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제도·종족의 제약 그리고 이주노동

노동사회

노조·제도·종족의 제약 그리고 이주노동

편집국 0 5,360 2013.05.1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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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한국동남아연구소와 노동사회가 함께 동아시아의 노동운동 현황을 살펴보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 중국 등의 노동운동 현황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날카로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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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특히 한국이 1980년대 아시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대표하는 대명사라면, 1990년대에는 동남아시아, 그 중에서도 말레이시아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물론 한국에서의 경험이 보편화 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민주화 요구의 성장이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촉발했고, 이 두 개가 맞물려 커다란 정치 변동을 가져왔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유사한 속도의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빠른 경제성장 더딘 노동운동

말레이시아는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요구가 점증하여 정치적 변동을 가져오는 데도 실패했고, 노동운동의 활성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대에 활발했고, 다시 1970년대에 잠시 중흥기를 맞았던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은 그 후 끊임없는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참고로 2000년 동아시아 주요국가의 파업건수를 비교해보면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의 통계에 의하면 2000년 인도네시아의 파업건수는 273건, 태국은 13건, 필리핀은 60건, 대만은 8,026건, 한국은 250건이었던 반면 말레이시아는 11건에 그치고 있다. 말레이시아보다 파업건수가 작았던 국가는 싱가포르(0건)와 홍콩(5건) 뿐이다. 노동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아시아에서도 말레이시아는 가장 하위권에 속해있다. 

이 글에서는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 대한 소개를 겸하여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는 몇 가지 요인들을 간략하게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노동조합의 조직과 구조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다음으로는 노동관계법령들이 어떻게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정치, 사회, 경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담론중의 하나인 '종족문제'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노동시장, 노동관련 통계들을 통해서 199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노동시장의 특성이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과 그와 관련된 외국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겠다.

말레이시아에서 노동운동이 효과적이지 못한 데는 일정부분 노조 자체 탓도 있다. 첫째, 전국단위 노조조직의 취약성을 들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노조들을 포괄하는 전국적인 단체는 주로 사기업 노조들로 구성된 말레이시아노동조합회의(Malaysian Trade Union Congress, 이하 MTUC)와 공공부문 노조로만 구성된 공공부문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Unions of Employees in the Public and Civil Service, 이하 CUEPACS)가 있다. 1989년에 MTUC에 대항하는 말레이시아노동기구(Malaysian Labor Organization)가 설립되었으나 1996년 해체, MTUC에 편입되었다. 1950년에 설립된 MTUC는 2002년 통계에 의하면 총 235개 노조, 507,560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 주로 중앙 및 지방정부의 하급 공무원으로 구성된 노조들을 포괄하는 CUEPACS는 1957년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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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lee_01.jpg총연맹이 노조가 아니라 사회단체?

MTUC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1940년대 말라야 공산당(Malayan Communist Party)과 연계된 전투적 노동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영국 식민정부는 일부 노조들이 추진하던 전국적 노조조직의 건설을 적극 지원했다. 이렇게 생겨난 MTUC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노조들에 정부의 의사를 전달하고 때로는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또한 MTUC 스스로도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파업 등의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정부와의 막후 정치적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을 선호해왔다. 이와 더불어 MTUC 지도부가 정부여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는 등 호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 실제로 1998년에 당시 MTUC 의장이었던 자이날 람빡(Zainal Rampak)은 집권연합인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을 주도하는 사실상의 집권당인 통일말레이국민기구(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 이하 UMNO)에 가입했고, 마하띠르(Mahathir Mohamad) 전 수상에 의해서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 

전국적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말레이시아에서 MTUC는 노동단체가 아닌 사회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따라서 소속 노조의 단체교섭에 참여하거나 연대파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 MTUC의 주된 활동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바뀌는 노동관계법들에 관해 노조원들을 재교육시키고 노조간부들을 훈련시키는 교육사업과 미약하기는 하지만 노동법, 노동관계에 관련된 연구를 하고 책자를 발간하는 등의 서비스에 그치고 있다.  

'땅콩'처럼 부서져 있는 개별사업장 노조들

둘째, 취약한 전국조직과 마찬가지로 하부조직 역시 법·제도적 제약, 정부의 개입 등으로 인해서 점차 약해지는 추세이다. 여기에는 개별 사업장노조(in-house union)의 빠른 확산이 큰 역할을 했다. 개별 사업장 노조의 확산은 전통적으로 작은 말레이시아의 노조들을 더욱 작게 만들었다. 일본식의 노사관계를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 모델로 삼았던 마하띠르 전 수상이 취임한 1981년 이후 개별 사업장 노조의 수는 1982년 36개에서 1992년에는 154개로, 그리고 1997년에는 218개로 빠르게 증가했다. 말레이시아의 작은 규모의 노조는 흔히 '땅콩노조(peanut union)'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한 연구에 의하면, 1947년부터 1987년까지 노조당 평균 노조원의 숫자는 2,000명을 넘은 적이 없고 대개 1,500명 선에 머물러 있다. 가장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전체 노조의 50%이상이 500명 미만의 조합원을 가진 노조라고 보고되었다.   

마하띠르 재임기의 빠른 경제성장은 특히, 외국자본의 유치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이를 위해서 마하띠르는 개별 사업장 노조를 확산시킴으로써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교섭력을 약화시키고 임금상승을 억제하는 등 친자본적인 경제환경을 꾀했다. 개별 사업장 노조의 확산은 전체 노조수의 증가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된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일본의 경우 교섭력을 약화시키는 사업장 노조의 확산이 '노동관계법들의 민주화'와 병행되어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그런 노동관계법의 민주화라는 요소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노조의 교섭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통적으로 규모가 작은 말레이시아의 노조를 더욱 파편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법자 '노조등록관'과 앙상한 노사관계법 

말레이시아의 노사관계에서 국가는 네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의회를 통해서 노동관계법의 '입법자' 역할을 하고 둘째, 정부기구인 인적자원부(Ministry of Human Resources)를 통해 노동관계법의 '적용자' 역할을 하며 셋째, 말레이시아 내에서 가장 큰 고용자(공무원과 공기업)로서 노사관계에 있어서 한 '당사자'의 역할을 하고, 마지막으로 노동법원(Industrial Relation Court)을 통해서 국가는 '최종 심판자'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막강한 국가가 제정하고, 적용하고 또 최종적인 심판까지 담당하는 말레이시아의 노동관계법, 즉 <노동조합법>(Trade Union Act 와 Trade Union Ordinance), <노사관계법>(Industrial Relations Act) 그리고 <고용법>(Employment Act)들에서 노동운동에 불리한 많은 규제적, 억압적 조항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노동조합법>은 노조의 조직, 등록, 노조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의 권한 그리고 쟁의행위에 관한 사항들을 다룬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에서 기업의 기밀을 관리하거나, 관리·경영직 노동자, 보안관련 직위에 있는 노동자는 노조 가입이 금지되어 있다. 앞서 말한 바처럼 MTUC가 노조가 아닌 사회단체로 등록된 것 또한 노동조합법이 노조들을 하나로 묶는 노조연맹의 결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노조는 인적자원부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막강한 권한을 가진 노조등록관(Registrar of Trade Union)이 그 업무를 담당한다. 노조등록관은 노조등록 신청을 거부할 수도 있고, 기존 노조의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는데, 이때 그 사유를 알릴 의무가 없다. 물론 등록되지 않은 노조는 불법이다. 더 나아가 노조등록관은 노조의 활동과 관련하여 조합원 기소권, 조합비 사용 감시권, 노조활동과 관련 조사상의 구인권, 조합시설의 압수수색 영장 청구권 등 노조활동의 억압과 감시를 위한 포괄적인 권한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또한 파업은 일정 절차를 준수해야 하는데, 우선 모든 파업은 비밀투표를 통해 조합원 2/3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합법적 파업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이 의결은 반드시 노조등록관에게 제출되어야 하고 만약 등록관이 파업의 사유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면 합법적으로 파업을 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의 <노사관계법>은 노동쟁의 행위에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는데, 우선 말레이시아의 노사관계법은 파업을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 의하면 다수의 고용인에 의해서 사전에 모의된 작업의 중지, 또는 거부, 그리고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반 태만행위 등도 파업으로 규정된다. 합법적인 파업이라도 인적자원부 장관은 해당 쟁의를 노동법원으로 넘길 수 있는데 이 법원은 모두 정부에서 추천한 인사로 구성되므로 중립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쟁의행위가 노동법원의 심사대상으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일체의 쟁의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말레이시아의 노동법원은 정규 법원체계에 속한 법원은 아니지만, 노동법원의 쟁의행위에 관한 결정은 최종적인 심판이며 노동법원의 판결자체는 쟁의대상이 아니다. 이외에도 노동자의 승진, 전보, 고용, 계약의 해지, 해고, 재임용, 업무재배치에 관한 사항은 단체협약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노조 설립 금지하는 고용법

노동자의 고용, 처우 등에 관한 사항들을 규정하고 있는 <노동법>에는 아직 최저임금에 관한 규정이 없다. 또 한화로 약 41만원에 해당하는 1,500링깃(RM, 말레이시아 화폐단위) 이상의 월급여를 받는 노동자는 법의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고용법이 사실상 특정 노조조직의 금지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1986년 제정된 <투자촉진법>(Promotion of Investment Act)에 의해서 '선도(pioneering)산업'이라고 규정한 산업 및 품목에 관련된 기업에서는 고용법이 규정한 최저 근로조건에 대해서는 단체협상을 금하고 있어서, 사실상 노조의 설립을 금지하고 있다. 선도산업으로 규정된 품목과 산업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 278개에 이른다. 고용법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전자산업에서도 1989년까지 노조설립이 불가능했다. 1980년대 말레이시아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것이 바로 해외투자가 중심이 된 전자산업이고 전자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도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1989년까지 해외투자의 촉진을 위해 노조설립이 금지되었다. 1989년 이후에도 산별노조의 설립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고 단지 개별 사업장 노조만이 허용되어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한 기본적인 협약 8개 항목 중에서 단지 5개 항목만을 비준했다(사실 이 부분에서 한국의 상황은 말레이시아 보다 열악하다. 한국은 4개 항목 즉, 100, 111, 138, 182조 만을 비준했다). 이 8개 협약은 29조(강제근로에 관한 협약), 87조(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98조(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 105조(강제근로 폐지에 관한 협약), 100조(동일가치 근로에 대한 남녀근로자의 동등보수에 관한 협약), 111조(고용 및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 138조(취업의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 그리고 182조(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 등인데, 이중에서 말레이시아는 세 개 조항 즉, 87조, 105조, 111조에 관한 비준을 아직 하지 않고 있으며 105조는 1958년에 비준을 했으나 1990년에 다시 이를 철회했다.    

말레이시아 사회의 핵심 '종족문제'

흔히 종족문제는 말레이시아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일컬어진다. 노동문제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닌데, 종족문제는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서 대규모로 노동자를 수입한 결과로 현재 말레이시아의 인구는 가장 큰 종족인 말레이인을 포함하는 약 65%의 부미뿌뜨라(Bumiputra-땅의 자손으로 번역되며, 말레이인을 포함한 원주민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약 25%정도의 중국인, 그리고 약 10% 정도의 인도인을 포함한 기타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으로 상이한 이 세 종족간의 갈등관계는 종족간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불평등으로부터 야기된다. 정치적으로 우월한 부미뿌뜨라는 경제적으로는 오랫동안 비말레이인(중국인, 인도인)에게 뒤져있었다. 문화적으로는 말레이-이슬람문화가 다른 문화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런 종족간의 경쟁관계에서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간의 충돌 즉, 1969년의 종족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1971년부터 말레이인들을 경제적으로 우대하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이 실시되었다. 신경제정책은 말레이인들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그들이 근대적 산업부문으로 진출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비말레이인들은 이 정책의 종족 차별성에 대해 끊임없이 항의하고 있다.  

전반적인 말레이시아 노동자의 종족별 구성은 대강 전체 인구의 종족 구성을 반영한다. 통계에 의하면 1990년에 노동인구의 종족별 구성은 말레이인이 57.8%, 중국인이 32.9%, 인도인이 8.5%, 노조원의 경우 각각 59.3%, 17.5%, 22.1%였다. 하지만 노동인력의 이와 같은 종족구성은 최근의 현상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1970년 이후 신경제정책을 통해 정부가 말레이인의 근대화된 경제부문 참여를 촉진하기 전에는 말레이인은 노동인구 구성에서 소수였다. 농업을 제외한 1957년의 산업별 노동인구 통계를 보면 말레이인은 대부분의 산업에서 30%를 넘기지 못했다. 또한 1949년 노조 조합원 통계에서도 말레이인은 불과 13%였다(중국인 24%, 인도인 58%). 하지만 신경제정책이 이후 1988년 통계에서는 그 비율이 59%, 18%, 22%로 변화되었다. 

노동자 종족갈등은 지배엘리트의 힘

노조 간부의 비율에서도 말레이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고,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정체되어 있으며, 인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이런 수적 지위의 장기적 변동은 노조 내에서 종족별 권력의 변화를 암시한다. 새로 얻어진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말레이 노동자의 노조 내에서 발언권과 권력이 강해진 반면, 비말레이인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노동조합에서 지배적 지위를 잃게 된 비말레이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지위하락이 곧 말레이인을 우대하는 정부 정책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 인식은 조직화된 노동인구 내에서 종족간의 반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말레이시아의 종족문제는 노조의 내적 단결뿐만 아니라 노조의 조직률을 저하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노동인구의 한가지 특징은 식민지 정책의 결과로 특정 산업에 특정 종족집단이 집중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약화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이 종족별 집중은 뚜렷하다. 예를 들면, 말레이시아의 플랜테이션 산업에는 인도인이 집중되어 있고, 공공부문에는 말레이인이 집중되어 있고, 상업부문에는 중국인이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플랜테이션 노동조합에는 인도인 이외의 다른 종족집단 노동자들이 가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상급단위 노동자의 조직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MTUC 설립 초기에 이 조직은 주로 인도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종족이 주가 된 노동조합들은 MTUC에 가입을 꺼리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들 내에서 종족간의 분열은 노조의 약화와 그 결과로 최대한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경제성장을 꾀하는 목적으로도 이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 집권세력의 정치권력의 유지와도 그 이해를 같이 한다. 14개 정당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집권연합인 국민전선은 사실상 종족정당인 UMNO, 말레이시아 중국인연합(Malaysian Chinese Association, MCA), 말레이시아 인도인회의(Malaysian Indian Congress, MIC)가 주도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말레이인의 정당인 UMNO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말레이시아의 집권당으로 일컬어진다. 국민전선, 보다 좁게는 UMNO의 안정적 정치권력은 수적으로 가장 큰 종족집단인 말레이인의 동원과 지지를 통해서 확보되어 왔다. 따라서 UMNO 엘리트의 입장에서 국가붕괴 위기까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종족갈등을 확대재생산하여 지속적으로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동원해 낼 필요가 있다. 

이런 논리는 노동자에게도 적용이 되는데 정치엘리트들은 말레이시아의 노동자들이 계급의식 보다는 종족의식에 의해서 지배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현재 집권 엘리트들의 정치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UMNO 엘리트들은 특히 말레이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조들이 파업을 하거나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이익 즉, 경제발전에 저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 노사관계의 불안정은 현재 말레이인의 손에 있는 정치권력마저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의 순응을 이끌어낸다. 그 대신에 말레이 권력자들은 노동자들의 협조의 대가로 그들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UMNO 엘리트들은 이런 논리로 전체 노동인구의 거의 60%에 달하는 말레이인 노동자를 통제하는 동시에 말레이인 노동자와 비말레이인 노동자 사이의 괴리감을 확대 재생산하여 노동운동을 끊임없이 약화시킨다. 

완전고용과 꾸준한 임금상승이라는 유인   

다음의 [표2]는 1990년대 중반이후 노조원수, 노조수의 추이와 임금, 임금상승률, 파업수, 실업률에 관한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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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가 최고의 경제성장을 경험했던 1990년대 중반, 그리고 1997~98년 경제위기 이후 다시 성장세를 회복했던 1999년 이후의 말레이시아의 노동시장의 특징은 낮은 파업률, 낮은 실업률, 꾸준한 임금상승, 그리고 대량의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유입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2%를 완전고용이라고 보는데, 말레이시아에서 3%대의 실업률은 거의 완전고용에 가깝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이 1990년대 중반이후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낮은 실업률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의미하는 것은 노동력의 부족이다. 

이렇게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활발하지 않은 노동운동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꾸준히 상승했다. 결국 말레이시아에서 노동운동은 비록 활발하지 못하지만, 급속한 경제발전의 결과로 실업률이 낮게 유지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생겼고, 임금이 꾸준히 상승했던 것이다. 임금의 꾸준한 상승은 다시 노동운동을 약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적정한 임금의 상승을 통해서 파업과 노동운동을 낮은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적 규제와 병행하여 임금상승이란 유인을 통해 노동운동을 통제하고 있다.

미래를 열 이주노동 문제

마지막으로 최근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큰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이주노동의 문제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필요하겠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로 1990년대 초반부터 말레이시아는 사실상의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국외에서 노동인력을 수입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현재 말레이시아에 약 150만명의 외국 노동자들이 있으며 이중 절반은 불법체류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1997년 말레이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다. 말레이시아 국가와 기업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먼저 희생시켜 자국 노동자들을 보호하여 대량 해고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회피했다. 또한 이들은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많은 제약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최근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강제출국 시키는데 무리한 공권력을 동원하고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성범죄까지 저질러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외교적 마찰까지 일으켰다. 이와 더불어 국내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사회적 문제 즉, 급증하는 범죄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이 손쉬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말레이시아의 노동자와 노조들은 급격히 증가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대를 시급히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잠재적으로 이미 파편화되고 약한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보다 낮은 임금으로 노조로 조직화되지도 않은 채, 사용자가 쓸 수 있는 노동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레이시아 노조나 노동운동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적 고려에 앞서 인도적 차원에서도 이주노동자와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것은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제약과 이주노동이라는 화두

이상에서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특히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요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빠른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운동이 그러하듯이 그리 활발하지 못한데, 그 원인을 노조 자체의 문제, 노동관계법들의 조항, 그리고 종족문제 등을 통해서 짚어 보았다. 말레이시아에는 효과적인 전국단위의 노조가 부재하고 따라서 노조들을 하나의 큰 힘으로 묶어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하다.

이와 함께 국가에서 장려하는 사업장 노조의 확산으로 노조 전체의 힘은 더욱 파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말레이시아의 노동관계법들은 경제성장이란 미명 하에 여러 가지 규제조항들을 통해서 노조의 성장이나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방해하고 있다. 여기에 말레이시아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인 종족문제는 이미 파편화된 노조를 다시 종족별로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추가적으로 정치엘리트들은 한편으로는 종족문제를 교묘히 조작하여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유지,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의 단결을 저해하는 편리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중반이후 노동시장, 노동운동의 상황을 보면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난 노동력의 부족에 따라 임금이 꾸준히 상승했다. 이런 발전은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은 경제발전을 위해 외자유치를 적극 추진해야하는 국가에게도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즉, 채찍과 동시에 적당한 당근이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을 약화시켰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임금의 가장 하층을 채우는 이들 이주노동자들과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가 하는 것이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에서 새로 대두되고 있는 과제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