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총선 결과, 누가 ‘승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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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총선 결과, 누가 ‘승리’했는가

편집국 0 3,409 2013.05.17 09:03

 


inhwan_01.jpg지난 1월30일 실시된 이라크 제헌의회 총선을 두고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대단한 성공작’이라고 평가했다. 60%에 육박하는 투표율에다, ‘전면전’을 선포했던 저항세력의 공세도 우려했던 것보다 미미했던 탓이다. 어떻게든 선거는 치러졌고, 이제 이라크 정치권은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형식적인 절차를 차곡차곡 밟아가면서, 이라크를 중동지역 민주화의 상징이자 교두보로 활용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전략은 일견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악의 축’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악의 축’?

그러나 침공 1년 11개월여를 맞은 이라크는 여전히 혼돈의 도가니다. 세계 제2위의 산유국 한복판에서 고물 중고차량은 연료부족으로 멈춰서고, 주유소마다 휘발유를 사려는 주민들이 길게는 수km씩 줄을 늘어선다. 침공 직후와 마찬가지로 전기는 공급되는 시간보다 정전되는 시간이 많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가장 낙관적인 추정치로도 30~40%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진 살인적인 실업률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젊은이들은 하릴없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선거 직후 잠시 주춤하던 저항세력의 공세가 다시 불을 뿜고 있는 것은 이런 현실이 빚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이라크 선거관리위원회가 17일 공식 발표한 최종 선거결과를 보면, 시아파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시스타니가 지원한 ‘통일이라크연맹’(UIA)이 48.7%의 득표율을 올리며 제헌의회 전체 275석 가운데 과반수를 조금 넘긴 140석을 차지했다.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친 쿠르드족 연합체 ‘쿠르드리스트’가 75석(투표율 약 26.2%)으로 뒤를 이었고, 이야드 알라위 현 임시정부 총리가 이끈 ‘이라크리스트’는 40석(13.9%)을 얻는 데 그쳤다. 이밖에 가지 야와르 현 임시정부 대통령이 이끄는 ‘이라키스’가 5석,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소수종족인 투크코멘족의 ‘이라크전선’과 민족주의 진영이 각각 3석을 얻었고, 이라크공산당도 2석을 얻었다.
애초 60% 이상의 득표율을 올릴 것으로 예상됐던 통일이라크연맹이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음에도, 선거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대부분의 외신들은 이라크에서 ‘이란식 신정체제’가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전망을 새삼 쏟아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 상당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천문학적 예산과 막대한 인적피해를 감수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이라크를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악의 축’인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자리를 또 다른 한 축인 이란의 조종을 받는 ‘대리인’으로 채우게 됐다는 지적이었다.

inhwan_02.jpg이라크 총선 결과와 미국의 이해 관계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통일이라크연맹의 두 축인 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SCIRI)와 다와당은 후세인 정권 시절 이란을 근거지로 반정부 활동을 벌여왔다. 핵심 인사 대부분이 이란 망명객 출신인데다, 이들의 선전을 가능케 했던 시스타니는 이란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부 수니파들이 이들을 가리켜 ‘이란의 첩자’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는 전문가들의 말을 따 “미국이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기다린 게 시스타니의 축복을 받는 시아파 정권의 등장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이라크 시아파는 자신들의 이란 ‘형제'들과 합세해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미국의 ‘사활적 이해관계’와 정면에서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뒤늦은 ‘호들갑’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선거결과 발표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이라크가 ‘아야톨라들의 나라’가 될 것이란 우려는 끊이질 않았었다. 오히려 과반 의석을 간신히 넘긴 친이란계 시아파는 제헌정부 구성 과정에서 여타 정치세력과 합종연횡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점은 미국에게 불리할 게 없는 결과다. 각 정치세력의 치밀한 이해타산에 따라 들어설 제헌정부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주도에 이끌려 가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가능한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이 주도해 만든 ‘임시기본법’은 제헌 헌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기 위해선 이라크 전체 18개주 가운데 3개주 이상에서 인구 3분의 2 이상이 반대해선 안 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북부 3개주를 확보하고 있는 쿠르드족도, 중서부 4개주를 확보하고 있는 수니파도 시아파 신정체제를 받아들일 리 만무한 상황에서 이런 규정은 이들에게 사실상의 거부권을 준 셈이다. 『에이피통신』이 14일 제임스 스타인버그 브루킹스연구소 외교정책 연구실장의 말을 따 “미국으로선 특정세력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게 최선의 결과일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캐스팅 보트를 쥔 쿠르드족

이번 선거 최대 승자로 쿠르드족을 꼽는데 주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압도적인 투표 참여 열기 속에 예상을 깨고 단숨에 제2의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쿠르드족은 강력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됐다. 이미 향후 정국에서 쿠르드족이 ‘킹 메이커’가 될 것이란 전망에 이의를 다는 전문가는 없다. 그러나 높아진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돌발변수에 따른 상황 급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이런 우려가 결코 쓸데없는 걱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동의 집시’로 불리는 쿠르드족은 지난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 차례 종족의 운명을 건 ‘정치적 도박’을 벌인 바 있다. 우연찮게도 그 때마다 미국은 빠짐없이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했다. 지난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독립을 꿈꾸던 쿠르드족은 이란 편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후세인 정권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1988년 3월 ‘안팔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쿠르드족 탄압에 나서면서 북부 할라브자에선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쿠르드족 수천명이 한꺼번에 숨지기도 했다. 당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던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철저히 눈을 감았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뒤 미국은 쿠르드족에게 후세인 정권에 맞서 싸우라고 부추겼다. 당시 ‘아버지’ 부시 정권은 쿠르드족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봉기가 시작되자 이를 무시했다. 결국 수많은 희생자가 났고, 쿠르드족 보호를 명분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한 미국은 이라크 북부지역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후세인 정권을 직접 압박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기 전부터 쿠르드족은 미군에 기지를 내주는가 하면, 개전 초기부터 미군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에 맞서 싸웠다. 또 지난해 4월 미군의 수니파 거점도시 팔루자 1차 공세 때도 쿠르드족 민병대 ‘페쉬메르가’ 출신 병사들이 대거 투입됐다. 대부분의 수니파들은 이런 쿠르드족을 '반역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쿠르드족으로선 세 번째 ‘베팅’을 한 셈인데, 그 결과는 1년1 0개월여만에 제헌의회 선거에서 올린 기대 이상의 성과로 이어졌다.

독립 쿠르디스탄의 꿈은 날개를 펼 것인가

제헌의회 선거에서 예상 밖의 선전으로 잘랄 탈라바니 쿠르드애국동맹(PUK) 의장이 유력한 새 정부 대통령으로 거론될 정도로 이라크 정국에서 쿠르드족의 정치적 위상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급부상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주력이었던 수니파의 정치적 몰락과 맞물린 탓에 수니파 불만의 표적이 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이라크 전체 인구비율(15~20%) 보다 높은 득표율(약 26%)을 올리면서, 이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쿠르드족에겐 부담이다.

특히 제헌정부에서 쿠르드족이 과도한 권력지분을 요구하거나, 오랫동안 염원해 온 ‘독립’의 꿈을 섣불리 추진하다간 앞선 두 차례의 쓰라린 경험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쿠르드를 견제하기 위해 시아파와 수니파가 뭉치면서 ‘아랍-쿠르드 대립’이라는 갈등구도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탓이다. 제헌의회 선거와 함께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쿠르드족이 북부 유전지대의 심장부인 키르쿠크 주의회 의석의 약 60%를 확보하면서 이런 구도가 벌써부터 현실로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쿠르드족은 오래 전부터 키르쿠크를 독립 쿠르디스탄의 수도로 염두에 둬 왔다.

터키를 비롯해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이란 등지에도 상당수 쿠르드족이 흩어져 살고 있어, 이들 국가들도 이라크 쿠르드족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쿠르드족이 독립 쿠르디스탄이란 오랜 염원을 실현시키려 할 경우, 이들 국가의 강한 반발을 부를 것은 뻔하다. 특히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 반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터키 정부는 무력 개입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다. ‘킹 메이커’로 올라선 쿠르드족이 쉽게 불안감을 떼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고, 새 정부 구성을 주도하고 있는 시아파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 있다.

정부구성이 새로운 혼돈의 시작이 될 수도 

이야드 알라위 현 임시정부 총리가 저조한 득표율로 날개가 꺾이긴 했지만, 이를 친미파의 퇴조로 연결하는 시각은 성급한 분석이다. 새 정부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것으로 보이는 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 출신 압델 마흐디 현 임시정부 재무장관을 비롯해 통일이라크연맹의 새 정부 총리 후보로 확정된 이브라힘 자파리 다와당 당수 등 주요 인사들의 면면이 반미파로 보기는 어려운 탓이다.

마흐디 장관은 지난해 12월22일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라크 원유산업의 민영화 방침을 밝혀 미 행정부 안팎에서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파리 당수 역시 "미군 조기철수는 혼란만 야기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히는 등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맺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기사회생해 총리직까지 넘보고 있는 아흐메드 찰라비 이라크국민회의 당수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할 것은 당연해 보인다. 비록 지난해 갑작스레 '추한 결별'을 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결행에 결정적인 명분이 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설의 근거를 제공했던 인물이다. 미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은 여전히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 있다.

하지만 변수는 도처에 깔려있다. 선거불참을 선언하고 외곽에서 세를 불리고 있는 시아파 강경 지도자 무크타다 사드르가 미군 철수시한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설 경우,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다. 밖으로는 정치일정 참여 불가를 외쳤음에도, 그를 따르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이번 선거에서 제헌의회 진출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십 년 권력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수니파의 행보도 이라크의 미래에 있어 결정적인 변수임은 물론이다. 제헌정부 구성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권력배분 노력이 있을 테지만, 이들이 느끼고 있을 상대적 박탈감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적 몰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면서, 벌써부터 온건 수니파까지 저항세력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유력한 수니파 종교지도자 모임인 이슬람학자협회(AMS)는 선거 직후 미군 철수시한 공개를 조건으로 새 정부와 협력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 단체의 수장격인 압둘 살람 쿠바이시는 최근 사드르 쪽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이들의 향후 행보에 따라 이라크 정국이 다시 격랑에 휩싸이면서 미국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는 15일 이슬람성직자협회가 바그다드의 움 알쿠라 사원에서 열린 회합에서 이런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전했는데, 이날 회합에는 사드르 진영을 포함해 27개 조직이 참석했다.

“천천히 악화시키느냐 빨리 악화시키느냐 하는 것 뿐”

미 랜드연구소 제임스 도빈스 국제안보 및 국방정책센터 국장은 외교안보전문지 『포린어페어스』 최신호에서 미국이 이라크에서 직면한 상황을,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는 ‘모래구덩이’와 ‘진창’에 비유했다. 점령군 계속 주둔은 광범위한 저항만 부를 뿐이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철수를 결정할 경우 내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라크 민심을 잃음으로써 미국은 이미 전쟁에서 패했다”며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리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집권 2기를 맞은 조지 부시 행정부에게 남은 선택은 “상황을 천천히 악화시키느냐 빨리 악화시키느냐 하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준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 새 정부 최우선 과제가 치안유지라는 데 이견은 없다.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는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재건·복구 작업도 더는 늦출 수 없는 과제다. 수많은 정파와 종족의 치밀한 이해타산에 따라 들어설 정부가 이런 과제를 수행해낼 만큼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총선이 ‘끝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의 끝’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