급속히 대체시켰다. 그 결과 정치보스들이 국토를 분할 장악해서 지역 유권자들을 식민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근대적 사당(私黨)정치를 발전시켰다. 소위 3김식 봉건정치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대의민주주의는 총체적 파탄상태에 빠져들었다.

호남포위 그리고 호남충청연대라는 지역주의 전략에 입각해서 각각 권력을 획득했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근대적 용어에 빗대는 것조차 과분할 정도로 권력을 전근대적으로 행사했다.

민 주화투쟁 시절부터 이들을 추종했던 소위 상도동, 동교동 세력들은 민주주의 발전과 개혁에 대한 신념보다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경력추구자 집단이 되어 있었다. 배타적 지역성, 이념적 보수성, 비전문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 가신집단은 자신들의 보스가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후 전근대적 사인(私人)통치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들 사인통치 집단들은 국가기구의 인적 충원과정을 지배하고, 선출직 공직후보에 대한 공천권을 장악하고,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을 수수해서 권력자원으로 활용했다. 대통령 직계가족과 가신들의 부정부패는 절정에 달했고 인사충원의 지역집중성과 배타성은 강화되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집단을 개혁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권부는 상실했고, 정책결정의 폐쇄성과 임의성, 그리고 정략적 특성은 장기적 국가이익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두 대통령은 임기 종료를 1년 여 앞둔 시점에 이미 국민들의 신임을 완전히 상실했다. 국정은 표류하고, 국력은 쇠진하고, 정국불안은 가중되었다. 민주적 통치능력의 이러한 파탄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은연중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다.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권력기관이 이처럼 비민주적 파탄상태에 이르렀는데도 국회는 이에 대한 건전한 견제 역량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지역주의 투표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 속에서 국회의원들은 민심과 민의를 살피기보다 공천권을 쥔 정치보스에게 맹종하려 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분출했던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갈등 요인들은 국회 내의 합리적, 생산적 협의와 조정을 통해 해소되지 않았다. 민생현안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국회는 보수적 정치계급(political class) 집단들이 권력과 그 부산물을 놓고 정쟁을 벌이는 장소로 전락했다.

지역주의 투표라는 한계 속에서도 유권자들은 민주화 이후 치러졌던 모든 총선거에서 대통령 소속 정당에 절대다수 의석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의사는 정당조직의 이합집산, 의원 빼오기, 의원 꿔주기 등 다양한 정치술수를 통해 철저히 외면되고, 왜곡되었다.

대의기제 파탄낸 전근대적 정당들

미 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보편화했던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 구도 속에서 의회는 착실하게 기능과 권한을 확대하여, 제왕적 경향을 강화해 가고 있던 대통령을 보다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인적, 재정적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한국 야당은 스스로 이런 기회를 포기했다. 특히 16대 국회에서 대단히 안정적인 절대다수 의석을 장악했던 한나라당은 국회를 활용해서 건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사회갈등을 원내로 끌어들여 해소하고, 국회의 기능과 권한을 건전하게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단행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못하고 오직 정쟁과 대결의 장으로 국회를 이끌고 갔다.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가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 폐쇄적, 보수적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약화하려는 개혁을 철저히 거부한 채 구태의연한 정쟁만 반복함으로써 국회의 건전한 대의기능을 파탄상태에 빠뜨렸다. 국회가 이처럼 제 기능을 못하고 불구상태에 이른 것은 정당정치의 전근대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정치사회를 분할 장악한 한국 정당들은 이념과 정책에서 차별성이 거의 없는 보수 일색의 정치집단들이다. 이 정당들은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렴하고 이해를 조정하는 정당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지역 유권자들을 볼모로 한 정치보스의 사당으로 전락했다.

지역 유권자들의 맹목적 투표를 자산으로 공천권과 정치자금까지 장악한 정치보스에 철저히 맹종하는 경력추구자들의 집결체가 한국 정당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보스들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 정당조직은 해체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했으며, 무수한 정치철새들은 이 조직, 저 조직으로 넘나들었다. 전근대적 담합정당(cartel party)의 전형적인 모습을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들이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정치사회를 분할 장악한 사당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연고와 출신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선택 이외에 어떤 의미 있는 선택지도 제공받지 못했다. 지역주의는 공세적 지역주의에서 방어적 지역주의로, 감성적 지역주의에서 타산적 지역주의로 변모를 거듭하면서 선거 때마다 가공할 위력을 발휘해 왔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지역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장본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주의의 피해자들이었다. 지역주의 투표의 일차적 책임은 지역적 계산과 선택 이외에 아무런 대안도 제공해 주지 않은 보수일색의 정파들이 져야 한다. 유권자들의 좌절과 불만은 투표율의 지속적 감소로 표출되었다. 제도정치권과 대의민주주의 기제 전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감소되는 투표율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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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자"며 총선시민연대가 주도한 낙천낙선운동  -출처:총선시민연대 ]

노무현정부 등장과 지배세력의 위기의식

대 통령과 권부, 국회, 정당, 그리고 선거 등 대의민주주의 핵심제도와 조직은 이처럼 총체적인 파탄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대의기제의 총체적 파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회의를 확산시키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한국 대의민주주의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붕괴의 위험성을 심화해 오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실패와 불명예 퇴진은 3김정치의 맹위를 약화시켰다. 냉전반공주의와 지역주의에 바탕을 둔 보수독점 정치구도에 대한 불만과 저항 역시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정치개혁과 낡은 정치인 청산에 대한 시민적 요구 또한 커 가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퇴진한 한나라당은 정당의 면모를 탈지역적 민주정당으로 바꾸는 데 실패했다. 김영삼 이후 한나라당을 이끌었던 이회창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영남에 기반을 둔 일부 낡은 정치인들을 성공적으로 퇴출시켰지만 정당조직과 인맥의 근본적 혁파에는 실패했다. 특히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보수 기득권층의 동원을 핵심으로 하는 구태의연한 대선전략은 군부 권위주의, 냉전적 반공주의, 패권적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영남의 정치토호들을 여전히 한나라당의 주력으로 삼았다.

반면 김대중 정부의 파탄과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당은 위기극복의 방안으로 정당조직과 후보경선 방식의 민주화를 시도했다. 특히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해 국민참여 경선제를 도입한 민주당은 지역주의 사당정치의 틀 속에서 성장한 후보가 아니라 새로운 참여정치의 도움을 받은 탈지역적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대결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긴 것은 무엇보다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갈망하는 민심의 승리였다. 그것은 또 대의민주주의를 파탄에 이르게 한 3김정치와 지역주의의 퇴조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또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헤게모니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했다. 즉 냉전반공주의, 발전국가주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입각한 한국 보수세력의 헤게모니가 탈냉전 전후세대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음을 의미했다.

사 실 김대중 정부 역시 보수 기득권층과 제한된 전선을 형성했던, 소위 헤게모니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정부였다. 그러나 지역폐쇄성, 전근대적 사당정치와 사인통치, 부정부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김대중 정권은 보수 헤게모니 세력과의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 무엇보다 요청되었던 시민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시대의 흐름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지하고 대세에 순응한 개혁조치를 초기에 단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부와 금권을 활용한 전근대적 통치 방식을 포기하고 또 소속정당에 대한 비민주적 지배 역시 포기했다.

검찰과 국정원 등 전통적 권력기관을 사인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자율성을 대폭 부여한 조치는 정치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검찰의 자율적인 수사와 혁파로 이어졌다. 그 결과 오염될 대로 오염된 정치사회를 정화하고 또 파탄에 이른 대의기제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단행하라는 시민적 요구를 정치권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 정당에 대한 비민주적 지배를 대통령이 포기함에 따라 정당 민주화 역시 탄력을 얻게 되었다. 사당정치의 잔재를 제거하고 정당의 기반을 탈지역화하려는 노력이 지역주의 정치계급의 저항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하자 민주당 내 개혁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개혁을 표방한 신당 창당이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에 이은 이와 같은 개혁은 헤게모니 세력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의회 내에 압도적 다수 의석을 장악한 지역주의 보수세력의 무차별적 공세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군부를 대신해서 언산정(言産政) 3각지배체제를 확립한 거대 보수언론의 총공세 등 보수 헤게모니 세력의 조직적 저항에 직면했다. 갓 출범한 정권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유례 없는 대공세는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율을 급속히 떨어뜨렸다.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직접 통제를 포기한 탓도 있었지만 대통령 측근 비리의 때 이른 노출은 대선자금 의혹과 함께 참여정부의 도덕성을 손상시켰다.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혼재

그 럼에도 참여정부의 개혁성에 대한 시민적 지지는 지속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이러한 대립과 변화의 국면 속에서 감행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탄핵은 헤게모니의 위협을 느낀 수구 기득권 세력의 총체적 반격을 의미했다. 또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연대해서 강행한 탄핵소추야말로 지역주의에 근거한 담합적 정당정치를 파멸로 이끌고 간 최후의 담합행위였다. 민주화 이후 대의민주주의를 총체적 파탄에 이르게 했던 대표적 정치세력들은 마침내 대의민주주의를 붕괴 직전의 파국상태로 몰고 갔던 것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총체적 파탄상태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붕괴되지 않은 것은 한국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대안적 기제를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 온 덕택이었다. 시민들은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화의 과실들이 지역주의 정치계급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탄상태에 이른 정치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는 대신 시민사회의 공적 기능과 특성을 비약적으로 강화해갔다.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은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이 혼재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급속히 소멸하고 지역 대립구도가 이를 대체하면서 전근대적 지역주의가 특히 선거 국면에서 시민사회 전반의 강력한 저류를 형성했다.

산 업자본주의의 발달에 발을 맞추어 성장해 온 노동운동은 한국 시민사회를 근대적인 계급사회로 전환시키려는 흐름을 대표했다. 1995년 민주노총의 조직화로 노동시장의 계급기반을 확보한 노동운동은 김영삼 정부 내 개혁세력이 시도했던 노사관계 개혁이 좌절된 후 정치세력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2000년 출범한 민주노동당은 이 노력의 산물이었다.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시장 조직의 지원을 받으며 대중정당 조직노선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은 계급사회 건설이라는 근대적 흐름을 대표한다.

한편 1990년대 이후 폭발적인 조직화를 과시해 온 시민운동단체들은 탈계급적, 탈물질주의적 의제를 앞세운 서구 신사회운동의 탈근대적 경향과 유사한 특성을 띠었다.

정치개혁운동의 ‘주력운동’화

그 러나 한국 시민운동은 서구 신사회운동과 중요한 차이점을 지녔다. 선진 민주국가의 시민운동이 추구한 다양한 탈물질주의 의제들 중에서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와 동원을 이끌어 온 주력운동은 평화운동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개혁운동을 시민적 동원을 위한 주력운동(instrumental movement)으로 만들어 갔다. 이것은 무엇보다 한국 대의민주주의 기능의 마비와 파탄에 기인했다.

1990년대 시민단체들이 제기했던 수많은 사회개혁 의제들은 보수적, 지역주의적, 폐쇄적 대의기구와 정치계급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환경, 여성, 교육, 문화, 평화 등 다양한 개혁 의제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무엇보다 정치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시민운동 세력들은 절감했다. 그 결과 다양한 시민운동단체들은 연대해서 정치사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결성된 총선시민연대는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이 전개했던 낙천낙선운동은 폭발적인 시민적 호응과 동원력을 과시함으로써 폐쇄적 정치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 주었다. 이 운동의 성공은 정치개혁운동을 한국 시민운동의 주력운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이후 정치개혁운동은 범시민운동 조직의 구심점이며 동시에 시민적 동원과 참여의 기폭제가 되었다.

정치개혁에 대한 범시민적 호응을 확인한 시민단체들은 인적청산을 넘어서서 제도법률의 개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탄으로 치닫는 대의기제를 민주적으로 재건하기 위한 법률적 기틀을 마련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결과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 국회법 등에 대한 개혁안의 골격이 2002년 초 완성되었고 그 해 상반기 시민단체들의 협의와 토론을 거쳐서 범시민단체의 개혁안으로 확정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는 이 개혁안을 관철시키려는 노력과 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했지만 정치사회, 특히 법제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나라당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법률제도 개혁의 노력이 구태의연한 정치계급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이다. 이 좌절은 정치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법제개혁만이 아니라 인적청산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웅변해 주었다.

우중을 거부한 시민들이 이룬 정치변화

한 편 제도언론이 권력과 정치사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언산정 지배연합’의 한 부분으로 전환해 가자 시민들은 전자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새로이 제공된 사이버 공간을 새로운 참여민주적 공론의 장으로 발전시켰다. 한국 시민들은 보수 정치인들의 냉전적 상징조작과 지역감정 조작에 일방적으로 압도당하는 우중(愚衆)으로 남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민사회를 오직 사적 이익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적영역(private sphere)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공익을 따지고 논하는 공론의 장(public sphere)으로 만들어갔다. 이들은 어리석은 대중이 아니라 국익과 공익을 따지고 논하고 추구하는 공중(公衆; public)으로 변신해 갔던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것은 시민사회의 이러한 변화와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적 요구 그리고 참여기제의 성장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선거 전략과 공약개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택이었다.

취 임 후 권부와 정당정치의 개혁에 착수하여 포괄적 정치개혁의 추진을 약속한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민주주의 재건의 희망을 보았던 시민들은 수구 정치세력들이 저지른 대통령 탄핵을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 온 시민사회의 공중들은 대단히 폭발적으로 참여기제를 가동시켰다. 탄핵저지를 위한 범시민적 연대기구는 즉각 결성되었고, 거리는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시위로 뒤덮였으며, 탄핵을 강행한 보수 지역주의 정치계급에 대한 정치적 심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새로운 공론의 장인 사이버 공간을 통해 급속히 전파되었다.

17대 총선결과는 탄핵에 대한 시민들의 준엄한 심판과 응징 그 자체였다. 민주화 이후 최초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이 절대 다수 의석을 장악했다. 호남과 충청을 대표했던 두 지역정당은 붕괴되었다. 김종필의 퇴진과 함께 3김정치는 마침내 종료되었다. 한편 이념, 정책적 차별성과 진보성을 내세운 민주노동당이 원내 제3당으로 약진함에 따라 보수 독점의 정치지형 역시 혁파되었다. 한국 대의민주주의 재건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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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 진영의 지원을 받으며 대중정당 조직노선을 표방한 민주노동당 ]

 참여민주주의는 개혁과 진보의 손으로

세 계화의 징후는 다양하다. 정치적 측면에서 그것은 민주주의의 범세계적 확산을 뜻하기도 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정당, 의회, 선거와 같은 대의민주주의 기제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반면 시민사회의 공적기능 활성화를 토대로 참여민주의 기제가 성장하는 추세이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보여 준 모습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와 같은 특징이 급격하게, 그리고 과장되게 표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 모습은 분명 불구의 민주주의(crippled democracy)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불구는 치유 불가능한 불구는 아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우선 대통령, 국회, 정당, 선거 등 여전히 불비한 대의 기제들을 개혁해야 한다. 진보와 개혁의 거센 공세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 보수냉전의 헤게모니 체제 역시 혁파해서 정치와 사회 영역의 이념적 획일성과 편중성 역시 조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분명히 이념적 지형은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적 내용과 전망을 담고 있는 이념적 차별화는 아직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세력은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한 체계적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개혁과 진보에 대한 전망을 갖춘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성장 역시 필요할지 모른다. 이러한 변화와 개혁의 바탕에 공중의 견실한 성장과 확대가 또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대의기제의 치유, 참여기제의 견실한 성장과 확산을 이끌어야 할 세력이기 때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