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노동운동의 전략 변화

노동사회

브라질 노동운동의 전략 변화

편집국 0 4,234 2013.05.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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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atin American Perspectives, issue 139, Vol.31, No.6, November 2004, pp.31~47. 필자 마리케 리소프는 영국의 워릭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학을 가르치고 있고 그녀의 주요 연구는 경제 개혁에 대한 브라질 노동조합의 반응과 브라질 국가의 역할 변화에 관한 것이다. 저서로는 Labour Relations in Development(edited with Alex Fernandez Jilberto, 2002)가 있고,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경제에 대하여 수 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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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27일 브라질 대통령선거는 전례 없는 결과를 낳았으니, 그것은 전직 금속노동자이자 1979년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창당했던 노동자당의 지도자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일이다. 이러한 범상치 않은 선거결과는 브라질 노동운동이 정치적 목표를 급진적 사회주의로부터 보다 실용적인 정치 및 경제 전략들로 점진적으로 이동한 결과로 부분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브라질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 PT)의 주요 부분인 브라질 노동운동 내에서 발생한 이러한 전략적 변화를 검토하고, 정치적 현대화가 브라질 좌파의 한 특징이 되었음을 논증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브라질 노동운동이 광범한 잠재적 조합원들의 관점과 함께 보다 넓은 계급 개념에 근거하여 그들이 대변하는 이해와 노동운동과 다른 사회운동들 사이의 강력한 관련을 인정하였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아가서 초기 브라질 노동조합의 전략이 파업과 동원으로 특징지어졌던 반면, 1990년대에는 파업의 동력이 쇠퇴하였고 그것이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기 위상을 재고하면서 새로운 전략들을 숙고토록 하였음을 보여줄 것이다. 끝으로, 2002년 선거에서 룰라의 당선은 노동자당과 지지자들에게 중대한 정치적 성공을 의미하지만, 이전 시기의 몇 가지 긴장과 의견의 대립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브라질의 역사와 신노조주의

브라질의 군부독재 기간(1964~1985) 중, 1970년대 초반 저항 세력의 재출현은 파업의 물결을 자극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1970년대 초반 노조의 투쟁은 보다 자율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낳았고, 노사관계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는 현장의 활동들은 이제 군부체제에 대한 정치적 반대로 전환하였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노동운동들이 1980년대 후반까지는 비슷한 정치적 궤적을 따랐는데, 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민주화 과정에서 노동자 중심의 저항운동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민주화 이행의 동력이 소진될 때 노동조합도 함께 쇠락했다.

통상 브라질 노동운동은 개발도상국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성공적인 사례로 이야기된다. 그러한 브라질의 ‘신노조주의(new unionism)’ 운동은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가졌다. 첫째, 내부 민주주의와 노사관계의 민주화에 초점을 둔다. 브라질의 신노조주의 활동가들은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보다 책임성을 갖도록 내부 구조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은 (특히 공업 부문에서) 사용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노조가 작업장 대표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대표성은 그 이전의 조합주의(coporatist) 노동법에서는 허용치 않던 것이었다. 이 과정은 공장위원회(factory commissions)의 결성을 낳았다. 이 위원회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도력을 상실했지만, 이들은 노사관계의 민주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다. 

둘째, 이 운동은 국가로부터의 자율성과 조합주의적 노조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조했다. 신노조주의 활동가들은 국가 정책 전달벨트로서의 노조라는 역할을 거부하고, 조합원의 이해 대변에 있어 보다 정치적인 역할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게다가 이들은 강제적 조합비(imposto sindical)에서 자신의 몫을 할당받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노조의 모습을 거부했고, (주로 공업 부문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들은 의무 조합비를 폐지하고 자발적인 멤버십을 채택했다. 한편, 신노조주의 활동가들은 국가가 개발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을 기대했다. 사유화에 반대하는 많은 저항들이 경제·사회적 개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셋째, 신노조주의는 사회운동들과 강력한 연계를 유지했고, 브라질의 경우 노동조합에 기반한 새로운 좌익정당인 노동자당과 끈끈한 유대를 가졌다. 노동운동은 공식적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는 집단과 조직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신흥 시민사회 조직들과의 관계나 무토지 농민운동(MST) 등이 이를 나타내는 사례들이 될 것이다. 보다 넓은 ‘노동자’ 사회운동에 대한 노동조합의 참여에 아무런 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브라질의 중앙통일노총(CUT)과 MST는 주요 전략상의 차이가 존재하며, 후자가 보다 급진적이고 전투적이면서 대중 조직화에도 보다 성공적인 경향이 있다. 

셋째, 신노조주의의 목적·전략·멤버십은 공식 부문 외의 노동자들을 조직화 대상에 포함하고 노동자의 이해 대변을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변화를 위한 보다 넓은 정치 프로그램과 연계하려는 시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시각에 기반했다. 또한 많은 노동조합들이 주택 프로젝트, 교육 및 훈련, 구직과 재훈련 지원 등의 사회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지지와 정당성을 확대하고자 했다.

계급 개념과 좌파의 전략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CUT는 ‘계급’에 대한 관념을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확장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와 혁명 또는 큰 범위의 사회변혁에 대한 수사학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집합 행동에서 그것이 반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계급’은 전통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 속에서 특히 도시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언급하는 말이었다. 서유럽과 미국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정의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인민의 실체를 충분히 대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계급 개념은 변화하는 노조 전략에 대한 분석에서도 중요한데, 왜냐하면 CUT가 남성 도시 공업 노동자들이 주도하던 환경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남성 도시 공업노동자들의 집단이 CUT의 창설과 노동운동이 주요 정치행위자로서 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브라질 노동자들 다수를 자동적으로 대표하지는 않으며 때문에 CUT가 브라질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군부체제와의 대립하고 있는 광범한 연합전선은 다른 집단이나 조직들과의 동맹과 협조가 일단 성공적인 전략임을 보여주었다. 

노동 인구의 모든 부문(비공식 부문부터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까지)을 대표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노동운동이 노동계급이라는 그림을 단순하게 이용하거나 제한된 대표성에 기반해서는 동원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지지자와 노조 활동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CUT와 개별 노조의 시도들 속에 반영되었다. 마가렛 켁에 따르면, 브라질 노동운동과 좌파 내에서도 노동계급 개념에서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중간계급 노동조합원들의 조직 및 투쟁 형태와 보다 전통적인 도시 및 농촌 노동자 조직들 사이의 접합(conjuntion)은 전통적인 계급 정의 보다 정치적 정체성을 우선 순위에 두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로드리게즈에 따르면, 노사관계에서 일상적 이슈들을 다룰 필요성이 보다 강하게 제기되는 속에서 진행된 1980년대와 90년대 신노조주의 활동가들의 경험은, CUT가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기반한 충성과 정체성을 갖는 것에서 조합원의 목표들을 성취하는 조직화를 강화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배타적이고 엄밀한 강조를 점차 기각함을 의미했다. 물론 이러한 노조의 실제 활동과 CUT의 전국적 출판물에서 나타나는 수사적인 표현에서는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 중앙 노조조직은 급진적인 해법을 선호하는 태도로부터 변화하는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 대한 대응력을 강조하는 태도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상주의적 대안과 실용주의적 대안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적 시각들은 대개 사회의 큰 변혁을 만드는데 초점을 두는 반면, 실용주의적 대안은 예를 들어 고용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 교섭을 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PT의 경우에 있어서, 이렇게 계급의 개념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당이 그 잠재적 투표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미 계급의식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대신 당의 활동이 노동자 교육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계급형성 과정의 일부여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제 계급의 개념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기 조직화의 역동적 과정이 된다. 그것은 단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을 단결시키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풀뿌리 정치활동을 고취하는 것이다. 더욱이 계급적 관심사는 더 이상 산업 노동자들이나 노조활동가의 영역으로 협소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잘 조직된 농업 및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보다 큰 대의를 갖고 집단적 주체로 자기조직화하는 투쟁을 벌이는 여타 사회운동 세력들을 포괄하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비록 노동운동의 기존 목표 및 전략들과 일정하게 충돌을 빚기는 했지만,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CUT의 5차 전국대회(1997)에서 기본적 정치원칙으로서의 시민권이 노동운동 전략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문서로 시민권의 의미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광범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완전한 시민권은 불가능하다고 언급되었다. 나아가 CUT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사회 정책들(주택, 교육, 노동자 협동조합을 통한 고용 창출 등)이 CUT 및 다른 비국가 기구들에 의해 시행될 것을 제안했다. 

전통적인 노동자 요구와 보다 넓은 정치적 목표 사이의 충돌 사례들이 CUT 전국대회의 핵심 쟁점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CUT가 노동자 권리의 보호를 넘어선 일반 정치적 이슈들에 자원을 집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단체교섭에 집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또 하나의 사례는 선거정치 참여와 관련된 논쟁이다(‘정치적 시민권’의 확장). 이러한 견지에서 CUT에게 중요한 이슈는 PT 후보들에 대한 지지 활동의 수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CUT 내에는 전략으로서의 선거정치를 거부하는 보다 혁명적인 경향들이 일부 있었고, 또 PT 외의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그룹들도 존재했다. 특히 2002년 선거 이후에는 좌파 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다시 중요해졌다. 

브라질 노동운동의 정치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연구해보면, 계급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중요한 전환을 의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논쟁적인 이슈로 남아있음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농업 노동자들, 자영업 노동자들, 노동자 협동조합, 실업자, 비공식 부문들의 지위에 관한 논쟁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도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와 함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가진 그룹들을 위한 다양한 동원과 조직화 형태가 요구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다 넓은 노동계급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음에도, 여전히 혁명적 전위로서의 노동계급에 관한 전통적 논쟁이 존재한다. 예컨대, 1986년의 PT 행동계획은 상업, 공업, 금융, 토지소유 집단을 포함하는 부르주아 그룹들을 농촌 및 도시 중간계급과 농촌 및 도시 임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계급(여기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가장 전략적 집단이 된다)에 대한 ‘반대 진영’으로 언급했고, 노동시장에서 제외된 도시 및 농촌 잔여집단들은 종종 ‘반사회적’ 행동들과 연루해서 언급했다. 이 계획에서 중간계급에 대한 정의가 특히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개인 및 가족 농업 생산자들, 중소기업가들, 독립 노동자들, 공공 및 민간 부문의 고위 전문가들, 수공업기술 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노동 대중, 학생, 일부 성직자들, 군대의 하위 간부들과 임금에서도 구별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이러한 계급 담론은 PT의 공식 출판물에서 사라졌다. 1990년에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운동 내에서 전략적 집단이 아니게 되었고 좌파의 투쟁은 모든 대중투쟁을 포괄하게 되었다. 더욱이, 사회주의는 이제는 넓게 정의되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의식적 투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신노조주의에도 유사한 사고가 퍼졌다. 전국금속노동자연맹(CNM)의 결의문에 따르면, 노동계급이 정치적 단결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산업적, 사회적, 교역적, 경제적 발전 정책을 강조하는, 모든 노동인민에 적절한 대안적 프로젝트를 생산해내야만 한다. 게다가 CUT에 따르면, 좌파가 전통적 계급 개념의 문제점을 인식했다면 효과적인 정치 전략은 시민권, 교육, 보건, 주택과 같이 인구의 다수에 어필할 수 있는 이슈들에 대한 관심을 포괄해야만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노동조합 역시 실업자와 연금수령자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한다. CNM은 경제 발전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 관계를 희석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노동과 자본 관계의 적대적 성격을 재확인하며, 파트너쉽이라는 기업가 이데올로기를 거부해야만 한다”). 따라서 신노조주의자들은 광범한 정치적 연합이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신노조주의와 노동당의 정치적 역할에 전통적 ‘계급’ 개념이 얼마나 중심적인지 하는 문제까지도 고민해야만 했다. 

‘사회주의’라는 전통적 라벨은 PT의 전략에 쉽게 들어맞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89년 룰라의 선거운동에서 사회주의는 PT의 목표로 강조되지 않았고 대신 대중민주주의적 기획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갔다. 더욱이, PT 지방자치 정부의 사례들은 지역 PT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직접 민주주의(지역 재정 수립에 대한 참여)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보건, 교육, 사회개발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투자임을 보여주었다. 브라질 북동부의 지역 PT 정부들의 실천을 분석하면서, 윌리엄 나일런은 PT가 지역 정치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교조적 관점을 탈피하였고, 민주적 수단을 통한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장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궁극적 방법으로 간주되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하여 PT의 변형적(transformative) 사회주의 의제는 민주주의에서 참여의 실험에 대한 강력한 강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좋은 정부’와 대중적 참여를 활발히 고취하여 형식 민주주의의 증진을 강조함으로써, PT는 20세기를 주름잡은 레닌주의 및 유럽 사민주의 전통보다 더욱 오래된 사회주의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다.

브라질 노동운동과 PT의 두 가지 특징은 그 정치적 목적에 관한 논쟁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첫째, 다양한 경제부문 및 배경을 가진 구성원과 이와 연관된 다양한 조직구성이라는 의미에서, PT와 CUT의 다원주의는 두 조직의 성원에 관한 논쟁에 반영된다. 다이앤 데이비스는 “PT는 스스로를 전술당이라기 보다는 전략당으로 간주하여, 실제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향해 대안적 형태의 민주적 참여를 노동자에게 교육시키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PT와 CUT는 모두 낡은 노동운동과 좌익 정당들의 경향을 벗어나서 강력한 개입주의적 국가와 대항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통적 정당정치에 의존하는 대신 대중적 동원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1979년의 창설부터 1982년에 맞이한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 이르기까지, PT는 노동자의 권리방어가 민주화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노동권의 증진 양자의 견지에서 모두 노동자 참여의 증대는 그런 점에서 민주화 과정에서 당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다. 

PT가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사회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합이었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소유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며, 노동자당의 팜플렛에 따르면 그것은 국가 소유와는 다른 것이었다. “자본주의 시장의 뒤틀린 논리와 사회주의라 불리는 사회들의 참을 수 없는 관료적 국가 계획” 사이에 존재하는 민주적 형태를 통해 사회는 경제적 우선성과 생산의 목표들을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세 가지 수준에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완전한 시민적 자유의 실현,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들, 그리고 대중적 참여의 충분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운동과의 협조와 연계에 대한 CUT와 PT의 강조는 대의제 문제에 대한 부분적 대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정규직 노동자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노동운동 혼자서 노동계급 전체를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권리를 방어하고 획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협력 증진 계획에 노동운동의 ‘다른’ 노동자 범주들을 포함시키려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사례였다. 이 기획은 농촌 노조운동에서 이미 광범위한 현상으로, 노동계급 내에 소기업가를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또한 CUT가 보다 적극적이고 소규모 단위를 통한 접근이 고용 창출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조직체들과의 협력을 신노조주의의 핵심 원칙으로 하는 것은 긴장을 가져왔다. 다른 조직들은 1990년대에 들어 보다 강력해졌고, 이 힘은 때로는 경쟁적으로 다가왔다. 산도발에 따르면, CUT의 대규모 동원과 비교해 볼 때 1990년대 MST의 토지 점거와 시위 행렬은 더욱 성공적이었고 이는 한편으로는 CUT와 PT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CUT와 MST 사이에 긴장을 가져왔다. 예컨대 농민운동, 특히 MST의 운동과 동원은 정부와의 협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었고 이는 CUT의 동원보다 여론에 보다 강력한 효과를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운동들 사이의 긴장은 어느 정도는 농업개혁에 관한 정부의 태도를 압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CUT도 독자적인 농업개혁 프로그램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정부가 그것 중 일부라도 채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농산물이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인만큼, 농업 개혁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를 수반하는 이슈다. 

요약하면, 신노조주의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은 노조의 요구를 일반적인 사회 발전 이슈들을 포괄하도록 확장하는 것과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투쟁에서 생겨난 여타 사회운동 및 조직들과의 강력한 연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CUT의 계급 개념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조합원의 이해를 시민권, 민주화, 경제 발전과 같은 넓은 이슈와 연관지어 해석하게끔 만들었다.

저항과 동원

198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노조의 전략은 파업 행동이었다. 1990년대가 되자 파업 회수는 줄어들었지만,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 것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페르난두 콜로르 드 메요의 당선과 탄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1989~1992)은 파업을 유발했지만, 그의 실패한 거시경제 안정화 계획에 뒤이은 경제위기는 파업운동의 지속을 막았다. 또한 1992년 그의 탄핵은 1984년의 대통령 직선제 운동에나 비견될만한 대규모 시위를 초래했다. 1994년에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두주의 보다 성공적인 거시경제 안정화계획(헤알계획)이 도입되고 초인플레가 진정된 후, 파업 회수는 월별 111회로 증가했지만 월별 파업 참가자 수는 줄어들었다([표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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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노동조합이 이용한 보다 일반적인 저항 형태는 대규모 동원과 총파업이다. 그러나 1992년과 콜로르 탄핵 이후, 파업은 보다 강력한 저항의 순환을 강화했던 1980년대 같은 효과나 회수를 기록할 수는 없었다. 경제 안정과 헤알 계획이 가져온 실업 증대, 그리고 카르두주 정부가 전투적 노조 전략에 대하여 취한 비타협적 태도의 결합은 총파업 조직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예컨대 1995년 석유 노동자들의 전국적 파업은 임금 교섭을 둘러싼 파업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국영 석유회사 페토로브라스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정치적 차원을 획득했다. 정부가 파업을 진압하기로 결정하자 그것은 곧 노동운동의 허를 찌르는 공세로 받아들여졌다. 1996년의 총파업은 대규모 동원을 수행하지 못했고, 노조 지도자들은 다수의 노동자들이 더 이상 파업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노동운동 스스로가 자신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시기에는 교섭을 보다 중시하게 되었다. 

마틴즈와 로드리게즈는 전 CUT 위원장 빈센테 파울루 다 실바의 말을 인용하며, 헤알 계획이 도입된 이후를 노조가 새로운 노동권을 세워내지 못하고 “노동의 유연화 제안과 노사관계 규제완화에 저항할 수단과 역량을 계속 상실해 가는 상황”에 처한 시기로 묘사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특히 실업의 위협 속에서, 파업 상황에서보다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게 더욱 힘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CONCLAT(모든 브라질 노동자 조직이 모인 전무후무한 대회) 20주년을 기념하며 2001년 8월23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회합에서 룰라는, 예전 같으면 방송차 한 대면 파업을 충분히 조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CNM의 페르난두 로페스에 따르면, ‘조직화/인플레이션 패러독스’가 심리적 효과를 가져왔다. 고인플레 시기에는 높은 임금인상률을 요구하기 더 쉬웠고,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직접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파업 중 손실된 임금은 파업을 통해 얻은 임금 인상으로 벌충되리라 예상되었다. 저인플레 시기에는 임금이 초인플레에 맞춰져있던 시절 보다 임금 인상률 요구 수준이 더 낮아져야 하고, 이는 구매력에 동일한 효과를 미친다 하더라도 파업 돌입을 주저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1990년대에 일어난 경제적 변화들에 덧붙여서, CUT는 노동자 저항의 정치적 환경도 변화했음을 인식했다. “독재가 종식되고 재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사회 행위자들이 나타났고, 노조의 투쟁은 더 이상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고유의 민주적 성격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군부체제에 맞서는 투쟁이 저항세력들 사이에 전례 없는 단결을 만들어냈지만, 이 단결은 1980년대에 민주화의 실제 면모들과 현장에서 일상적 노동투쟁이 현저해지게 되자 무력화되었다. 동시에, 노동운동을 포함하는 많은 저항 그룹들은 민주주의의 결과를 직시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참여자들 다수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보다 대중적인 참여나 사회적 개선으로 귀결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CUT 스스로가 1980년대의 이러한 문제를 권위주의 체제와 조합주의(coporatist) 노조구조가 부과한 정치적 제약으로 설명했다. 1990년대의 상황에 대하여, CUT는 경제적 문제들을 “노동권에 대한 공격에 맞서는 광범한 저항, 대안적 기획의 구체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동맹 정책 수립”을 통해 풀자고 제안했다. 

1980년대의 파업들은 노동조합의 조직구조와 정당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정치적 저항과 노동자 투쟁에서 새로운 그룹들을 포괄했다. 1990년대에는 정당성의 원천으로서의 성공적인 동원과 파업의 중요성이 덜해졌고, 이는 다른 형태의 노동자 행동의 중요성을 증대시켰다. 특히 공업 부문에서 일부 강력한 노조들이 대립적 전략 보다 회사의 재구조화 협상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또한, 노조들은 국제자유노련(ICFTU) 같은 전통적 국제노조 기구와 메르코수르 같은 지역기구의 대의제를 활용하여 국제적인 정당성과 지지 획득을 통해 노동권 옹호 운동을 강화시켰다. 새로운 국제적 노동자 연대- 특히 다국적기업 종업원들 사이의 초국적 연대를 증진하고 노동관련 NGO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들- 는 노동조합의 지역 운동에 정보와 지지, 연대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1990년대가 지나고 2002년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노동운동 내에는 새로운 동학이 포착될 수 있었다. 전국적 수준에서, CUT와 그 주요 경쟁자인 ‘노조의 힘(For?a Sindical)’은 전국 단체교섭 캠페인과 단일한 임금 캠페인 같은 공동 운동을 전개했다. 1999년에는 ‘파업 축제(festival de greves)’를 통해 개별 임금 캠페인을 조율하여 일련의 성공을 거두었다. 2000년 지방선거에서 PT의 승리 역시 노동자운동의 가능성에 새로운 믿음을 심어주었다. 물론 2002년 선거에서 룰라의 승리 역시 새로운 낙관에 기여했지만, 여러 논쟁적인 이슈들은 남아있다. 

룰라 정부 하에서 노동조합의 입장

지방 정부에서 PT의 영향력 증대, 경제개혁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불만 증가, 그리고 좀 간접적인 것이지만 1990년대 동안 변화한 노조 전투성의 성격 등이 모두 룰라의 대통령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룰라 정부 하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개선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지만, 2002년 8월 국제통화기금과 당시 미국 재무장관 폴 오닐의 압력 속에서 룰라가 카르두주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의 기조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면서, 그 기대들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또한, 선거운동이 룰라의 사회프로그램에 대한 직접적 기대를 삭감시키기도 했다. 2003년에 제출되고 시행된 주요 정책제안들 중 일부는 커다란 내외부의 반발에 직면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 준비 단계는 노동운동 내에서 룰라의 입후보를 지지하는 노조운동가들(특히 CUT)을 한편으로 하고, CUT의 주요 경쟁상대인 노조의 힘 지도자 파울로 페레이라 다 실바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치로 고메스를 지지하는 노조운동가들 사이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졌다. 결선투표에서 노조의 힘은 조합원들이 룰라에 투표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선거가 브라질 노동운동의 전통적 맞수인 이들 조직 사이에 만들어준 외견상의 단결에도 불구하고, 선거 이후에는 전통적으로 노동자당을 지지했던 그룹들 내에서조차 룰라에대한 심대한 반대가 나타났다. 

룰라 정부에 대한 처음 반대는 기아 제로(Fome Zero)와 탈빈곤 프로그램 등이 천명한 비현실적 목표들에 집중되었다. 기아 제로 프로그램은 룰라 선거운동의 간판 중 하나였고 여러 개의 구조적 요소들(경제성장을 통한 고용창출, 농업개혁, 사회정책개혁)과 빈곤 가정에 대한 식품 직접공급정책을 결합한 것이었다. 일부 비판자들은 그게 주로 선거용으로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정책은 화폐융통과 식량공급보다는 소득재분배와 빈민층에 대한 기회 창출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정부가 수립하고 IMF가 지지한 거시경제 및 재정 목표들은 사회정책을 위한 단기적인 지출의 증대가능성을 극도로 제한했다. 

사회보장과 연금개혁을 위한 룰라의 제안은 CUT에 가입해있는 공공부문 노조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았다. 공공부문 연금 체계와 공무원 노조원의 지위를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사회보장 체계는 매우 불평등하고 고비용 구조로 비판받지만, 룰라의 제안은 CUT와 PT의 주요 유권자들의 이해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카르두주의 개혁 계획으로부터 시작된 이 정책은 퇴직 연령을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로 연장했고 공공부문 연금에 한도를 부여했다(역주: 브라질은 일반회사의 경우 퇴직연금이 1천불로 제한되어 있으나 공공부문은 제한이 없었다). 광범한 저항과 함께 2003년 7월 공공부문 파업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연금개혁안은 같은 해 12월 의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브라질 조합주의 노사관계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은 신노조주의 노동운동의 핵심 요구 중 하나였다.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시스템은 노동운동을 파편화하고, 작업장 대의기구를 무력화하고, 전국이나 부문 수준에서 단체교섭 과정의 조정을 가로막곤 했다. 일부 노동이슈들이 1988년 헌법에 포함되었고 1990년대의 개혁들이 노동자 결사의 자유 조치들을 도입했음에도, 이러한 변화들이 노동운동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2003년 6월, 노동·기업·정부를 대표하는 3자 기구인 ‘전국 노동포럼(F?rum Nacional do Trabalho)’이 국회에 제출할 노동개혁 합의안을 만들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 제출안에는 3자가 참여하는 전국노사관계평의회의 설치, 노조 조직화를 위한 새로운 제안, 단체교섭의 새로운 방식, 노동쟁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 등이 포함된다. 지면의 제약으로 이 안을 여기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지역 수준부터 전국 수준까지 경제적 부문에 따라 노동조합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포럼이 했다는 점은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조합주의 노동체제 하에서 노조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직업별 범주에 따라 나누어지고 지리적 경계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하나의 경제 부문 내에서 단체교섭의 조율을 어렵게 했다. 또한, 이 안에 따르면 노조는 자신이 특정부문들의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총투표를 통해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과거의 의무 조합비는 자발적 멤버십과 함께 조합원이든 아니든, 노조가 대표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협상비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는 의무 조합비를 통해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많은 노조들이 적절한 대의 기구가 되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5년의 이행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 개혁은 브라질에서 노조조직과 대의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개혁안은 강제 조합비에 이권을 가진 이들, 그리고 개혁이 지역수준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조보다 중앙 노조조직의 손에 더 많은 권력을 가져다 줄 것을 염려하는 이들 양측에 의해서 비판받았다. 

결론

브라질 노동운동은 1970년대 이래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당시에는 다른 저항 운동들의 조직 및 정치활동 방식에 크게 영향 받은 파업운동으로 출발하여, 정치적 이행과정과 작업장 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파업은 정부가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적 고려와 정치 참여를 수용하게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노동운동은 정당한 정치행위자이자 브라질 노동대중의 대변자로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또한 노동자 지도자들이 1979년 창설한 노동자당과 함께, 브라질의 노동자 중심 좌파는 명확한 정치적 열망을 가졌다. 이는 지방선거에서의 성공에서부터 시작하여 2002년 룰라를 브라질의 대통령을 만든 선거로 정점에 달했다. 이러한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노동운동은 적대적인 경제적 및 정치적 환경에 대응하여 전략을 변화시켜야만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노조주의는 명확히 좌익적 운동인 것은 분명하지만, 초창기부터 정치적 주장과 요구를 보다 포용력 있게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한편으로, 신노조주의의 정치 프로그램은 노동자의 권리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넓은 지향을 가졌고, 노동법이나 노조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대중 집단들을 가능한 포괄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신노조주의는 무토지 농민운동처럼, 동일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운동들과 경쟁을 치러야만 했다. 

1990년대의 노동운동의 입장은 성공적인 대규모 파업의 시기, 노동운동의 역량이 파업과 시위를 통해 정치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들은 점차 단체교섭에 강조를 두는 전략들로, 그리고 노동자당의 경우에는 지역 및 전국 수준에서 정치적 성공의 증진을 중시하는 전략들로 대체되어갔다. 선거로 선출된 이상, 노동자당은 연합의 건설과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개혁의 시행이라는 면에서 험난한 파도를 헤쳐가야 하게 되었고, 이는 노동운동과 당 대오 내에서 반대를 키웠다. 

이러한 두 가지 발전 -과거의 전투적 노동운동 전략의 수정과 노동자당의 정치적 성공- 은 아마도 같은 과정의 두 측면일 것이다. 이 속에서 과거의 정치적 이상이 일정 정도 타협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재급진화가 노동운동이 정치 영역에서의 강력한 존재로 기능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