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운동사 [8] - 한국 노동자계급, 역사의 전면에 도약하다

노동사회

한국노동운동사 [8] - 한국 노동자계급, 역사의 전면에 도약하다

편집국 0 9,891 2013.05.17 10:00

작열하는 폭염을 다스리는
태풍이 남쪽을 강타하던 날
동해를 긁으며 회오리가 
미친 듯이 해안을 때리던 날
미친년 머리칼 같은 빗줄기를 몰고 
이 땅을 치때리던 날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르는 새가 있었다. 
폭풍이 심할수록 더 높이 나르는
새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 그것은 평등
그것은 노동해방의 불꽃
그 불꽃 날개를 단
투쟁의 불새.
87년 7월 우리는 모두
보았다. 고압선 이글거리는
어두운 공장 거리마다
동해의 풋풋한 가슴들이 훤히 열리는 것을 보았다.

(중략)

피맺힌 가슴에 선혈이 번지며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치닫는 바다를 보았다.

백무산 시 ‘전진하는 노동전사' 중에서 


활화산 같은 87노동자 대투쟁의 폭발

1987년 6월29일,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항쟁에 대한 항복선언을 발표하자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휩쓸던 민주화 투쟁이 진군을 멈추었고, 전국 대도시를 뒤덮었던 최루탄 가스도 가라앉았죠. 그러나 정지는 잠시일 뿐, 일주일도 못돼 이러한 정치적 정적은 깨졌고 또 다시 투쟁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역이 바로 노동자들입니다. 노동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폭발적인 파업투쟁에 나선 겁니다. 노동자들은 1987년 6월29일부터 10월31일까지 총 3,235건의 파업을 벌였고, 이시기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숫자는 122만 5천여명에 이르렀습니다. 

wblee_01.jpg
[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울산지역 노동자들   - 출처: 성공회대 NGO사이버자료관 ]

이 거대한 폭발의 발화점은 7월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이었죠. 파업투쟁은 현대그룹이 진을 친 울산을 소용돌이로 만들며 마산, 창원, 구미, 대구, 포항을 거쳐 내륙의 광산지대, 호남, 중부의 경공업지역을 휩쓸고 지나갔고, 수도권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8월에 들어서면서 전국은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으로 뒤덮었어요. 그러나 8월 말에 가까워지자 총자본은 노동자 투쟁을 ‘불순한 좌경용공세력이 개입한 것'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8월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을 계기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파업을 파괴하였죠. 그리하여 노동자대투쟁은 9월 말에 이르면서 크게 위축됐습니다. 

하지만 석달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은 그야말로 ‘십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대중운동의 비약이었어요.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 아래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노동기본권 보장, 직장민주화, 차별철폐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우고 노동법의 제약을 뛰어넘어 ‘불법파업‘을 단행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현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한 뒤 협상에 임했고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 집행부를 제치고 행동을 벌였고 노조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열심히 싸웠지만 특히 남성이 많은 중화학공업 분야의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하였죠. 

1987년 여름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규모의 파업투쟁이자 대중적 항쟁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켜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고 정치적 계급의식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은 투쟁을 거치면서 스스로가 이 사회의 발전을 주도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지요. 그러나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조직적 역량으로 결집되지 못했고 연대투쟁, 통일투쟁도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투쟁목표에서도 단위사업장의 경제적 요구에 그쳤고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민족민주운동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지 못하였죠.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은 1987년 9월 이후, 권력 및 자본과의 치열한 대립관계 속에서 노동자들 스스로가 극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조직, 이념, 투쟁의 주요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와 도약을 거듭하였습니다. 

조직 급증과 민주노조진영의 새로운 구축

87년 여름의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요구 성과는 열기에 비해서는 부진했죠. 그에 비해 새로운 노조결성과 어용노조 퇴진투쟁은 급진전됐습니다. 신규노조는 7월 한달만 126개에 이르렀으며 연말까지 1,361개의 노조에 22만명의 조합원이 새로 등록되었으니까요. 자본가들은 들불처럼 번져 가는 노조결성에 속수무책이었고 신규조직 등록 때마다 까다롭게 굴던 정부당국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죠. 어용노조 퇴진투쟁 역시 격렬하였습니다. 7월 이후 진행된 노동쟁의 가운데 446개가 어용노조 때문에 일어났고 노조집행부가 바뀐 곳은 쟁의사업장의 35.7%나 되었어요.

노동조합 결성은 1988, 1989년에도 거침없이 진행되어 1986년 노조와 노조원 숫자가 각각 2,675개, 103만 6천명에서 1989년에는 7,883개에 193만 2천여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불과 3년 사이에 노동조합은 3배, 조합원수는 76.8%나 늘어난 것이지요. 조직률이 1986년 12.3%에서 1989년에는 18.6%까지 상승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영역의 확장도 가져온 것이었죠. 사무, 전문직과 공공부문, 서비스분야까지 광범하게 확산되었으며 특히 그 이전까지는 금기시됐던 재벌기업과 공기업에서도 대대적으로 노조가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새로운 노조들은 예외 없이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하여 출발하였습니다만, 얼마 안가 한국노총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뭉쳐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죠. 노조들은 자체 조직의 수호에서부터 노조운영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교류를 넓혀갔습니다. 그리고 1987년 말부터 새로운 연대조직을 추진했고 그 주된 경로는 접근이 용이한 지역(제조업)·업종(비제조업)·그룹(대기업)이라는 세 가지의 틀이었습니다. 먼저 각 공단의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은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로 결집하였어요. 지노협은 1987년 12월14일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 창립을 시작으로 1989년 말까지 11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비제조업에서는 1987년 11월27일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을 시작으로 1989년 말까지 11개 업종별노조협의회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룹(대기업)에서는 1987년 8월 현대그룹노조협의회가 출범하였죠.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한국노총 조직과 구분하여 ‘민주노조'라고 불렀습니다 

민주노조들은 연대를 무기로 1988년 임금인상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고 실정법을 뛰어넘는 적극적이고 다양한 투쟁방식을 동원하였습니다. 투쟁은 거대기업과 공공부문을 강타하였죠. 4월의 대우조선 파업과 삼성중공업 민주노조 쟁취투쟁, 6월의 서울지하철 파업, 7월의 철도기관사 총파업, 연합철강 노조의 장기투쟁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마산·창원지역 노동자들은 공동임금투쟁과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을 전개하였고 정부출연기관 노조들은 업종별 공동투쟁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이런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에 각각 15.5%, 21.1% 임금인상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조합원대중의 주체적 참여 하에 이뤄지는 산업별 지역별 공동임투"라는 전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많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총자본의 억압에 대응하고 노동법 개정과 같이 전체 노동자 공통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중앙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8월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하고 11월13일에는 연세대에서 ‘전태일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 대중적 시위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어 민주노조진영은 사안별 공동투쟁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2월28일 ’지역ㆍ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를 결성했죠. 전국회의는 결성 당시 550개 단위노조에 16개 지노협과 4개 업종협이 참가하였고 조합원은 약 20여만명이었습니다. 

1989년에 들어서자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어요. 그 시작이 1월2일 풍산금속 노조에 대한 경찰력 투입이었지요. 이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 역시 1,616건의 노동쟁의가 말해주듯 거세게 전개됐습니다. 128일에 걸친 현대중공업 파업투쟁과 서울지하철 노조가 ‘합의각서' 이행을 요구하며 진행한 전면파업, 전국교직원노조 결성투쟁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정부는 가차없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탄압했고, 노동자들은 연대투쟁으로 이에 맞섰습니다. 연대투쟁은 부천, 구로, 마산·창원지역에서 벌어졌고, 그밖에 외자기업 철수반대투쟁, 방위산업체 공동투쟁, ’위장폐업' 철회투쟁 등이 공동투쟁의 형태로 전개됐죠. 이러한 투쟁 속에서 전국회의는 전국적 차원의 통일투쟁으로서 노동절을 전후한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 5월28일 결성된 전교조 지원투쟁, 노동법개정 투쟁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조의 전국적 중앙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어요. 그러나 정권과 자본은 전국조직건설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저지했죠.

가중되는 노동탄압 아래 민주노조 사수투쟁

민주노조진영은 1990년 1월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출범시켰습니다. 이날 보수3당은 통합을 이루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태세를 분명히 했습니다. 경찰의 봉쇄망을 피해 수원 성균관대학교에서 개최된 전노협 결성대회에는 8백여명의 대의원을 포함한 1천5백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였어요. 전노협은 제조업이 중심인 14개 지역협의체와 2개 업종별 노조 조직에 속하는 602개 노조, 20여만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조직으로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스스로를 “이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라고 규정했죠. 

wblee_02.jpg
[ 1990년 전노협 결성 및 사수를 위한 5월 총파업 투쟁 - 출처:성공회대 NGO 사이버자료관 ]

전노협이 출범하자 정권과 자본은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을 “계급투쟁과 폭력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한 탈퇴 강요를 비롯하여 ‘제3자 개입 금지조항'을 이용한 전노협 지도부에 대한 구속·수배 등의 강압 조처, 전노협 소속 노조에 대한 행정관청의 업무조사 실시,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 거부 유도, 파업사업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노협을 와해하고자 하였죠. 1990년 5월, 이 와중에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서울 교도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에 전노협은 1990년 메이데이를 기점으로 ’전노협 사수, 노동운동 탄압분쇄, 구속자 석방' 등을 내세우며 총파업을 전개하는 등 완강히 저항하였습니다.  

한편, 전노협에 가입하지 않은 비제조업 노조들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결성, 1990년 4월 KBS 방송민주화투쟁과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적극 대항하면서 1990년 5월30일 ‘업종노동조합연맹회의'(업종회의)를 출범시키기에 이릅니다. 업종회의는 12개 사무·전문직 노조협의회가 참가하였고 조합원수는 전노협과 비슷한 20만명이었습니다. 업종회의는 “사무, 전문, 서비스직 노동자의 단결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과 권익실현을 위해 공동투쟁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발전과 통일을 목적으로 한다."고 스스로의 위상을 규정하였습니다. 

업종회의 구성 조직 가운데 사무금융·언론·병원·건설·전문·대학노련과 전국강사노조 등 7개 연맹(노조)이 합법성 확보투쟁을 통해 법적 지위를 확보하여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적 기틀을 마련하였죠. 업종회의는 노조탄압분쇄, 각종 악법철폐 투쟁을 벌였고 전노협과 연대하여 권력과 자본의 탄압에 맞섰습니다. 그 때마다 노태우 정권은 가차없이 공권력을 동원하였고, 노동현장은 해고·수배·구속 사태가 일상적으로 반복됐죠. 1988년에 80명 정도이었던 구속 노동자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년 동안 1,893명에 이르렀고 해고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습니다. 

총자본의 악랄한 탄압 아래 민주노조들이 전노협과 업종회의로 결집해 가는 동안 대기업들도 1990년에 들어서서 단결을 모색했습니다. 그 계기가 전노협을 비롯한 민주노조에 대한 정부의 전면적인 압박과 본격화된 임금억제정책이었지요. 7개 대기업 노조들은 1990년 2월26일 ‘전국대기업노조비상대책회의'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단위노조 집행력이 취약한데다 직권조인 파동이 일어남으로써 와해되었고, ‘민주파'로 교체된 대기업 노조 대표들은 1990년 12월9일 경주에서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연대회의)를 결성했습니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1991년 2월10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간부수련회를 갖고 해산하던 연대회의 소속 노조간부 67명을 연행 구속했습니다. 연대회의는 전노협과 함께 대정부투쟁을 벌였지만 정부의 강경한 탄압과 지도부의 공백을 이기지 못하고 4개월만에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어요. 

한편 1987년 이후 노동자대중의 질풍노도와 같은 전진에 충격을 받은 한국노총은 1988년 말, “굴종과 예속의 역사를 청산"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며 개혁을 서둘렀습니다. 한국노총 건물 안에서 하는 농성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철문을 제거하는가 하면, 대중집회와 시위를 벌여 사회개혁을 촉구하면서 노동자들로부터 대표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죠. 한국노총은 1991년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여 ‘민주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주의'로 운동기조를 새로이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운동기조에서 한국노총은 반공주의를 삭제했지만 계급투쟁적 운동은 배격하였고 전반적으로 경제적 조합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았지요. 

또한 한국노총은 1989년 9월 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친노동자 후보를지지, 지원하는 선거활동을 벌이는 한편 경실련, 흥사단 등과 함께 경제개혁촉구 범국민대책회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 우리쌀지키기범국민대책회의 등을 구성하고 각종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노조대표의 의회진출에 주안점이 두어져 있고 기층 민중운동이나 통일운동을 배제한 채 시민운동과의 연대만을 추구하는 것이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종래의 권력편향적이고 폐쇄적인 태도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죠. 그러나 한국노총의 개혁의지는 1994년, 1995년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임금가이드라인에 합의함으로써 혼란에 빠져버렸어요. 이른바 ‘노·경총 합의'에 대해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큰 반발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민주노조진영에 의한 한국노총 탈퇴운동이 급속히 확산됐죠. 이로써 한국노총은 세력이 급격히 감소했고 지도력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는 1996년 총파업투쟁을 통해 대전환의 기회를 찾게 됩니다.

민주노총 건설과 노동운동의 지형변화 

1989년 강경한 탄압정책으로 전환한 노태우 정권은 경제침체를 빌미로 1990∼91년에 ‘한자리수 임금인상', 1992년 ‘총액임금제' 등 임금억제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동관계법 ‘개악'을 시도하는 등 억압의 강도를 더욱 높여갔습니다. 이에 민주노조진영은 이제까지의 일회적 공동투쟁, 사안별 연대투쟁을 극복하고 노동법 개정이라는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투쟁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중앙 조직체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다시 한 번 같이 하였어요. 여기에는 정치정세의 변화도 작용하였습니다. 정부가 1991년부터 유엔 가입과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추진했고 1992∼93년 총선거와 대통령선거 등 정치일정이 다가옴에 따라 노동법 개정에 유리한 정세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주·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배경으로 전노협, 업종회의는 1991년 10월9일 ‘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 공대위)를 결성하였어요. ILO 공대위는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을 통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을 목표로 내건 “한시적인 공동투쟁체"였죠. ILO 공대위는 전국 9개 지역에 지역위원회를 두고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국회 청원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 11월10일에는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6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태일 정신 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또한 ILO 공대위는 ILO에 한국정부를 제소하여 민주노조진영이 한국 노동조합의 일각을 대표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ILO로부터 노동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이끌어 냈죠. 이러한 활동은 국가와 자본에게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진영 투쟁의 정당성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은 여기서 얻은 자신감을 토대로 전국 중앙조직 건설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노조 조직률은 1989년을 고비로 매년 낮아지고 노동쟁의의 성과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민주노조의 중앙조직은 법률상 복수노조 금지조항 때문에 합법성을 확보할 수가 없었죠. 또한 정부는 1992년 총액임금정책과 1993년 노·경총 합의를 통해 임금억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민주노조진영을 압박했습니다. 거기다가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민주노조진영은 전체 운동진영을 포괄하고 노동운동의 당면과제를 수행하는 ‘공동사업추진체'로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1993년 6월1일 정식 발족시키게 됐습니다.

민주노조진영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1993년 등장한 김영삼 정부는 국제화, 세계화를 명분으로 하는 통제정책으로 대응했어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적용하여 전노대 소속 노조간부들을 구속ㆍ수배하는가 하면, 노동쟁의 사업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고 ‘노동법 개정 무기한 연기' 방침을 천명했습니다. 전노대는 정부에 대한 투쟁방침을 분명하게 하는 한편 1994년에는 노·경총 합의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투쟁전선을 구축하고 ‘어용노총 탈퇴 및 맹비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여 광범위한 중간층 노조들을 견인했죠. 전노대는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와 전국기관사노조협의회의 투쟁과 한국통신에서 민주 집행부의 등장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통해 수많은 노조의 한국노총 탈퇴와 전노대 가입, 특히 전지협과 대공장 노조의 전노대 가입을 이끌어냈죠.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전노대는 1994년 11월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를 공식 발족시켰습니다. 당시 전노대의 조합원수는 40만여명이었지만 자동차, 조선, 공공부문 등 대규모 국가 기간산업의 기업들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민노준은 “투쟁 속에 민주노총을 건설한다"는 방침 아래 1995년부터 임단협 투쟁, 노동법 개정투쟁과 함께 사회개혁투쟁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와 함께 민노준은 민주노총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죠. 민주노총 건설에 대해 정부와 자본은 직간접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방해했으나 새로운 노동운동을 향한 노동자들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wblee_03.jpg
[ 1995년 민주노총 창립 대의원대회   - 출처:성공회대 NGO 사이버자료관 ]

마침내 1995년 11월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연세대 대강당에서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역사적인 창립대회를 가졌습니다. 민주노총의 출범에는 15개 산업(업종)조직과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조직이 가맹했고 단위노조는 861개 조합원은 418,154명이었습니다. 창립 대의원대회에는 366명의 대의원 가운데 326명이 참가하였고 초대 위원장과 사무총장에 권영길, 권용목을 선출하였죠. 민주노총은 출범에 즈음하여 이렇게 선언합니다.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인 우리는, 100여년에 걸친 선배 노동자들의 불굴의 투쟁과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결성한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주·민주·통일·연대의 원칙 아래 뜨거운 동지애로 굳게 뭉쳐 노동자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고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의 그 날까지 힘차게 투쟁할 것을 선언한다."

이렇게 하여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새로운 노동운동에 대한 염원은  민주노총 건설로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투쟁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켜왔고 노동운동의 이념도 ‘노동해방'이라는 구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변혁적 내용으로 변화시켰죠. 이로부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1950년대 이래 유지되어 온 대한노총 또는 한국노총 중심의 일방적인 지배체제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민주노총의 결성은 자주적 노동운동의 계승이면서, 19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되고 발전된 민주노동운동의 집약된 성과이었지요. 민주노총의 출발은 노동운동의 통일과 발전을 추진할 새로운 주체의 대두이며, 사회운동 또는 민족민주운동을 주도할 중심 역량의 성장이라는 의의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정치파업: 1996∼97년 총파업투쟁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 동안 노동운동의 큰 목표는 노동악법 개정이었고 그것은 한국사회의 핵심적 민주개혁과제의 하나로 부각됐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의 유연화에 대한 자본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어요. 이런 배경 하에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신노사관계'의 구축을 목표로 하여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습니다. 노동법 개정작업은 1996년 5월9일 대통령 자문기구로 구성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의 중심의제였고, 민주노총도 아직 합법성을 갖지 않은 채 여기에 참여하였지요. 노개위에서는 6개월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합의에는 실패했습니다. 

wblee_04.jpg
[ 1996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총파업중인 노동자들이 당시 신한국당 당사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 출처: 성공회대 NGO사이버자료관 ]

쟁점은 노동기본권 보장과 정리해고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의 유연화였어요. 그런데 정부는 1996년 12월3일 사용자의 요구에 가까운 내용으로 개정안을 의결하였고 여당인 신한국당은 12월26일 새벽 단 6분만에 안기부법개정안과 노동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켜버렸습니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 지령을 산하조직에 내렸고 이에 따라 자동차, 금속, 현총련, 전문노련 등에서 파업에 돌입했죠. 12월26일 85개 노조, 14만2천여명이 참가했던 전국적 총파업은 매일 확대되어 12월31일이 되면 연인원 10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총파업은 전국 각지에서 규탄 및 총파업결의대회와 함께 전개됐어요. 집회에는 매일 십수만명이 참가했죠. 한편, 한국노총도 12월27일 4시간 ‘시한부파업'을 지시하였다가 민주노총의 파업이 대규모로 완강하게 전개되고 정리해고제 등 노동법개악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거세다는 판단 아래 파업을 연말까지 연장했습니다. 또한 지역별로 연일 집회를 열어 신한국당을 규탄하였죠.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자 사회운동단체들도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날치기통과에 대해 국민의 80%이상이 반대를 표시하였고 총파업에 대해서는 절반이상이 지지의사를 보였죠. 또한 국제노동단체와 각국 노동단체들도 날치기통과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고 총파업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사를 표명하여 왔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1997년 초 휴일이 지난 후 총파업은 더욱 확대됐습니다. 파업은 민주노총의 2단계 투쟁지침에 따라 자동차, 금속 등에서 언론, 사무, 전문, 서비스직 노조로 확대됐죠. 민주노총 조합원 중 파업참가자수는 1월3일부터 14일까지 매일 20만명을 돌파하여 총 169만 5천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한국노총은 14일부터 시한부파업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7개 연맹 1,648개 노조 422,450여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이날 한국노총 금융노련과 민주노총 사무노련이 연대집회를 열었으며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과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이 명동성당에서 만나 연대투쟁을 논의하였죠. 양대 노총은 이 논의에서 5개항의 투쟁과제에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강경 대응을 천명했고 신한국당은 여론 무마와 시간끌기 작전에 골몰하였습니다. 야당 역시 여야영수회담 개최만을 요구할 뿐 소극적으로 대하였죠. 

사회각계의 참여와 지지가 확산되는 가운데 1월15일 총파업은 390개 노조 35만3천여명이 참가하여 1996년 12월26일 이후 최대규모를 보였고 1997년 1월18일까지 참가자수는 90만 5천명을 훨씬 넘어섰어요. 한편 민주노총은 1월18일, 우선 장기파업에 따른 조직역량을 고려하여 주1회 수요총파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2월18일부터 4단계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공동투쟁방침을 발표하고 1월26일에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공동대회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국민적 저항이 갈수록 격화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종교지도자들과의 만남과 여야 영수회담을 거쳐 2월17일 마침내 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노동법 재개정을 천명합니다. 이에 따라 1997년 3월11일 임시국회에서 여야간의 합의로 날치기 법안을 폐지하고, 4개 개정안을 통과시켰어요. 그러나 개정 노동법은 날치기 노동법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상급단체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곧바로 폐지하고, 정리해고제 시행시기를 2년 유예한 것을 제외하면 극히 부분적인 개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총파업을 마무리한 후 민주노총은 1997년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개선투쟁과 사회개혁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에 나섰죠. 임단투는 4대 목표와 15대 요구 쟁취에 중점이 두어져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정치세력화는 '1998년 지방자치단체 선거 진출 → 1998∼99년 정당건설 → 2000년 국회원내진출'을 경로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말 대통령선거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대통령 후보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죠. 한편 한국노총은 대통령선거와 관련하여 300대 요구를 제기하고 ‘정책연합'을 추진했습니다. 정책연합은 야당인 국민회의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결실을 거두게 됐죠. 

외환위기와 노동운동의 혼란 그리고 혁신의 몸부림

김영삼 정권의 임기 끝 무렵인 1997년 11월, 돌연 외환위기가 도래했습니다. 국제금융기구(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사유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정책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공식 제의했습니다. 한국노총은 국민회의와 정책연합을 선언하고 있는 상태였고, 민주노총도 1998년 2월 총파업을 배수진으로 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총파업은 불가능하며, 협상을 통한 수정 없이 정부측 원안대로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근로자 파견법이 제정되면 노동자 대중의 상태는 더욱 악화된다는 판단 하에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한 바 있었지요. 

그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노사정위원회는 치열한 논의 끝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했고 1998년 2월9일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잠정 합의하였습니다. 잠정 합의의 내용은 노동기본권을 보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등)받는 대신 노동계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의 법제화에 동의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에 노력하며, 정부는 고용 및 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월9일 열린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에서는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가운데 기립투표를 벌여 사회협약안이 부결됐습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총사퇴를 하였죠. 새로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총파업 돌입을 결의했습니다만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2월13일 임시국회는 정리해고를 법제화하고 근로자파견법을 제정했습니다. 

민주노총은 1998년 3월31일 개최된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혁신을 내건 2기 지도부를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5월20일 개최된 대의원대회에서는 “고용안정 및 생활안정 쟁취를 위해 5∼6월에 총파업을 기본으로 하는 총력투쟁을 배치한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아울러 정리해고 철폐 등 4가지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정부 교섭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1일 노동절 대회에서는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이고 5월27일에는 1차 총파업을 전개했죠. 이후 민주노총은 노정합의 → 총파업 투쟁 철회, 노사정위원회 복귀 → 공공부문 구조조정 → 7월10일 노사정위원회 탈퇴 → 7월23일노사정위원회에 복귀 등의 과정을 거쳐, 1999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는 합의사항 불이행을 이유로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최종 의결했습니다. 

wblee_05.gif

이렇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노정합의 및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철수를 되풀이하면서 저항하는 사이 자본과 권력의 구조조정은 거침없이 자행됐습니다. 임금동결, 삭감이 성행하고 ‘고용이냐 임금이냐' 택일하라는 자본의 공세는 갈수록 가중되었지요. 1998년 6월 금융노조의 총파업, 9월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과 10월 만도기계노조의 파업,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그리고 5월 이후에는 민주노총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및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 등이 이어졌습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으로 맞섰습니다만 투쟁은 방어적 수세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각개격파되고 말았죠. 한편,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협상을 통한 위기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금융산업 및 공공부문의 민영화 등이 강행되자 마침내 정책연합을 파기하고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죠. 

21세기로 들어서서도 노동상황은 여전히 엄혹했습니다. 외환위기는 빠른 시기 안에 모면하였지만 자본의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 공세는 일상화하였고, 노동시장에서는 실업사태와 유연화가 범람하였습니다. 대량실업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가운데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로 위협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과 차별로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됐죠.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기업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사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만 그 성과는 부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존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분신투쟁으로 절박한 요구를 제기하였습니다. 

wblee_06.jpg
 [ IMF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태풍이었다.  - 출처: 성공회대 NGO사이버자료관 ]

노동조합운동은 현장조직력의 무력화, 지도력의 약화, 대중투쟁의 위력상실만이 아니라 운동의 통일성, 연대성에도 심대한 취약성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로 노동운동의 위기론이 조직 안팎에서 제기됐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들이 ‘노동운동의 혁신'이라는 목표로 경주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와 한국노총의 '21세기위원회'는 바로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동운동의 혁신과제는 기업별 노조체계 타파와 산별노조 건설, 노동운동 이념 재정립,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조운영 개혁 등으로 집약됐어요. 이에 따라 1998년 이후 산별노조 건설운동이 민주노총에서는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언론노조, 민주택시노조, 사무금융노조, 대학노조 등에서 진전되어 조금씩 결실을 거뒀고, 한국노총에서는 금융노조, 택시노조 등에서 산별노조 전환이 추진됐습니다. 특히 금융노조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사상 최초의 총파업을 통해 산별노조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죠. 

노동자정치세력화도 지방자치단체 진출을 늘려 가며 꾸준히 진행됐죠. 그리고 2004년 4·15 총선에서는 한국노총은 녹색사민당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다가 참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의회에 진출시키는 역사적 성과를 거뒀습니다. 

wblee_07.jpg
[ 2000년 민주노동당 창립대회 ]

신자유주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노동의 수량적 유연성과 임금소득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지금 노동운동은 여전히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노동운동 고립화를 위한 공세도 갈수록 거세져 가고, 노동자계급 내부적으로도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짐으로써 노동조합의 대표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 또한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성공과 패배, 도약과 침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지금 노동운동은 스스로의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부단히 자기혁신을 펴나감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