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중된 탄압 뚫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색

노동사회

가중된 탄압 뚫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색

편집국 0 5,864 2013.05.17 09:37

 


wblee_01.jpg1980년 5월17일 쿠데타를 단행한 신군부는 광주민중들의 역사적 항쟁을 피비린내 나는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신군부정권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폭력적으로 지배체제를 정비해 갔습니다. 신군부는 '숙정'과 '정화’를 내걸고 거침없이 정적을 제거하였고 정치 사회 언론 등 각 부문으로 정화조치를 확대하였습니다. 노동계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 해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민주정의당을 발족시켜 합법적인 정부를 자처하였어요. 이것이 이른바 제5공화국 정권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와 민주화 항쟁

전두환 정권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를 강화하여 강압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강권을 휘둘렀습니다. 전두환정권은 중화학분야의 구조조정, 대량의 외국차관 도입, 자본자유화, 시장 개방을 단행하고 노동통제 강화에 의한 노동운동 무력화를 강행함으로써 독점자본의 위기를 타개하고 이윤축적 기반을 조성해주었습니다. 이로부터 농촌은 피폐해지고 부의 편중에 따른민중들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권력형 부정 부패현상은 5공화국 내내 계속되었고 외채위기는 갈수록 가중되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 후 억눌려있던 민심은 서서히 저항을 키워갔죠.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극한 투쟁으로 맞섰고 그 때마다 잔혹한 탄압양상이 폭로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의 개인적이고 간헐적이었던 저항은 기습적인 시위를 거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 퇴진만이 아니라, ‘반미항쟁’을 새로운 요구로 제기하였습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정권퇴진과 반미를 넘어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을 통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농활’과 ‘공활’은 당연한 활동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1983년 말 이른바 ‘유화국면‘을 연출하였고,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운동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치열한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어요.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이 끊임없이 일고 저항투쟁은 사회 각 부문으로 확산되었죠. 그리고 조직적 결속과 전국적 운동단체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러자 정권은 1985년 중반 이후 다시 탄압의 고삐를 당기기 시작하였어요. 그러나 저항세력은 이미 폭력적 탄압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정권과 맞설 만큼 성장해 있었습니다. 1986년 초 전두환이 국정연설에서 1989년에 가서야 개헌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히자 전국의 대도시에는 수십만의 대중집회가 열려 개헌요구를 분출시켰습니다. 이에 혁명적 위기를 절감한 미국은 ‘보수대연합’을 시도하여 야당과 재야민주화운동세력 사이에 분열을 획책했어요.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변혁을 위한 이념논쟁이 격화하였고 개헌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죠. 

논쟁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하느냐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사회변혁과 민주적 개헌을 위한 이 같은 열기는 5월3일 인천 집회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정권은 이를 탄압의 구실로 삼아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습니다. 민주화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지만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반독재투쟁은 다시 격화하였고 전두환이 헌법을 개정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선언하자 민주화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를 향항 열망은 마침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 결성으로 이어지고 6월 항쟁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정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압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권력은 무력화되었고 전국은 혁명전야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어요. 마침내 6월29일 전두환 정권은 민정당 대표 노태우를 내세워 직선제 개헌과 언론자유 보장, 국민의 기본권 신장 등 8개항의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외채의 급증과 대기업의 독점 강화

한편 전두환 정권은 1979년에 엄습한 경제위기를 외국차관의 대량 도입과 구조조정으로 대처하였습니다. 외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독점자본의 재편과 경영합리화를 통한 기업의 체질 개선, 둘째, 독점자본에 대한 국가의 대규모 지원, 셋째, 물가안정, 넷째, 중산층을 포함한 일반국민에 대한 수탈 강화, 다섯째, 생산성 향상 등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정권은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갖춰 주기 위해, 환율조정과 노동통제의 강화, 농업경제구조의 조정을 강행하였어요.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실질임금은 생산성 향상률을 크게 밑돌았습니다. 농업경제의 구조조정은 농산물 가격통제와 복합영농정책, 시장개방을 통해 이농촌을 파탄으로 몰아갔습니다. 농민들은 대량으로 농촌을 떠나 다시 도시로 찾아들게 되었죠. 그에 반해 정권은 정책적 혜택을 수출 대기업에 집중하였고 독점자본은 갈수록 비대해지게 되었죠. 

이와 같이 80년대 전반기 전두환 정권의 구조조정은 외국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대기업에 대한 특혜를 베풀어 주는 한편 노동통제의 강화와 농산물 가격통제 등 ‘생산 및 분배과정에서의 민중수탈‘을 통해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본 축적을 원활히 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비된 국내의 축적조건은 세계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른 ’3저 현상‘과 맞물려 1986년 이후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인이 되었죠. 자본은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면서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고 수출의 급증으로 외채위기도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활상태는 개선되지 않았어요. 재벌그룹들은 부동산 투기와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더욱 배를 불렸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해외 의존적 불균형성장 하의 독점의 심화, 부익부 빈익빈으로 집약되는 구조적 모순은 계속 심화되고 있었고 국민경제의 자생력은 더욱 취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1987년 7월 이후 거센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이죠. 또한 3저 현상과 같은 외부적 이점이 사라지자 경제는 다시 침체국면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전반기 한국 경제의 이러한 추세 속에서  임금노동자수는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노동자 내부구성도 많은 변화를 나타냈어요. 취업자 총수는 1980년 1,368만 3천명에서 1987년 1,635만 4천명으로 증가하였고 실업자는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은 1987년 21.9%(358만명)로 줄어들었고 제조업은 27.0%(441만 6천명),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서비스업은 50%수준(817만 2천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죠. 이 가운데 임금노동자수는 1980년 646만 4천명에서 1987년 919만 1천명으로 276만 7천명이나 증가하였습니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56.2%로 크게 늘어난 것이죠. 

1980년대 노동자구성은 연령계층별, 학력별로도 상당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연령계층별로는 29세 이하의 층은 줄어들고 30세 이상의 층이 늘어나고 있었죠. 학력별로는 국졸·중졸이 줄고 고졸·대졸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아직 취업자 증에는 농촌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도시출신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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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강제해산에 맞선 점거농성  - 출처: 성공회대 NGO 자료관 ]

노동대탄압과 노동조합운동의 침체

광주민중항쟁 후 국보위는 노동조합운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그 방향은 기존 어용노조 간부의 청산과 민주노조의 파괴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악을 통한 제도적 통제 강화였죠. 신군부는 노동청을 통해 8월21일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시달하였습니다. ①산별위원장급 12명의 즉시 사퇴  ②산별노조 산하의 지역지부 즉각 폐지 ③노동조합 정화운동 지속적 추진 등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 및 산별노조 위원장급 상층 간부 12명은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노조와 간부직을 떠났습니다. 

이어 신군부는 191명의 정화대상자(정화대상자 121명, 자진사퇴자 70명)를 선정하고 이들에게는 9월18일경부터 노조간부직을 사퇴하고 현장에 복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민주노조 간부들은 정화조치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퇴를 거부하였지만 상급단체와 회사로부터 보복을 받아 해고되거나 구속 수배되었어요. 이어 계엄사는 민주노조에 대한 파괴작업을 개시하였고 이를 위해 7월과 12월 노동운동가들을 강제로 대량 연행하였습니다. 계엄사는 이들에게 가차없이 협박과 폭행을 가하여 사표를 받았고 그중 일부를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한편 지역지부 해체 지시로 9월15일까지 105개의 지역지부가 해산되었고 조합원은 14만명이나 급감하였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12월31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이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법 개정은 노조결성에서부터 조직형태, 조직운영, 단체교섭,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어요. 그 주요내용은 기업별 노동조합의 강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설치, 노조설립요건의 강화, 단체교섭권의 위임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연장, 냉각기간의 연장,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노조간부의 경력과 노조비 사용제한, 공익사업 범위확대, 직권중재 대상확대, 노사협의회법의 신설 등이었죠. 이 밖에 신군부 정권은 노동대책회의 설치, 블랙리스트 배포, 위장취업자 축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변화를 차단하였습니다. 기업은 권력의 비호 아래 노동자들을 강력한 통제 아래 묶어두고 부당노동행위를 통해 노조활동을 봉쇄하였습니다. 

신군부는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악하고 곧 바로 민주노조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계피복노조는 해산명령을 받았고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는 위장폐업으로 해체되었으며 서통, 남화전자, 무궁화메리야스, 태창메리야스 등에서는 노조간부들이 축출되고 노조가 어용화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지만 정권의 폭력적인 파괴공격을 막아내지 못한채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어요. 그리고 1981년 9월 원풍모방을 마지막으로 민주노조운동은 그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노동운동은 극심한 침체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먼저 조합원수가 1980년 100만 수준에서 70만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노동쟁의도 급감하였습니다. 노동쟁의조정법에 의한 노동쟁의는 1982~83년 2년 동안 45건에 불과하였고 쟁의행위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또 노동부가 발표한 노사분규도 1980년 407건에서 1981년 186건, 1982년 88건으로 급속히 감소하였습니다. 

노동조합의 무기력한 대응과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색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의 총본산인 한국노총은 신군부 정권의 탄압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노총은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강조하고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으나 실천활동으로 연결시키지 못하였죠. 정권에 의해 강요된 정치적 편향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직 내부의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한국노총 회의장 통로에 철문을 설치한 것이나 개혁을 요구하는 5명의 전임간부를 해고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었죠. 한국노총의 결정적인 반시대적 행로는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으로 돌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이러한 탄압과 노동조합의 무력화 속에서도 노동운동은 완전하게 단절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밖에서 새로운 싹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활동가들은 정권의 감시망을 뚫고 끈질기게 운동의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고,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도 새로운 노동운동의 길을 찾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 5월, 70년대 민주노조 간부 일부와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조직하여 새로운 노동운동을 추진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노동운동은 변혁의 관점에서 학생운동과 굳건히 결합하고 제2노총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전민노련은 활동에 들어간지 얼마 안 돼 조직원이 모두 검거되어 당초의 구상을 펴지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되었고 특히 노동자용 교양도서를 많이 출판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기여했죠.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은 광주민중항쟁의 패배 이후 더욱 치열하게 모색됐습니다. 학생운동 출신들은 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한 ‘1980년 봄’의 전체적인 민주화 투쟁을 정리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노동운동이 중심이 되어 변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에 따라 학생운동 내부에는 학생운동 중심의 정치투쟁론과 노동현장에의 투신과 노동운동을 강조하는 ‘현장론’ 또는 ‘준비론’이라는 흐름이 형성되고 많은 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학생 출신들은 노동현장의 조직형태로 소그룹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70년대 이후 들어왔던 야학도 더욱 현장지향적인 경향을 띄면서 소그룹운동의 일환으로 크게 확산되어 가고 있었죠. 

노동운동의 활기 회복과 재야 노동운동의 대두

1984년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화국면이 도래하자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노동운동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발점은 1983년 말 이리와 인천지역의 해고자들이 전개한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이었습니다. 이 투쟁은 1978년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동일방직 투쟁에 대응하여 블랙리스트를 배포한 이후 군사정권이 또다시 1천여명의 해고자 명단을 사업장에 돌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한데 대해 항의한 투쟁으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죠. 

wblee_03.jpg이 투쟁 이후 새로운 운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의 창립이었죠. 한국노협은 1984년 3월10일 서울 홍제동 성당에서 2천여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결성되었습니다. 한국노협의 중심세력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출신들이었고 기업별 노조형태의 고립·분산된 운동을 극복하고 노동자를 주체로 하는 전국적 통일적 구심점을 형성한다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한국노협은 70년대 민주노조의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왕성한 지원과 민주화운동 세력과의 결합을 실천하였고 블랙리스트 철폐투쟁, 청계피복노조 복구투쟁, 노동법 개정 청원운동 등 제도개선투쟁을 주도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노협은 새로운 노동운동을 추구하는 자주적 공개기구로서 활동가들과 민주화운동세력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관심을 끌었죠. 그러나 한국노협은 정치투쟁에 대한 논쟁으로 1984년 말부터 분열되어 약화되었고 일부 활동가들은 한국노협을 이탈하여 다른 조직들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이어 1985년 2월3일에는 한국노협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산업선교회와 관련을 가졌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기노련)’이 창립됐죠. 이 밖에 1985년 4월10일에는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노동현장에서는 학생출신들이 대거 투신하면서 신규조직과 노동쟁의가 급증하였어요. 몇몇 노조는 치밀한 준비를 거쳐 결성된 후 완강한 투쟁을 통해 조직력을 키우고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노조결성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죠. 노조 신고절차가 완화되어 신고필증은 잘 나오는 편이었지만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때문에 많은 노동조합들이 파괴되거나 무력화되었습니다. 특히 84년 하반기에는 노동운동 활성화에 놀란 행정당국이 사소한 이유를 들어 노조설립신고증 교부를 거부하고 기업주는 노조를 파괴하거나 어용노조를 만드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84년 가을의 유니전, 협진양행과 85년 경동산업, 성원제강, 동일제강, 세화상사, 한국음향기기, 대한상운 등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노동쟁의도 크게 늘어났고 참가자 수나 노동손실일수도 크게 증가하여 노동자투쟁의 완강함을 나타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구, 부산 택시운전사들의 파업 시위는 노동자들의 울분이 얼마나 누적되어 있으며 투쟁의 폭발성이 얼마나 큰가를 적나라하게 나타낸 사건이었어요. 5월25일 사납금 인하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폭발한 대구 택시운전사들의 파업과 시위는 삽시간에 부산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택시운전사들은 이런 투쟁을 통해 요구조건을 관철해 냈으며 신규조직을 확대시키고 노동쟁의를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게 됐지만 박종만 노동자의 분신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본의 횡포는 여전히 잔인하게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활성화하자 정권은 1984년 하반기부터 다시 탄압정책으로 전환했어요. 대량해고, 위장취업자 검거와 비방, 블랙리스트 활용, 노조설립봉쇄, 휴·폐업, 형사처벌 강화, 구사대 설치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1985년에도 노동운동은 노동조건의 악화와 2·12총선에서 집권당의 패배를 배경으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노동쟁의는 급증하였고 임금인상 투쟁, 신규노조 결성투쟁, 어용노조 민주화투쟁, 블랙리스트 철폐투쟁, 한국노총 및 관계기관 점거농성투쟁 등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투쟁의 진전은 19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서울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게 됩니다.  

wblee_04.jpg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과 구로동맹파업 

인천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노조를 제치고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정추위)’를 구성하여 회사와 노조에 맞서 대항했습니다. 그러자 회사측은 1984년 12월28일 주동인물인 송경평 등을 해고해버렸어요. 노동자들은 1985년도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노조로 하여금 4월16일에 파업돌입을 선언하게 하였죠. 파업은 인천공장과 부산공장으로 확산되었고 파업 농성의 열기는 권력과 자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마침내 4월23일  김우중 회장이 단독협상에 나섰고 25일 새벽에는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합의내용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체로 근접한 것이었죠. 그러나 그 이후 경찰은 노동자 8명을 구속하였고 회사측은 해고 1명, 자진사퇴 1명, 3개월 정직 4명 등 징계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막강한 권력과 재벌기업에 맞섰습니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지식인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였고 노동관계법상의 제약을 뛰어넘어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갖고 조직적으로 쟁의를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대우자동차 투쟁은 당시 지식인 노동자들 사이에 비밀리에 유행하던 소그룹 활동방식에 충격을 던져 준 사건이었죠. 

대우자동차 투쟁으로부터 한달 후, 구로공단에서는 10개 노조가 연대파업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6월22일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등 3명을 구속하자 인근에 있는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삼성제약, 부흥사의 노조들이 연이어 동맹파업 또는 연대투쟁에 돌입한 것이죠. 노조들은 민주노조의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 인식하고 70년대 민주노조의 파괴과정을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연대투쟁에 돌입하기로 했어요. 

청계피복노조와 민주화운동 단체들도 구로연대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시위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폈고 대우어패럴 회사측은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를 가하여 농성을 해산시키고 노동자들을 몰아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고 구로동맹파업은 6일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죠. 연대투쟁에 참가한 노조는 10개에 약 2,500여명이었습니다. 투쟁과정에서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입건, 47명이 구류를 받았으며 700여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강제사직 당하였습니다. 

구로연대투쟁은 대우자동차 투쟁과 달리 경공업, 중소기업 분야의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이 투쟁은 1950년대 이후 기업단위 노조가 주체가 되어 벌인 최초의 지역연대투쟁이었고, 각 노조가 파괴의 위기에 직면하여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업별 노조 차원의 충실한 일상활동과 지속적인 연대활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또한 구로연대투쟁은 노동부장관의 퇴진 요구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나마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어요. 그리고 다른 부문의 민중운동에 각성을 촉구하면서 민중운동 내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다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로연대투쟁은 기업별 노조에 함몰되지 않고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할 수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변혁적 노동운동의 지향과 대중정치투쟁

1984년의 유화국면으로 인해 운동공간이 상대적으로 확대되자 이전의 소그룹운동을 중심으로 했던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비제도권 단체들이 결성되고 신규조직이 급증하였으며 노동쟁의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소그룹활동이 광범하게 확산되었죠. 그러나 1984년 하반기 이후 정치권력은 다시 탄압을 가중시켰고 노조결성 시도는 연이어 봉쇄되고 노조들이 파괴되었으며 부당해고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노동운동가들 사이에는 노동조합과는 다른 대중운동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 노력의 하나로 나온 것이 지역투쟁의 틀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985년 4월과 6월에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노투)’,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 등이 결성되었어요. 이 조직들은 현장기반을 갖지 못하고 운동이념도 분명하지 않아 곧 소멸하지만 당시 풍미하던 소그룹운동과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운동조직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죠. 이른바 ‘지역노동운동론’이 그것입니다. 지역노동운동론은 당시 대중상황에 비추어 고립분산된 소그룹 방식의 수공업적인 활동에서 벗어나 지역적 조직으로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이 끝난 후 경인지역에는 많은 단체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청계피복노조를 비롯한 몇몇 단체들은 1985년 8월25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86년 2월 7일에는 ‘인천지역 노동자연맹(인노련)’이 결성되어 서노련과 결합했죠. 이것이 ‘서인노’입니다.

서노련은 창립선언에서 노동자가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궁극적 과제이며 어떤 합법적 민주노조도 파괴되는 탄압상황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조직을 건설하지 않고서는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서인노는 대중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역사적 전망과 과학적 이론을 갖춘 전위들이 정치조직을 만들어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행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치투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노련은 ‘전국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전노삼민통)’를 결성하고 학생운동과 연대하여 노동자가 주도하는 개헌투쟁을 추진했죠. 서노련은 대중정치투쟁을 확산시키고 지역조직들을 묶어 ‘전국적 노동자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서노련신문’을 발간하였다가 86년 3월에는 인노련과 함께 ‘노동자신문’으로 통합 개편합니다. 

서인노는 민주화 운동역량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노동운동 세력이 크게 확장되는 추세 속에서 구로동맹파업이라는 경험과 성과를 토대로 결성하였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주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고 많은 활동가들을 결집시켰죠. 서인노는 스스로 설정한 노선에 따라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무릅쓰고 정치적 폭로와 선전 선동투쟁을 전투적으로 감행하였고 노동운동의 전국적 통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합니다. 그러나 전선의 통일은 이룩되지 않은 채 다른 세력들의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경제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결성된 남서울노동운동연합(남노련)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인노에 대한 반발과 비판은 86년도 임금인상투쟁이 저조한 결과로 나타나면서 고조되었어요. 86년도 임금인상투쟁은 서인노와 다른 세력의 분열 경쟁 속에 전개되었죠. 노동단체들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노동자들을 지원 격려하였고 현장지도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습니다. 노동쟁의도 급격히 늘어났고, 서울 신흥정밀에서는 노동자 박영진이 임금인상 투쟁 도중에 자기 몸을 불사르는 극한적인 저항투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투쟁성과는 극히 부진하였고 서인노에 대한 반발과 비판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조직 안에서는 분열과 갈등이 일었습니다. 서인노를 비판한 내용들은 대중을 무시하고 선도투쟁 만으로 나갔다는 것, 현장투쟁을 무시하고 정치투쟁으로 노동자들을 몰았다는 것, 다른 조직들을 거느리려는 패권주의에 빠졌다는 것, 조직 내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어요. 여기에다가 전두환 정권이 86년 5월 3일 인천투쟁 사태를 계기로 운동단체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자 서인노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자체 내부 논쟁이 격화하면서 소멸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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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공단에서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박영진 노동열사  - 출처: 성공회대 사이버 NGO 자료관 ]

한편 서노련이 출범한 때를 전후하여 학생운동과 지식인들 사이에는 사회변혁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어요. 그 논쟁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그룹, 제헌의회(CA:Constitutional Assembly)그룹으로 나타났죠. 이같은 논쟁은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내용은 대중과 전위를 어떻게 보고 실천하는가였습니다. 서인노가 와해되고 경인지역에는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서클이 형성되었어요. 서클들은 사회변혁에 관한 논쟁에 골몰했습니다. 이들은 실천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지역에 분산되어 대중노선과 통일적 실천을 주장하면서도 대중과 결합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기보다는 골방에서 전략 전술논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1986년 하반기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후, 대중정치조직과 서클중심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운동조직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전위조직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는 쪽과 대중조직 건설이 우선이라는 두 방향으로 나눠졌고, 대중조직으로서는 노동조합과 정치적 대중조직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논의는 노동운동을 지도할 전위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전위조직건설론, 정치적 대중조직건설론(PMO), 비공개노조론, 투쟁위원회론, 민주노조론, 자주노조론 등으로 나타났어요.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운동

1987년 1월 15일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와 4.13호헌 선언을 계기로 민주화투쟁은 역사적인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경제는 저금리·저유가·저물가라는 이른바 ‘3저 현상’을 바탕으로 단군 이래의 대호황을 구가하고 있었죠. 정부는 저율의 임금인상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기대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1987년 임금인상투쟁은 이와 같이 민주화투쟁의 격화와 경기호황이라는 유리한 조건과 임금억제정책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작되었어요. 임금인상 투쟁시기가 다가오자 노동운동단체들은 각종 결의대회 등을 개최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열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체불임금 청산, 노동조건 개선, 노동조합 결성, 노조민주화 등을 요구조건으로 하여 투쟁을 벌였죠.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건수는 전해에 비해 줄었고, 투쟁양상도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어요. 운동단체들의 역할은 침체되었고, 전해에 활발한 양상을 보였던 경인지역은 극히 저조했습니다. 임금인상 결과도 사용자측이 제시한 수준 아래에 머물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상반기 투쟁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어요. 노동운동의 불모지대로 일컬어지던 지방의 거대재벌의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그것이었죠. 현대그룹의 경우 울산의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엔진에서 집단행동이 일어났어요. 대우그룹에서는 85년 대우자동차 파업에 이어 창원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옥포 대우조선에서도 노조결성 움직임이 일어났죠. 종업원 7천여명의 부산 대양고무에서도 임금인상투쟁이 있었고,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조공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공노동자신문’을 발행하며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시흥의 기아산업에서도 2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와 낮은 임금인상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어요. 물론 이들의 투쟁은 뚜렷한 중심세력이 구축되지 않은, 자연발생적이면서 낮은 형태의 느슨한 투쟁이었고, 성과면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없었죠. 그러나 노동자들의 참여율은 매우 높았고 결속력도 매우 강했어요. 일정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조직적인 투쟁으로 나설 수 있으리라는 점을 예고해준 것이죠.

wblee_06.jpg한편 박종철 군의 고문 살해사건이 알려지면서 반독재투쟁은 다시 격화되었습니다. 4·13 호헌선언 이후 투쟁은 급격히 고조되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마침내 역사적인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야노동운동가들은 5월 27일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습니다. 6월 10일 이후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속에서 창원, 인천, 성남, 부산, 서울, 안양, 마산 등 대도시와 공업지대 노동자들은 연이은 시위투쟁에 참가했죠. 서울의 제2금융권 사무직 노동자들은 학생시위에 대한 경찰의 진압을 항의하다가 점심시간 및 퇴근시간을 이용하여 시위에 참가하고 명동성당 철야농성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이른바 넥타이부대의 민주화투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민주항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권력의 통제, 자본에 의해 강요된 잔업과 철야노동을 떨치지 못했으며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어요.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도 대부분 단순히 시위대의 일부였을 뿐 다른 계층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요구, 노동자계급 고유의 정치 경제적 요구는 극히 드물었죠. 그리고 정치파업과 같은 조직적이고 위력적인 투쟁을 벌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6월민주항쟁은 전두환정권의 ‘폭탄적인 6·29선언’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기나긴 투쟁의 여정 끝에 승리감을 만끽하였고, 민주화투쟁은 일단 직접적인 투쟁을 중단한 채 숨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직접적인 탄압의 주인공이 바뀌었을 뿐 절박한 삶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마침내 노동자들은 민주화투쟁 승리 후의 정지된 상황을 뚫고 독자적인 요구와 그 해결을 위해 스스로 떨쳐 일어나기 시작했죠. 87년 여름 노동자대항쟁이 그것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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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시청 광장에 운집한 민중들  - 출처: 성공회대 사이버 NGO 자료관 ]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