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변화와 분열된 노동운동

노동사회

정권의 변화와 분열된 노동운동

편집국 0 4,456 2013.05.17 09:59

 

이 글에서는 태국 노동운동의 변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정권과 정책의 변화가 어떻게 태국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국가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는 국가를 변화시킨다. 사회세력 중 하나인 노동운동은 국가를 변화시키는 주요 세력이기는 하지만 태국의 노동운동은 국가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정권과 정책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운동이 여느 사회운동처럼 국가 정책과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와의 관계 속에서 연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태국의 노동운동은 국가와 정면대치하기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통해 주조되고 유지되어 왔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태국 노동운동의 취약성은 노동운동 세력의 전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성격과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글은 태국 노동운동의 취약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선 역사제도적 관점에서 정권과 정책의 변화가 어떻게 노동운동에 변화를 주었는지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현재 탁신(Thaksin)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esjung_02.jpg국가정권의 변화와 태국 노동운동 

태국 노동운동의 취약성의 주요 원인은 분열된 노동운동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국 노동운동의 분열에는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국가 정책에 따라 태국 노동운동은 분열을 거듭했고, 노동운동의 양분화는 시기마다 성격은 달랐지만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시기를 구분한 후, 노동취약성을 주제로 태국 노동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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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932년 쿠데타 전후 
② 사릿(Sarit)의 온정주의적 군부정치
③ 1973~76년 민주화 
④ 1976년 이후 1981년까지의 계엄령 
⑤ 1980~90년대 초의 준 민주주의 
⑥ 1992년 민주화 이후 
⑦ 1997년 헌법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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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932년 쿠데타 전후

1920년대 이후로 노동 정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중국인 이민자들이 태국 사회에서 주요 노동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대규모의 태국인들이 공공 사업체에 고용되면서 노동조직들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도 노동조건을 향상하기 위한 시위와 파업이 종종 조직되었다. 특히 1932년 절대왕조에 반대하며 발생한 군부 쿠데타에 노동조직들이 가담하면서 세력이 커져갔다. 

1932년 쿠데타 이후의 노동운동은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했다. 1946년에 총리가 된 프리디(Phridi)는 정당정치를 허용하고 경쟁적 선거를 실시하는 등 개혁정치를 펼치면서 노동자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로 인해 노동조직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나 프리디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7년 피분(Phibun)의 쿠데타로 프리디 정권이 막을 내리자 정당정치와 노동운동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피분은 긴급조치법과 반공법을 제정하여 정당정치를 금지하고, ‘민족주의’의 미명아래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특징은 중국 이민노동자들과 태국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다. 중국노동력과 태국노동력은 제한된 노동시장 안에서 서로 경쟁을 하였고, 서로 다른 노조 안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분열이 심했다. 주로 제분소, 부두 등의 사업장에 고용되었던 중국인들은 1949년에 공산주의 세력과 함께 ‘중앙노조(Central Labor Union)’를 설립하였다. 중앙노조는 노조의 정치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교육, 조직화 사업 그리고 고용주와의 교섭을 진행했으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파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피분정권은 이러한 노동운동을 탄압하면서 중앙노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도시 노동시장의 중국노동력을 태국노동력으로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훈련 그리고 쿼터제 도입 등을 통해 태국인들의 취업률을 높이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공공사업체에 종사하고 있는 태국인들을 조직화하여 ‘태국노동조합(Thai Labor Union)’이라는 어용 노조를 설립하고, 노동자들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며 길들이기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동정책은 ‘경제 민족주의’라는 미명아래 행해졌다.  

 ② 사릿(Sarit)의 온정주의적 군부정치

경제민족주의는 1960년대부터 조합주의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노조의 분열은 중국 이민노동자와 태국노동자 사이가 아니라 공기업과 사기업의 분열로 바뀌었다.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인해 농촌 인구가 도시의 노동시장으로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태국 노동인구가 중국 이민노동자 수를 추월하였고 중국 이민노동자 세력은 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1958년 사릿(Sarit)이 쿠데타로 군사정부를 세우고, 온정주의적인 조합주의 정책을 펼쳤다. 

사릿 정부는 “노조는 파업을 조장하며 노조와 같이 대립적인 성격의 조직은 태국의 고유문화가 아니다”는 이유로 노조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인해 사기업 노조 활동은 탄압받았고 가끔씩 파업은 있었지만 소규모였으며 쉽게 진압되었다. 사기업 노조 활동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지만, 공기업 노조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군부가 소유하거나 투자를 하고 있던 공기업들은 공기업 안에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작은 노동조직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군대의 비호를 받는 공기업의 노동자들은 사기업 노동자보다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받으면서 어용조직화 되었고 이로 인해 사기업과 공기업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③ 1973~76년 민주화   

여전히 공기업과 사기업 노조의 분열이 지속되는 가운데, 1973년부터 1976년까지 태국은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이 와중에 노동운동은 다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군사정부가 몰락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학생운동 세력과 연합한 사기업 노조는 조직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이들의 파업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1973년 파업 건수는 501건, 1974년 357건, 1975년 241건, 1976년 133건으로 1960년대 후반의 파업 건수가 15~25건 사이에 머문 것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 노조의 조직력이 얼마나 강화됐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조직화를 돕고 있었지만 공기업 노조는 학생운동이나 진보진영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④ 1976년 이후 1981년까지의 계엄령

1975년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은 내분이 일어 그 세력이 나뉘었고 노동운동도 주춤하였다. 그러자 보수 세력들이 점점 힘을 얻으면서 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끄리앙삭(Kriangsak)의 쿠데타로 1976년에 막을 내린다. 이 시기가 태국 역사에서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인 대중동원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태국은 이때까지 전국적인 대중동원의 경험이 없었다. 대부분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에서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 대규모 대중 동원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경험이 없던 태국은 대중동원이 다른 나라보다 일반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다. 

끄리앙삭의 쿠데타로 다시 군부체제로 돌아간 태국에는 1976년부터 1981년까지 계엄령이 내려진다. 노동운동은 계엄령 시기 동안 극도로 탄압을 받는다. 파업 건수가 1977년에 7건, 1978년에 21건, 1979년 64건 그리고 1980년에 18건으로 급속도로 줄었고, 파업노동자 수도 1973~76년 사이에는 10만명이 넘었던 반면에 이 시기에는 4,000~5,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⑤ 1980~90년대 초의 준 민주주의

1980년대의 국가 정책은 군부 시절의 국가 조합주의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경제정책이 수출지향 성장정책으로 바뀌었고 노동정책 또한 ‘자유주의적 조합주의(liberal corporatism)’로 탈바꿈되었다. 자유주의적 조합주의에서는 국가 조합주의와 유사하게 자본과 노동이 국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지만, 자본의 경우 경제 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노동운동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귀족노조로 군림했던 공기업 노조들은 그동안 정치적인 투쟁에 전혀 가담하지 않고 주로 공기업의 노동복지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반해 이 시기부터는 공기업의 사유화에 대한 반대 투쟁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방기업가들의 활발한 의회 진출로 많은 국회의원들이 공기업의 사기업화를 주장하였고, 정부는 1983년에 실제로 몇몇 공기업을 사기업화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기업 노동자들은 사기업화 반대를 주장하면서 강경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로 인해 공기업노조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자본가들은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줄여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기업화를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기업가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군대의 비호 아래 있던 공기업노조가 약화함으로써 군인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사기업노조는 여전히 조직률이 낮고 유명무실했다. 많은 기업들은 노조에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노조에 가담하는 노동자를 해고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1988년에는 110개의 공장에서 232명의 노조 지도자들과 1,531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노조설립이 제한적이나마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지만 기업주들은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노조 설립을 막았으며 하청을 통해 정규직 노동자의 수를 줄이기도 했다.

⑥ 1992년 민주화 이후 

199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공기업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법의 개혁으로 인해 법과 현실의 차이가 점점 커져만 갔다는 것이다. 

1991년 수친다(Suchinda)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태국의 선거민주주의가 퇴보하는 듯 했지만, 다시 시민사회의 투쟁으로 1992년에 선거민주주의를 회복한다. 공기업의 위상이 사유화 반대 투쟁으로 이미 위협받는 가운데 태국 정부는 1991년 법제정을 통해 공기업의 노조설립 권리를 박탈하여 공기업노조가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공기업의 노조설립권을 박탈하는 법은 2000년도에 공기업노동관계법안이 새로 만들어져 노조설립이 다시 허용될 때까지 적용되었다. 

이외에도 1990년대에는 여러 법령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법적 노동권 보장은 나아졌으나 실제적인 노동권 보장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90년에는 사회안전망 정책안이 마련되고, 1994년에는 산업재해 보상안이, 1998년은 노동자보호안이 제정되었다. 이런 모든 법안들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고나 재해를 당했을 때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법적으로 규정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사실상 가장 큰 문제점은 1975년 노사관계법이 노동자 10명 이상의 공장에만 노조를 허용하기 때문에 10명 이하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80만명의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42%를 해당한다. 이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법 테두리 바깥에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 법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⑦ 1997년 헌법 개헌

1997년 경제위기로 인해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해고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많은 제조공장에서 파업이 빈번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파업과 전투성이 두드러지는 시기였지만 이러한 노조의 활발한 움직임은 사회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정부는 파업 행위 때문에 경제위기가 악화한다는 이론 아래 적극적으로 탄압하였다. 이 시기에 부당해고 파업투쟁을 벌인 공장노동자들은 결국 정부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기는 하였지만 많은 파업 가담 노동자들이 실업상태이거나 재취업이 되었다 하더라도 노조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다. 지속적인 파업투쟁의 실패는 노조설립과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1997~1998년 경제위기 때 늘어났던 파업은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직장폐쇄는 늘어나고 있다. 

1999년의 조사에 따르면 9백만명의 사기업 노동자 중에서 2.79%만이 조직된 상태이며 공기업은 노동자들의 52.6%가 조직화되었다. 사기업의 낮은 조직률은 노동운동의 취약성을 보여주며 군부의 비호를 오랫동안 받아온 공기업 노조와 사기업 노조의 지속적인 반감과 분열은 노조의 세력을 강화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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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본가의 정치 장악 

현재의 태국 정부도 우회적으로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탁신은 선거에서 노동조직의 지지에 힘입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노동조직은 토사구팽 되었다. 특히 정부는 ‘신사회계약’ 정책을 통해 노동권의 불만을 줄이는 한편 노동계의 단합을 막아 노동계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

1997년 헌법 개정 이후 처음으로 치룬 선거에서 탁신 시나와트라는 태국애국당을 이끌며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태국애국당은 1998년에 창당된 신생당으로 2001년 선거에서 단일당으로는 처음으로 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2005년 선거에서도 탁신은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국애국당의 정책은 민족주의적인 동시에 민중주의적이다. 민족주의를 도구적으로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예전 군부정권들과 유사하지만 민중주의적이라는 면에서 현 정권의 성격이 예전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태국애국당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경제 개혁안들을 거부하고 농촌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빈곤종식캠페인을 벌여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태국애국당의 승리는 경제위기 이후에 국내 자본가들의 정치적 장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태국 의회 정치는, 특히 1980년대 이후로 국내 자본가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세습적 관료주의 사회에서 선거를 통한 정치 입문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정치 입문은 자본가 우호적인 경제정책을 가져 왔으나, 1997년 경제위기는 이러한 국내 자본가들의 특권에 제동을 걸었고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경제 개혁안들은 기존의 국내자본가들의 특권을 위협하였다. 태국애국당의 설립은 경제 개혁안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거나 소외된 자본가들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그러므로 태국애국당의 승리는 국내자본가들의 정치적 장악이 다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국내 자본가들의 정치세력화 측면에서 본 태국 노동운동의 현재와 미래는 사실상 불확실하다. 특히 탁신의 정책이 다면적면서 우회적으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직들의 단합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탁신 정부는 노동조직들을 포섭하고 노동조직들 사이의 분리를 조장하며 노동조직들이 강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 예를 들어,  태국애국당 정책을 초안하는 당시에는 노동조직의 참여로 참여정치가 부활하는 듯하였다. 이를 통해 인적자원과 사회복지 발전을 위한 정책들을 약속했으며 직업창출과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를 믿고 노동자들과 많은 노동조직들은 탁신과 태국애국당을 지지하였다. 태국애국당에 대한 지지는 한편으로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 개혁정책에 대한 강한 반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탁신 정권의 배신

탁신이 총리로 선출된 이후,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노동계와의 약속만은 저버렸다. 기업관계 개선, 노동자 기술 훈련, 사회 안전망 범주 확대 등 대부분의 노동관련 공약들은 실질적인 내용이나 계획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히,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중 노동조합 설립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협약을 비준하겠다는 공약과는 달리 당선 후에는 이에 대한 논의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노동계를 회유하기 위해 실업기금정책을 실시하고 ‘건강안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건강안전연구소는 노동계가 1993년에 있었던 장난감 공장 화재로 18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이후부터 요구해오던 제도로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노동자 회유정책의 일환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사기업 노동자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면서 노조의 세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1975년 노동관계법의 개정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공기업과 사기업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법령을 따라야만 했고 공기업의 사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공기업이 사기업으로 전환될 경우 노조 등록법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업노조의 미래 또한 불확실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탁신 정권은 노동운동의 강경화를 막기 위해 사회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구실로 대중 매체의 정권비판을 금지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비정부기구 활동가, 학자 등 정부를 비판하는 인물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탁신 정부의 사회기강을 바로 잡기위한 ‘법과 질서’ 캠페인은 일부 대중들의 호응을 받기는 하였지만 국민 개개인의 권리는 퇴보하였고 국가의 강제적 권력만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탁신의 ‘신사회계약’

탁신정권의 노동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노동복지부 장관 임명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노동사회복지부는 1993년에 처음 설치된 이후로 2004년까지 14번이나 장관이 바뀌었고 보수적인 인물들이 장관직을 차지하였다. 탁신정권은 2001년에 태국국가당의 부총리 데지 분롱(Dej Bunlong)을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정당인 태국국가당의 부총리로 선거캠페인 동안 노동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인물이다. 2002년 후반에 새로 임명된 수왓(Suwat) 장관은 노동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는 듯했지만 오래지 않아 경질 되었고, 2003년 후반기에 새로 임명된 우라이완 티엔통(Uraiwan Thienthong) 노동부장관은 노동 관련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수왓 전 장관이 시작한 개혁정책은 곧바로 주춤하였으며 노동부장관은 정권과 자본가들의 허수아비 역할을 하였다. 유일한 변화로는 아동노동에 관련된 국제노동기구 협약을 비준한 것인데 태국은 국제노동기구 창설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13개의 협약만 비준한 상태이다. 

불투명한 태국 노동운동의 미래

탁신 정권의 전반적 노동정책의 특징은 신사회계약을 통해 노동계를 약화시키고 포섭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계약은 온정주의적인 군사 독재 정부였던 사릿 총리 시절에 처음 행해진 이후로 두 번째이다. 사릿 군사 정권 시절에 있었던 ‘사회계약’이 국내 자본가들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면 탁신이 추구하는 신사회계약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보장을 확대함으로써 노동계의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이주 노동자들로 농촌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재정보조나 국민의료보험 등을 포함한 빈곤층을 위한 정책은 노동계의 불만을 약화시키는데 효과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정책은 시민사회나 국제기구에 의해서도 성공적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으며 ‘일만 바트 농촌마을 재정보조정책’은 그 실효성에 대해서 많은 혹평을 받고 있지만 태국애국당이 당선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탁신 정권은 국내 자본가들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국가를 직접적으로 장악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국내 자본이 정치적으로 사회세력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가 과두정치 상태에서 노동운동의 미래는 가히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